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가지 재미있는 상상들 ; 추상적 대상에 대한 지각과 계속되는 낙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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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한테는 이번주와 오늘이 그런 날입니다. 지금이 삼일 째인데, 굉장히 빠르게 심력이 회복되고 있어서 생각보다 이르게 작업으로 돌아갈지도 모르겠다...생각 중입니다.

옆에는 작업할 것들을 가져오긴 했지만, 그냥 뭐.....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하고, 그렇게 설렁설렁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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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질문에 제가 답변을 남겼는데, 남기고 보니 굉장히 재미있는 생각이 나서, 몇 가지 적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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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인간을 포함한 동물은 다양한 형태의 지각을 가집니다. 우리에게 흔한 오감뿐 아니라, 몇몇 동물들은 전자기장과 자기장 등을 느끼곤 합니다. (전자기장을 느끼는 대표적인 동물로는 전기뱀장어와 귀상어 등이 있습니다. 자기장의 경우, 굉장히 논쟁적이지만 바다거북과 철새들이 있죠.)

그렇지만, 오감이라는 게 "생물학적 발생 혹은 진화"의 차원에서 보자면 굉장히 중첩되고 분화되는 지점들이 있습니다. 예컨대, 후각과 미각은 둘 다 화학 감지기의 변형입니다. 우리도 저희가 촉각으로 분류하는 몇 가지는 화학 감지의 대상입니다. 대표적으로 매운 맛과 (박하에 함유된) 멘톨로 인한 냉감 등이 있죠. (온도와 압력, 통증 등은 다른 신경 수용체이긴한데, 아직 굉장히 연구가 덜 된 분야입니다.)

한편 청각은 물리적 감지기입니다. 즉 공기의 진동을 느끼는 것이죠. 넓게 보자면, 촉각 중 일부는 이런 형태입니다. 즉 인간의 촉각 중에서 압력을 감지하는 것은 이러한 형태입니다. 몇몇 동물은 이 촉각 감지가 굉장히 다양한 형태로,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범위를 넘어서곤 합니다.
예컨대, 물고기의 옆면에 있는 라인인 측선은 물의 흐름을 굉장히 예민하고 섬세하게 감지합니다. 인간으로 말하자면, 촉각이지만 (공기 대신) 물이라는 매질을 통해서 굉장히 먼 거리에 있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청각과 유사하기도 합니다.
또한 크기가 작은 생물체들은 굉장히 다양한 (인간 기준에서) 미시적인 (물리적) 힘을 감지하곤 합니다. 예를 들어, 자그마한 곤충들은 자신들이 서 있는 풀이나 나뭇가지에서 느껴지는 진동을 감지해서 행동하곤 한다고 합니다. 크게 보자면, 코끼리 역시 땅바닥의 진동을 통해서 많은 것을 감지한다고 합니다.

인간의 예로 보자면, 이런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클럽 같은데서 거대한 우퍼 스피커 옆에 있다보면, 분명 소리인데 온 몸이 울리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 전쟁 영화에서 말이 달려오는 씬에서 온 몸이 진동하는 감각이 드는 것.

(이것과 아래에 나올 동물 감각에 대한 내용은 에드 용의 <이토록 굉장한 세계>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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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인간에게 요상한 지각이 있다 가정해보면 어떨까, 라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예를 들어, 수학의 요소를 이루는 추상적 대상(abstract object)에 대한 지각 말이죠.

우선 이 추상적 대상이 뭐 자연주의적으로 환원되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추상적인 대상인지는 논의에서 배제합시다. 그냥 어떠한 지각을 통해서, 바로 인지되는 수학의 요소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이러한 생각이 아주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우선 우리는 시간 감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간(time)의 지각에 대해서는 굉장히 많은 논의들이 있습니다만, 뭐 여튼 오감을 통해서 시간에 해당하는 무언가를 바로 지각한다는, 그런 주장들도 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렇다면 수가 안 될 것은 무엇일까요?

게다가 우리는 자기장을 지각한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동물들을 압니다. 도대체 어떻게 자기장을 지각하는지는 모르지만 말입니다. 뇌의 어떤 부위가 아닐까, 생각하는데 인간에게도 수를 지각하는 어떠한 부위가 있다 생각하면 어떨까요?

