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설의 현상학은 일종의 ‘초월론적 철학’이다. 즉, 지식의 가능조건으로서 ‘순수의식’ 혹은 ‘초월론적 자아’를 명료하게 기술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칸트가 순수이성의 범위를 규정하여 학문으로서의 형이상학을 복권시키고자 하였던 것처럼, 후설 역시 순수의식에 대한 탐구를 통해 다양한 경험과학을 정초하는 보편학으로서의 철학을 성립시키고자 한다. 이러한 시도는 순수의식의 지향적 태도에 따라 대상이 우리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주어진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가령, 똑같은 나무도 우리가 생물학적 태도를 가지고 바라볼 때는 생물학적 대상으로(“저 나무는 참나무과에 속하는 떡갈나무이다.”), 미적 태도를 가지고 바라볼 때는 미적 대상으로(“저 나무는 캔버스 위에 삼각형 구도로 그려질 수 있다.”), 경제적 태도를 가지고 바라볼 때는 경제적 대상으로(“저 나무를 화분으로 만들면 20만원에 판매할 수 있다.”) 나타날 수 있다. 우리의 의식이 취하는 태도에 따라 대상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 학문적 진리의 영역이 달라지는 것이다.
문제 제기
그러나 각각의 학문적 진리의 영역을 규정하고자 하는 현상학의 작업은 일종의 모순에 직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학문적 진리의 영역은 특정한 의식의 태도를 전제한다. 대상을 생물학적으로 바라보려는 태도가 생물학을 성립시키고, 미적으로 바라보려는 태도가 미학을 성립시키고, 경제적으로 바라보려는 태도가 경제학을 성립시킨다. 특정한 의식의 태도로 대상을 바라보는 동안에는, 곧 소위 ‘자연적 태도(natürliche Einstellung)’를 취하고 있는 동안에는, 모든 학문을 정초하기 위한 보편학이 성립할 수가 없다. 보편학은 자연적 태도를 벗어나 ‘초월론적 태도(transzendentale Einstellung)’를 취해야 한다. 바로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현상학이 강조하는 ‘초월론적 태도’ 역시 결국 또 다른 종류의 ‘자연적 태도’에 불과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즉, (1) 우리는 학문을 성립시키기 위해 대상에 대해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태도’를 취해야 한다. 그런데 (2) 특정한 태도를 취하게 될 경우 모든 학문들 사이의 관계를 객관적 위치에서 규정하고자 하는 ‘보편학’은 불가능해지고 만다. 따라서 보편학으로서의 현상학은 결국 자기 자신이 보편학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거나, 자기 자신을 아무런 태도도 취하고 있지 않은 예외적 학문으로 내세워야 하는 상황에 빠진다. 둘 중 어느 쪽도 만족스러운 해결로 보이지 않는다.
선행 연구
후설의 현상학이 초월론적 철학으로서 지니고 있는 모순은 이미 다양한 철학자들을 통해 폭로되었다. 가령, (1) 데리다는 『목소리와 현상』에서 아무런 선입견 없이 순수의식을 기술하고자 하는 시도가 ‘현전의 형이상학’에 빠지고 만다고 비판하였다. 세계를 객관적 지위에서 바라보는 시선을 상정한 채 형이상학을 성립시키고자 하는 입장은 성공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2) 바티모는 『해석을 넘어서』에서 초월론적 철학이 제시하는 지식의 가능 조건이 결국 일종의 ‘해석’으로 여겨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모든 경험과학이 자신의 관점에서 세계를 ‘해석’하고 있는 것처럼 초월론적 철학도 특정한 관점을 상정한 채 세계를 ‘해석’하고 있을 뿐이라는 이야기다. (3) 리쾨르 역시 지식의 가능 조건으로서 순수의식이나 현존재를 직접적으로 기술하고자 하는 시도에 대해 회의적이다. 오히려 지식의 가능 조건은 소위 ‘우주 상징’, ‘꿈의 상징’, ‘시의 상징’ 같은 다양한 구체적 텍스트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간접적으로 기술되어야 한다고 강조된다.
