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정말 직접적으로, 거칠게 여쭙는 질문: 도대체 어떻게 공부해야한단 말인가?

(5분 전에 실수로 엔터키를 눌러서 충분히 수정되지 못한 글이 올라갔습니다. 동일한 내용입니다.)

매번 서강올빼미에 접속할 때마다 선생님들의 감사한 정리글들을 통해 다양하고 중요한 철학적 주제들을 접하게 되고 배울 수 있어서 기쁘지만, 동시에 매번 위압감이 듭니다. 제 자신도 서강올빼미에 '적어도 내가 공부한 것은' 원숙히 정리해서 소개하고 피드백도 받고 도움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굴뚝같음에도 불구, 선생님들에 비해 저 스스로의 수준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정말 이루 말할 수 없게 크게 들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이는 비단 제가 '경험'이 없기도 하거니와, 제 스스로 느끼기에는 '내가 제대로 공부하고 있는 중이다.'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대학에 재학 중이지만 사실상 텍스트들과 대단히도 친해지게 된 것은 군 생활동안 혼자 공부하면서였고, 그래서 스스로의 강독과 글에 대한 결핍을 느끼면서도 도저히 ‘함께 공부하는 사람’이 주변에 없어 갑갑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에 선생님들께 질문드립니다.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철학 텍스트 강독/연구/탐구를 해야하는 것입니까?
ㅡ 이런 피상적인 질문은 자체로 실례가 될 수밖에 없으니, 아무 밑천도 없이 맨 땅에 헤딩하고 있는 제 현재 '보잘 것 없는 공부 방식'을 조금 적겠습니다.

현재 레비나스의 <전체성과 무한>을 이전보다 조금 깊게 탐구하고 있습니다. 저희 학교 교수님의 강독 방식을 흠모하여서 학부생의 신분으로 어깨너머 배운 그 방식을 따라 해본답시고 뱁새 가랑이 찢기 합니다만... 교수님의 강의 계획서에서 그 방식이 조금 소개되고 있습니다.

논점point을 잡아내고 논점을 중심으로 논증argument을 재구성해 보는 것, 숨겨진 가정들assumptions을 찾아내고 논증의 타당성validity 혹은 건전성soundness 혹은 설득력persuasiveness을 검토하는 것, 논증과 논증의 연결고리를 찾는 것, 나아가 텍스트 전체의 흐름을 일관하면서 저자가 명시화할 수도 있었지만 명시화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던 것"을 다시 "불러내는" 시도를 해보는 것, 그렇게 해서 이 모든 시도들을 통해 철학적 사고라는 게 무엇이고 왜 중요한지, 왜 소중한지, 왜 파워풀한지를 경험하는 것이다.

이에 제가 교수님의 빼어난 방법론을 엉성하게 활용하는 방식은 대체로 아래와 같습니다. : 예컨대 [2부_B_5.요소의 신화적 형식]에서 레비나스는 '요소적인 것'에 관해 이런 서술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소에 의한 감각의 이 넘쳐흐름은 순간적 의미를 가진다. 이 넘쳐흐름은 무규정성 속에서 드러나는데, 요소는 이런 무규정성과 더불어 나의 향유에 주어진다. 향유 속에서의 성질은 어떤 것의 성질이 아니다. 나를 떠받치는 땅의 견고함, 내 머리 위 하늘의 푸르름, 바람의 숨결, 바다의 넘실댐, 빛의 반짝임은 어떤 실체에 매달리지 않는다. 그것들은 어디도 아닌 데로부터 온다. 어디도 아닌 데서, 있지 않은 ‘어떤 것’에서 온다는 이 사실, 나타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채 나타난다는 사실, 그래서 결국 언제나 오지만 그 원천을 내가 소유할 수 없다는 이 사실이 감성과 향유의 미래를 그려낸다. (에마뉘엘 레비나스, 『전체성과 무한』, 김도형 외 2인 옮김, 그린비, 2018, p.205)

이에 대하여 제가 최대로 평이하게 (하지만 어디까지나 ‘저를 위해서’)쓴 정리 글입니다.

