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폴트의 하이데거 해설서에 대한 단상

리처드 폴트(Richard Polt)의 Heidegger: An Introduction이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아직 완독한 것은 아니고 1/3 정도 살펴본 상태이지만, 전반적으로 내용이 참 좋네요. 예전에 대학원 수업에서 이분의 The Emergency of Being: On Heidegger's Contributions to Philosophy라는 책을 인상적으로 읽은 기억이 있어서 이번 책도 도서관에서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하이데거의 철학을 매우 충실하게 해설하면서도 아주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예시들을 많이 제시해 주어서 입문자들에게 도움이 되겠네요.

사실, 저는 분석철학의 관점에서 하이데거를 난도질(?)하는 조금 더 도발적인 작업물들을 선호하는 편이긴 해요. 하지만 이 책은 텍스트에 대한 철저한 주석과 내용에 대한 친절한 해설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고 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고 싶네요. 아마도 폴트는 전형적인 대륙철학 배경에서 하이데거를 전공한 사람인 것 같은데도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만한 아주 친절하고 명료한 언어로 하이데거를 설명하네요.

가령, 하이데거의 '세계' 개념을 설명하면서는 캐나다인 유대계 지질학자를 한번 상상해 볼 것을 권유하네요. 하이데거가 말하는 세계가 물리학의 시공간적 세계가 아니라 '그리스인의 세계'나 '스포츠의 세계' 같은 의미의 세계라는 점도 지적하고요. 이런 식으로요.

"예를 들어, 우리의 지질학자의 세계란, 과학자로서의 관심, 캐나다인으로서의 관심, 어머니로서의 관심 등등 그녀가 지닌 모든 관심을 조직화하는 전체 영역이거나 맥락이다. 세계는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머무르는 유의미한 총체이다. 우리는 그 용어를 '그리스인의 세계' 혹은 '스포츠의 세계'에 대해 우리가 말할 때와 비슷하게 사용한다." (R. Polt, Heidegger: An Introduction, Ithaca, N.Y. : Cornell University Press, 1999, p. 49.)

그리고 이런 설명들과 함께 그림도 자주 등장합니다. 가령, 사진에도 있는 51쪽의 그림은 하이데거의 철학에서 소위 '도구'라고 불리는 사물들이 어떻게 서로 지시하고 있는지를 표현하고 있어요. 장갑, 신발, 코트 등 손안의 존재들이 서로 관계를 맺으면서 따뜻함이라는 목적을 위해 함께 사용된다는 거예요.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물들이 단순한 '이론적 앎의 대상'이 아니라 '실천적 사용의 대상'이라는 점을 저렇게 그림으로 표현한 거죠.

책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지 않아서 대중적인 접근성이 다소 떨어진다는 점은 아쉽네요. 그래도 하이데거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철학과 학부 고학년생이나 대학원생이라면 크게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륙철학 연구자들도 이런 깔끔한 설명을 할 수 있다!"라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자극과 귀감이 될 만한 책이라고 생각해요.

15개의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