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원전을 보면서 공부할 필요가 있나요?

처음으로 철학을 공부하려는 바다 속에서 갓 태어난 물고기입니다!
지인의 추천으로 '차라투스트라가 이렇게 말했다.'를 읽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해가 안 됐습니다! 찾아보니 지인이 저를 바다에 던지고 알아서 헤엄치라고 한 꼴이던군요!
끝까지 읽은 김에 좀 더 니체에 대해 알아보자는 생각으로 다음 선악의 저편을 읽을 생각인데. 하핫! 500p 이더군요.
그러니 드는 생각이 굳이 원전을 읽을 필요가 있을까하는 의문이 듭니다. 그냥 다른 작가가 정리해놓은 걸 보는 것이 더 이해하기 편하고 시간이 적게 들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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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자 아닌 이상 안봐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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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전공자는 어떤 의미로써 원전을 찾아보시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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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한 사람들이 틀리게 요약했을 수도 있으니 학문을 하는 전공자들은 원전을 읽는 것이 권장됩니다.
어느 철학자에 대한 학문적인 글을 쓰려면 그 사람이 직접 쓴, 그러니까 원전을 읽는 건 필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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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와 요약에는 언제나 '해석'이 개입하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연구자도 텍스트를 순수하게 객관적인 관점에서 정리하거나 요약할 수는 없죠. 텍스트의 내용 중 어떤 부분을 강조할 것인지, 어떤 부분을 생략할 것인지는 해석자의 판단에 크게 의존합니다. 그래서 똑같은 텍스트를 읽더라도, 서로 다른 사람마다 서로 다른 방식의 (때로는 서로 대립하는 방식의) 입장 차이들이 생겨나는 거죠.

니체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니체를 서양의 마지막 형이상학자로 보는 해석(하이데거-가다머)과 니체를 형이상학 자체를 극복한 포스트모던적 철학자로 보는 해석(데리다)은 서로 대립됩니다. 또한 니체를 사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철학자로 보는 해석(카우프만-네하마스)과 공적이고 사회적인 철학자로 보는 해석(영) 역시 서로 대립됩니다.

이들 중 어느 것이 일방적으로 맞다거나 틀리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각각의 해석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는 연구자들에게 열린 문제이죠. (물론, 그렇다고 아무 해석이나 다 허용되는 것은 아니겠지만요.) 그리고 바로 이런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이 철학 연구 자체를 추동하기 때문에, 연구자들에게는 텍스트를 직접 읽으면서 논쟁사를 비교하고 평가하는 작업이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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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을 읽는다는 것은 그 시대의 천재와 가상의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원전을 읽는다는 것은 우리가 갖고 있는 질문들을 계속 작가에게 묻고, 그 작가가 어떻게 대답할지 계속 예측하는 과정이니깐요. 그래서 원전을 읽고 페이퍼를 쓰게 된다면, 그 시대의 천재와의 대화를 하면서 알아낸 것을 적는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원전을 읽지 않고 다른 작가가 정리해놓는 것만 읽는다면 이 기회를 놓치는 것입니다. 2차자료들은 정리해놓은 사람이 자신이 갖고 있던 질문들을 던지고 알아낸 것들을 적어낸 것이지, @ch618618 님이 갖고 있던 질문들에 대한 답을 적어낸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2차자료들을 위주로 읽게 되면 한 철학자가 어떤 질문들에 어떻게 답을 했는지, 어떤 이론을 갖고 있는지 등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있겠지만, 우리의 철학적 호기심을 풀어줄 기회를 놓치는 것이지요.

또, 조금 더 실용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원전을 읽지 않고 2차자료들을 읽게 된다면, 이 시대의 연구 동향이라던가 존재하는 해석들을 많이 알 수는 있겠지만, 새로운 생각을 해낼 수 없습니다. Rutgers의 Alex Guerrero 분석철학의 맥락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I’ll begin by describing a method that rarely works. First, start with an interest in some topic that has been discussed a lot by philosophers. Second, read everything on that topic, over a long time, keeping kind of neutral notes on the views throughout. Third, try to think of something new to say. Disaster!