나의 주장
나는 후설의 현상학이 지닌 문제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통해 극복될 수 있다고 본다. 진리가 다양한 학문 영역에서 각각의 방식으로 성립한다는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굳이 초월론적 태도에 의존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초월론적 태도와 같은 순수한 관점을 상정한 채 다양한 학문 영역을 구획하고 정초하려는 시도는 언제나 모순에 직면하고 만다. 우리는 단지 진리를 특정한 학문 영역에 가두고자 하는 철학적 입장(가령, ‘자연주의’와 ‘역사주의’)이 내적 한계를 지닌다고 지적하면 될 뿐이다. 즉, 초월론적 태도로부터 우리 자신이 직접 보편학의 체계를 세우고자 해서는 안 된다. 철학을 극복하기 위해 또 다른 철학을 도입할 필요는 없다. 형이상학을 극복하기 위해 또 다른 형이상학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비트겐슈타인이 강조한 것처럼, 우리는 주어진 철학을 그 철학 자체의 논리로 논파해야 한다. 독단적 체계 S에 대응하기 위해 또 다른 독단적 체계 S’를 보편학으로 내세울 것이 아니라, 단지 S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S 자체의 귀결을 통해 보여주고자 해야 한다. S ⊃ (C & -C)라는 형식으로 S를 비판하는 논증을 구성해야 하는 것이다.
진리가 다양한 학문 영역에서 각각의 방식으로 성립한다는 주장에 대해 그 어떤 해명도 하지 않을 경우 우리는 무엇이 학문인지에 대해서도 말할 수 없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최소한 이것이 학문이라고 할 수 있는 최소 조건, 선제 조건을 제시할 수 있을 때 이 조건을 충족하는 모든 학문들과 각 학문의 지식이 타당하다는 결론을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선제 조건, 최소 조건을 알기 위한 도구로써 초월론적 태도가 요청된다고 한다면 독단적이라는 주장은 비약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독단적 형이상학은 학문의 내용 자체를 정초하려고 했다면 후설의 현상학은 학문의 조건을 정초하는 작업으로서 그 두개가 같은 이유로 비판받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주장을 굳이 또 다시 정당화할 필요가 있을까요? 오히려 비트겐슈타인처럼 "다양한 언어 게임이 존재한다. 모든 언어 게임을 아우르는 하나의 규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언어 게임은 가족유사적으로 묶일 뿐이다."라는 사실에서 철학적 탐구를 시작하는 게 진정으로 근본적인 태도라고 생각해요.
가족유사적으로 묶인 언어 게임들을 단일한 규칙으로 체계화하려는 시도가 바로 '형이상학’이라는 사이비 문제를 발생시키는 것처럼, 이미 다양한 방식으로 성립하고 있는 진리를 '순수의식’이나 ‘현존재’ 등으로 다시 정당화하고자 하는 시도는 독단주의에 빠지는 거죠. 실제로, 후설의 제자인 하이데거는 후설을 따라 '초월론적 현상학적 환원’의 작업을 수행했던 자신의 전기 철학이 '형이상학의 언어’에 암묵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휴머니즘 서간」에서 인정하고요.
i. 혹시 진리가 다양한 학문의 영역에서 각각의 방식으로 성립하는 예를 하나만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ii. 형이상학이라고 할 때는 어느 형이상학을 말씀하시는지요?
iii. 언어 게임을 아우르는 하나의 규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 역시 형이상학적 주장 아닐까요? 언어와 세계가 어떤 방식으로 엮여 있는가에 대한 주장이니 말입니다.
