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학과 종교현상학: 신호재, 『미르치아 엘리아데의 『성과 속』 읽기』

신호재 선생님의 엘리아데 입문서 내용이 매우 흥미롭네요. 문고판으로 250쪽 분량의 작고 얇은 책이고, 아주 평이한 어조로 엘리아데의 종교학적 성과를 소개하고 있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무척 개성적입니다. 제가 본 엘리아데 연구서들 중에서 가장 개성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요. 후설을 전공한 현상학자의 관점에서 엘리아데의 종교현상학이 어떤 점에서 '현상학'이라고 불리기에 적절한지를 논의하는 것이 이 책의 주된 내용이거든요.

교양을 담당하는 교수로서 감히 내 생각을 말하자면, 학생과 대중에게는 『성과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류학적 사례와 신화적 근거를 남김없이 이해하는 것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엘리아데가 자신의 종교학을 전개하는 데에 의지하고 있는 방법론이다. 이것이 현상학이라는 철학에 기초하고 있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 줄 수 있다면, 시시콜콜하리만치 세부적인 내용에 함몰되어 길을 잃지 않고서도 독자가 엘리아데가 『성과 속』에서 말하려는 대상의 요지를 파악하는 데에 큰 어려움이 없으리라 믿는다.

요컨대 내가 이 책을 집필한 목적은 현상학의 관점에서 『성과 속』의 핵심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끔 하는 것이다. 현상학의 기본 취지는 논리적 사변이나 언어적 분석이 아닌 생생한 체험을 통해 사태의 의미를 직접 보여 주게끔 한다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성스러움에 대한 체험에 근거하여 종교의 본질을 직관하게끔 하는 『성과 속』은, 엘리아데가 명시적으로 현상학을 원용하지 않았거나 설령 현상학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손 치더라도, 다분히 현상학적 성격을 지닌다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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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는, 이 책이 제시할 나의 견해를 엘리아데의 『성과 속』은 "반드시 현상학적 관점으로 읽어야만 한다"는 완고한 주장으로 오해하기보다는, "현상학적 관점에서 읽는 것도 가능하다"는 하나의 의견으로 받아들여 주기를 바란다. 엘리아데가 제시하는 풍부한 경험적 사례를 샅샅이 고찰하지 못한 것은 영원히 이 책의 한계로 남을 것이다. 혹시 종교학 전문가, 연구자가 이 책을 읽는다면 이 점에 대해 너그러운 양해를 구한다. 또한 교양의 함양을 위해 이 책을 읽는 학생과 대중에게는 문헌적, 연구사적 검토를 통해 종교학의 기존 성과를 풍성하게 반영하지 못한 데 대한 아쉬움을 전한다.

신호재, 『미르치아 엘리아데의 『성과 속』 읽기』, 세창출판사, 2023, 9-12.

철학과에서 다루어지는 '현상학'과 종교학과에서 다루어지는 '종교현상학' 사이의 관계는 매우 미묘합니다. 둘 다 '현상학(phenomenology)'이라는 이름을 공유하고 있지만, 그 두 가지가 과연 방법론적 측면에서 연속성이 있는 것인지에 대해 논란이 많습니다. 즉, 철학 전공자들은 후설(E. Husserl), 하이데거(M. Heidegger), 사르트르(J. P. Satre), 메를로퐁티(M. Merleau-Ponty), 레비나스(E. Levinas) 같은 순수현상학에 주목하다 보니, 그 계보를 벗어난 다른 응용현상학의 흐름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 반대로, 종교학자들은 드 라 소세이(P. D. C. de la Saussaye), 오토(R. Otto), 반 델 레에우(G. van der Leeuw), 엘리아데(M. Eliade) 같은 종교현상학에 주목하다 보니, 그 계보 이외의 철학적 논의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죠.