(이는 아주 이상한 생각이 아닙니다. 캐럴 계숙 윤의 <자연에 이름 붙이기>에는 뇌손상으로 인해 folk-생물 분류 체계가 무너진 환자들이 나옵니다. 예컨대, 이들은 우리가 [과학적이 아닌 직관적으로] 구분하는 파충류와 포유류의 구분을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수학이나 시간에도 이러한 것에 해당하는 환자들이 존재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제 기억으로는 공간 지각에 있어서는 이러한 환자들이 존재하는 것으로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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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관과 지각은 참, 오묘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모든 직관이 이러한가, 하면 아니지만. 우리가 '직관'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는, 지각과 유사한 지점이 있습니다. 바로 시간적으로 찰나, 즉 숙고-반성으로 얻지 않는 지식이라는 측면이 있죠. 다만 우리가 통상 생각하는 오감에 그러한 지식이 해당되지 않을 경우, 이를 직관이라 부르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동물들의 확장된 여러 감각 지각 사례와 여러 특수한 인간 뇌손상의 사례를 검토해보면, 우리는 몇 가지 직관들을, 지각이라 명명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한 가지 반례가 예상되긴 합니다. 수학적 대상에 대한 지각이라고 하기에는, 인간은 수학적 지식을 확장하고, 새로운 관계성을 밝혀내기 위해 지속적으로 궁리-숙고-반성한다는 점입니다.

그렇지만 감각 지각 역시 그러한 영역이 있습니다. Perception learning이라고 명명된, 현상이죠. 예컨대, 숙련된 테니스 선수들은 일반인보다 더 찰나, 더 빠르게 공을 인식합니다. 매사냥꾼 역시 찰나에 어떠한 매인지, 그런 것들을 지각하곤 하죠.

보다 일상적인 사례로는, 커피나 향수의 향을 더 민감하게 구분하는 사람들이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수학도, 일종의 perception learning이라는 과정을 통해 확장된다 여길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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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러다보면, 어떠한 추상체들을 곧바로 인식하는 외계인이나 생물체들을 상상하곤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사회와 그들의 생활 주기와 생물학적 특성과 뭐 그런 것들이요.
언젠가 구체적으로 작품이 나왔으면 좋겠네요.

수학, 언어-의미, 시간, 공간. 또 뭐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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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한 가지 생각으로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수, 언어-의미, 시간에 대한 지각/직관을 가지는 능력/기능을 진화시켰을까요? 진화론에 따르면, 모든 생물체들은 나름의 환경적 적응 과정을 통해, 이러한 능력을 획득합니다. (물론 이 기능이 처음부터 지금처럼 쓰였을지는 미지수이지만요. 예컨대, 조류의 깃털은 처음에는 날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방수 혹은 보온을 위해 만들어진 것 아닐까, 라는 제안이 나옵니다.)

아마 영원히 풀기 어려운 문제일겁니다. 인간 화석에서 이러한 추상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부위에 남아있을리도 없으니, 따라서 역사 과학, 즉 고생물학과 고고학의 관점에서 이러한 발전 과정을 탐구하는 것은 굉장히 어렵겠죠.

다만 기술이 발전하면, 우리는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이에 대한 데이터를 얻어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얻어낼려나. 그것도 생각해보니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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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다시 몇 가지 윤리학적 주제들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특히 응우옌의 게임에 대한 논의에서, 인간의 동기(motivation)이 가지는 복잡한 형태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여러 가지 미학-예술철학과 윤리학의 영역에서 이와 비슷한 사례가 생각나더군요.

응우옌이 지적하듯, 게임은 목적에 있음에도, 그 표면적 목적이 어디까지나 실질적인 목표를 위해 지연됩니다. 예컨대, 우리는 이기려고 게임을 히지만, 이기는 과정의 즐거움을 얻고자 이 승리를 끝없이 지연시키는 사람들을 압니다. (치트키를 쓰지 않고 게임을 하는, 진정한 즐겜러들이죠.)

이는 니비슨에 대한 생각으로 넘어갔습니다. 니비슨은 유학의 윤리를 말하면서, 기본적으로 유학에서 윤리는 힘(power) - 덕의 구현이라 주장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즉, 내가 타인에게 윤리적 행동을 할수록, 그 사람은 자신이 그 "감정적 부채"를 갚아야 한다는 감정을 가진다는 것이죠. 그렇기에,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팔을 자른 사람에게, 살아난 누군가는 굉장히 큰 부채감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 이 부채를 해소해야 한다는 부정적인 감각을 해소할 방법이 없으니깐요!)

이러한 감정의 모순은 굉장히 여러 생각으로 이어지곤 합니다. 노엘 캐럴이 말한 유머와 호러의 역설. (우리는 윤리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웃음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리고 통상 피하려고 하는 부정적인 감정인 공포를 느끼고자 호러라는 장르를 만들기도 했죠.)

에드 용의 책에서 읽은 마조히스트들의 사례도 생각합니다. 이들은 고통을 '쾌락'이라 인지하죠. 운동을 하고 느낀 것이지만, 운동은 기본적으로 고통을 수반합니다. 하지만 이 고통이 어떠한 성취가 있을 것이라 자각/믿게 되면 (정확히 말하자면 일종의 확신을 하게 된다면), 근육통이라는 고통이 즐거워 지는 경험을 최근했습니다. 일반적으로 고통은 부정적이고, 회피하고 싶은 느낌인데 말이죠! (저는 지금도 팔을 많이 써서 오는 오른 어깨의 통증을 굉장히 싫어합니다.)