(1) 위에서 제시된 나무의 예가 태도 변경에 따라 각각의 학문 영역에서 '참’으로 받아들여지는 진술이 달라지는 구체적인 방식입니다. 가령, "저 나무를 화분으로 만들면 20만원에 판매할 수 있다."라는 진술은, 경제학적으로는 진리이지만, 미학적으로는 진리가 아닌 거죠. 또 다른 예를 들자면, 서울대학교 이남인 선생님은 '시간’이라는 개념이 역사학과 물리학에서 서로 구분되는 방식으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물리학에서 '시간’은 계량 가능한 수학적 시간인 반면, 역사학에서 '시간’은 삶의 기간을 의미한다고요.
(2) 데리다를 비롯한 철학자들이 후설의 현상학을 "현전의 형이상학"이라고 비판할 때 염두에 두고 있는 '형이상학’이란, 외부의 객관적 실재를 우리의 머릿속에 있는 그대로 완벽하게 그려내고자 하는 시도 일반을 의미하는 용어입니다. "어느 형이상학"을 구체적으로 가리킨다기보다는, 실재를 표상하고자 하는 모든 종류의 시도가 형이상학에 들어가는 거죠. 가령, 이러한 비판에는 플라톤, 데카르트, 칸트의 형이상학은 물론, 근대의 실증주의와 오늘날의 과학주의까지도 포함될 것입니다. 또한 최근에 등장한 분석적 형이상학과 니체-베르그손-들뢰즈가 제시한 '차이의 존재론’도 이러한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겠죠.
(3) 그런 주장을 또 다른 반실재론적 형이상학이 아닌, 순수한 ‘해체론적’ 비판으로 제시하는 것이 문제의 쟁점이 될 것입니다. 저는 비트겐슈타인이 "언어 게임을 아우르는 하나의 규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명제를 반실재론적 형이상학을 통해 정당화했다고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언어 게임을 아우르는 하나의 규칙은, 그런 규칙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너희 형이상학자들이 제시해라. 나는 그런 걸 찾지 못하겠다. 다만, 너희가 그런 게 존재한다고 주장한다면, 나는 그 주장을 언제든지 논파해주겠다."라는 태도를 취했다고 생각합니다.
(1) YOUN님의 설명은 후설 현상학의 기획과 용어 전반에 대한 이해의 배경이 없는 식자들에게는 충분한 설명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후설 현상학 전반에 걸친 논의에 익숙할 뿐만 아니라, 후설의 진리론에 관한 입장에 비판 내지 반대 입장를 마음 속에 염두하고 질문을 하는 식자들에게는 불충분한 설명이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다음과 같은 사항에 걸쳐 보충설명을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a.
YOUN님도 잘 아시다시피 진리론에 대한 여러가지 입장이 철학사에 걸쳐 존재합니다. YOUN님께서 해석하시는 후설의 진리론은 진리에 관한 다양한 입장 가운데 어떤 지형에 위치하는지(e.g., correspondence theory of truth, pragmatic theory of truth, coherence theory of truth, etc.)에 관하여 해명을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 일반적으로 부정적인 의미에서 '형이상학’이라는 이름표를 이전 시대의 철학적 시도에 대해 붙일 때는, 일반론적 입장에서 앞선 시대에 이뤄진 형이상학적 이론을 구축하고자 하는 시도를 비판하고 이와 어떻게 자신의 입장이 다른지를 보여주려는 수사적 장치로서 철학자들이 으레 사용하는 일종의 metaphorical term으로서 사용되는 빈도가 더 높다고 생각합니다.
철학자마다 그리고 사용되는 문맥마다 의미차이는 있겠지만, 일반적 용례를 거칠게 잡는다면, 내적으로 정당화되지 않은 암묵적 전제를 마치 당연한 사실 혹은 진리인양 도입해 그 전제 위에서 철학적 이론을 구축한다는 의미에서 '[독단적] 형이상학’이라는 이름을 붙여 비판하는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Arigato님께서는 형이상학이라는 용어 정의에서 무엇을 염두에 두고 계셨는지 궁금합니다).