두 가지 전통을 모두 아우르는 연구자들이 많지 않다 보니, 그 두 전통이 공유하고 있는 '현상학'이라는 이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종종 많은 혼란이 발생합니다. 심지어 유명한 종교학 연구자들 중에서는 그 혼란에 진절머리가 난 나머지 '현상학'과 '종교현상학'은 서로 아무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죠. 영국 랭커스터 대학교의 유명한 종교현상학자인 니니안 스마트(N. Smart)나 캘리포니아 대학교의 신화학자인 이반 스트렌스키(I. Strenski)가 이와 같은 태도를 취합니다. 이들에 따르면, 종교현상학은 후설의 현상학과는 아무 관계도 없이 독자적으로 발전한 분야일 뿐이죠. 두 분야가 공유하는 '현상학'이라는 이름은 순전히 우연의 산물이지, 실질적인 학문적 관계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현상학과 종교현상학이 서로 다른 사조인 것처럼 다루어지는 이유는, 단순히 철학과 종교학이 오늘날의 대학에서 서로 다른 분과로 연구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둘 사이의 단절이야말로 학문의 세분화에 따른 우연의 산물이라는 것이죠. 실제로, 20세기의 사상사적 배경으로 조금만 깊이 들어가 보면, 현상학과 종교현상학이 굉장히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발전했다는 증거들은 흔하게 발견됩니다. 애초에 20세기 현상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후설과 20세기 종교현상학의 거장들 중 한 명인 오토는 서로 친구 사이였고, 후설은 오토의 종교 연구야말로 '현상학'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작업이라고 높이 평가하기도 하였거든요.

나는 지난 여름에 당신[루돌프 오토]의 책 『성스러움의 의미』를 알게 되었네. 그 책은 나에게 지난 몇 년 간 다른 어떤 책들도 주지 못한 강한 영향을 주었지. 나의 인상을 이런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을 허락해 주게. 그 책은 종교현상학을 위한 최초의 시작이야. 적어도 순수 기술과 현상 자체에 대한 분석을 넘어서지 않는 모든 것들과 관련해서는 말이지.

E. Husserl. "Letter to Rudolf Otto", T. Sheehan (trans.), Heidegger: The Man and the Thinker, T. Sheehan (ed.), Chicago: Precedent Publishing, Inc., 1981, p. 25.

어떤 의미에서 오토는 종교현상학의 창시자 격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종교현상학'이라는 용어 자체는 신학자 드 라 소세이가 훨씬 이전에 먼저 사용하였지만, 20세기에 이르러 종교현상학을 본격적으로 학계에 퍼뜨린 인물은 오토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오토는 종교학 그 자체의 창시자 격인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종교학의 기원은 막스 뮐러까지 거슬러 올라가긴 하지만, 20세기 종교학의 패러다임을 제시한 인물은 오토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20세기 현상학의 아버지인 후설과 20세기 종교현상학의 아버지인 오토가 서로의 작업을 참고하면서, 서로에게 '현상학'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길 인정하였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현상학과 종교현상학의 연관성은 증명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에드문트 후설과 루돌프 오토

엘리아데는 바로 오토 이후에 등장한 가장 위대한 종교현상학자입니다. 엘리아데의 대표작인 『성과 속』은 서론에서부터 명시적으로 오토의 『성스러움의 의미』를 거론하고 있기도 하죠. 성스러움의 본질을 '누멘적인 것(das Numinose)'이라고 규정한 오토의 작업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겠다는 것이 엘리아데의 입장이거든요. 그렇다면 이런 엘리아데의 작업이 철학에서의 현상학과 전혀 관련이 없는 다른 논의라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사실 굉장히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후설 본인이 오토의 작업을 '현상학'이라고 인정하였고, 오토의 작업이 지닌 목표와 방법론을 수용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엘리아데라면, 당연히 엘리아데의 작업 역시 '현상학'일 수밖에 없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현상학과 종교현상학 사이의 긴밀한 연관성을 강조하는 신호재 선생님의 입장이 정당하다고 봅니다. 아쉽게도, 신호재 선생님은 철학 전공자셔서 종교현상학의 계보와 발전에 대해서까지 자세하게 아시고 계시지는 못하신 것 같지만, (혹은 입문서에서 그런 전문적인 논의들을 다루기가 부적절하다고 생각하신 것 같지만,) 신호재 선생님이 제시한 논의의 방향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종교현상학이 종교의 본질에 대한 (후설의 용어로) '본질직관'을 수행한다는 해설은 아주 훌륭합니다. '본질직관'은 엘리아데를 비롯하여 모든 종교현상학 일반이 수행하는 작업의 핵심을 정확히 꿰뚫는 용어라고 생각해요.

