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틀비를 위한 나라는 없다-근대적 인간과 <필경사 바틀비>

앞으로 공부하게 될 서강대 영문과 대학원 페이퍼를 시범삼아 미리 작성해보았습니다. 페이퍼를 작성하는 것도 커리큘럼에 있기에, 방학동안 시간이 남아 페이퍼 양식에 맞춰 작성해봅니다.
필경사 바틀비2


<바틀비를 위한 나라는 없다>
-근대적 인간과 필경사 바틀비

<필경사 바틀비>는 근대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의 전형을 보여준다. ‘월가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고 월가의 변호사 사무실이 주된 공간으로 설정된 이 소설에서 문제 삼는 것은 월가의 일상이라기보다 필경과 같은 법률적 업무가 떠받치는 근대자본주의체제와 그 체제 속 인간의 삶의 방식 자체이다. 무엇보다 바틀비의 기이한 행위를 오로지 고용주인 변호사의 시점에서 서술함으로써 이야기 전체에 체제 우호적인 변호사의 관점이 배어들게 한 것이 주효했다. 특히 자유간접화법으로 들려주는 변호사의 내면독백이 압권인데, 덕분에 바틀비로 말미암은 변호사의 곤혹스런 속내가 미세한 결에 이르기까지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또 다른 관점을 제공할 근거인 바틀비의 속내는 짐작조차 하기 힘든데, 그로 말미암아 소설의 언어가 절묘한 유머의 효과를 거두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안하고 싶습니다”라는 구절이 반복될 때마다 심각해지기도 코믹해지기도 부조리해지기도 하는 뉘앙스의 변화는 멜빌의 정교한 언어구사 솜씨를 보여준다.

체제우호적인 변호사가 그의 직원들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방법은 근대자본주의체제의 산물이라는 것을 <감시와 처벌>을 읽음으로서 알 수 있다. 이러한 방식은 푸코가 ‘판옵티콘’이라고 설명한 것에 잘 드러난다. 비록 설계에 따라 판옵티콘이 지어지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지닌 본질적 요소들은 힘의 새로운 형태인 훈육적인 힘에 일정한 특성을 부여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요소들은 학교, 병원, 공장, 감옥, 일터와 같은 근대사회의 수많은 기관들과 장소들의 설계와 건설 속에 나타나 있다. 우리는 스며들어 있으나 익명성을 띠는 감시를 통해 힘이 행사되고 있는 훈육적 사회 속에 살고 있다. 소설 속에서 훈육적 힘은 변호사(화자)에 의해 행해지는 관찰과 감시, 공간과 시간의 분할, 월스트리트와 감옥, 경찰 등의 다양한 형태로 작동하나, 여전히 그 작동원리는 똑같다. 이러한 훈육을 거부하는 개인은 배제되거나 사회에서 축출된다. ‘그렇게 안하고 싶습니다’라고 표현되는, 규율에 대한 바틀비의 거부는 그가 근대사회 속에서 어떻게 처리될지, 그의 최후를 미리 암시하고 있는 듯 하다.

<감시와 처벌>에서 공간에 관한 푸코의 상세한 논의는 역시 그가 공간적인 모형들을 좋아했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된다. 푸코에 있어서 철학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공간적으로 생각하는 것에 다름없었다. 어느 한 대담에서 그는 자신이 “공간에 사로잡혀”있었다고 진술했고, 이 진술은 그가 힘과 지식 사이에 있을 수 있는 관계를 생각하는 방식을 바로 이 공간적 집념을 통하여 찾았다고 밝히는 와중에 나왔다. 어떻게 특정한 힘의 공간적 배분이 그 주체에 관한 보다 상세하고 정확한 지식을 얻을 수 있게 하는가를 근대식 공간은 대단히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개인들의 행실이 지속적으로 관찰될 수 있다면, 그 또한 상세히 평가될 수 있게 된다. 수준들을 측정하는 것, 행태들을 비교하는 것, 수행에 등급을 매기는 것이 가능해진다. 공간을 구성하는 구성원들의 행태들, 욕구들, 목표들, 경험들을 한결 더 정교하고 예민하게 형성시키는 방법들을 고안해내는 데 필요한 새로운 응용성을 제공함으로써 이러한 지식은 힘의 효과를 강화시킨다. 예컨대 규범을 약간 위반한 것조차 제재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이것은 개인 각자들을 기술되고 측정되며 또한 다른 사람들과 비교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교정되고 배제되며 또한 정상화되는 것도 가능해질 수 있는 ‘사례’로 바꾼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바틀비는 하나의 사례였다. 푸코에 따르면, 주체를 영구히 힘으로 장악하는 것을 보장해주는 가시성-소설 속에서 직원들은 고용주에게 계속해서 보여지며, 관찰된다-은 덫이 되고 만다. 가시성(보여짐)은 언제나 힘관계를 유지시킨다. 지식형태들, 힘의 기술들, 그리고 그들 주체들 사이에 있는 근본적인 상호의존성을 논증함으로써 푸코는 근대적 힘의 해부도를 폭로한다.