이와 같은 형이상학이라는 용어의 관례적 사용을 배경으로, 어떤 형이상학적 체계가 수립되는 논증과정 자체가 내적 결함을 이미 가지고 있다는 점을 입증해 그 논리의 근본적 수립불가능성을 입증하는 방식을 가리켜 '해체’라고 하셨다면, 해체론적 비판을 경유해 형이상학을 비판하겠다는 YOUN님이 구사하시려는 전략에 대해 동의하고 또 지지합니다.
2-a.
YOUN님께서 취할 최종적인 입장은 같은 현상을 토대로 하는 다양한 학문 영역의 이론적 체계의 성립을 담보하는 meta이론의 정립불가능성’만’을 보인다는데 있는 것인지요? 그렇다면 이와 같은 해결책이 이끌고 갈 결론은 흄의 skepticism과 어떤 변별점을 가지는지 궁금합니다.
2-b.
현전의 형이상학에 대한 데리다의 비판은 현상학적 운동 저 스스로가 통렬히 비판해온 심리주의의 한계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다는데 있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요컨대 시간의 종합을 통해 현상의 본질을 포착하는 의식적 주체를 진리의 담지자로 상정하는 한에서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느냐 한다면 '어렵다’라는게 데리다 비판의 요지이겠지요.
발제하신 내용이 스케치내지 초록에 해당하는 글임을 감안하고, 제가 궁금한 점을 질문드리고 싶습니다. 앞서 말한 논쟁의 지형을 미루어볼 때, 현전의 형이상학이라는 용어를 중심으로 전개되어온 현상학자와 후기구조주의자 간의 논쟁이라는 두 가지 큰 줄기의 입장으로부터 YOUN님께서 제시하시는 비트겐슈타인적 해결법은 어떤 변별점을 가지는지 궁금합니다.
(1) 굳이 후설의 입장을 '진리 대응 이론’과 ‘진리 정합 이론’ 사이에서 어느 쪽인지 구분한다면, 저는 '진리 정합 이론’에 더 가깝다고 생각해요. 특히, 후설을 비롯하여 현상학 일반에서 강조되는 ‘지평(Horizont)’ 개념은, 대상이 나타나기 위해 배경 맥락이 먼저 주어져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함의한다는 점에서, 한 믿음은 정합적 믿음의 체계 속에서 평가받는다는 입장과 많은 부분 일치하죠.
다만, 데이비슨이 「진리와 지식에 관한 정합 이론」에서 자신의 정합주의가 결국 대응 이론과 구분되지 않게 된다고 강조하는 것처럼, 엄격하게 말해, 후설을 대응 이론과 정합 이론 중 어느 한쪽에만 귀속시키는 도식이 완벽하게 만족스럽지는 않다고 생각해요. 후설은 지평 속에서 출현한 대상이 결국 그 대상의 '본질(essence)'이고 '실재(reality)'라 주장하다 보니, 그의 현상학이 보여주는 것 역시, 데이비슨과 마찬가지로, 대응 이론과 정합 이론이 서로 대립하는 입장일 필요가 없다는 사실니까요.
(2) 정확히 제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입니다. 저보다 더 깔끔하게 설명해 주셨네요. 동의해주셔서 기쁩니다.
(2-a) 어떤 의미에서는 '회의주의’라고 할 수 있지만, 저는 형이상학에 대한 회의가 반드시 일상적 지식에 대한 회의를 함의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해요. 다만, 흄처럼 상식을 의지하면 되기 때문에 회의가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비트겐슈타인이 강조하듯이, 일상적 지식은 형이상학적 정당화를 애초에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든요. 즉, 페아노 공리계 같은 수학의 공리를 유의미하게 사용하기 위해 '수’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 요구되지는 않아요. 또 아름다운 미술작품을 그리기 위해 "미란 무엇인가?"에 대한 형이상학적 대답이 제시되어야 할 필요도 없고요. 오히려 우리는 형이상학에서 벗어날 때에야 비로소 우리의 일상적 '생활세계’가 언제나 이미(immer schon) 아무런 철학적 정당화를 요구하지 않고서도 잘 작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고 봐요. 저는 회의주의가 아니라, 굳이 말하자면, ‘직접적 실재론(direct realism)’ 혹은 '자연스러운 실재론(natural realism)'을 옹호하기 위해 형이상학을 비판하는 거죠.