이 책의 제2장인 ' 『성과 속』의 현상학적 성격'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 대단히 놀랍습니다. '판단중지', '본질직관', '태도변경', '초월론적 현상학적 환원' 같은 후설의 용어들을 사용하여 엘리아데의 종교현상학을 설명하고 있거든요. 여기서 제시되는 논의는 (일반적인 입문서에서는 보기 드문) 매우 개성적이면서도 수준 높은 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로서는 콕스(J. L. Cox)의 A Guide to the Phenomenology of Religion(London: T & T International, 2006)와 같은 해외 학술서 이외에는 이런 논의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네요. 그렇지만 글 자체는 매우 쉽게 쓰여 있어서, 설령 현상학의 방법론을 완전히 처음 접하는 분들이라고 해도 내용을 이해하는 데 전혀 무리가 없을 만한 수준입니다. 고도로 학술적인 내용을, 아주 평이한 서술 속에 담아낸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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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르치아 엘리아데

저는 현상학과 종교현상학 사이의 교류가 단순히 사상사적 측면을 넘어서 그 두 분야 모두를 위해서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현상학과 종교현상학은 오늘날 서로 다른 방식으로 교착상태에 빠진 것처럼 보여요. 분과 학문으로서의 철학과 종교학이 세분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현상학과 종교현상학이 자신들의 최초의 고민들로부터 지나치게 멀어지게 됨에 따라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한 것인데, 저는 그 문제들이 '현상학'의 원류로 돌아갈 때에만 극복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1) 오늘날 철학에서 다루어지는 현상학은 자신이 본래 가지고 있던 놀라운 파급력과 응용력을 상실한 것 같습니다. 현상학이 마치 아주 특수하고 국소적인 철학의 분야인 것처럼 여겨지게 되면서, 철학의 분야 바깥으로 현상학이 뻗어나갈 힘이 상실된 것이죠. 모두가 현상학을 공부하지만, 정작 현상학을 철학의 매우 테크니컬한 논의 이외의 어떠한 분야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 지 알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가령, 후설의 제자였던 아돌프 라이나흐는 우체통을 현상학적으로 어떻게 연구해야 하는지를 두고서 한 학기를 보냈다고 하고, 사르트르는 유리컵과 탁자 등을 현상학적으로 분석하는 방법에 대한 소개를 듣고 현상학에 매료되었다고 하는데, 오늘날에는 현상학 전공자들조차도 이런 식의 작업이 과연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잘 상상하지 못하죠. 저는 이런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현상학이 본질직관의 구체적인 수행 방법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봅니다. 바로 그 일환으로서 종교현상학 같은 응용현상학에 대한 연구가 철학에서도 활발히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해요.

(2) 어떤 의미에서 오늘날 종교현상학은 거의 파산 상태입니다. 엘리아데 이후로 종교현상학에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할 만한 학자가 나타나지 못하였거든요. 물론, 윌프리드 캔트웰 스미스나 니니안 스마트 같은 인물들이 주목을 받기도 하였고, 자크 바덴부르크 등이 '신종교현상학'을 제시하기도 하였다지만, 종교현상학 분야에서 지난 수 십년 간 근본적인 진전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는 점에 대해서는 상당수의 학자들이 동의하는 바입니다. 저는 종교현상학이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자신의 '방법론'에 대한 성찰의 부재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에는 종교현상학자들조차도 다른 종교 연구가들과 마찬가지로 실증적인 연구에만 지나치게 관심을 가집니다. 종교현상학이 '현상학'이라는 방법론의 강점을 살리지 못한 채, 단순히 수많은 비교종교학 연구들 중 하나가 되려고 하는 것이죠.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종교현상학자들이 현상학의 철학적 측면에 더욱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보입니다. 실증적인 비교종교학 연구와 현상학적 비교종교학 연구가 어떻게 다른지를, 종교현상학자들이 더욱 명확하게 자각하고서 연구를 진행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신호재 선생님의 입문서가 현상학과 종교현상학 사이의 교류를 활발하게 하는 데 기여하는 하나의 가교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현상학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 종교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 혹은 그 둘 모두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이, 이 입문서를 통해 기존의 학문 구분법 내에서는 얻을 수 없는 통찰들을 많이 얻어가실 수 있으면 좋겠네요. 아울러, 이 입문서의 내용이 더욱 발전되어서 현상학과 종교현상학 사이의 관계에 대한 본격적인 학술 연구들이 많이 등장했으면 좋겠습니다. 솔직히, 제 자신이 그런 연구를 해보고 싶다는 소망이 더욱 강하게 생기기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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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모르던 분야이지만, 선생님 글을 읽고 관심이 생겼습니다. 추천하신 책 꼭 읽어 보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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