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정의와 순환논증

일반적으로 물체를 생물과 무생물로 나누고, 생물 안에는 식물과 동물이 포함됩니다. 동물에는 미생물, 곤충이 모두 포함됩니다.
이 때에 생물을 생물로 존재하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데, 제 결론은 생에의 의지를 가진 존재가 생물이라는 것입니다.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야말로 살아있다는 것이라는.. 내용이 되는데요, 빙글빙글 도는 것 같습니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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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 같은 경우는 의지를 갖고 있거나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에 말씀하신 생명은 적합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음과 비슷한 생각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One advantage of characterizing life in terms of the minimal organization or pattern of autopoiesis is that we can list clear criteria for determining whether anything satisfies that organization:

  1. Semipermeable Boundary: Check whether the system is defined by a
    semipermeable boundary made up of molecular components.
    Does the boundary enable you to discriminate between the inside and outside of the system in relation to its relevant components? If yes, proceed to 2.
  2. Reaction Network: Check whether the components are being produced by a network of reactions that take place within the
    boundary. If yes, proceed to 3.
  3. Interdependency: Check whether 1 and 2 are interdependent: are
    the boundary componen ts being produced by the in ternal network of reactions, and is that network regenerated by conditions
    due to the boundary itself? If yes, the system is autopoietic (Thompson - Mind in Life, 103).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자신을 주변 환경으로부터 구분짓는 껍질 (인간에게는 피부와 같은 것이겠죠) 을 자신이 직접 생산하면 생명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신진대사를 거치는 것, 예를 들어, 음식을 먹고 피부를 생성한다거나 하는 것들이 생명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앞서 말씀하신 정의를 살짝 바꾼다면,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살아있다는 것

보다는

자신을 주변으로부터 구분짓게 해주는 것을 생산하는 것

이라고 보면 톰슨이 말한 생명의 개념과 비슷하게 가실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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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일반적으로 생물로 구분짓지 않는 바이러스 또한 껍질(capsid) 를 지니므로 생물로 볼 수 있을까요?

이반 톰슨은 바이러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Viruses are often described as living, but they do not satisfy the autopoietic criteria. A virus is a bounded structure with a protein coat, thereby satisfying the first criterion. But
the second (and hence the third) is not satisfied because the molecular components of a virus (nucleic acids) are not generated inside the virus, but outside in the host cell. A virus has no metabolism of its own and thus is not self- maintaining in the autopoietic sense. Outside of a host cell, in the environment, a virus can persist, but it does not exchange matter with its environment in a continual self-producing way (pdf를 보는 중인데 페이지 넘버가 안 나와있네요).

제가 모르는 생물학적 디테일들이 많이 포함돼있는 것 같아 더 말해서 좋을 것 같진 않습니다. 그래도 @rmshdmf 님의 질문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네요.

추가로 Table 5.1에서 다음과 같은 표를 만들어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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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작용을 본문에서 언급한것으로 보아 톰슨의 기준과 해당 교수님의 기준과 거의 같은 내용으로 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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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네요.

생명의 기원을 논하기 전에 우선 생명이 무엇인지 정의하는 일이 필요하다. 생명체로 정의되려면 첫째, 외부 환경과 자신을 구분할 수 있는 경계를 명확히 가지고 있어야 하고 둘째, 현재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자기 복제가 가능해야 하며, 셋째 대사 과정이 일어나야 한다.

저 교수님의 논문에서는 자기복제란 기준이 추가됐고, 대사 과정으로 인해 경계가 생성돼야한다는 기준이 빠졌지만, 얼추 개념은 비슷해보입니다. 이반 톰슨이 저 책을 쓸 당시 (2007년) 동대학교 (토론토 대학교) 생물학과랑 많이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그래서 생물학 학계랑 어느 정도 연결 고리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 새롭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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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저는 이와 같은 "정의" 문제가 무의미하다 여기는 편입니다. 생명(life)가 애당초 엄밀히 정의된 단어가 아니고, 그저 우리의 직관적/역사적 사용 + 그 위에 켜켜이 덧붙여진 과학적 재해석에 불과하다면, 이 단어 자체를 해체해버리는 것이 낫지 않나, 라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생명이 문제가 되는 영역이라면, 생명체의 고통 뭐 이런 응용윤리적 분야일 가능성이 높은데, 애당초 이 영역에서 생명에 미생물이 들어간다 해도, 미생물의 고통, 미생물의 죽음...뭐 이런 것에 대해 윤리적 문제를 직관적으로 느끼거나/문제라 호소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의문이네요.)