(2-b) 저는 기본적으로 데리다와 비트겐슈타인이 동일한 철학적 입장을 견지하는 인물들이라고 봐요. (두 인물 사이의 유사성에 대한 연구는 꽤나 많아요. 이승종과 뉴턴 가버의 『데리다와 비트겐슈타인』을 비롯하여, 데리다 본인이 직접 읽고 극찬한, 핸리 스태튼의 Wittgenstein and Derrida라는 책도 있죠.) 비록 한쪽은 ‘해체적(deconstructive)’ 철학이라고 불리고, 다른 한쪽은 ‘치유적(therapeutic)’ 철학이라고 불리지만, 둘은 모두 형이상학을 비판하기 위해 또 다른 형이상학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중요한 공통점을 지니죠. 그래서 저는 데리다와 비트겐슈타인 사이의 변별점을 내세우기 보다는, 둘을 상호보완적으로 사용하여 하나의 ‘해체적 논리’ 혹은 '치유적 논리’를 명료하게 구성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위에 이뤄진 토론과 단절된 새로운 흐름에서 궁금한 점을 질문드리고 싶습니다. 발제문의 제목 가운데 "초월론적 철학의 모순"이라는 기술적 개념어 내지 관용구가 눈에 들어오는데, Transcendentalism of Husserlian phenomenology vs. Neo-Kantian philosophy 라는 대결구도를 배경에 두고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초월 철학이라는 개념어가 다의적/중의적Equivocal 함의를 지니고 있어 조심스러우나, 어떤 철학이 초월철학이라고 불리기 위해서는 "능동성이라는 지성의 능력에 미리 내재된 선험적 개념의 체계 내지 타고난 기능적 작용에 주로 의지해 의식 바깥세계에 대한 명증한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라는 핵심주장을 견지하고 있어야 비로소 그 이름표를 받을 자격이 생긴다고 말할 수 있을 듯합니다.
초월철학의 모순 극복을 말씀하셨지만, YOUN님께서 (1) 후설이 어떤 면에서 칸트 전통 내지 이전의 초월론적 철학의 모순과 한계를 그대로 지니는지에 관해서는 말씀을 하신바가 별로 없는듯 합니다. 둘을 동일한 혐의로 묶어서 현전의 형이상학이라는 혐의를 씌운다면 사상체계의 어느 지점이 그러한지 궁금합니다.
더불어 (2) YOUN님 자신이 갈길이 초월론적 철학의 전통을 비판적으로 교정하는 시도인지 아니면 완전히 결별하고자 하는 것인지에 관해서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답변 감사합니다. 일단 예시에 대해 한마디 보탠다면, 나무의 경제적 가치가 그 미적 가치와 전혀 별개라고는 생각 안 되는 것이, 보기에도 좋으니까 화분에 담겨 그 만큼에 팔리는 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물론 그 취지는 이해했습니다.
나무의 여러 속성이 나무 자체와 갖는 관계는, 갖가지 게임들이 서로에 대해 갖는 관계보다는 더 긴밀하다고 생각됩니다. 게임이라는 것은 정의하기 나름이기 때문에, 농구도 되고 포커도 되고 강강술래도 되고 혼자 다트 던지기도 되고 거의 무한히 확장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을 전부 묶어주는 유사성이 있는지 의문입니다. 반면 나무의 여러 속성들은 나무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에 정의하기 나름이 아니라 이미 규정되어 있을 것입니다. 가령 나무는 화분에 담아 키우거나 집을 짓는 데는 적합하지만 톱을 만드는 데는 그렇지 않은데 여기서 뭐가 되고 안 되고는 나무의 속성에 의해 정해져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나무의 규정에 이르렀는가는 또 다른 문제일 겁니다.