이 요소의 넘쳐흐름은 ‘무규정성’에 의한 것이다. 요소의 이 무규정성이 향유에게 주어진다. : 여기서 <향유>라는 단어가 보다 이해를 돕는 역할, 아니 그 말 자체가 굉장히 중요성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나를 떠받치는 땅의 견고함, 내 머리 위 하늘의 푸르름, 바람의 숨결, 바다의 넘실댐, 빛의 반짝임”의 저 모든 서술들은 하늘과 바람과 바다를 ‘즐기기 위한 감각적 표현들’이지 그것들을 ‘대상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표현’이 아니다. 때문에 “향유 속에서의 성질은 어떤 것의 성질”, 즉 실체의 속성과 같이 이성의 엄명한 파악으로 이해되어야할 종류의 것이 아니다.
또한 “그것들은 어디도 아닌 데로부터 온다. 어디도 아닌 데서, 있지 않은 ‘어떤 것’에서 온다는 이 사실… (후략)”라고 레비나스가 쓰고 있는 이 지점에서 ‘어디도 아님nowhere’ ‘있지 않은 어떤 것something that is not’이라는 표현들에 얽혀있는 것은 어쩌면 <형상>의 문제는 아닐까? 후설의 지향성이 필요로 하는 ‘형상(Eidos)에 대한 직관’의 방식과 다르게 나아가려는 것이 아닌가? - 이러한 의문에 관해.. 나는 후설의 이론을 아직 충분히 숙지하지 못한바 후설을 토대로 무얼 말할 수가 없음.
다만 적어도 『존재에서 존재자로』에서 레비나스가 ‘그저 있음il y a’의 그 본질적인 익명성에 관해 “정신은 파악된 외재적인 것(un exterieur)과 대면하지 못한다.”(E. Levinas, 『존재에서 존재자로』, 서동욱 옮김, 민음사, 2003, p.94)라고 말했던 것을 이와 관련해 상기해볼 수는 있겠다. 즉 본질적인 ‘있음’ 일반에 대하여 이성적 사유 혹은 노에시스의 지향은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즉 어떤 명확한 구분을 가능케 하는 외면이 가능하지 않고, 요소에 대한 향유로써의 접근 때문에 지시적 특칭이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이에 확실히 ‘요소적인 것’은 ‘il y a’에서 향유-감성의 사유가 추가되면서 발전된 개념으로 보인다.
“결국 언제나 오지만 그 원천을 내가 소유할 수 없다는 이 사실이 감성과 향유의 미래를 그려 낸다.” 『전체성과 무한』에서는 “현재”를 어디까지나 “재현”에 의한 것으로 이야기한다.(“재현한다는 것, 그것은 단지 ‘새롭게’ 현전시킨다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 현행의 지각을 현재 자체로 되돌리는 것이다.” 『전체성과 무한』 p.182) 반면 감성과 향유는 주체에게 실재를 현재적인 것으로 사유할 힘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래의 불안정성을 대면케 한다. 그러나 이러한 서술은 감성과 향유를 부정적인 것으로, 재현을 긍정적인 것으로 보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째서 요소적인 것을 향유하는 주체가 재현을 통해 요소를 ‘대상화’할 수밖에 없는가에 대해서 추적하며 서술해내가려는 것이다.

다시 한 번 글을 살펴보면서 이러한 잘못들을 보게 됩니다.
(1) 다른 사람이 읽기 기꺼운 글이 아니다. (2) 철학 개념이나 사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3) 설명어들이 모호하고 위태롭다.

그렇다면 선생님들, 철학 텍스트 탐구와 그 정리 글을 쓰는 것에 있어서 무엇을 목적해야하며, 어떤 준칙들을 지켜야합니까? 서강올빼미 포럼의 목적이 ‘작업물의 오픈소스화 및 공유’라는 것도 그렇고 저 또한 꾸준히 타인이 읽기 좋은 글을 쓰고 그것을 서강올빼미를 통해 감사한 피드백들을 받아가며 실력을 키우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위의 제 정리 방식이 가진 문제점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실 수 있으신가요?