Maybe some people can do it that way, but it’s very hard to find your voice and keep your
passion and energy throughout that process. Instead, you learn about the 18 moves that have
been made, the 14 positions in logical space that have been occupied (like tanks running over
flowers), and you can maybe spot another 2 or 3 that haven’t been occupied. You can write a
paper that takes up one of those, but often you aren’t really excited about that position, it’s just kind of left over. And maybe for a reason…

물론 게레로는 분석철학에 대한 말이지만, 철학사에게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철학사를 공부할 때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위주로 읽게 된다면, 이미 논의된 주제에 대해서만 쓸 수 있게 됩니다. 전 위에 Guerrero의 left over이란 말이 참 와닿았었네요. 누구든 생각할 수 있지만 누구든 쓰지 않은 주제를 쓰게 되면 우리는 잔반처리반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철학 전공자, 즉, 새로운 주제에 대해 논문을 쓰고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아야하는 입장에서는 원전을 읽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물론 전 다른 댓글들에 완전히 동의합니다. 하지만 이 부분들이 언급이 안 된 것 같아서 추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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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자들이 원전을 통해 많은것을 이해하는것은 존중합니다. 전공자가 아닌경우 원전을 읽지않아도 철학자들에 대한 좋은 번역본을 읽고 공부한다면 문제가 없는것으로 압니다. 잘 이해할 수 있게 번역된 책이라면 반드시 영어로 읽을 필요가 없을겁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 원전으로 읽는 경우가 더 잘 이해되고 쉬운 경우도 있습니다. 가령 영어로 된 책의 경우잘못 번역된 책이라도 그 내용을 수정하면서 읽을 수 있다면 번역판을 읽어도 상관없을겁니다.

Guerrero의 글을 인용하신 건 잘못하신 거라고 생각됩니다.

Advice for Applying to PhD Programs in Philosophy (guest post) - Daily Nous

Guerrero는 철학 대학원 지원자들에게 '어떻게 해야 좋은 Writing Sample을 쓸 수 있는지'에 대해서 설명하기 위해 인용하신 부분을 썼습니다. Guerrero가 하려던 말은 '원전을 읽어라'가 아니라 '꽤 핫한 토픽을 정한 뒤 그 토픽에 관해 쓰여진 논문과 책들을 다 읽고 나서 글을 쓰지 말고, 흥미가 가는 토픽이 있으면 거기에 관해 일단 써라'입니다.

인용하신 부분 바로 뒷부분을 보면 Guerrero가 하려던 주장이 뭔지 더 명확하게 보일겁니다.

Much better: start with something that is bugging you or disturbing you. Maybe it’s an actual thing in the world that is happening. Maybe it’s an idea that was presented in a class that just seems wrong somehow. Maybe it’s some text or topic that seems philosophically interesting, but which no one is talking about. Maybe it’s just a way of looking at things that comes to you from who knows where, while your mind wanders around (like flowers growing over tanks). Follow those things. Pull them apart, see what’s going on inside. Write about them. Try to sort out what is bothering you. Write about that. Sometimes you’ll figure it out. Other times the problem remains, but you understand it better. Write that up. Don’t read or research all that much yet. Try to present things clearly, even argumentatively, so that someone outside your mind can join you in your disturbance or your intrigue.

그리고 '원전을 읽지 않고 2차 자료들만 읽으면 새로운 생각을 해낼 수 없다'는 주장은 공감하기가 힘드네요. 2차 자료들이라도 비판적으로 보면서 자신만의 생각을 기를 수 있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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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레로가 하려던 말이 '원전을 읽어라'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생각을 먼저 하고 (혹은 글을 먼저 쓰고) 그 다음에 연구논문들을 봐야한다는 걸 철학사에 적용을 한 것 뿐입니다.

헤겔의 경우로 생각을 해봅시다. 헤겔 2차자료를 쓸 때 (특히 연구서), 사람들은 헤겔 철학의 일부분만 써서 자신의 질문에 답을 합니다. 아무리 헤겔에 관한 부분이더라도 자신의 프로젝트와 관련없는 부분들은 쓰지 않겠지요. 즉, 2차자료들을 위주로 읽게 된다면, 그 사람들의 프로젝트와 관련된 헤겔 철학의 부분만 읽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되더라도 그를 뒷받침해줄 문헌적 근거를 찾기 어려워집니다 (그리고 1차자료에 어떤 내용이 있는지를 모르니, 어떤 생각이 좋은 생각이고, 어떤 생각이 나쁜 생각인지 구분하기도 어려워지겠지요.). 그렇다면 자신의 프로젝트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없어지게 된다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새로운 논의를 만들어내지 못할 것이며, 새로운 생각을 해낼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 이런 비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학창 시절 시험을 볼 때, 절대 기출문제만 보지 않습니다. 먼저 이론을 보고, 그 후에 이론에 기반해서 기출문제를 풀게 되지요. 만일 이론을 보지 않고 기출문제를 푼다면, 기출문제에 나와있는 문제들만 풀 수 있게 됩니다. 기출문제에 없는 문제들은 못 풀겠지요. 철학사도 같습니다. 이미 헤겔의 철학으로 특정한 철학적 문제에 답한 경우만 보게 된다면, 새로운 철학적 문제를 헤겔의 철학으로 답하는 능력이 떨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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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게레로에 관하여 답을 드리겠습니다.