아주 예전에는, 아리스토텔레스 - 밀 덕윤리에서, 습관화 테제가 참 말이 안 된다 느꼈습니다. 싫은 것이 습관화를 통해 좋아진다고? 그렇지만, 이러한 운동과 같은 형태는 굉장히 흥미로운 동기 - 감각의 복잡한 측면을 설명해줄 수 있다 여겨집니다. 게임도 그렇고요.

그렇다면 이러한 것을 통해 일종의 덕 윤리 - 혹은 습관화가 가능하지 않을까요?

기억(memory)는 의외로, 인간이 통제하지 못하는 영역 중 하나니깐요. PTSD의 사례는 생각해보면,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느낌의 영역을 다룬다는 점에서, 윤리학과 미학은 많은 접점이 있어 보입니다. 다만 이걸, 학술적으로 연구할 방법이 있을까? 는 잘 모르겠어요.

여전히 감정에 대한 여러 도덕심리학/철학적 모노그래프는 엄밀하지 못하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애당초 이러한 현상적인 것에 대한 접근이, 엄밀할 수 있을까요? 애매합니다. 애매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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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와 대화를 하면서 한 내용이지만, 저는 점점 더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덕 윤리학에 경도되고 있습니다.

도덕 개별주의라 하죠?

다만 이 도덕 개별주의가 "모든 상황"에서 옳은 것일까, 는 잘 모르겠습니다. 예컨대,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윤리에 따른 숙고는 한정된 피-영향자들이 있는 상황에서는 굉장히 적합하다 여겨집니다. 예를 들어, 파티에 여러 친구들을 초대하는대, 친구들의 취향이 다를 경우 이를 해결하는 적합한 방식은 이들의 다른 취향이 최대한 충족될 수 있는 제 3 지점을 찾는 것이겠죠.

그렇지만 이러한 고려가, 과연 지금처럼 개인의 행위가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영역에서도 그대로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예컨대, 제가 CEO고 누군가를 자르는 결정을 해야 한다 해봅시다. 그래서 제 결정에 영향을 받는 사람이 100명 가량 된다 가정해봅시다.
과연 우리 인간의 연산 능력은, 이 100명 모두를 고려하는, 덕 윤리적 판단을 내릴 수 있을까요?

전 못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럴 때는....아....그래 일종의 결과론이 가장 나은, 추론의 방식이 아닐까 했습니다. 그냥 일종의 "근사값"으로 말이죠. 도무지 연산할 방법이 없으니깐요.

생각해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윤리는 아테네라는, 굉장히 협소한 도시 국가라는 사회적 배경 속에서 나왔습니다. 지금 구글을 뒤지니, 성인 남성 인구는 4만명이라 하네요. 4만명 정도면, 덕 윤리를 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공리주의가 나온 대영제국 시기에, 이러한 덕 윤리적 고려를 할 수 있었을까요? 벤담과 밀이 괜히 대영제국 때 이런 사상을 만든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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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적 지각이라는 아이디어에 대해서는 수학적 실재에 대한 논쟁이 연관될 것 같네요.

  1. 지각이 외부 대상에 대한 것이라면 수학적 대상은 자연스레 외부에 실재한다는 게 됩니다.
  2. 외부 대상과 감각기관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지각이 이뤄진다는 것을 생각하면 수학적 감각기관이 수의 위상에 대해 힌트를 줄 수 있어야 합니다
  3. 마지막으로 추상적 수학적.대상(직관적이지 않은 수학적 대상)의 경우 직관적인 수학적 대상과 불연속성을 상정해야 하는데 이게 좀 독단적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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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가 말한 것이 정말 이런 것을 상정하는지 의문스럽네요.
음, 우선 지각이 외부대상에 대한 것으로 한정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예컨대,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여러 가지 느낌에 대해서 저는 "지각" 비스무리한 것을 한다 여깁니다.
인지라는 중립적 텀을 사용할 수도 있지만 (i) 적어도 숙고/반성이 아닌 시간적 찰나에 아는 것이므로, 지각이라고 쓰겠습니다.

나아가 지각이 외부 대상에 대한 것일지라도, 외부 대상과 우리가 지각하는 것이 동일하다 상정할 필요는 없다 느껴집니다.
예컨대 색(color)에 대한 한 입장은, 이것이 외부 대상에 의해 촉발되지만, 우리가 느끼는/지각하는 색이라는 것은 이 중간 신경계 어딘가에서 발생한다 여겨지기도 하니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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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의 위상이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고자 쓰신 건지 모르겠어서 뭐라 답하기가 어렵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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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추상적 수학적 대상과 직관적 수학적 대상이 구체적으로 각각 무엇을 예시로 상정하고 하신 질문인지 궁금합니다.