모든 부족하면서 갈망만 큰 사람이 그러하듯이 저 또한 추상적으로 여쭙고만 싶은 것들이 많아 이렇게 두서없고 포괄적인 질문만 드리는 글이 되었습니다. 이런 질문밖에 못하는 것도 글쓴이의 부족함의 반영이겠거니 하고 너그러이 생각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공부해야 준수한 연구자로 거듭날 수 있는지... 어디 마땅히 여쭐만한 곳이 없어 이렇게 간절히 질문 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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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tto 님께서 제기하신 질문은 대학원에 올라가 공부를 계속해더라도 누구나 계속해서 생각하게 되는 내용인듯 합니다. 질문 안에서 Ditto님께서 염두에 두고 계신 것은 강단철학의 Standard Interpretation을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해를 달성하는 적절한 방법론에 대한 물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철학 텍스트를 접근 및 활용하는 올바른 방법론이란 무엇인가?

이에 관해서는 먼저 철학 텍스트 독해를 통해 달성하고자 하는 목적이 뚜렷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공부를 하다보면 저마다 다른 목적으로 같은 텍스트를 놓고 다양한 독해를 내놓고는 합니다. 비전공자들이 철학자들의 개념적 착상들을 전유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경우도 있고, 전공자들이 오래된 질문과 논증을 현대적으로 재각색하여 엄밀한 문헌학적-역사적 고증에 따른 독해에 구애받지 않고 오늘날의 사정에 알맞게 재구성하고자 하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엄밀한 문헌학적-역사적 고증에 따라 사상의 발전사적 과정을 꼼꼼히 추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요컨대 철학 텍스트로부터 얻어가고자 하는 목표가 다르다면 적합한 방법론과 접근이 또 다르겠지요. 방법론과 접근의 차이에 관하여 말하자면 예컨대 비전공자와 세부전공자가 후설의 현상학적 환원에 대해 논구할 때 요구되는 엄밀성과 문헌학적 근거제시의 기대수준이 다르다는 점을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철학 텍스트 독해를 통해 달성하고자 하는 최종적 목표가 강단철학 내부의 논문출판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말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을 해볼 수 있을 듯합니다.

  1. Springers/Kluwer Publishers, Cambridge companion 등 International academic publisher에서 나온 연구서적을 독해하여 Standard Interpretation의 범위와 연구동향 그리고 신뢰할만한 2차문헌지를 얻는다.

  2. 여러 2차문헌을 통해 철학자의 사상에 대한 개괄적인 구도와 주요 논증들을 숙지한 뒤에 철학 원전을 접근해 들어간다.

  3. Term paper, Journal publication을 염두에 두고 주제를 잡아서 글을 써보고 선후배/동료/대학원생/박사급 연구자 등에게 이해의 수준과 내용구성 및 접근방법에 대해 feed-back을 받는다.

이 정도를 들 수 있을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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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연히 기대했던 답변의 선을 넘쳐흐르는 값진 도움의 말씀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당장 이행할 방안을 생각해야지, 곁다리로 질문을 더 드리는 것도 무의미할 것 같다고 느낍니다.

순서?로 따지면 2-1-3이 될텐데, 저는 2의 개괄적 구도와 논증의 숙지마저도 여실히 부족하고 부족한 상태에 있는 것 같네요. 제 스스로가 현상학-프랑스 현대 철학의 담론에 대해 깊이 알고싶어하면서 2차문헌 독서량이 상당히 부족하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근래에는 LeCroissant님께서 Reading list: How to start reading Husserlian Phenomenology?에서 언급해주신 Secondary Texts를 pdf로 접하며 열심히 읽어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도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마음은 급하지만 그럴수록 돌아가야겠습니다; 사실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짚어가야만 했던 해야할 일을 하는 것이겠지요? 다시 한 번 정말정말정말 조언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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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학 및 프랑스현대철학의 명저들은 대부분 국가박사학위논문(thèse agregation; L'etat Docteur) 및 부논문(thèse supplement)으로 제출된 논문들입니다. 박사학위자를 독자로 상정하고 쓴 글에다가 본인의 독자적인 연구영역을 성공적으로 구축했다는 자격증명격의 논문이기 때문에 문체의 문제를 차치하고 나서라도 내용의 수준과 난이도면에서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1
앞서 제시한 방법론에서 "배경지식을 갖추야만 반드시 철학텍스트를 잘 읽을 수 있다"를 주장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다만 노력투입대비 성과라는 효율의 측면에서 생각해볼 때, 충분한 배경지식과 개괄적인 이해가 선행되지 않은 채로 원전을 곧바로 들어가는 것이 그다지 좋지 않을 뿐더러 오독의 가능성을 높이기 때문에 1-2-3의 순행적 방식을 제시해본 것입니다.