<감시와 처벌>에 따르면, 규율은 공간에 따른 개인의 분할을 실행한다. 그 목적으로 규율은 몇 가지 기술을 사용한다. 규율은 종종 폐쇄성, 즉 다른 모든 사람에게는 이질적이면서, 자체적으로 닫혀 있는 장소의 특정화를 요구한다. 그것은 천편일률적으로 규율에 의해서 보호되는 장소이다. 그래서 작품의 화자가 일하는 월스트리트는 폐쇄적인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곳은 변호사와 법과 관련된 일, 자본과 금융에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머무는 장소로 확정되고, 그 밖의 사람들은 이 장소 바깥으로 배제된다. 한때 네덜란드인들이 식민지 지배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쌓은 벽(wall)은 월스트리트와 월스트리트가 아닌 곳으로 공간을 나누므로, 주거공간과 업무공간을 분리하는 상징적인 역할 또한 수행한다. 그러므로 “일요일이면 페트라처럼 인적이 끊기고 매일 밤이면 텅 비어버”리는 이 공간은 푸코가 말한 근대성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이 공간에서는 방랑자들과 빈민의 대대적인 ‘감금’이 이루어지며, 갈 곳을 잃은 바틀비 또한 결국에는 감옥에 갇히게 된다. 과거에는 업무공간과 주거공간이 이처럼 분리된 형태로 나타나지 않고 양자가 혼재된 형태로 나타났으며 방랑자나 빈민들을 도시 밖 감옥으로 축출하는 시도도 나타나지 않았었다. 일하는 공간은 업무 외에 다른 것이 허용되지 않으므로, 바틀비가 사무실에서 주거를 해결할 때 화자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할뿐더러 매우 불쾌해 한다.

그러나 규율이 작동하는 원칙인 이러한 폐쇄성 외에도, 규율은 훨씬 더 유연하고 섬세한 방식으로 공간을 재구성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기본적인 위치결정의 원칙이나 분할방식의 원칙에 따라 이루어진다. 개인마다 정해진 자리가 있고, 또한 지역마다 할당되는 개인이 있다. 집단 단위의 구분을 피하고, 집단적 배치를 분해하며, 혼잡하고 밀집해 있거나 파악하기 어려운 다수를 해부하도록 한다. 규율의 공간은 분리시켜야 할 신체나 그러한 요소들과 같은 정도의 작은 단위로 분할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주인공 화자가 사용하는 사무실도 필경사들을 위한 공간과 고용주인 화자 자신이 사용하는 공간으로 나뉜다. “반투명 유리 접문이 내 사무실 공간을 두 부분으로 나누고 있었는데, 하나는 필경사들이 차지하고 다른 하나는 내가 차지하고 있었다.” 고용주인 화자는 모든 필경사들을 관찰하기에 용이한 가장 안쪽에 자신의 공간을 설정한다. 또한 필경사 각자는 스스로의 공간을 부여받는다.

바틀비의 공간이 화자 옆에 자리 잡은 것도 주목할 만하다. 화자는 “바틀비를 접문 옆의 한구석에 배치하되 (자신의) 공간 쪽에 두기로 했다. 자질구레한 문제를 처리해야 할 경우를 대비하여 이 조용한 사람을 (자신이) 부르기 쉬운 곳에 두기 위해서였다. 만족스러운 배치를 위하여 나는 바틀비 쪽에서 내 목소리는 들을 수 있되 그를 내 시야에서 완전히 격리할 수 있는 높다란 접이식 녹색 칸막이를 구입했다.”

