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영어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영어 실력이 많이 늘었다고 생각할 때도, 언어 장벽에는 계속 부딪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Baxter이란 사람의 책 발췌인데,

Hume seems to use ‘‘time’’ and ‘‘duration’’ interchangeably within T
1.2.3.6–11, 17; SBN 34–7, 39. This makes sense when speaking of a duration.
Thus ‘‘time,’’ ‘‘a succession,’’ and ‘‘a duration,’’ when used generally, are
interchangeable for Hume. However ‘‘duration’’ can be used also to convey
more the manner than the sort, more successiveness than a succession.
Hume tends not to use it in this sense but commentators often read it this
way, perhaps influenced by Kemp Smith.

duration과 a duration의 차이를 두는 것도 모자라 successiveness 와 succession의 차이를 두는군요. 참... 또, Garrett이란 사람의 책에서는

Is adequacy a property of ideas or a relation?

이런 식으로 머리를 아프게 하네요. 스피노자 책인데, 스피노자는 adequate idea만 얘기하지, adequacy는 얘기 안하는데, 저렇게 adequacy라고 말하니 갑자기 머리가 꼬이는 것 같습니다. 갑자기 최근 3일 동안 이런 어려운 영어들을 접하니, 영어에 자신감이 많이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냥 하소연 한 번 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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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어들의 정말 미세하다고 여겨질 수 있는 차이가 어떤 때는 한없이 중요해지는 것이 철학의 영역인 것 같습니다.

참고로 succession과 successiveness의 차이는 둘 다 연속되는 것이지만, 후자가 특히 중단없이 계속해서 연속되는 것을 의미하는 점이 차이인 것 같고요, 스피노자의 텍스트에 있어서 adequate는 잘 아시듯 '적합한/충전적(充塡的)'이란 의미로 인과관계에 의한 인식과도 관련되어서 사용되고, adequacy는 M. David의 '충분성 논제'(Adequacy thesis)로 유명한 것 같습니다. (스피노자에게서 adequacy의 특별한 의미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단어 유래를 보자면 adequacy는 원래 "어떤 것을 다른 것과 동등하게 만드는 것"인 라틴어 adaequāre에서 유래했는데요, 영어 단어로서 adequacy는 1800년대 초에 형용사 adequate의 파생어로 등장했다고 합니다. 철학적 문맥이 아닌 일반적으로 adequacy은 단지 어떤 것이 충분한 상태를 말하고, 동시에 그 충분함의 상태가 가감이 없이 계속되는 느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참고로 Adequate Causation이라고 하면 법학에서 인과관계이론에 나오는 용어로 '상당인과관계'라고 번역이 되는데, 이것은 독일법학에서의 "Adäquanz Kausalität"의 번역어죠)

*혹시 오류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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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감사합니다. 제가 이해하고 있는 바를 적어보겠습니다.

우선 succession과 successiveness의 차이는, 한없이 계속해서 연속되는 여부의 차이가 아닌 연속하는 것과 연속성의 차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여겨집니다. 예를 들어 {1,2,3, ...}의 순서대로 연속하는 같은 경우는 a succession 이지만 successiveness는 아닌 것이지요. 이 경우에는 {1,2,3, ...} 에서 successiveness를 찾을 수 있다 와 같은 맥락으로 말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이런 면에서 Baxter이 "convey more the manner than the sort"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즉 "a duration"이라는 것은 연속하는 것이고, "duration"이라는 것은 연속하는 상태 혹은 연속성으로 쓰인다는 말 같습니다 (하지만 후자에 대해서 아직도 제대로 설명을 못하겠네요.).

adequacy에 있어서 제가 헷갈렸던 점은, adequate x가 아닌 adequacy 를 논한다는 점입니다. 우선 스피노자에게서 adequate이란 다음과 같이 정의됩니다:

By an adequate idea, I mean an idea which, in so far as it is considered in itself, without relation to the object, has all the properties or intrinsic marks of a true idea (E2d4).

예를 들어, 제 생명은 inadequate knowledge만 가질 수 있습니다 (E2p31). 그 이유는 제 생명의 관념으로는 제 생명이 얼마나 갈지 모르니깐요. 외적 요소들이 제 생명을 결정지을 수 있으니깐요. 하지만 adequacy의 같은 경우는 살짝 다릅니다. @FrancesYates 님은 adequacy를 두 가지 방식으로 설명해주셨는데,

제 생각에 Garrett은 충분성의 맥락에서의 adequacy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FrancesYates 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충분한 상태"로써 adequacy를 이해한다면, 한 관념이 그 자체로 모든 성질들을 갖고 있는 상태와 같이 이해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Garrett이 묻는 것은 이 충분한 상태라는 것이 a property인지, a relation인지 묻는 것이겠죠. 즉, 한 관념이 충분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 관념의 성질을 의미하는 것인지, 그 관념이 관계성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겠네요.

일단 제가 이해하고 있는 바는 이렇습니다. FrancesYates님의 댓글을 읽고 답글을 달면서도 이해도가 높아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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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뿐만 아니라 우리도 말할 때는 똑같은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철학'이랑 '철학적'이라는 것도 엄밀히 따지다 보면 차이가 있고, '철학적'이라는 것과 '철학함', 심지어 '철학다움'이라는 용어까지 만들어낸다면 누군가에게는 이 차이도 분명 세세하게는 있을 것인데 말하기 쉽지는 않아 보입니다.