예컨대 현상학자로 분류되는 많은 철학자들은 칸트, 흄 등과 대립각을 세워가면서 문제제기와 방법론을 발전시켜나갑니다. Erlebnis/Erfahrung과 같이 단어상으로는 유의어로 묶이지만 상호대립 또는 대비되는 의미로 쓰이는 개념군들은 이들이 비판적 대화의 대상으로 놓는 철학자들의 해당개념 용법을 염두에 두고 보아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원전으로 곧바로 들어갈 때 이해의 중요한 단서가 되는 이와 같은 개념어의 용법 상의 차이를 잡아내기란 어렵다고 봅니다.

#2
해외 연구서를 추천한 까닭은 Erlebnis/Erfahrung, Sinnlichkeit/Bedeutung등 단어 상으로는 같은 유의어의 관계에 있지만, 개념어 상으로는 상이한 의미로 쓰이는 짝개념들을 세밀하게 짚어나가면서 해설해주는 연구서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약간은 다른 맥락에서 사르트르는<존재와 무>에서 connaître와 savoir를 상호대비하며 앎의 유형을 세분화하는데 이 경우 한국어에는 직관적으로 두 단어의 의미차를 짚어줄 대조군이 존재하지 않는데 반해 영어에는 존재합니다. 이와 같은 의미차를 보이는 개념어군 이해하는데 있어 영어가 보다 유리하고 효율적인 측면이 많아 해외 연구서를 추천하는 것도 있습니다.

#3
누구라도 자신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주제에 관해 보다 심도깊은 이해를 효율적으로 달성하고 싶을 것입니다. 훌륭한 2차서를 꼼꼼하게 독해하는 것이 이를 가능하게 해준다고 생각합니다. Springers 등의 유수 출판사에서 나온 2차서들은 해당분야에서 인정받는 학자들이 집필한 경우가 많습니다. 난해한 내용을 쉽게 풀어 해설해줄 뿐만 아니라, 각각의 논점에서 다시 연결되는 철학적 제문제들과 이에 관한 연구동향을 소개해주기 때문에 이해의 큰 그림 뿐만 아니라 세부 내용까지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연구에 있어서 자기 나름의 관점을 수립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프랑스 철학자들이 당대 유행과 철학사에 대한 철저한 이해를 바탕으로 고전적인 문제를 세련되게 재풀이한 끝에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했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Standard interpretation을 잘 섭렵하는 것이 독자적 관점을 기르는데 필요한 기초체력이 아닌가 하고 종종 생각하고는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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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

그리고 나라의 교육이 부끄러울 정도로 잘못됬다는 증거로 평범한 육체노동자들뿐만 아니라 명색이 자유민으로서의 교육을 받았다는 사람들에게도 숙련된 의사와 재판관이 필요하다는 것보다 더 명확한 증거를 찾을 수 있을까? 아니면 자네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어 주인이든 재판관이든 남들에게서 정의를 구해야 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며, 교육이 잘못됐다는 명확한 증거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플라톤 <<국가>>(천병희 역) 184p 중에서

플라톤의 논변이 국가에서 행하는 공교육에 해당하는 것만이 아니냐고 반문하실수도 있겠지만 직접 <<국가>>를 읽어보신 분들은 알 수 있듯이 사실 국가는 정치체제를 빗댄 개인에 대한 이야기지요.

플라톤은 교육은 '스스로' 문제 해결을 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 합니다.

아마 질문자님이 학계에서 이미 공부하고 있으심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탐구 혹은 연구해야 하냐고 물으시는 건 학계의 과정에 만족하지 못하시는 것이겠지요.

학계의 연구자가 되고 싶으시다면 지금 만족하지 못하시는 그 방법에 자신을 깎아내면서 적응하는 것도 한 방법이겠으나 철학은 절대 학계 안에 갇혀 있지 않다는 것을 레비나스의 삶이 이미 증명해주는 것이 아닐까요?
레비나스조차도 너무나 늦은 나이에 학계에서 인정받았으니까요.
맨 땅에 헤딩하는 방식이 질문자님의 '스타일'을 만들수도 있는 것 아닐까요?
마지막으로 읽으면 너무나 감탄하게 되는 철학자 김영민의 <<공부론>>의 일부분을 남깁니다.

