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필사는 논문 작성 혹은 외국어 연마에 도움이 되는가?

이것은 질문인가 잡답인가 혹은 떡밥인가 애매하고, 실제로 제 생각도 모호합니다만 서강올빼미 여러분들의 생각이 궁금하여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려 합니다.

간단한 상황설명부터 드리자면, 현재 저는 독일의 한 대학에서 철학 전공으로 박사학위과정 중이고, 다소간의 도로 후에 이제야 논문의 작성 단계에 돌입했습니다. 그간 세미나나 콜로키엄에 참석해서 어찌어찌 발표도 하고 연구계획서도 얼마전에 크게 수정 및 보완을 했고, 지도교수도 저도 '이제는 본격적으로 논문을 써야지'라는 대강의 합의에는 도달한 상태입니다.

문제는 "독일어"로 "학위 논문"을 쓴다는 것이 여전히 정말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문헌을 독일어로 접하고 있지만, 여전히 다른 언어로 '학문적인 글'을 쓸 수 있는 수준에는 도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알게모르게 한국어도 잘 안쓰다보니 제 한국어도 무뎌지는 걸 느끼지만, 논문 작업을 할 때마다 한국어로 이 정도 말할 수 있는 것을 독일어로는 이렇게 적게 말할 수 밖에 없나라는 생각을 수도 없이 합니다. 구글 번역과 챗GPT의 도움을 많이 받아서 그나마 단순하게나마 글을 써나가고 있지만, 여러 면에서 독일어로 번역된 글은 다소간 단순해지는 것을 피하기는 어렵습니다. 혹시나 저와 비슷하게 작업을 하신 분이 계시다면 비슷한 느낌을 받으셨을 것 같네요. 생각보다 번역이 잘 되는 편이지만, 번역된 글은 다소간 반복적이고 단조로워지는 것을요...

그래서 "독일어"로 쓰인 "좋은 논문"을 필사하는 것을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에서 석사과정을 할 때만 하더라도 한국어를 아주 엄격하고 정교하게 쓰는(그리고 그러한 것을 지도학생들에게도 요구했던... 지나고 보니 물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지도교수를 만난 덕에, 지도교수의 논문의 글쓰는 방식을 많이 참고했었죠. 따라서 필사도 몇 번 해봤었고요.

그때 기억을 떠올리며 독일어 논문을 조금씩 필사를 하고 있는데, 이제 막 시작한 걸 감안하더라도 스스로 의문이 많이 듭니다. 우선 들이는 시간에 비해 쓰는 문장이 얼마 안되고요. 문장 분석하고 문법적-용법적으로 가져다 쓸만한 것을 체크하고 검토하는 시간이 꽤 많이 소요가 됩니다. 참고가 될만한 좋은 글들은 보다보면 '내가 이렇게 쓸 수 있을까?' 라는 절망감이 들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이따금 참고하게 되는 18~19세기에 쓰인 문헌들은 오늘날의 학술적인 글의 문체와 너무 맞지 않는 경우도 많고요...

서강올빼미에 비슷한 고민을 하셨거나 혹은 비슷한 시도를 해보신 분이 있으시다면, 이에 관한 의견을 듣고 싶네요. 자유롭게 본인 생각을 적어주셔도 좋고, 답을 달기 좋게 몇 가지 질문의 형태로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1. 논문을 쓰기 위해 다른 논문을 필사하는 것은 도움이 되는가? 어떻게 해야 도움이 되는가?
  2. 다른 언어로 학술적인 글을 쓰기 위해서 무엇을 하면 좋은가? 어떤 방식이 효과적이었는가?

혹시 다른 분들이 보기에도 별 도움이 안되고, 제가 해보니까 역시나 뻘짓이었어(...) 라면 언제든 그만둘까 합니다. 하지만 도움이 된다면 좀 더 해보고,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 언젠가 다시 글을 남겨보도록 하겠습니다. 쓰다보니 생각난건데 같이 해볼 의향이 있으신 분이 있다면 이에 대해 따로 이야기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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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같은 경우에 영어할 때 논문 필사는 아니더라도 분석하면서 글을 읽을 때는 많습니다. 그리고 그 경우에는 시간이 확실히 많이 걸리죠. 하지만 제 생각에는 그만큼 언어적으로 얻는 것도 많습니다. 그저께도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약 7쪽을 1시간 동안 읽었네요. 예전에도 수도 없이 읽었던 챕터인데도, 분석하면서 읽으면 엄청 오래 걸리는데, 그렇게 읽을 때마다 제 영어 실력이 느는 거 같아요. 하지만 철학 논문을 분석하면서 읽으면 시간이 너무나도 많이 걸리기 때문에 (내용이 어려우니 언어분석은 훨씬 더 어렵지요) 논문 언어 분석은 제가 롤모델로 삼고 싶은 논문이 나올 때만 하고, 평소에는 조지 오웰처럼 간결한 문체를 가진 사람의 소설/에세이들을 분석하는 편입니다.