(2)

그래서 정확한 논의를 위해서는 "생명에 대한 정의"에서 시작하는 탑 다운 방식보다는, 일종의 스펙트럼처럼, 비생물에서 생물까지의 넓은 범위에 속하는 여러 구체적인 사례들에 대한 다운 - 탑 방식으로 문제를 논의하는 것이 더 생산성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프리온, 바이러스, 나아가 미토콘드리아/DNA 같은 생명체의 구성 요소 등등. 이런 비생물 - 생물 경계에 있다고 여겨지는 여러 작은 하위 단위들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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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Mandala 님처럼 정의 문제에 회의적이었었고, 지금도 어느 정도는 회의적인 편입니다 (하지만 서서히 덜 회의적인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이반 톰슨의 책을 끝까지 읽어보진 않아 (엄청 깁니다. 500쪽이 넘었던 걸로 기억해요...) 제대로 말은 못하겠지만, 생각 (mind)의 형성에 있어서 이런 생명이 필요하다, 이런 맥락으로써 생명을 논했던 걸로 기억해요. 그래서 생각의 형성에 있어서 필요조건이 뭔지, 어떻게 생겨나는지 엄밀히 따지려면 필요조건을 엄밀히 따져야겠지요 (물론 이 필요조건에 "생명"이란 단어가 적합한지는 별개의 문제긴 하겠습니다).

(2)

여기에 쓰신 건 헤겔 공부하는 사람으로써 굉장히 흥미롭네요. 헤겔에게 생명이란 하나의 생각방식이자 존재방식이거든요. 그래서 어떤 것은 생명으로써 존재하고 생각되는것이지요. 그리고 헤겔은 생명을 변증법으로써 유도해내는데, 그 유도과정이 말하신 것처럼 탑 다운 방식인지 다운 탑 방식인지 논란이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생명이란 개념 자체가 완전히 선험적으로 유도된 것인지, 아니면 헤겔이 경험적 근거에 기반하여 유도해낸 개념을 수정해나가는 것인지, 등등 말이죠. 그래서 헤겔이 @Mandala 님과 같은 생각을 했다면 <대논리학>은 순수 선험적인 프로젝트가 아닌, 어느 정도의 다운-탑 혹은 경험적인 요소가 포함돼있는 프로젝트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네요.

좋은 코멘트 감사합니다. 여기는 밤인데, 자기 전에 좋은 생각할 거리 주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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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hk9297 @Mandala
제 글에 답글이 달리는 것들을 보면서 저 또한 사고를 확장시키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저 또한 연역적으로 생각을 해보니 차츰 '생명'이라는 것의 정의가 해체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의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의지라는 것의 개념이 차츰 모호해지고, 무엇인가 작용한다는 것만이 확실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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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과 생물학을 공부하시는 분들은 황당하게 여기실 것 같기도 한데, 요즘 기후 위기 철학에서는 제임스 러브록의 가이아 이론을 재발굴 해서 많이들 읽지요? 지구 시스템의 항상성 유지에 대한 논의를 하면서, 그렇다면 이 가이아라고 이름 붙여진 지구 전체를 생명으로 볼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이야기를 던지죠. 하드 사이언스를 하는 쪽에서는 이 주장이 일종의 사이비처럼 취급되어 와서 오랫동안 받아 들여지지 않았던 것 같던데, 최근에는 Earth system theory 라고 자연과학 내에서도 좀 정제된 형태로 제대로 연구된다는 풍문을 들었어요. 저는 이 지구 전체를 생명으로 파악하려는 시도를 보면서, 생명의 정의라는 게 이런 관점에서 생각될 수 있구나 해서 흥미롭더라구요. 글쓴이께서 생명의 정의의 어려움에 대해 논하시니 문득 이쪽으로도 생각이 뻗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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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언급한 이반 톰슨 역시도 지구를 생명인지에 대해서 논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제 기억에는 지구도 생명이라고 결론지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오래 전에 읽은 책이라 확언하진 못하겠네요). 기후 위기 철학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지 몰랐는데, 새로운 걸 알게 됐네요. 흥미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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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 당시 기후 변화의 철학 세미나에서 그때 같이 논의된 텍스트들이 제임스 러브록의 가이아 이론, 그리고 더불어 sympoiesis와 autopoiesis에 대한 논의였어요. autopoiesis를 이야기한 나사의 과학자 분이 칼 세이건의 와이프인데, 이름이 린 마굴리스 였던 듯해요. 린 마굴리스가 이 autopoiesis 개념을 논의했고, 이에 대해서 나중에 도나 헤러웨이가 쓰기를, 린 마굴리스가 말하는 게 사실 정확히 해석해보면 sympoiesis라고 해석을 하더라구요. 디페시 차크라바티도 기후 위기 시대에 기존의 위계적 인간/자연의 도식의 한계를 넘어설 탈인간중심적 인류학 내지 세계관을 구상할 필요성에 대해 논의하는 가운데, 러브록의 가이아 이론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earth system theory를 중요하게 인지하고 있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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