(1)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필사"는 글의 한정적인 지점에만 도움이 되었을 뿐, 글 전반의 향상을 노력에 비례한만큼 가져다주진 않았습니다.
필사는 두어번 해보았지만, 두세달가량 필사 대상의 문체에 근접해지는 효과만 있었을 뿐, 글의 다른 부분 - 예컨대 구성이나 논지 전개나 아이디어 등등에 효과가 있었는지는 물음표입니다.
저한테 도움이 된 것은 좋은 글을 분석하는 것이었습니다. 저자가 왜 이런 구조를 선택했는지, 어떻게 자신의 논지를 교묘하게 방어했는지, 불필요한 논쟁을 회피하려했는지 등등.
다만 이러한 포인트들을 첫 논문, 석사논문을 쓸 때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때는 그냥...무식하게 썼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쓰고나서, 아...이 사람은 이래서 이런 방어적인 서문이 있었구나, 아 이 사람은 이래서 조금 급진적인 논지 전개가 있었구나, 파악할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된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전 쓰기-분석이 바퀴처럼 같이 간다 여기는 편입니다. 쓰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고민의 지점이 있고, 그걸 알게 되면 같은 고민 앞에서 타인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알게되고 적용해 볼 수 있죠.
(2)
저 같은 경우, 더 단순하게 쓰려 노력합니다. 어차피 학술 논문의 핵심은, 건조한 근거라는 뼈만으로 상대를 설득하는 겁니다. (적어도 저는 이리 믿습니다.)
누가 말했든, 어떤 상황에서 어떤 문체로 말했든 정말 좋은 주장과 근거라면 상대가 납득해야하는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문법은 더 단순하고 어휘조차 초중생이 쓸 법한 단순한 표현을 써도 문제가 된다 여기지 않습니다. (물론 주요 개념어를 이러면 곤란하겠지만요..)
그래서 항상 학술논문을 쓸 때는, 영어가 모어가 아니였던 1급 학자들의 논문을 전범으로 삼는 편입니다. (적어도 문체의 측면에서는요.)
저 같은 경우, 치누아 아체베와 펑유란이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단순하고 필요한 말만 하는 것.
이 이상이 학술 논문에서 필요하다 여겨지지 않네요.
P.S.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tranquility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고요할 정'의 번역어("정적"할 때의 정 자 입니다.)로 여러 학자들이 논문에 썼었죠.
처음 논문을 읽었을 때, 저 단어를 포함해 모르는 단어가 너무 많아서 자괴감이 들었던 적이 많았습니다만, 쓰다보니 의문이 하나 들더군요.
저거 굳이 tranquility라는 단어를 썼어야해?
저희한테는 더 단순하고 간략한 단어가 있습니다. calm이죠. 이렇게 말해도 다들 알아먹습니다. 심지어 영어가 모어가 아닌 사람들은 더 잘 알아듣더군요.
그 뒤부터 굳이 라틴어/그리스어에서 기원한 복잡한 대학원용 단어를 쓰고자 노력하지 않게 된 듯합니다.
필요하고 의미 있는 구별이라면 쓰겠으나, 대부분은 모어 화자에게 남아있는 고등 교육의 습관...같더군요.
(물론 이러면 쟨 고등교육까지 받았는데 단어가 참 싼티나구만...이라는 눈치를 보내시는 분이 있지만, 서양권이라면 이제 이걸 대놓고 입밖에 내뱉는 분은 없을거라 사료됩니다.)
(여담이지만 한국어든 뭐든 어휘 선택을 통해 그 사람의 교육 수준을 파악할 수 있다는 - 놀라운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당장 방금 전의 문장만 해도, 어휘 선택은 '단어를 고르는 것', 파악은 '알다'처럼 훨씬 단순한 말들이 있습니다. 영어 논문도 이런 것 아닐까요? 그냥 어려운 단어들이 익숙한 사람들이 쓰고 읽으니 어려운 단어들이 계속 쓰이는...뭐 그런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