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의 존재와 존재자

하이데거를 읽다가 의문이 생겨서 올립니다.

정말로 존재와 존재자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것이 가능한가요?
가령 '존재'를 염두에 둔다거나 그것을 지시할 때는 존재가 존재자로서 파악되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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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생각엔 영어로 생각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영어에서는 X와 a X의 구분을 둡니다. 예를 들어, chair과 a chair은 다르죠. 지금 제가 앉아있는 것은 a chair 이지만, chair은 아닙니다. 또, chair은 a chair이 아니겠죠. 같은 이유로 a being/beings와 being의 구분이 가능하지 않나, 싶습니다.

하이데거 작품 중에서 영문본을 찾아서 '존재자'를 어떻게 표기했는지 보는 것도 재미있겠네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그런데 두 가지 질문이 떠오릅니다.

  1. 존재는 존재하는지요?
  2. 시간은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지요?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는 세계 속에 출현해 있는 존재자의 하나가 아니라 그러한 존재자들을 출현시키는 사건입니다. 출현의 결과와 출현이라는 사건에 대한 취급을 달리해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 있어 보이고, 그런 입장에서

된다는 생각은 존재를 하나의 존재자처럼 취급하는 일이며, 이는 존재를 잘못된 방식으로 사유하는 일이라고 비판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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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TheNewHegel 님께서도 지금 존재를 말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존재가 존재하니까 존재를 말할 수 있는 것이고 존재하는 것은 존재자가 아닌가요?

저의 물음과 짧은 견해를 지적 비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추가로 떠오른 질문이예요.

말씀하신대로 시간이란 현존재가 자기이해를 하는 지평의 선험적 형식이기 때문에,

  1. 현존재로서 시간의 존재여부를 판가름할 수는 없는 것입니까?

아니면,

  1. 시간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제가 무의미한 사유를 계속하고 있는걸까요ㅠㅠ

친절하게 설명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다만, 선험적 형식이라고 하는 '시간성'이 근원적인 또는 통속적인 '시간'과 어떤 관련성을 지니는지에 대해 의문이 남습니다.

시간성이 있기에 다양한 시간의 양태가 잇따라 존재한다고 하는 표현에서 '나는 인간성이 있기에 인간이다' 와 같은 동어반복이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리고 선험적으로 '주어진다' 함은 현존재에게 시간성이 있다(존재한다)고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열번 쯤 읽어 보았는데,
아직 이해가 안되서요ㅋ
열번 더 읽고 리플 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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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부한 설명에 감사드려요.

제가 시간성이 내포하고 있는 여러 의미들을 간과하고 의견을 냈던 것 같습니다.

한편, 현존재의 경험 가능 범위 안에 있지 않은 것을 어떻게 말과 글로 옮길 수 있는지 의문이 듭니다.

예를 들어, '시간성'을 선험적 형식이라고 확정할 수 있는 근거는 또한 선험적인 형식의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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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하이데거의 서문을 이해하는 방식도 이렇게 간단한 편입니다. 빨간색인 것들과 (그들이 공유하는) '빨간색임'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설령 빨간색이라는 속성을 빨간색인 것들을 통해 파악한다 하더라도, 빨간색과 빨간 것들은 여전히 구별됩니다. 존재와 존재자 역시 이처럼 당연히 구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하이데거가 그 장황한 문장들을 통해 이 구별을 역설한 이유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이제

이 질문은 나름의 철학적 의미가 있어 보입니다. 칸트나 오늘날의 논리학자들에 따르면, 존재는 속성이 아닙니다. 검약적이라면 사물, 나아가 기껏해야 수나 속성 따위를 우리는 존재한다고 생각하는데, 속성도 아니고 다만 속성 담지자들을 일반화하기 위한 논리적 장치를 두고 그것이 지칭하는 바가 존재하는지 묻는 것은 부조리할 것입니다. 따라서 제가 이해하기로, 오늘날의 이해에 따르면 '존재'에 대응되는 존재자는 아무리 방만한 존재론을 취하더라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존재'에 대응되는 무언가가 존재하기는 하겠습니다. 가령, 'x는 P이다' 꼴의 문장을 추상해 'P인 것이 존재한다'를 도출하는 우리의 추론 규칙이 존재합니다. 바로 이런, 사실을 우리가 사유하거나 사실로부터 무언가를 추론해내는 방식 자체를 '존재'의 의미로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다만 이제 이런 이야기로 넘어오면 하이데거의 원 서술과는 꽤 멀어지겠네요.

