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한 질문 한번 드려봅니다

능동적이면서 수동적인 행위가 있을 수가 있을까요?

수동없는 능동은 없고¹,
수동적이며 능동적인 행위는 없다고 여기기에(주제의 의문)²,수동이 묻은 능동은 수동이 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³
그러니 능동적인 행위는 애초부터 존재하지않고 수동적인 행위밖에 없는 것이죠⁴

1=능동적이려면 기본적으로 생물로 태어나야하는데 낳아지는건 반드시 수동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수동이 능동을 낳는다고 생각되어집니다

불편한 점이 보이시면 마음껏 말씀해주세요

1개의 좋아요

능동적인 것과 수동적인 것의 정의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렸겠습니다만, 헤겔의 자기 규정이 능동적이면서 수동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헤겔의 생명이 자기규정의 대표적인 예시인데, 자신의 존재에 의해 새로운 자신이 형성된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 도토리라는 것은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순수히 도토리의 존재에 의해서 나무가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만일 도토리의 존재가 나무의 형성의 기반이라면, 도토리는 능동적이었습니다. 반면 나무는 도토리의 존재에 의해 형성된 존재지요. 그렇기 때문에 나무의 형성에서 나무는 수동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도토리와 나무는 하나의 생명체를 구성하고 있죠. 그렇기 때문에 그 생명체는 능동적이고 수동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개의 좋아요

능동과 수동의 정의는 국어사전에 나오는 그대로입니다

능동: 다른 것에 이끌리지 아니하고 스스로 일으키거나 움직이는. 또는 그런 것.

수동:자발성이 없이 남의 힘을 받아 움직이는 (것).
입니다

제가 궁금한 것은 단 한가지 사건이 능동적이며 수동적인게 가능한가 싶었습니다 말씀하신 예에서는

그 생명체의 과거의 모습(도토리)과 현재의 모습(나무),두가지 사건을 가지고 판단하고 있는 것같습니다

또한,도토리가 나무를 만드는 것도 수동적이라고 볼 수있는게 아닌지요? 그야 나무를 만드는 것은 도토리의 선택이 아닌 타고난 운명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두 가지 사건은 아닌 것 같습니다. 도토리가 나무가 되가는 과정은 하나의 사건이죠. 다만 그 사건의 수동적인 면과 능동적인 면이 포함돼있는 것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이 부분은 굉장히 철학에서도 의미가 있는 말인 것 같습니다. 어떤 사건이 정해져있다면, 혹은 @codegeass 님이 말씀하신 듯이, "타고난 운명"이라면, 그것은 능동적일 수 있을까? 란 것이죠. 일부 사람들은 능동적이면서 타고난 운명일 수 있다고 합니다. 대표적으로 헤겔이 그러겠죠. 그 이유는 정해져있다고 해서 능동적이지 않다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능동적인 것은 "스스로 일으키거나 움직이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정해져있는 것을 스스로 움직인다는 것이 모순을 일으키진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해져있어도 스스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도토리는 자신의 존재에 의해 나무가 된다고 했습니다. 즉 도토리는 스스로 자신을 나무로 만든 것입니다. 물론 도토리의 행위가 정해져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해져있다고 해서 그것이 도토리가 스스로 자신을 나무를 형성하지 않을 필요는 없습니다. 타고난 운명과 능동성은 상응 가능하다는 것이죠 (적어도 일부 사람들에게는요). 그렇기 때문에 도토리가 나무가 되는 것은 타고난 운명일 수 있겠지만, 그래도 도토리는 능동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2개의 좋아요

그게....도토리(과거)와 나무(현재), 두가지 형태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같습니다
능동적인 것은 도토리 형태일때를 말하는 것이고 수동적인 것은 나무 형태일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같은 생명체 이긴하지만 시간상으로는 절대 같아질 수 없지 않나요?

그리고 타고난 운명이 아니라 할지라도 도토리는 능동적일 수 없을 것같습니다 도토리가 나무까지 크기까지 내리는 비,심을 수 있는 대지 심 지어 빛까지 자연이 주기에, 도토리 스스로가 자발성을 가지고 나무로 큰 것이라고는 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1개의 좋아요

시간상으로 같다기 보단, 하나의 과정이라고 봐야겠죠. 애초에 어떤 것이 수동적인지 능동적인지를 논할 땐, 여러 시간으로 나눌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시간 인터벌로 봐야하니깐요. 단적인 예로, 어떤 물체가 중력에 의해 떨어진다면, 그 물체가 수동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codegeass 님도 부정하진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말씀하신 것처럼 시간 인터벌이 아니라 각자의 시간으로 보게 된다면, 그 물체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애초에 속력이라는 것이 시간 인터벌로 정의가 된 것이니깐요. m/s면 1초라는 인터벌 동안 움직이는 거리를 말하는 것이잖아요? 그래서 제 생각엔 수동성/능동성을 논하려면 시간 인터벌을 논해야하고, 제가 말한 도토리가 소나무가 되는 행위는 시간 인터벌에 있기 때문에 괜찮은 것 같습니다.

이 부분 역시 핵심을 찔렀다고 생각합니다. 도토리는 엄연히 말해서 100%의 자발성을 갖고 있진 않죠. 하지만 그렇다면 문제는100%의 자발성을 갖고 있는 것을 찾기가 힘듭니다. 그렇다면 수동적이면서 능동적인 것을 논하기 전에 능동적인 것조차 찾기 어렵게 되는 것이죠.

고쿠분 고이치로의 <중동태의 세계>를 추천해드립니다.

고대 그리스 문법에서 핵심적인 대립은 능동태vs중동태(middle voice)였고, 수동태는 중동태의 한 가지 형태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라틴어로 이동하면서 중동태가 지워졌구요.

고이치로는 책임을 물을 수 있게 하는 근거로서의 의지(will) 또는 자발성(voluntas)의 문제가 이러한 문법적, 언어적 표현 층위와의 관련성 속에서 고찰되어야 한다는 데에 이릅니다.

한번 참고하시길 권해드려요!

2개의 좋아요

능동-수동은 관점에 따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건의 주체와 객체가 있고, 주체는 능동-객체는 수동인 것이죠.
그런데 그 주체도 어떤 행위의 객체이고, 또 그 행위는 또다른 행위에서 기인한 것이고... 이런 것들이 반복된다면 수동보다는 능동을 정의하기가 더 어려워보입니다.
귀납적으로, 완전한 능동이 있는지? 온전한 자유의지라는 것이 있는지를 사유하게 되는 것 같네요..답은 없지만요ㅠ
글을 다시 읽었는데, 완전한 자유의지가 없다는 것은 이미 말씀하셨군요ㅠ 한편 능동을 사유함에 있어 자유의지가 없는 도토리를 예로 드는 것은 조금 부적절한 것 같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