이는 분명하지 않은 분리 때문에 생기는 나쁜 결과라거나, 개인들이 통제되지 않고 실종되는 일, 산만한 왕래와 무익하고 위험한 동맹의 가능성을 모두 없애기 위함이다. 실제로 장소에 관한 권력을 가진 화자는 모든 필경사들을 주시하며, 자신의 직원에게서 산만함의 징후가 보일 때, 그것을 문제로 파악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적절한 권고를 하거나 조정을 가하려고 시도한다. “바틀비를 칸막이로 가리되 편리하게 내 곁에 둔 한가지 목적은 이런 사소한 경우에 그의 써비스를 받고자 함이었다.”라고 화자는 말하는데, 일의 효율과 관련된 이러한 감시는, 푸코에 따르면, 도주와 방랑과 집단의 행동을 방지하기 위한 전술에서 기원하였다. 중요한 것은 개개인의 출결사항을 명백히 하고 개인의 소재를 파악하는 일이며, 유익한 연락체계를 확립하고 일반 사람들과 차단시켜서 감시하고, 평가하고 제재하며, 그 자질과 공적을 측정하는 일이다. 따라서 알고, 통제하고, 활용하기 위한 절차가 중요하다. 규율은 분해를 위한 공간을 조직하는 일이다.

따라서 알고, 통제하고, 활용하기 위해 고용인들의 특징과 장단점이 열거된 일련의 일람표가 등장한다. 직원들을 배치하고, 서로 격리시키고, 일하는 공간을 신중히 분할하고, 업무의 체계적인 분류를 행하는 일의 일종인 것이다. <필경사 바틀비>의 서두에 등장하는 필경사들의 소개는 업무의 효율성의 관점에서 쓰인 일종의 일람표이다. 다른 상황에서는 주목받지 않았을 필경사들의 특징이나 자질-얼굴이 붉게 변하는 것과 동시에 산만해진다거나, 오전에는 산만하지 않으나 오후에는 산만해진다거나, 잉크를 많이 흘리게 되며 얼마나 얌전하고 정중한지-들이 소설의 서두에서 관찰되어 열거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필경사들이 근대적인 공간이 아닌 다른 환경에 처해있다면 그들의 성격적인 특징이나 다른 이야기들이 더욱 부각되어 서술될 것이다. 또한 화자는 자신의 공간 옆에 바틀비를 위치시키고 그를 끊임 없이 관찰-감시한다. “그간 내가 바틀비에게서 눈여겨본 그 모든 눈에 띄지 않는 수수께끼를 이제 떠올려보았다. 그는 대답할 때 말고는 절대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 때때로 혼자만의 시간이 상당히 있는데도 독서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는 것, 오랜 시간 동안 칸막이 뒤쪽의 어슴푸레한 창가에 서서 막다른 벽돌벽을 내다보곤 했다는 것을 기억했다.”