나아가, 사실 전 요즘 수학이 논의하는 대상이 단일한 것인지 좀 의문스럽습니다. 숫자(number)와 연산에 의해 정의되는 구조, 위상수학에서 다루어지는 구조. 등등 이런 것이 과연 단일한 것일까...

예컨대 해석기하에서 기하학적 구조/공간적 구조를 다루기 위해 함수를 활용하지만, 이때 함수는 차라리 일종의 도구 아닐까요?
물리학에서 엄밀한 공식화를 위해 수학을 사용하지만, 이때 수학의 대상과 물리학의 대상이 구분되는 것처럼 말이죠.

또한 불연속성이 정말로 문제가 되나, 라는 생각도 듭니다. 사회존재론에서 가져온 예시인데 인종(race)라는 속성을 생각해보죠.
인종은 사회적 규범 혹은 뭐 사회적으로 정의된 속성이지만 동시에 이것이 자연적 특성이 없는가? 묻는다면 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피부색은 분명 누구나 감각지각을 통해 인식할 수 있으니깐요. (물론 피부색은 연속적이기에 대머리의 사례처럼 모호성이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검은 피부와 하얀 피부의 차이가 없다는 것은 과한 주장일겁니다.)

따라서 (만약 수학이 불연속적이라면) 수학 역시 이렇게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직관적인 수학적 대상 위에 여러 가지 이론적 대상들이 올라간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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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느낌(feelling)이라는 단어와 지각(perception)의 차이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느낌'은 내적 감각과 외적 감각 모두에 사용되는 반면 '지각'의 경우 외적 감각에 한정해서, 더 정확히 말해선 대상이 존재하는 경우에 한정해서 사용됩니다.
    수학적 느낌을 상정하신 거라면 저도 반대할 이유가 없습니다.

  2. 이것도 지각을 상정하고 말한 것이기는 합니다. 고민을 좀 하다 '수의 위상'이라고 표현했는데 제가 표현하려고 했던 것은 인지 과정에서 지각 대상과 상호작용을 하니 최소한 외적 세계에서의 수의 위치, 혹은 구성, 혹은 어떤 종류의 존재자인지에 대한 힌트를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이 물리적 대상인 또는 그것에 의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은 인간이 물리적.존재자이기 떄문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수를 지각한다는 것은 인간이 수학적 존재자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 수학적 존재자가 세계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저는 모르겠습니다.

  3. 불연속성을 인종의 예시와 같이 상정하는 것은 서로 다른 사고 회로를 상정해야만 가능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는 로이 바스카의 사회과학철학에서 제시된 것과 동일한데 자연적 대상과 사회적 대상은 모두 실재하지만 그 둘의 존재론적 층위가 다르고 사회적 대상은 자연적 대상을 토대로 삼아서 존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수학적 대상은 사정이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수든 함수든 위상수학적 대상이든 모두 수학적 대상으로 취급한다면 하나의 위계에서 하나의 인지적 능력을 상정합니다.(Mandala님의 아이디어에서는 수학적 느낌) 하나의 인지적 능력이 어느 순간에 이전의 것과 전혀 다른, 그리고 몇 가지 제약이(지각을 상정하고 쓴 것이기는 합니다.) 있는 인지적 능력에 의해 인식되는 무언가를 인식한다고 하는 것은 설명해야 하는 연속성을 불연속성으로 메꿨다는 인상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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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재미있네요. 수학적 대상에 대해서는 관련 논의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실제로 드레츠키(F. Dretske)와 그 계승자들은 우리가 타인의 마음을 직접적으로 지각한다는 논증을 펼치기도 하더라고요. 외계인을 굳이 상정하지 않더라도, 바로 인간인 우리 자신이 ‘마음’이라는 추상체를 이미 지각하고 있다는 거죠.

개인적으로는 추상체들을 지각할 수 있다는 주장에 동의하는 편입니다. 지각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관찰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에 과연 엄격한 구분선이 있는지 의문스러워서요. 브랜덤(R. Brandom)도 이렇게 이야기하죠.

"[T]here is no particular line to be drawn between what is in principle observable and what is not."

(R. Brandom, “Non-Inferential Knowledge, Perceptual Experience, and Secondary Qualities: Placing McDowell's empiricism”, Reading McDowell: On Mind and World, N. H. Smith(ed.), London and NowYork: Routledge, 2002, p. 96.)

그래서 지각되는 것과 지각되지 않는 것을 나눌 구분선이 없다면, 추상체를 ‘지각’한다는 주장이 원칙상 거부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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