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의 존재와 존재자

가 제가 말한 바와 상이한 무엇인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제가 말한 바가 지금 @yhk9297 님이 말씀하시는 바로 그 바와 같습니다.

에 대해서는 (실제로 개체와 속성의 관계에 개체와 존재의 관계를 유비한다면… 오해의 소지가 있으므로) 별 이견은 없습니다만, 원래의 질문이 ‘하이데거에게서 존재와 존재자가 구분되나요?’가 아닌

였던 고로 위에서와 같이 유비한 것이었습니다. 두 개념은 애초에 다른 범주를 구성한다는… (존재가 '빨간색인 것'이나 '색깔', '존재자'마냥 범주를 구성하는 개념이 아니라는 점이 또 문제긴 하지만요 ㅋㅋㅋ)

순전히 존재와 존재자가 아예 층위를 달리한다는 견지에서 하신 말씀이라면 저도 그에 대해 동의가 됩니다. 하이데거의 개념사용이 워낙에 까탈스럽기 때문에, 두 가지 구별에 이렇다할 적확한 예시를 들기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드신 예시는 a red thing 과 redness의 차이로 보입니다. 이는 성질에 대한 관계인데, 하이데거의 존재/존재자의 관계가 성질에 대한 관계로 설명될 수 있는가? 라고 하면, 적어도 하이데거는 아니라고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의미한 바를 적용한다면 a red thing과 red thing의 관계를 생각해봐야합니다. 이 차이는 존재와 존재자의 구별, 혹은 "존재가 존재자가 될 수 없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생각할 때 중요하게 작용할 것 같습니다.

존재 존재자 논의를 혼자 해결짓는 게 너무 힘들어서 한번 더 질문을 드리게 됩니다(선생님께 혼날 각오를 하고서요ㅠ).

제가 예전에 생각했던 것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1. 세계사실은 항상 존재자의 존재이다.
  2. 존재의 존재는 세계사실이다.
  3. 그러므로 (1)존재의 (2)존재는 존재자의 (2)존재이다.

이렇게 사유해도 되는걸까요?

(1)존재 는 이름으로써만 존 재 라고 불리울뿐이지 실질적으로는 존재자이다.

아직 제가 근원적인 존재물음에 조금도 도달하고 있지 못한 걸까요?

존재는 항상 존재자를 출현시키는 사건이며 우리는 항상 존재자를 통해서만 존재에 접근할 수 있지만(=존재가 존재자의 존재이기는 하지만), 그로부터 존재 스스로가 존재자라는 결론은 나오지 않습니다. 이 두 가지를 계속해서 혼동하고 계시는 것이 문제로 보입니다.

지금 거듭 주장하시는 대로 존재가 스스로 하나의 존재자라고 가정해봅시다. 당초에 우리는 존재자가 어떻게 출현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존재 개념을 끌어들였습니다. 그런데 이 존재가 다시 하나의 존재자라면, 그것은 다시금 그 존재자가 어떻게 출현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무언가를 끌어들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존재자로 고찰하는 이상 존재자를 출현시키는 사건은 다름이 아니라 존재일 터입니다. 그런데 방금 가정에 따르면 존재는 존재자이므로 또 다시 자기가 무엇에 의해 출현하는지는 여전히 설명되지 않은 채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존재가 존재자라고 가정한다면, 이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아무것도 설명하는 바가 없습니다.

머릿속에 드는 생각을 보다 명확히 하기 위해서라도 텍스트를 자세히 살펴봐야 할 때가 종종 있는데, 지금이 바로 그러한 때라고 생각됩니다. 앞에서 제가 인용한 구절을 포함하는 (국역본 기준) 20-24쪽(서론 제1장 제2절)을 일독하시기를 권합니다. 특히 하이데거가 말하는 "물음이 꾀하고 있는 것"(21쪽)이 무슨 의미인지를 파악하도록 시도하시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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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걸리더라도 일러주신 원문의 부분들을 계속해서 정독하겠습니다.

그냥 넘어가기에는 중대한 문제에 제 자신이 걸려있는 듯하거든요.

도움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 가지 주제가 겹쳐 있어서 (게다가 댓글이 진행되며 다른 주제들로 내용이 확장되어서) 단답형으로 말하는 것이 어렵긴 하지만, 제시하신

라는 질문에 대해서 '예/아니오'로만 대답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네. 존재와 존재자를 구분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2) 네. 존재는 언제나 '존재자의 존재'로 파악된다는 점에서 존재자와 결코 분리되지 않습니다.

레비나스가 이 점을 아주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이데거에게서 존재와 존재자는 개념적으로는 구분되지만, 실재적으로는 분리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물론, 레비나스는 존재와 존재자를 분리시키지 않는 하이데거를 자신의 관점에서 비판하고 있기는 하지만, 적어도 하이데거의 존재론에 대한 레비나스의 요약 자체는 하이데거 옹호자들에게도 대체로 수긍할 만 합니다.)

