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건 교수님에 대한 단상

어젯밤 꿈에서 김영건 교수님을 만났다. 주일에 낯선 교회에 갔더니 김영건 교수님께서 계셔서 "교수님이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하고 여쭤보았다. 교수님은 기독교 신자가 아니셨으니 말이다. 꿈 마지막 부분에 김영건 교수님과 배를 타고 강을 같이 건너다가 깼는데, 일어나서 뭔가 마음이 뒤숭숭했다. 김영건 교수님이 최근 대장암으로 큰 수술을 받으셨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설마 했더니, 아침에 서강대 철학과 공지방에 김영건 교수님의 부고가 올라왔다.

김영건 교수님은 서강대에서 굉장히 유명한 분이셨다. 정말, 모든 철학과 학생들이 좋아하고 존경한 분이었다. 재직하신 기간동안 서강대 철학과에 '영건 학파'를 만드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영건 교수님 덕분에 비트겐슈타인, 셀라스, 맥도웰을 배운 학생들이 많았고, 또 이 점 때문에 서강대 내에서 아주 독특한 분석철학 흐름이 이어지기도 했다. 나도 대학원 석사 1학년 시절에 김영건 교수님을 만나고서 공부의 방향 자체가 완전히 달라진 학생 중 하나이다. 김영건 교수님이 아니었다면, 비트겐슈타인을 제대로 공부할 생각조차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김영건 교수님은 여러 가지 철학적 주제들을 다루셨지만, 그 중에서도 나는 김영건 교수님의 '칸트-비트겐슈타인-셀라스 논제'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우리의 모든 사유가 소위 '이성의 논리적 공간' 혹은 '이유의 논리적 공간'이라는 개념의 질서에 매개되어 있다는 것이 셀라스의 핵심 논제이다. 김영건 교수님은 이 논제가 칸트로부터 시작되고 비트겐슈타인에게서 발전되어 셀라스에게까지 이어진 것이라고 지적하셨다.

나는 셀라스에 대한 칸트와 비트겐슈타인의 연관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번스타인의 지적이 매우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성의 논리적 공간에 대한 셀라스의 주장을 '칸트-비트겐슈타인-셀라스의 논제'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그것은 우리의 경험적 내용, 언어적 내용, 심성적 내용은 이성의 논리적 공간, 즉 개념적이며 규범적인 규칙들을 선제한다는 논제이다. 따라서 개념적이며 규범적이고 지향적인 규칙들은 경험적, 언어적, 심성적 내용을 구성하는 역할을 한다. (김영건, 2014: 22-23)

그러나 칸트-비트겐슈타인-셀라스 논제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논쟁들이 있다. 가령, 김영건 교수님은 소위 '피츠버그 학파(Pittsburgh school)'의 대표적인 인물들인 맥도웰과 브랜덤이 칸트-비트겐슈타인-셀라스 논제를 계승하는 방식에 대해 자주 의문을 표하셨다. 두 인물은 개념의 질서가 지닌 중요성을 정당하게 부각시켰지만, 그 과정에서 과학적 실재나 과학적 진리를 폄하하는 오류를 범하였다는 것이었다. 칸트-비트겐슈타인-셀라스 논제를 받아들이면서도 여전히 과학적 진리와 과학적 실재를 옹호할 수 있다는 것이 김영건 교수님의 철학적 입장이었다.

이성의 논리적 공간에 대한 셀라스의 생각은 맥도웰과 브랜덤에 의해 더욱 심화된다. 로티가 지적하는 것처럼 이것은 분석적 칸트주의로부터 분석적 헤겔주의에로의 이행이다. 분석철학이 헤겔에 대한 혹똑한 비판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철학사적 사실에 비추어본다면, 분석적 헤겔주의는 참으로 역설적이며 흥미로운 현상이다. 그러나 나는 칸트-비트겐슈타인-셀라스의 논제를 통해 이런 분석적 헤겔주의가 우리가 의존하는 개념틀의 제약성을 무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나아가 그것은 셀라스 철학을 구성하고 있는 또 다른 주요 축인 과학적 이미지에 대해서 소홀하게 생각하고 있다. (김영건, 2014: 5)

다른 말로 하자면, 김영건 교수님의 이런 입장은 셀라스가 제시한 '현시적 이미지(manifest image)'와 '과학적 이미지(scientific image)'를 화해시키기 위한 노력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셀라스는 우리가 경험하는 일상적 세계를 '현시적 이미지'라고 표현하고, 과학이 제시하는 인과적 세계를 '과학적 이미지'라고 표현한다. 그는 얼핏 서로 상충하는 것처럼 보이는 두 이미지를 어떻게 화해시켜야 하는지가 오늘날 철학의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셀라스를 계승하는 철학자들 중 소위 '셀라스 좌파(left-wing Sellarsian)'에 속하는 맥도웰과 브랜덤은 개념의 질서를 현시적 이미지에만 국한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김영건 교수님은 과학적 이미지 역시 현시적 이미지처럼 개념의 질서를 바탕으로 성립한다는 사실을 지적하시면서 맥도웰과 브랜덤을 비판하셨다. 칸트-비트겐슈타인-셀라스 논제를 계승하면서도 과학적 이미지의 중요성을 강조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김영건 교수님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셨다.