만약 외국인이 '철학다움' 같은 걸 마주하게 되면 당황할 것 같네요. 즉 어느 나라나 똑같습니다. 유창한 영어권 화자라도 저렇게 duration과 a duration이나 successiveness 와 succession을 모르지는 않지만, 갑자기 저 차이를 세세하게 따지라고 한다면 당황할 수도 있다고 생각되네요.

제가 위에서 언급한 '철학' 예시가 본문과 다르다고 여기실 수도 있으니, 그럼 위에서 나온 '연속'이라는 것도 한국어로 따진다면 얼마나 복잡할까요? 한국어는 특히 교착어 특징까지 살린다면 '연속'과 '연속함', '연속됨', '연속되는 것', '연속적인 것', '연속인 것', '연속성', '연속되어짐', 심지어 '연속스러운 것(?)', '연속다운 것(?)' 등등의 이상한 것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이제 막 한국어를 배운, 또는 한국어 어느정도 된다고 생각하는 외국인이 봐도 기가 막힐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런 말들이 분명 사용 방법에 따라 세세하게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는 언어를 사용할 때 그렇게 복잡하게 따지지 않습니다. 이것들을 어느 정도는 한 묶음으로 치고 '맥락'에서 살펴보는 경향이 있을 겁니다. 실제로 그게 자연스럽거든요... 그리고 동양철학 쪽은 더 기가 막힐 수도 있습니다. 간단하게 '삶'을 예시로 들어도, '삶', '생존', '생(生)', '사는 것', '살아가는 것', '살아있는 것', '살고 있는 것', '생활', '목숨', '활(活)', 명(命) 등등... 이거보다 더 어려운 한자까지 나오는 동양철학 개념들이 존재합니다. 심지어 훈음이 일치하는 중국어 화자들도 이 개념들 때문에 골치 아파 합니다. 한자를 더 잘 알 것 같은 중국어 화자들도 이 모양입니다. 그냥 자연스러운 일인 거죠. 따라서 이 문제는 영어의 자신감과 전혀 무관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네요.

제가 오버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 논문들 보면 'OO' 개념 얘기하고 'OO적인 것'이라는 말들이 이어서 나올 수 있습니다. 만약 칸트의 '물 자체' 얘기를 하는데 한국어 논문에서 '물 자체 적인 것' 등을 갑자기 사용하게 된다면 우리는 여기서 어떻게 해야할까요? 누군가는 대충 알아먹고 넘어갈 수도 있겠죠. 어떤 사람은 꼼꼼히 따져볼 수도 있을 겁니다. 여기서 자신이 가지는 문제 의식에 따라 문제를 대하는 방식의 태도가 달라진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어떤 개념을 대충 썼다고 해도 무책임한 건 아니라고 봅니다. 그 사람은 뭉뚱그려서 그 개념이 사용될 수 있다고 (때로는 무의식적으로) 믿은 것일 테고, 그러면 그런 의도를 포착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스탠퍼드 철학사전의 'definitions' 항목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It is a fact about us language users that we somehow come to understand and use a potential infinity of sentences containing a term once we are given a certain small amount of information about the term."

사람은 대충 단어를 배우면 이걸 어느순간 문장에 잘 응용하거나 어떻게든 알고 사용합니다. 미스테리한 일이라고 합니다. 그냥 언어의 신기한 일을 하고 있다고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가끔 그 신비성 때문에 오해와 오류를 낳기도 하지만, 때로는 우리 언어 생활을 풍부하게 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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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민도 힘들어한다고 해서

이라고 하긴 어려운 것 같습니다. 왜냐면

이 말에는 동의하지만, 결국 우리는 이런 단어의 차이를 어렴풋이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죠. 한국어를 많이 배우지 않은 원어민보다는 저 말들의 의미를 빨리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제가 예전에 헤겔/하이데거 세미나를 들을 때, 가장 중요했던 테마 중 하나가 being/a being이었습니다. 한국어로는 존재/존재자로 번역이 되는 것 같더군요. 하지만 존재/존재자는 우리가 평소에 쓰지도 않는 구분일 뿐더러, being/a being의 차이는 한국어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를 이해해야되는 입장에서는 곤욕이었습니다. 제 학우들은 "아! 우리는 being을 모르는구나!"라고 어렴풋이라도 이해는 했지만, 전 그 차이가 뭔지조차도 감을 잡을 수 없었네요. 그렇기 때문에 언어의 능숙도를 아예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이 포스팅에서 나온 예시들로 설명을 하자면, 저는 adequate/adequacy의 차이를 저는 헷갈려했습니다. 충분한/충분성의 관계와 같다고 일단 결론을 내렸지만, 1. adequate/adequacy 의 차이가 충분한/충분성의 차이라고 연결짓는데 시간이 걸렸을 뿐더러, 2. adequate/adequacy의 차이가 충분한/충분성과 완벽하게 맞물린다고 아직 말하기 어렵네요. 하지만 원어민들은 이런 절차를 거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부분은 원어민보다 이해하는데 더 어려움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혀 무관"하지 않습니다. 물론 언어가 이 어려움의 지분이 100%를 차지하진 않을 수 있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철학적,' '철학다움'등의 용어가 있습니다. 하지만 원어민에게 이미 어려운 것을 더 어렵게 만들기 때문에 언어장벽이라고 표현해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 같아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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