언급하신 비판의 대상인 형이상학자들 이외에 YOUN 님이 지향하시는 실재론 전통에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아퀴나스-브렌타노 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1) 칸트와 후설은 모두 지식의 '가능 조건’을 다룬다는 점에서 ‘초월론적(transzendental)’ 철학이라고 불릴 수 있다고 봐요. 문제는, 이러한 식의 철학이, 선험적 종합판단에 대한 정당화를 통해서든지(칸트) 지향적 관계에 대한 기술(후설)을 통해서든지, 결국 "c가 지식의 조건(혹은 한계)다."라는 주장을 적극적으로 제시하려 한다는 점이라고 생각해요. 지식의 가능 조건에 대한 이런 메타적인 진술은 도대체 어떠한 근거 위에서 가능한 것인지가 저에게는 분명하지 않거든요.
그러니까, 모든 지식이 특정한 조건을 바탕으로 성립한다면, "모든 지식이 특정한 조건을 바탕으로 성립한다."라는 지식은 과연 어떠한 조건을 바탕으로 성립하는지가 의문스러운 거죠. 이러한 문제제기에 대해 (a) 초월론적 철학 자체는 아무런 조건 없이 그 자체로 지식의 가능 조건을 순수하게 직관한다고 하면 '모순’이 발생하게 되고, (b) 초월론적 철학 역시 다른 조건에 의존하고 있는 상대적 지식이라고 하면 '회의’가 발생하죠.
(2) 굳이 말하자면, 저는 칸트주의보다도 헤겔주의를 지지해요. 지식의 '가능 조건’을 특정한 방식으로 규정하거나 명시하는 논의보다는, 우리 지식이 끊임없이 부정되고, 수정되고, 갱신되는 과정 속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철학이 더 현실적이고 설득력 있다고 생각합니다.
(1) “나무의 여러 속성이 나무 자체와 갖는 관계는 이미 규정되어 있다.” 아마도 이런 주장은 크립키 같은 본질주의적 형이상학자들이 지지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가령, "물은 H2O이다."는 후험적이지만 필연적인 문장이라 어떠한 가능세계에서도 '참’이 된다는 주장 말이에요. 제 생각에, 여기에 대해서는 두 가지 반응이 가능할 것 같네요.
첫째로, 후설 본인은 다양한 인식의 사태 속에서도 반복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본질(Wesen)'이 존재한다고 강조한 철학자죠. 후설 현상학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가 바로 ‘형상적 환원(eidetische Reduktion)’ 혹은 '본질직관(Wesensanschauung)'이라는 방법을 통해 본질을 기술하는 작업이기도 하고요. 후설 본인이라면 "나무의 여러 속성이 나무에 의해 이미 규정되어 있다."라는 주장에 대해 반대하지 않았을 것 같기도 해요.
둘째로, 후설의 현상학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후대 철학자들은 이미 규정되어 있는 ‘본질’ 개념에 대해 회의적이죠. 결국 '본질’이라는 것조차도 가족 유사적으로 정의될 수밖에 없다는 게 중요한 비판으로 제시되니까요. 가령, 나무가 톱을 만드는 데 적합하지 않다는 주장도, 어떤 대상을 '나무’라고 부를 것인지, 어떠한 종류의 '톱’이 필요한 것인지, 얼마만큼의 효용성을 '적합하다’고 규정할 것인지에 따라 참/거짓이 달라지겠죠. 결국, 누가, 무엇을 위해, 어떠한 방식으로 '나무’와 '톱’과 '적합성’을 규정하는지에 따라 "나무는 톱을 만드는 데 적합하다."라는 주장이 가능할 수도, 가능하지 않을 수도 있게 되는 거죠.
(2) 제가 나머지 철학자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잘 알지는 못해서요. 다만,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는 후설과 유사한 방식으로 직접적 실재론을 옹호하려는 철학자들에게 상당히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맥도웰이 그 대표적인 예죠. 맥도웰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제2의 자연’ 개념이 마음과 세계 사이의 이분법을 해소하기 위한 통찰을 제시한다고 주장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