존재와 존재자의 구별은 『존재와 시간』 가운데서 가장 심오한 사상으로 보인다. 하지만 하이데거에게는 구별이 있을 뿐 분리가 없다. 존재는 언제나 존재자 속에 붙잡혀 있다. 존재자 중에서도 인간에 대해 하이데거가 사용했던 ‘각자성(Jemeinigkeit, 각자의 것임)’이란 용어도 존재는 언제나 누군가에 의해 소유된다는 사실을 정확히 표현한다. 하이데거는 존재자 없는 존재를 인정할 수 없었다고 나는 믿는다. 존재자 없는 존재는 그에게 불합리한 것으로 보였다. (에마뉘엘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 강영안 옮김, 문예출판사, 1996, 39쪽 인용자 강조.)

그리고 추가적인 질문인

에 대해서는

(1) 아니요. 하이데거는 존재가 '존재한다(ist, 있다)'라고 하지 않고 '주어진다(Es gibt Sein, 그것이 존재를 준다)'라고 말합니다.
(2) 아니요. 하이데거는 시간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화(Zeitigen)'한다고 말합니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이라는 개념에 대해 '존재한다'라는 술어를 사용하길 거부합니다. 이 점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시로,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구절이기도 한데) 다음의 구절을 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존재자에 관해 ‘그것이 있다(es ist).’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존재’라는 사태에 관해서는, 그리고 ‘시간’이라는 사태에 관해서는 우리는 조심스러워야 합니다. 우리는 ‘존재가 있다(Sein ist).’, ‘시간이 있다(Zeit ist).’라고 말하지 않고, ‘[그것이 존재를 준다, 그래서] 존재가 [주어져] 있다(Es gibt Sein).’, 그리고 ‘[그것이 시간을 준다, 그래서] 시간이 [주어져] 있다(Es gibt Zeit).’라고 말합니다.1 우선 우리는 이러한 표현방식을 통해 단지 [우리들의] 언어사용을 변경했을 뿐입니다. ‘[그것이]있다(es ist).’ 대신에 우리는 ‘[그것이 준다, 그래서 그것이 주어져] 있다(es gibt).’라고 말합니다.” (마르틴 하이데거, 「시간과 존재」, 『사유의 사태로』, 문동규·신상희 옮김, 길, 2008, 29-30쪽.)

그런데 하이데거의 어법에 대한 이런 논의들은 사실 하이데거가 '존재/존재자'라는 개념 구분으로 무엇을 말하려고 하였는지가 명확해질 때에야 정당화됩니다. 이 개념 구분은 크게 세 가지 철학적 함의를 담고 있습니다.

(1) 세계를 물화(物化, Verdinglichung)시키려는 태도는 지양되어야 한다.
(2) 존재하는 모든 것은 우리와의 관계 속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현상한다.
(3) 현상과 실재 사이의 이분법적 구분은 성립하지 않는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하이데거에게서 '존재자가 존재한다'란 '존재자가 우리에게 주어진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 주어짐의 방식은 우리가 존재자와 맺는 관계에 따라 얼마든지 다양할 수 있습니다. 가령, 요리사에게는 칼이 요리-도구로 주어지는 반면, 강도에게는 칼이 살인-도구로 주어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존재자는 결코 고정된 형태로 우리 눈앞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기성품(ready-made product) 따위가 아니라는 것이 하이데거가 지적하는 바입니다. 오히려 존재자란 매 순간 우리와의 관계 속에서 새롭게 주어지는 '사건(Ereignis)'이라는 것입니다.

아래 영상에서

36:28-41:39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Sein)’와 ‘존재자(Seiende)’가 무엇인가요?
41:40-48:29 존재가 ‘배경’이고 존재자가 ‘개체’라는 점에 대해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48:30-53:00 존재가 ‘사건’이라는 점에 대해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53:01-57:57 존재가 존재자를 ‘준다’ 혹은 ‘선물한다’는 점에 대해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에 관련 내용이 아주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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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운명론적인 존재라는게 뭔가요?
철학모임에서 어떤 얘기를 들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아마 '역운(歷運 Geschick)'이라는 하이데거의 개념을 다소 피상적으로 설명하는 과정에서 '운명론적'이라는 표현이 나왔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이데거는 각각의 시대마다 존재를 이해하는 방식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존재의 '역사적 운명' 혹은 '역운'이라고 말하는데, 이 말이 영어로는 'fate'나 'destiny'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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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
남겨준 글이 어느정도 답이됩니다. 운명론적이란 말이 제겐 와닿진않지만,하이데거는 존재에 대한 우리의 탐구를 요구하는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