결국 이렇게 되면, 일하는 공간은, 주의를 기울여 분류하는 고용주의 시선에 놓인, 여러 항목이 들어있는 일람표와 같은 모양이 될 것이다. 즉 어느 일터에서나 모든 일에 대하여 직원들은 좌석을 지정받아야 하는데, 이것은 같은 일을 하는 모든 직원이 언제나 같은 장소의 일정한 자리에 앉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필경사들은 자신이 작성한 서류의 검토를 맡을 때 특정한 공간에 모여서 그 장소에서만 진행한다. 그 공간은 검토 업무를 하지 않는 바틀비의 공간과 분리되어 있고, 화자는 바틀비에게 자신이 있는 쪽으로 “나와서 자신의 의무를 다” 할 것을 명령한다. 모든 직원들은 자신의 일정한 좌석을 갖게 되며, 고용주의 명령과 동의가 없는 한 자기의 자리를 떠나거나 바꾸어서는 안 된다. 이는 다음과 같은 화자의 말로 반복된다.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이것, 즉 그가 항상 거기에 있다는 것, 아침에 가장 먼저 와 있고 하루 종일 자리를 지키며 밤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다는 것이었다.” 작중에서 니퍼즈가 바틀비에게 시비를 걸며 문제를 키우려 할 때 고용주는 “자넨 제발 물러나게”라고 말하며 스스로의 자리로 돌아갈 것을 명령하는데, 이는 고용인 전체를 통제하고 관리하는 미세하고 고도화된 권력의 기술이다. 푸코에 따르면, 이러한 공간의 구획은 근대적인 학교의 탄생과 그 기원을 같이 한다. “부모가 무관심하여 이가 들끓는 학생들은 청결하고 이가 없는 학생들과 떨어져 있도록 하고, 경박하고 경솔한 학생들은 얌전하고 착실한 두 명의 학생 사이에 끼어 앉도록 하며, 신앙이 없는 학생은 혼자 있게 하거나 신앙심이 깊은 두 학생 사이에 앉도록 해야 할 것이다.”경솔하고 경박한 학생에 대한 교사의 관심은 터키와 니퍼즈의 산만함에 주의를 기울이는 화자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지금까지 공간의 분할을 살펴보았다면, 이제는 시간에 따라 활동을 통제하는 것을 살펴보고자 한다. 푸코에 따르면 시간표는 오래 전부터 있었지만 정교하고 미세한 단위까지 시간을 분할하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서 임금제도의 점차적 확산으로 시간에 대한 보다 정밀한 분할이 이루어진다. 에를 들면, “노동자가 종이 울리고 나서 15분 이상 지각하는 일이 일어날 경우...”라든가, “작업 시간 중 5분 이상 면회를 하는 직공...”이라든가, “정해진 시간에 작업장에 나오지 않는 자...”와 같은 식으로 말이다. 화자의 관점에서, 필경사들이 산만해지는 시점이 정오 이후와 정오 이전으로 구분되는 것도 이와 같은 시간의 분할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고용하는 시간의 질을 높이려는 경향도 있다. 즉, 끊임없는 통제, 감시자에 의한 압력, 작업을 방해하거나 산만하게 하는 모든 요소의 제거가 그렇다. 시간을 완전히 유익하게 구성하는 일이 중요해지는 것이다. 즉, 작업 중에 몸짓으로건 혹은 다른 방식으로건 동료 직공을 웃기거나, 어떤 장난 이건 놀이를 하고, 먹거나 자거나, 이야기나 농담을 하는 것도 엄금한다. 식사시간이 정해져서 직원들은 이 시간 외에는 식사를 할 수 없다. 더욱이 업무를 방해받지 않는 선에서, 식사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진저넛’을 통해 빵 또는 사과를 배달받아 먹는다. 더구나 작업이 중단되는 식사시간에도 “직공들에게 일에 대한 관심을 잊어버리게 하는 황당한 이야기나 연애담, 그 밖의 화제에 관해서 어떤 말도 하지 않아야 한다.” 또한 “공장 안에 술을 가지고 들어가 작업장에서 마시는 것은 모든 직공에게 어떤 이유로든 엄금한다.” 측정되어서 임금이 지불되는 시간은 또한 불순함도 결함도 없는 시간이고, 계속 신체가 자신의 활동에만 주의를 집중하도록 한 양질의 시간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화자는 정오 이후로 계속해서 산만해지는 터키에게 오후에는 나오지 말 것을 권고한다. 정확성과 집중은 정규적이라는 것과 더불어 규율 시간의 기본적 덕목을 이룬다. 그래서 화자는 며칠 동안이고 집중해서 필사에 몰두하는 바틀비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면서 햇빛으로 밤에는 촛불을 켜고 필사를 했다. 만약 그가 즐겁게 일하기만 했다면 나는 그의 근면을 상당히 기뻐했을 것이다.”라든지 “(바틀비)의 착실함, 전혀 방탕하지 않은 점, 부단한 근면성, 깊은 고요함, 어떤 정황에서도 한결같은 태도 등으로 인해 그를 고용한 것은 사무실에 소중한 이득이었다.”라고 말하는 대목이 특히 그러하다.

“그렇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정식화되는 규율에 대한 바틀비의 거부는 그가 근대 시스템에서 어떻게 처리되어야 할지 미리 예상하게 만든다. 규율에 대한 바틀비의 거부는 계속해서 이어지고, 바틀비는 끝끝내 건물에서 떠나지 않는다. 변호사는 사무실을 옮기지만, 갈 데가 없어진 바틀비는 건물 “층계참의 난간”에 주거한다. 결국 건물주인은 “경찰에 사람을 보내어 바틀비를 부랑자로 툼즈 구치소에 잡아가게 했다”는 것을 화자에게 통지한다.