그와 별개로, 영어 철학 논문 읽을 때 어렵다 싶으면 번역해가면서 읽긴 합니다. 그러면 시간은 다른 사람보다 좀 느려도 전 이해가 훨씬 잘 되는 것 같더라고요.

글을 쓸 때는 한국어로 먼저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생각을 먼저 해놓고, 그 다음에 영어로 설득시킨다고 생각하면서 글을 씁니다. 물론 제가 한국어로 써놓은 것을 그냥 번역하면 당연히 결과물이 안 좋고, 한국어로 생각을 완전 정리한 후에 그 생각을 영어로 새롭게 쓴다고 하면 잘 써지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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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필사"는 글의 한정적인 지점에만 도움이 되었을 뿐, 글 전반의 향상을 노력에 비례한만큼 가져다주진 않았습니다.

필사는 두어번 해보았지만, 두세달가량 필사 대상의 문체에 근접해지는 효과만 있었을 뿐, 글의 다른 부분 - 예컨대 구성이나 논지 전개나 아이디어 등등에 효과가 있었는지는 물음표입니다.

저한테 도움이 된 것은 좋은 글을 분석하는 것이었습니다. 저자가 왜 이런 구조를 선택했는지, 어떻게 자신의 논지를 교묘하게 방어했는지, 불필요한 논쟁을 회피하려했는지 등등.

다만 이러한 포인트들을 첫 논문, 석사논문을 쓸 때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때는 그냥...무식하게 썼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쓰고나서, 아...이 사람은 이래서 이런 방어적인 서문이 있었구나, 아 이 사람은 이래서 조금 급진적인 논지 전개가 있었구나, 파악할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된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전 쓰기-분석이 바퀴처럼 같이 간다 여기는 편입니다. 쓰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고민의 지점이 있고, 그걸 알게 되면 같은 고민 앞에서 타인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알게되고 적용해 볼 수 있죠.

(2)

저 같은 경우, 더 단순하게 쓰려 노력합니다. 어차피 학술 논문의 핵심은, 건조한 근거라는 뼈만으로 상대를 설득하는 겁니다. (적어도 저는 이리 믿습니다.)
누가 말했든, 어떤 상황에서 어떤 문체로 말했든 정말 좋은 주장과 근거라면 상대가 납득해야하는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문법은 더 단순하고 어휘조차 초중생이 쓸 법한 단순한 표현을 써도 문제가 된다 여기지 않습니다. (물론 주요 개념어를 이러면 곤란하겠지만요..)

그래서 항상 학술논문을 쓸 때는, 영어가 모어가 아니였던 1급 학자들의 논문을 전범으로 삼는 편입니다. (적어도 문체의 측면에서는요.)

저 같은 경우, 치누아 아체베와 펑유란이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단순하고 필요한 말만 하는 것.

이 이상이 학술 논문에서 필요하다 여겨지지 않네요.

P.S.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tranquility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고요할 정'의 번역어("정적"할 때의 정 자 입니다.)로 여러 학자들이 논문에 썼었죠.

처음 논문을 읽었을 때, 저 단어를 포함해 모르는 단어가 너무 많아서 자괴감이 들었던 적이 많았습니다만, 쓰다보니 의문이 하나 들더군요.

저거 굳이 tranquility라는 단어를 썼어야해?

저희한테는 더 단순하고 간략한 단어가 있습니다. calm이죠. 이렇게 말해도 다들 알아먹습니다. 심지어 영어가 모어가 아닌 사람들은 더 잘 알아듣더군요.

그 뒤부터 굳이 라틴어/그리스어에서 기원한 복잡한 대학원용 단어를 쓰고자 노력하지 않게 된 듯합니다.
필요하고 의미 있는 구별이라면 쓰겠으나, 대부분은 모어 화자에게 남아있는 고등 교육의 습관...같더군요.

(물론 이러면 쟨 고등교육까지 받았는데 단어가 참 싼티나구만...이라는 눈치를 보내시는 분이 있지만, 서양권이라면 이제 이걸 대놓고 입밖에 내뱉는 분은 없을거라 사료됩니다.)
(여담이지만 한국어든 뭐든 어휘 선택을 통해 그 사람의 교육 수준을 파악할 수 있다는 - 놀라운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당장 방금 전의 문장만 해도, 어휘 선택은 '단어를 고르는 것', 파악은 '알다'처럼 훨씬 단순한 말들이 있습니다. 영어 논문도 이런 것 아닐까요? 그냥 어려운 단어들이 익숙한 사람들이 쓰고 읽으니 어려운 단어들이 계속 쓰이는...뭐 그런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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