이소룡의 추억 :스타일은 양식이 아니다

무술가 이소룡(李小龍, 1940~1973)은 어떤 ‘스타일’일 수밖에 없었다. 나태하거나 보수적인 치들은 종종 스타일에 반감을 지니지만, 스타일은 주류의 각질을 뚫는 아웃사이더의 징후로 일정한 혐오감을 동반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헤겔(G. Hegel)과 마르크스(K. Marx)의 분쟁에서 보듯이, 스타일이 없이는 진정으로 스승과 결별할 수조차 없다. 미완의 <사망유희>를 유작으로 남긴 채 이소룡이 세상을 뜨자 수많은 잡룡들을 내세워 모작들이 제작되었지만, 그의 스타일은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다는 사실만 날로 분명해졌다. 그러나 양식(Typus)은 스타일이 아니다. 요컨대 스타일은 흉내와 더불어 죽는다. 이와 대조적으로 양식은 오히려 흉내 내기의 네트워크를 통해 공고해질 뿐이다. 그래서 스타일에는 매순간 스스로의 부끄러움을 치열한 실존의 열정 속에서 승화시키는 아이러니의 빛이 있다. 키르케고르(S. Kierkegaard)처럼 말하자면 스타일 속에는 일반자적 양식 속으로 환원될 수 없는 단독자적 체취가 생생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양식은 부끄러움을 없애는 문화적 법식이다. 가령 지멜(G. Simmel)이 설명하는 양식이란 꼭 그런 것이다. 나아가 비코(G. Vico)나 융(C.G. Jung)이 말하는 양식은 지멜의 것보다 한층 더 깊어 보이고, 제법 형이상학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소룡의 궁푸(工夫) 스타일에는 형이상학적인 게 없다. 철학도이기도 했던 그는 더러 노자류의 잠언을 흘리면서 ‘물처럼 되라!’는 주문을 하기도 하지만, 그의 테크닉은 간결하게 정곡을 찌를 뿐 실없이 용장스러운 데가 없다. 그는 스크린의 스타가 되어 남다른 화려한 모습을 드러내면서, 군부독재와 개발지상주의의 아버지 체제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그 모든 불량스러운 10대의 우상이 되었다. 우리는 교실에서 책상을 마구 뛰어넘고 헛되게 쌍절곤을 돌리다가 형광등을 부수곤 했다.

