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회 지정 논평자가 해야할 것

많은 철학 학술대회에서는 발표에 할당된 지정 논평자가 있습니다. 학술대회 운영 측에서야 논평자 지정이 피가 마르는 일입니다만, 어쨌든 잘만 되면 발표를 매우 유익하게 해줄 수 있는 제도입니다.

그런데 전 "지정 논평을 어떻게 하나?"에 대해서 지도를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냥 남들 하는거 곁눈질로 배운 것도 있고, 민폐를 끼치고 머리가 깨져가며 배운 것도 있죠. 이런 사단을 막고자 또 요즘 많은 학술대회에서는 정확한 지침을 내려주는 경우도 잦은 것 같습니다.

근데 논평 관련해서 올라왔던 댓글 및 링크된 글을 보고 여러 생각을 하게 되서, '"지정 논평할 때 염두에 둘 점"에 관해서 누구 하나쯤은 글을 써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글을 적게 되었습니다.

이하 내용은 여러 학술대회에서 받았던 지침들에 기초하여 작성되었습니다. 이중에는 '도의적인' 것도 있으나, 어떤 의미에서는 '실용적인' 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1. 논평은 생산적이어야 한다.

논평의 목적은 '내가 이 발표를 깨부수겠어!'가 되면 안됩니다. 논평의 목적은 결국 발표된 프로젝트의 장점을 부각시킬 방법을 제안하고, 단점을 보완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일단 논평을 맡게 되었다는건, 이 학술대회 주최 측에서 그 원고를 보고 어찌되었건 나름의 가능성을 보았다는 얘기입니다. 물론 논평에 있어서 내용에 대한 비판은 알파이자 오메가입니다. 하지만 그 비판은 '생산적 비판'이 되어야 합니다.

이는 비단 도의적인 문제만은 아닌게, "이 발표는 쓰레기야!"라고 말하는 것은 곧 그 주최 측이 그런 쓰레기를 분간할 능력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함의를 갖습니다. 논평자에게 대놓고 뭐라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한들, 주최를 맡았던 사람들은 이를 결코 쉽사리 잊지 않습니다.

2. 논평문 초고는 일주일 전에 미리 보내는게 바람직하다

논평문을 일찍 공유함으로써 발표자가 보다 숙고된 대답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것은 도의적으로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실용적' 면에서도 지정 논평자가 돌발 질문을 던지는 건 딱히 도움이 안되는 것 같습니다. 청중이 그 자리에서 예리한 질문을 던지는건 종종 '어, 저 선생, 좀 똑똑하구만'이라는 평판을 쌓는데 도움이 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미 발표문을 미리 씹고 뜯고 맛볼 수 있었던 지정 논평자가 돌발 질문을 던져서 발표자의 허를 찌르는건 그런 좋은 평판을 얻는데는 썩 도움이 되지 않는 듯 합니다.

(근데 사실, 논평문을 미리 받아서 발표 내용을 미리 수정해놓고 입 싹 씻는 발표자 역시 애석하게도 존재합니다. 논평자가 어색하게 '어 ... 초고에는 문제가 있었는데, 발표에서는 문제가 수정되었군요!'라고 말할 수 밖에 없게 되죠. 제 생각엔 이런 경우도 발표자가 딱히 좋아보이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3. 논평의 목적은 질의응답을 풍부하게 하는 것에 있다

지정 논평은 반드시 '발표 핵심에 대한 요약'를 포함해야 한다고 봅니다. 특히나 30분 이내의 짧은 발표의 경우, 청중은 그 발표 내용을 완벽히 숙지할만한 여유가 되질 않다보니 그런 요약이 큰 도움이 되지요.

이렇듯 시간이 촉박한 상황에서, 발표 원고에 대한 상세한 비평은 일주일 전 서면 논평으로 이미 발표자한테 갔어야 합니다. 그 자리에서 원고의 상세사항을 미주알 고주알 푸는건 '이게 무슨 소리야'하고 멀뚱거리는 청중들 앞에선 시간이 아깝죠.

대면 논평에서 중점이 되야할 것은 핵심적인 문제제기, 특히나 청중들의 질의응답 및 토론의 운을 띄우는 것이라 봅니다. 학술 발표의 실질적 목표는 많은 경우 '논문을 발전시키는데 써먹을 피드백'을 받는거니까요. 이런 목표에 지정 논평자가 협조할 수 있는 가장 큰 방법은 '내가 이 공간을 지배하는 자다!'가 아니라 청중이 놀 수 있는 판을 깔아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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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좋아요×무한입니다! 이런 생활에서 우러나오는 팁글들 너무 좋습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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