우리는 바틀비의 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근대 이전에 바틀비의 행위(행위를 하지 않는 행위, 규율에 대한 거부)는 처벌의 대상이 아니었다. 또한 범법자가 처벌을 받는 이유는 (사회계약론에 근거해) 그것이 사회 질서에 혼란을 야기한다는 이유보다는 법을 만든 왕의 권한을 침해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근대 이전에 처벌의 대상이 되는 죄는 주로 국왕살해죄, 반역죄와 같은 왕권을 침해하는 행위에 한정되었다. 그러나 과거의 권력은 사회(정치적 요인, 경제적 요인)가 변화하면서 다른 것에 좀 더 주안점을 두게 된다. 변화된 정치적 상황은 더 이상 왕권이 권력의 중심에 있지 않고 부르주아가 사회의 새로운 핵심세력으로 대두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변화된 경제적 상황은 부의 증가와 인구의 급증에 따라 주요한 위법행위가 재산에 관한 것으로 변화했음을 의미했다. “부르주아지의 소유권은 절대적인 소유권으로 되어버렸다. 즉 농민층이 획득하거나 보유해 왔던 모든 묵인사항(과거에 부과되었던 강제적 의무의 불이행이나 변칙적인 관행의 기정사실화, 예를 들면 공동 방목권, 고사목 채취 등)은 바야흐로 새로운 지주들에 의해 무조건 범법행위로 규정되어 버렸다. 극빈자들의 생계를 보장해 줄 수 있었던 여러 권리에 대한 위법행위는 소유권의 새로운 위상과 더불어 재산에 관한 위법행위로 바뀌는 경향을 보인다. 그리하여 그 위법행위를 처벌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과거라면, 갈 곳 없는 바틀비가 층계 난간에서 거주하는 것은 위법행위가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근대 사회에 접어들면서 바틀비의 행위는 소유권에 대한 위법행위로서 용인되지 못하고, 이는 질서에 혼란을 야기하고, 규율에 대해서 거부한다는 그 이유만으로 처벌의 대상이 된다.

“그러한 범법행위들이 바르게 규정되고 확실하게 처벌되어야 하며, 일관성 없이 형평을 잃은 처사로 묵인되고 인정되던 대량의 규칙 위반 행위 중 어떤 것이 허용할 수 없는 범죄인가를 결정하여, 그것에 대해서는 반드시 징벌을 부과해야 한다. 자본의 축적과 생산관계와 소유권의 법적 지위가 새로운 형태로 부각되면서 이제까지는 조용하고 일상적이며, 묵인된 형태로 혹은 폭력적인 형태로, 권리를 침해한 위법행위에 속해 있던 민중들의 모든 실제 행동은 어쩔 수 없이 재산에 관한 위법행위로 방향 전환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방랑자들이야말로 도둑과 살인자를 만드는 근원으로서 사회의 구성원이 아니면서 사회 속에서 생활하고, 모든 시민에 대해서 명실상부한 전쟁을 벌이는 자들이며, 시민 사회의 성립 이전부터 있었다고 상정되는 그러한 상태로 우리들 틈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에 대해 르 트론느는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치안이 강화되고, 그들의 약탈로 피해를 입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기마헌병대가 그들을 수색하기를 원했다. 또한 그는 이 쓸모 없고 위험한 사람들이 국가에 흡수되어서 마치 주인에 대한 노예의 관계처럼 국가에 예속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음과 같은 화자의 독백은 이에 대응한다. “사무실을 바꾸는거야.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고, 만약 새 사무실에서 녀석을 발견하면 그때는 통상적인 불법침입자로 고소하겠다는 뜻을 정식으로 통고하는 거야.”

따라서 근대 이후로 정치체제와 경제체제가 바뀌면서 이전에는 묵인되었던 위법사항들도 제재와 처벌의 대상이 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재산에 관한 위법행위들은 이전까지는 묵인되어 왔으나 부르주아지의 소유권 보호의 필요에 따라 단속되기 시작하였다. 부르주아들의 개혁은 군주의 초권력에 대항하는 것인 동시에 위법행위를 일삼는 하층민에게 대항하는 것이었다.

