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게재 후기

작년 2월 학술지 논문 게재에 대해 질문하는 글을 올렸었는데 이후 논문의 작성, 수정, 게재 확정의 과정을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제목은 "Aristotle's Critique of Form-number"이며 연말쯤 Elenchos라는 학술지에 실릴 예정입니다. 1980년 창간된 이탈리아의 고대철학 전문지이며 현재 De Gruyter에서 발간되고 있습니다.

내용은 플라톤의 형상수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비판입니다. 플라톤은 단위의 모음에 불과한 수학적 수 이전에 형상으로 존재하는 수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형상수는 수학적 수를 구성하는 단위들에 구조를 부여하는 형상이자 수계열의 순서를 보증하는 역할을 한다고 간주됐습니다. 논문은 후자의 문제에 주목하여, 형상수를 상정할 경우 수계열의 순서가 망쳐진다는 게 아리스토텔레스의 비판이라고 주장합니다. 또한 플라톤의 수 이론은 '하나'(to hen)의 여러 의미를 구분하지 못하여 수학과 형이상학을 (부당하게도) 뒤섞은 이론이라고 진단합니다.

논문은 구상에서 최종본 발송까지 일 년쯤 걸린 것 같습니다. 내용이 저의 박사 논문과 상당히 관계되는데도 짧은 분량 안에 명확한 주장을 담아내고 문체, 논문 형식 등을 조율하는 데 시간이 꽤 걸린 것 같습니다. '수정 후 게재' 결정을 받고 수정하는 데는 두 달쯤 걸렸습니다.

인상적인 점은 두 심사자의 상세한 논평이었습니다. 각각 두 쪽으로 된 평가지는 우선 논문을 간단히 요약하고 장점들을 나열했습니다. 나머지 한 쪽은 보완할 점들이 나열됐습니다. 긍정적이었던 평가는 가령 논문을 "really enjoyed" 했다거나 "ambitious, insightful, original" 같은 수식어였습니다. 반면 뼈아픈 약점들도 세밀하게 지적되어 몇 문장으로 처리했던 부분을 두 페이지로 확장하는 등 보완 작업 또한 만만치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전문가 두 명이 나의 글을 자세히 읽고 논지의 방향을 파악하여 더 발전시킬 수 있는 방안을 제시했다는 점이 고무적이었습니다. 수정본을 보낼 때 수정사항을 간단히 나열한 별도의 문서를 보내게 되어 있었고, 이후 편집자들의 최종 승인까지 열흘 걸렸습니다.

또 인상적인 점은 전반적 과정을 담당하여 이메일을 주고받은 주 편집자(managing editor)의 경력이었습니다. 웹상에 이력서가 있길래 살펴보니 Aristotelica라는 학술지를 겸해서 담당하고 있고 출간 목록을 보니 전문 연구자 못지않은 실력을 갖춘 분이었습니다.

철학을 공부하는 데 원문 해석 능력이 요구되느냐는 질문이 있는데 물론 전공 분야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저의 경우는 필수적이라 할 수 있고 위 논문에서는 표준 번역(Revised Oxford Translation)의 여러 구절에 대해 문제를 제기합니다. 하지만 전공이 고중세 쪽이 아니어도 언어 실력은 무조건 키우는 게 좋다는 생각입니다. 우선 여러 언어를 통해 언어의 공통적 구조를 파악하는 것이 논리적 구조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생각입니다. 또 요즘은 유럽에서도 다 영어로 한다는 말이 있으나 이건 그야말로 최소 조건이고 원문은 차치하고 좋은 2차 문헌을 읽기 위해서라도 영어 이외의 언어가 필요합니다. 또한 현대 철학의 주요 쟁점을 이해하는 데 철학사 지식이 필요하고 이는 당연히 언어 실력을 요합니다. 가령 수 개념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입장은 현대에 와서 초기 후설 대 프레게의 양상을 띠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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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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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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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고생하셨습니다!! 축하드려요!
학술지에 투고하고 받게 되는 비평이 정말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비평을 받기 위해서라도 게재 거부를 두려워해서는 안 되는 것 같아요.
그나저나 언제쯤 출판될까요? 너무너무 읽어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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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실어주는 것만 해도 고마운데 비평이 두려워서 게재를 거부하는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ㅎㅎ 2024년 2호에 실릴 예정이니 11-12월쯤 나올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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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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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