셀라스가 주장하는 현시적 이미지와 과학적 이미지를 이성의 논리적 공간과 경험적 서술, 혹은 인식적 사실에 관계하는 공간과 자연적 사실에 관계하는 공간, 또는 지향적 질서와 자연적 질서, 인식적 질서와 존재적 질서라고 규정할 때, 맥도웰이 지적하듯이 그것들의 구분이 개념적인 것과 비개념적인 것의 대비로 이해할 수 있지만,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다. 과학적 이미지는 현시적 이미지와 마찬가지로 세계, 자연을 개념화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그것은 비개념적인 것이 아니다. 맥도웰이 이성의 논리적 공간에 대비하여 자연의 논리적 공간이라고 부른 것처럼 자연의 논리적 공간은 자연의 비개념적 공간이 아니라 여전히 논리적 공간이다. […] 이런 의미에서 셀라스가 지향적 질서와 자연적 질서, 인지적 질서와 존재적 질서를 구분할 때,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개념적 질서와 비개념적 질서의 구분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를 경험, 이해, 설명하는 두 가지 방식과 질서에 대한 개념화이다. (김영건, 2014: 215)

나는 과학에 대해 진화론적이고 실용주의적인 입장을 취하다 보니, 김영건 교수님의 주장들이 다소 강하게 느껴졌다. 특별히, 김영건 교수님께서 인과적 질서, 논리적 질서, 수학적 질서 등을 우리가 보편적으로 선제할 수밖에 없는 개념틀에 포함시키시는 것에 동의하기 힘들었다. 김영건 교수님께서 반박에서 면제된 특권적 믿음들을 '개념틀'이라는 용어로 무비판적으로 상정하고 있으신 것이 아닌지가 항상 의심스러웠다. 적어도, 나에게 그 질서들은 인간의 생존에 유익하기 때문에 널리 수용되는 '도구' 정도의 의미만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김영건 교수님과의 이런 의견 차이는 언제나 즐거운 것이었다. 김영건 교수님은 분석철학자 특유의 날카로움을 지니고 있으셨으면서도 매우 유머가 많으신 분이셨다. 학생들의 주장을 논증으로 하나하나 깨부술 때에도 특유의 유쾌함을 잃지 않으시는 분이셨다. "인과적 질서가 선험적이지 않다고요? 미친 거 아니에요?!"라고 교수님께서 장난스럽게 말을 이어나가실 때마다 약이 오르면서도 정말 신이 났다. 김영건 교수님의 입장을 반박하기 위해 애쓰면서 공부하게 된 것들도 정말 많다. 실제로, 내가 쓴 논문들 중 「실재의 저항은 과연 존재하는가?: 하버마스의 형식화용론 속 객관세계의 지위에 대한 비판」은 대학원 석사 1학년 시절에 김영건 교수님의 수업에서 하버마스의 『진리와 정당화』를 읽으면서 고민한 결과물이다. 「매개된 직접성: 지각적 경험의 개념적 성격에 대한 맥도웰과 브랜덤 사이의 논쟁」도 김영건 교수님의 『이성의 논리적 공간』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응답이다.

철학을 공부하는 자세에서도 김영건 교수님께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김영건 교수님은 언제나 '명료성'과 '논증'을 강조하셨다. 아무리 어려운 텍스트를 읽더라도, 그 텍스트를 자기 것으로 충분히 소화하기 위해서는 내용을 깔끔하게 한두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특별히, 두 문장으로 요약할 때는 '전제'와 '결론'이라는 논증의 형식을 갖추어야 한다고 이야기하셨다. 그래야 그 텍스트가 말한 내용이 정말 옳은지를 따져볼 수 있으니 말이다. 가령, 나는 대학원 석사 1학년 시절에 김영건 교수님의 학부 언어철학 수업을 구경하러 갔다가, 김영건 교수님이 한 학생을 다음과 같이 지도하시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다.

김영건 교수님 : 그 사람,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이 무슨 내용이에요?
학생 : 그러니까, 서양 철학이 존재 망각을 했는데,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를 잊어버려서…….
김영건 교수님 : 그게 무슨 소리예요? 너무 길잖아! 한 문장으로!
학생 : 아…… 음…… 어…….
김영건 교수님 : "존재를 시간의 지평에서 사유해야 한다." 이거 아니에요? 물론, 저 말이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인지는 더 따져봐야겠지만, 책을 읽었으면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어야죠.

이 장면은 두 가지 점에서 나에게 매우 충격적이었다. 하나는 분석철학자가 진행하는 언어철학 수업 시간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이 거론된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하이데거 같은 난해한 대륙철학자조차도 얼마든지 한두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나는 전형적인 대륙철학의 방식으로 하이데거와 가다머를 공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김영건 교수님의 텍스트 접근 방식이 너무나 신선하였다. 김영건 교수님을 통해 철학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비로소 제대로 알게 되었다.

아마 김영건 교수님에 대해 이런 특별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학생은 나 이외에도 정말 많을 것이다. 대학원생들끼리 이야기를 하는 자리에서 어떤 학생은 자신이 나중에 '영건 장학재단'을 만들겠다고 말한 적도 있다. 또 다른 학생은 '영건 논문상'을 주관하거나 '영건 논문집'을 편찬하고 싶다고 한 적도 있다. 나 역시 앞으로 한국철학사를 쓰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김영건 계보'를 그려야 한다고 종종 말하기도 했다. 그만큼 김영건 교수님은 학생들에게 친근하신 분이시면서도 존경받는 분이셨다. 김영건 교수님이 남기신 논문, 책, 블로그가 앞으로도 오랫동안 철학을 공부하는 후배들에게 계승되고 발전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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