존재에 대해 말할 수 있다고 해서 존재가 존재자라는 결론은 나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무언가를 사유하는 방식은 단 한 가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물음의 지평 자체를 굳이 따지지 않은 채 던져지는 존재자에 대한 물음과 달리, 존재물음은 물음을 묻는 자(현존재) 자신의 존재 이해, 현존재의 존재양태, 여기서 발생하는 해석학적 순환의 구조 등을 고려하는 방식으로 물어져야 합니다. 이처럼 존재가 존재자와 다른 방식으로 사유되어야 한다는 점은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의 맨 처음부터 강조하고 있는 바입니다.

존재자의 존재는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존재자가 아니다. 존재문제의 이해에서 철학의 제일보는 [...] 존재자로서의 존재자를─마치 존재가 하나의 가능한 존재자의 성격을 가졌기라도 하듯이─그것의 유래가 되는 다른 존재자에게로 소급해가지 않는 데에 있다. 물어지고 있는 것으로서의 존재는 따라서 존재자의 발견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나름의 고유한 제시의 양식을 요구한다.
Heidegger, M., 『존재와 시간』, 이기상 역, 까치, 1998,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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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비유는 오해의 소지가 있어 보입니다. 존재자와 존재가 구별된다는 말씀은 전적으로 옳지만, (밑에서 말씀하셨듯이) 존재는 사물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속성이 아니며, 더구나 모든 사물이 소유하는 가장 보편적인 개념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개념은 하이데거의 의미에서 존재라기보다는 오히려 그가 종래의 존재론에 귀속시키는 존재자성(Seiendheit)에 가깝습니다(Heidegger, 1998, 16 및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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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의미한 바와는 살짝 다른 것을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a being과 being의 관계와 상응하는 것은 a red thing과 red thing, 혹은 a color 과 color의 관계로 생각됩니다. 빨간색은 a color 이지만 color이 아닙니다. 반대로 color도 빨간색이나 노란색이 될 수 없죠. 이런 면에서 being 과 a being의 관계는 빨간색인 것들과 빨간색임의 관계랑은 달라보입니다.

솔직히 아직도 다음과 같은 생각이 그치질 않습니다.

  1. 세계는 항상 존재자의 존재이다.

  2. '존재의 존재'를 말함에있어서도 존재자 ("존재")의 존재를 말함이다.

저는 처음에 제기하신 물음이 하이데거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위한 질문이라고 상정하고, 그에 대해 하이데거 입장에서 논거를 들어 답변을 해드렸고, 그에 대해 제시하신 반론에 대해서도 추가적인 논거를 들어 답변을 드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이유 없이 당초의 생각을 고수하고자 하신다면 답변자로서는 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 흥미로운 주제 같습니다.

제 생각에 철학자를 공부하기 제일 좋은 방법은, 그 철학자가 어느 정도 맞다, 말이 된다란 생각을 하고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먼저 답을 정해두고 그 철학자를 공부하게 되면 그 철학자의 깊이에 도달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궁극적으로는 하이데거를 비판하더라도, 일단 하이데거가 맞다고 생각하고 먼저 공부를 한 후 생각이 바뀌는지 확인하는 게 다음 과정 아닐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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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남겨주신 글들 계속 보고 있습니다. 도움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직 완전히 이해가 가진 않지만,
현존재의 존재이해를 바탕으로 한 존재물음의 방식으로 '존재'에 관한 기본 입장을 가져보고자 합니다.

아 저도 본래 이렇게 사유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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