그의 스타일은 응당 양식으로 굳어지면서 스타의 비용을 치르게 되었지만, 우리는 그 양식 속에서 우리의 스타일이 부활하기를 소망했다.그는 자신의 무술을 설명하는 중에 형(type)이라는 말을 싫어하고 늘 ‘자기표현’이라고 했다. 그것은 ‘디-자인(de-sign)이 그 자체로 하나의 강력한 사인(sign)이고, 탈코드는 그 자체로 가장 매력적인 코드’라는 사실을 말해 주는 대중적 이미지, 그 시절인연(時節因緣)과 같은 것이었다. 우리는 열다섯 살의 과도기를 제 깜냥껏 지나면서 이소룡의 스타일을 향한 불가능한 욕망을 반복강박적으로 양식화했다. 과거, 제자가 스승을 배우는 방식은 반복되는 흉내 속에서 양식을 얻고 마침내 그 양식마저 뚫어 내며 자신의 스타일에 이르는 길이었다. 즉, 동화(同化)-이화(굋化)의 변증법을 금강산을 스쳐 가는 계절처럼 무심히 반복하는 것! 그리고 이른바 염화시중(拈華示衆)의 길은 그 깨침의 극점에서 비밀처럼 보여 주는 교학상장(敎學相長)의 비경인 것이다. 그러나 이소룡의 이미지가 재현하는 한편 우스꽝스러운 양식은 스타가 된 아웃사이더들의 세속적 운명이다. 그들은 스타일을 양식 속에 죽이면서 세속의 명성을 얻는다. <사망유희>에서 노란 체육복을 입은 채 예의 괴조음을 지르며 상대의 쌍단봉을 대적하여 회초리처럼 길게 깎은 대나무 무기를 사용하는 장면은 몹시 흥미로운 파격이다. 그 복색과 무기의 취지는 그가 늘 한결같이 그의 제자들에게 강조하던 유연성(pliability), 즉 주류의 엄숙주의를 가로지르는 바로 그 유연성의 이단(異端)에 다름 아니다. 뛰어난 춤꾼이기도 했던 그는 그 이단적 유연성으로써 그만의 무술 스타일을 얻었으나, 그 스타일을 대중의 환호 속에서 양식의 제물로 희생함으로써 대중적 스타의 권력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유연성은 오직 실전 무술의 실용성을 위한 것이었다. 《징비록》(1647)의 유성룡에 의하면 신립(申砬) 장군의 호령이 번거롭고 요란스러워 반드시 싸움에서 패할 것이라고 했고, 인재등용의 귀재였던 세종대왕은 말수를 줄이고 듣기에 기민했다고 했지만, 궁푸(工夫)도 공부(工夫)도 곧 그런 것이다. 주먹이든 말이든, 칼이든 펜이든, 그것은 사태의 진실을 향해 유연하고 실제적으로 파고드는 방식에 주력해야 한다. 연암 선생도 학문과 문장을 논하면서 억지로 기이하고 새로운 것을 추구할 일이 아니라고 경계한다. 요점은, 자신의 스타일로 사실에 충실한 글을 쓰면 그것이 곧 기이하고 새롭게 된다는 것이다. 언거번거한*(주석:언거번거하다 : 말이 쓸데없이 많고 수다스럽다.) 말은 외려 어눌한 것보다 못하고, 형(型)만 요란스러운 동작은 실없기 때문이다. 이소룡의 추억! 그것은 그대로 어떤 공부의 환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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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철학자들의 글쓰기 방식이 자유로워보일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언급하신 레비나스를 비롯하여 어떤 철학자들도 결코 학계를 벗어나 고립된 채 오로지 혼자서 철학하는 법을 터득하지는 않았습니다. 마치 성장기 전체를 사회 밖에서 고립된 채 보낸 사람이 혼자 언어를 터득한 일이 없듯이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텍스트 해석이나 철학적 입장을 맹목적으로 좇지 않고 독자적인 견해를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은 십분 동의가 되지만, 그러한 독창성이 중요하다는 점은 학계에서 (적어도 현존하는 철학 연구자 공동체에서) 부정된 적이 없습니다. 대학 등의 학문 교육자들은, 그러한 독창성이 그간 축적되어 온 연구성과들을 성실히 파악하고 섭렵하고 비판하는 과정을 거침으로써 비로소 형성된다는 점을 주장할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라는 점이 학문 공동체 내에 중요한 교훈으로 승인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학문 공동체의 표준적인 텍스트 연구 방법을 배우려는 ditto님의 태도는

순응적인 태도가 아니라, 철학자라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훈련 과정을 성실히 이수하려는 훌륭한 학생의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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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에 대해서는 LeCroissant님께서 너무나 잘 설명해주셔서, 제가 그와 관련해서 그 이상 덧붙이는 건 사족이 될 것 같습니다. 저도 옛날에 이해가 안 되는 철학책을 꾸역꾸역 읽어가면서 항상 ditto님과 비슷한 고민을 했었던지라 질문자분의 심정에 공감이 되네요.

평이한 텍스트로 연습을 해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인 것 같습니다. ditto님께서 받아들이셨던 교수님의 독해방식은 올바른 독해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아시다시피 레비나스와 같은 철학자들의 글은 문학적인 표현과 전문 철학 용어들이 혼재되어 있고 개념어의 의미를 자세하고 명확하게 밝히기보다 자신이 주장하는 바를 압축적인 문장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논증의 구조가 잘 드러나 있는 글은 아닙니다(다시 말해 읽어내기에 난이도가 높습니다). 때문에 논증 구조가 명시적으로 잘 드러나 있는 글을 골라 요약 및 평가 연습을 해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저 같은 경우 분석철학 텍스트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LeCroissant님께서 말씀하신 Springers, Kluwer, Cambridge 등에서 나온 이차 연구문헌들 또한 대개 논증 구조가 잘 드러나 있는 표준적인 학술적 글쓰기 스타일에 따라 집필되므로, 현재 관심을 갖고 계시는 레비나스에 관한 이차 연구문헌들을 읽으시면서