먼저 바틀비의 죄에 주목했다면, 그 다음은 처벌방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틀비는 감옥에 갇히는 방식으로 처벌되는데, 이전에는 없었던 방식이다. 푸코에 따르면, 과거에는 범죄자의 신체에 직접적이고 어마어마한 폭력이 가해졌다. 팔 다리를 자르고 찢고 불태우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서면서, 형벌 집행은 조심스러워졌다. 수형자의 신체에 손을 대지 않게 되었다. 손을 대는 경우에는 최소한으로 해야 한다. 신체 자체가 아닌 어떤 요소를 대상으로 삼을 것. 물론 금고, 징역, 유형수 징역, 유배, 거주제한, 유형 등도 신체에 제재를 가하는 형벌이기는 하지만, 신체 자체에 직접적인 폭력을 가하는 방식의 형벌은 아니다. 이러한 형벌에서, 즉 근대적 제도에서 신체는 도구 또는 매개체와 같은 것이 된다. 즉, 신체를 감금한다든지, 혹은 노동을 시킨다든지 해서 신체에 제재를 가하기는 하지만, 그 목적은 개인으로부터 권리이면서 동시에 재산으로 생각되는 자유를 박탈하기 위한 것이다. 육체 자체의 고통, 신체 자체의 괴로움을 목적으로 했던 전근대의 형벌과는 구별되는 점이다. 이를 푸코는 ‘감각의 고통을 다루는 기술의 단계’에서 ‘권리 행사를 정지시키는 경제의 단계’로 이행한 것이라고 말한다. 어쨌든 근대의 형벌은 ‘신체를 직접 다루지 않는’ 형벌제도와 직결되어 있는 것이다.

결국 19세기 초에는 신체형의 거창한 구경거리는 자취를 감추게 된다. 사람들은 신체에 고통을 주는 것을 피하고, 고통을 가하는 극적인 연출을 징벌에서 제외시켰다. 형벌의 간소화 시대에 들어선 셈이다. 물론, ‘기술적 방법’으로서의 신체형에 중심을 두는 것을 지양하고, 재산 또는 권리의 박탈을 주요 목표로 삼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신체에 가해지는 고통이 필연적으로 수반될 수 밖에 없기는 했다. 식사의 제한, 성적 교섭의 금지, 구타, 독방 등의 신체 자체에 관여하는 어떤 종류의 보충적인 형벌을 반드시 수반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은 감금의 ‘의도적인 결과’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필연적인 결과로 보여진다. 완전히 비신체적인 징벌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에서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벌의 강도가 감소 된 것?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보다 더 확실한 것은 목표가 변경되었다는 것이다. 가장 가혹한 형태의 형벌제도라 하더라도 그 대상이 이미 신체가 아닌 경우 형벌제도는 무엇에 대하여 힘을 행사하는가? 바로 정신이다. 신체에 극심한 고통을 가하는 처벌의 뒤를 잇게 된 것은 마음, 사고, 의지, 성향 등에 대해서 깊숙이 작용해야 할 징벌이다. 이러한 원칙을 결정적으로 정식화한 사람은 마블리인데, 그는 “징벌은 신체보다는 정신에 가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마블리의 원칙은 단순히 경건한 소망으로 머물지 않았다. 근대의 형벌제도가 계속되는 동안 마블리의 원칙은 형벌의 양상을 결정지었다. 체제우호적인 변호사의 다음과 같은 말은 마블리의 말과 놀랍게도 유사하다. “그날 아침 목격한 것으로 말미암아 나는 그 필경사가 선천적인 불치병의 희생자라는 것을 납득하게 되었다. 내가 그의 육신에 자선을 베풀 수는 있다. 그러나 그를 아프게 하는 것은 그의 육신이 아니다. 아픔을 겪는 것은 그의 영혼인데, 그 영혼에는 내 손이 미치지 않는다.” 영혼 또는 정신을 교정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 이것이 근대적 형벌제도가 목표로 삼는 것이다.