선생님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이해하였습니다.
게레로의 주장은 '다른 사람들이 논문을 먼저 보고 글을 쓰려한다면 새로운 생각을 하기 힘들다. 때문에 글을 먼저 쓰고 다른 사람들의 논문을 봐야한다'이다.
게레로의 주장은 철학사에 적용 가능하다.
'2차 자료만 보면 새로운 생각을 하기 힘들다. 때문에 원전을 봐야한다'.

제가 선생님을 제대로 이해한 게 맞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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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원전을 읽지 않고 2차 자료들만 읽으면 새로운 생각을 해낼 수 없다'는 주장은 공감하기가 힘드네요. 2차 자료들이라도 비판적으로 보면서 자신만의 생각을 기를 수 있지 않나요?

이 부분은 제가 선생님의 주장을 (맥락을 보지 않아) 오해하여 쓴 글입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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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맞습니다. 분석철학에서 생각을 하는 것 (혹은 글을 쓰는 것)을 철학사의 맥락으로 바꾼다면, 원전을 읽으면서 해석해나가는 것이라는 전제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원전을 읽으면서 자신만의 해석을 만들어낸 후 (혹은 글을 쓴 후) 2차자료를 봐야한다, 라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분석철학에서 생각을 하는 것 (혹은 글을 쓰는 것)을 철학사의 맥락으로 바꾼다면, 원전을 읽으면서 해석해나가는 것이라는 전제를 하였습니다

이 부분을 확실하게 쓰지 않아 오해가 생긴 것 같군요. 설명을 더 확실히 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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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하게, 저는 전공자도, 학부생도 아닌 일개 고등학생의 입장에서는 원전을 읽는것이 필수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전문적인 지식을 쌓고 어떤 주제에 대해서 심도 깊이 연구하고, 새로운 지식을 발견하려면 원전이 필수라고는 하겠지만.

책을 읽는걸 좋아하는 입장에선 1차 저작물을 읽는 그 행위 자체가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데에 다른 무엇보다 만족스러웠습니다! 어쩌면 원전이 미치도록 지루할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가지 번역, 그리고 원서를 비교하고, 그 과정에서 "저자의 의도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고, 대답하는 그 일련의 과정에서 나의 주관을 확장하고, 성립하는 그 과정 자체가 나 자신의 내적 자아를 쌓는 좋은 기회가 아닐까 합니다.

지식을 쌓는데에 원전을 하나하나 읽어나가는것이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할수도 있겠지만, 한번쯤 원전 한권정도를 정해서 읽어보는 경험은 충분히 좋은 경험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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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 책을 선택해서 읽었기 때문에 혼란스럽고 굳이 원전을 봐야할까 그런 생각이 드셨을 거 같아요. 저도 옛날에 배경지식 없이 그 책을 읽고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야 라고 생각했거든요. 다른 철학책을 고르셨다면 그런 혼란스러운 마음까지는 들지 않으셨을지도요.
제 생각으로는, 전공자가 아니시거나, 혹은 아직 전공 입문자이고 앞으로의 길을 찬찬히 고려 중인 그런 조금 자유로운 신분에 있다면, 원전을 일단 읽어보는 게 더 즐거운 독서를 제공한다고 생각이 들어요. 예전의 저는 다른 이들이 정리해 놓은 내용이나 해석들을 읽는데 사실 관심이 없었어요. 그래서 제가 당시에 읽은 원전들을 표준적 해석에 따라 온전하게 제대로 이해하고 읽었다고 볼 수는 없겠으나, 입문기에는 이런 자유로운 독서가 훨씬 제 지적 흥미를 자극하더라구요. 어떤 철학적 지식을 쌓겠다거나 이 이론을 내것으로 소화하겠다 그런 야심 없이 단지 흥미 본위로 좀 막연히 읽은 감이 있기는 합니다. 배경 지식이 없다보니 내용적 이해는 떠듬떠듬 이지만서도, 그래도 저자의 목소리를 가장 가까이 듣는 그러한 과정 속에서 저는 철학에 더 매력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전공자 신분이다 보니 필수적으로 다른 연구자들의 연구와 해석을 읽어야 되지만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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