과 같은 방식으로 잘 독해해나가시면 나중에 레비나스의 원전을 읽어내는 데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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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글을 못쓰다보니 TheNewHegel님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키나 보군요.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킬 줄도 모르고 김영민의 <<공부론>>을 인용한 것은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학계에 표준적인 공부법 속에서 자신을 깎는 것도 공부의 한 목적 중 하나인 도야(陶冶)의 경험일 수 있기에 무조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용한 김영민의 글에

과거, 제자가 스승을 배우는 방식은 반복되는 흉내 속에서 양식을 얻고 마침내 그 양식마저 뚫어 내며 자신의 스타일에 이르는 길이었다. 즉, 동화(同化)-이화(굋化)의 변증법을 금강산을 스쳐 가는 계절처럼 무심히 반복하는 것! 그리고 이른바 염화시중(拈華示衆)의 길은 그 깨침의 극점에서 비밀처럼 보여 주는 교학상장(敎學相長)의 비경인 것이다.

같은 언명(言明)이 있는 것이지요.

모쪼록 찾으시는 빛을 발견하시길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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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스스로에게 부족함이 터무니 없이 많다고 생각하여서 어느 정도의 불안, 의지부족, 위축된 자신감에 쩔쩔매고 있었는데, exaiphnes님의 글이 제게 하나의 응원과 같이 느껴져 감사한 마음이 큽니다. 다만 아직 '학계'라기에는 부끄러운 시기에 있고, 또 다른 이들과의 학적 교류의 경험도 적은지라 제게 부족함이 있는 것은 거의 사실에 가깝습니다. 다만 스타일을 만드는 것에도 후일 어느 정도의 원숙함이 쌓이고나면, 추구하고싶은 바이기도 합니다. 언젠가 스승의 양식을 뚫어내는 그 스타일의 완성!

화답 차원에서 관련되는 문장을 인용하며 감사의 마음을 한껏 담겠습니다. 저는 아감벤이 자신의 방법론적 원칙으로 따르는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의 '발전가능성Entwicklungsfahigkeit' 개념을 정말 좋아합니다.

예술이든 과학이든 사상이든 모든 작품에서 진정 철학적 요소는 루트비히 포이어바흐가 '발전가능성'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원칙을 따를 때 비로소 한 작품의 저자에 속하는 것과 이를 해석하고 발전시키는 자에게 속하는 것 사이의 차이가 본질적으로 되는 만큼이나 파악하기 힘들어진다.
-조르조 아감벤, 『사물의 표시』, 양창렬 옮김, 난장, 2014, p.10

저 또한 제 해석과 발전의 사유가 레비나스와 여하 위대한 사상가/연구자들의 사유와 비교했을 때 차이가 없어보일만큼 열심히 수학하겠습니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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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NewHegel님, 많은 조언과 독려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또한 평이한 텍스트-논증 구조가 잘 드러난 텍스트로 독해 연습을 한다는 것이 가장 도움이 됩니다. 제가 이제야 제 책장을 둘러보니 대개 레비나스, 키에르케고어, 아감벤, 한병철 등의 책으로 뒤덮여있네요. 그나마 로버트 노직과 J.S.밀, 그리고 몇몇 비트겐슈타인 이차 연구문헌이 있어 다행히 지금 당장 그 연습을 시작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것들에 친숙해져야 논증구조가 드러나지 않은 레비나스의 논증을 재구성하고 그 틈새에 있는 key들을 찾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제대로 들었습니다. 반면 지금껏 홀로 해온 훈련들은.. 논증구조의 모호함 속에서 '이해'를 얻어내기 위한 훈련이었지만, 글로 정리해낼 때면 다시 그 모호함을 반복할 뿐이었네요. 많은 선생님들의 세심한 조언 덕에 무엇부터 해나가야할지 감을 잡게 되었습니다. 정말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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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원합니다. 저는 위에서 레비나스를 정리하신 방식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적어도 제가 읽기에는 해당 부분의 핵심을 잘 파악하신 것 같습니다.)