그리하여, 수감자들의 경우에 있어서 훈육적 힘이 추구하는 목적은 그들이 갖는 이익들 혹은 욕구들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정상적인 사람들로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훈육적 힘은 전근대적 힘이 사형수의 몸을 조각나게 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외부적인 폭력에 몸을 내던지지는 않는다. 강압적인 힘을 내재화하며 수감자는 자기 자신의 감시자가 된다. 변호사는 바틀비를 감옥에서 만나는데, “그가 높은 벽을 향해 얼굴을 돌린 채 더 없이 조용한 안뜰에 홀로 서 있는 동안 감옥 창문의 가느다란 틈새를 통해 사방에서 살인자와 도둑들의 눈길이 바틀비를 뚫어지게 지켜보는 광경을 보는 것과 같”은 시선이 수감자에게 내재화되는 것이다. 비록 과거에도 몸은 힘과 사회적 질서에 밀착되게 묶여 있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푸코는 이러한 관점으로 본 훈육적 힘은 근본적으로 새롭고 근대적인 현상이라고 설명한다. 신체적 강압을 자행하던 옛 방식과는 다르게 이것은 범죄자의 몸을 조각내지는 않으나 더 깊고 세부적인 방식으로 몸을 정형화한다. 범죄자는 힘이 추구하는 목적을 완전히 받아들이게 되며, 그것은 그 또는 그녀 자신이 취할 목표와 행태를 위한 규범이 된다. 푸코는 이것을 시적으로 공식화하면서, 위에서 언급한 수감자의 정신은 사실상 자신의 몸이 정복되어 나타나는 복종의 효과라고 기술하였다.

결국 근대적인 형태의 어떠한 규율 내지는 훈육적 힘도 거부하는 바틀비를 위한 공간은 그 어디에도 없다. 결국에 바틀비는 감옥에서 죽음을 맞는 것으로 그 최후를 장식한다. 결국 바틀비가 어ᄄᅠᆫ 사람인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비평적 논의가 있을 수 있겠으나, 위의 독법에 따라 근대 시스템을 지탱하는 일을 거절하는 새로운 존재라고 해석할 수 있다. 우리는 바틀비를 통해 포스트모던한 새로운 인간의 징조를 읽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멜빌은 바틀비라는 인물의 근본적인 지향을 최소한으로 일러주면서 그의 구체적인 성격이나 기이한 행동의 동기를 수수께끼로 남겨두었기 떄문에 독자는 바틀비가 근대자본주의체제에 타협하고 살아가는 변호사와 완전히 다른 종류의 인간임을 짐작할 수 있지만 그 나머지는 스스로 재구성해야 할 처지에 놓인다. 변호사의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는 이야기를 가려들으면서 우리가 사는 근대 시스템 속에서 바틀비는 어떤 존재인지 그의 삶의 방식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스스로 사유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3개의 좋아요

푸코의 철학으로 <필경사 바틀비>에 반영된 근대적 훈육 방식을 분석한 글이네요. 재미있습니다!

(1)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라는 바틀비의 거부에 대해서 고민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작업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가령, 지젝은 이 거부야 말로 라캉적 '실재(the real)'를 향한 욕망을 보여준다고 평가하더라고요.

(2) 절 구분이 추가되면 더 읽기 편할 것 같네요. 글의 내용이 '공간에 대한 분할', '시간에 대한 분할', '근대적 처벌방식'으로 나누어질 수 있을 것으로 보여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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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한 글이나마,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1) 공부를 하다보니,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는 굉장히 많은 철학자들-들뢰즈나 아감벤-이 언급한 단편소설이라는 것을 알게되었는데, 지젝도 언급했군요. 윤님은 정말 아는게 많으신 것 같습니다. 지젝이 그렇게 언급한 맥락을 저도 좀 알 수 있을까요?

(2)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나중에 어디에 제출해서 낼 일이 있으면 그렇게 수정해서 내야겠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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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네, 「필경사 바틀비」는 대륙철학자들이 정말 많이 인용하는 소설이죠. 지젝이 아마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이나 「폭력이란 무엇인가」에서 저 책을 언급했던 걸로 기억해요. 바틀비는 거부 자체를 위한 거부를 하는 인물인데, 그게 우리의 욕망이 상징계의 공백을 지향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얘기였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어떠한 제도와 질서와 대상에도 궁극적으로 만족하지는 못하고, 끊임없이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는 방식으로 (소위 '대상 a'라고 일컬어지는) 균열 자체를 욕망할 수밖에 없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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