세 가지 잘못에 대해 반성하셨지만, 사실 누구나 고전적인 텍스트를 처음 읽고서 개인의 편의에 따라 내용을 정리할 때는 다소 불분명하고 모호한 부분들이 들어가기 마련입니다. 다만, 글을 쓰는 과정에서 자신이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부분을 자각하고, 그 부분을 더 명료하게 만들기 위해 계속 고민하고, 다시 그 부분에 대해 해설하는 글을 써보면서 내용이 점점 개선되는 거죠.

몇 가지 추가적 의견을 덧붙이면,

(1) 인용해주신 강의 계획서 내용이 참 좋네요. 저는 국내의 대륙철학 전공자분들이 비판적 사고론과 형식논리학의 중요성을 너무 쉽게 무시하거나 간과할 때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정말 기초적인 논증만으로도 간단하게 정리될 수 있는 내용을 불필요한 수사나 장황한 철학사적 지식으로 뱅뱅 돌려서 설명하게 되는 상황도 많죠. 교수님이 강의 계획서에 이야기하신 대로, 텍스트 속에서 숨겨진 전제를 찾아내어 논증의 '타당성'과 '건전성'을 평가하는 독해 방식은 영미철학을 넘어서 대륙철학의 논의들을 읽을 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기초적인 형식논리학 강의를 수강하거나 교재를 공부하는 것이 이런 작업을 위한 밑바탕을 형성하는 데 정말 많은 도움이 됩니다.

(2) 이해가 잘 안 되는 책은 일단 처음부터 끝까지 여러 번 끈질기게 읽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학부생 시절에 제가 정말 존경한 이론사회학 교수님(이분이 쓰신 책에는 지그문트 바우만이 추천사를 달아줄 정도로 그쪽 분야에서 권위가 있으신 교수님이었습니다.)이 자주 하셨던 말씀 중에 '쇠심줄 전법'이라는 게 있었어요. 말 그대로, 어려운 책은 쇠심줄처럼 끈질기게 여러 번 반복해서 읽으면 어느 순간 이해가 된다는 거였죠. 단순무식하게 보이지만, 이 말씀이 정말 맞다고 생각해요. 저도 고전적인 철학 텍스트들은 최소 3번에서 보통 5번 정도 반복해서 읽는데, 정말 전혀 이해 못할 것 같은 책도 3번 이상부터는 어느 정도 내용이 머릿속에 잡히게 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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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님, 언제나 감탄이 절로 나오는 YOUN님의 글들을 읽으며 열심히 '정리하는 글쓰기' 연습을 해보고 있습니다. 제 정리글에 대해서 좋게 평가해주시니 몹시 기쁩니다ㅎㅎ 또한 여러 번 끈질기게 읽는 그 방법은 (얼마 안되는 독서 편력이지만)절감하고 있습니다. 전체성과 무한의 경우도 벌써 3회독째인데, 고작 3개월 전의 메모가 전혀 틀린 독해라는걸 발견하고 깜짝 놀라거나 '이해 안됨'으로 남겨둔 부분이 이해가 되는 경험들을 하며 독서의 즐거움을 한껏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매번 책과의 씨름을 하다보면 제 독서량이 너무 적은 것은 아닌가하고 괜한 걱정이 들때가 있습니다. 물론 정확하게 읽는 것이 제일임을 항상 알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조금 더 많은 책들, 더 많은 이해들을 빠르게 체득하고프다는 생각이 있어서요. YOUN님의 글 뿐만 아니라 서강올빼미의 다른 선생님들의 글을 읽다보면.. 도대체 어떻게 책들을 빨리-정확히 읽고 정리해내시는걸까요...? 만약 1회독 때에는 전반 내용을 스케치하듯 정리하고, n회독차부터 관심가는 부분에 관해 '탐구'해나가는 방식이 도움이 될까요?

딱히 이건 답해주시길 바라고 드리는 질문은 아닙니다. 그러니 답변하시느라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어차피 독서와 관련한 문제의 벽은 노력의 투자만 충분하면 얼마든 꿰뚫어낼 그런 벽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그 벽이 무너지는게 요원해서 그렇지요ㅠ 아무튼 무척 감사드립니다. 선생님의 감사한 답변을 통해 <어떻게 충실한 성공적 독서-정리를 해낼 것인가?>라는 화두를 갖고 성실히 탐구에 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