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의 철학』, 「초월적 경험론 - 보론」

뉴헤겔님이 올리신 글의 보론 부분을 읽고 정리한 글입니다. 『들뢰즈의 철학』, 제1장 「초월적 경험론: 들뢰즈 인식론의 칸트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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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와 데리다는 차이를 논한다는 점에서 유사한 철학을 전개했다고 여겨지나, 경험론을 대하는 입장에서 갈등한다. 데리다는 레비나스를 겨냥하여 경험론을 비판했는데, 들뢰즈와 레비나스를 묶어주는 공통분모가 경험론인바 데리다의 비판은 들뢰즈를 향하게 된다. 비판의 쟁점은 무엇이고,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면 다음과 같다.

1. 경험론은 현전의 형이상학인가?

레비나스의 경험론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레비나스가 감성 가운데 주어진 '흔적'이라고 일컫는 '궁극적 경험'은 무한의 이념의 현전을 무한히 연기시키는 방식으로 그 이념을 현시하는 일을 한다. 무한한 연기라는 부정적인 방식으로만 이념은 현전한다. 데리다식으로 말하면 흔적은 대리보충을 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래서 경험론과 어떻게 연결된다는 말인가?

만일 이념의 현시가 없다면 감성에 주어진 흔적은 타인이 아니라 외부의 감각적 자료에 불과하다. 타인에 대한 우리의 경험은 감성에 주어진 흔적이 대리보충을 통해 무한의 이념의 현시함으로써만 가능하다. 따라서 우리가 외부의 감각적 자료가 아닌 타인을 경험한다는 것은 사실상 무한의 이념을 경험한다는 것과 같다. 그리고 타인은 단순한 대상이 아닌 무한의 이념이다. (이 말은 타인은 주체의 모든 규정[한계지음]을 벗어나 있다는 말과 같다.)

일단 레비나스의 이러한 논리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을 떠나 데리다의 레비나스 비판에 집중하여 보자. 데리다는 레비나스가 현전의 형이상학을 전개한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이는 레비나스가 말하는 경험이 '결과로서의 경험'과 '근거로서의 경험'인 흔적으로 구분된다는 점을 포착하지 못한 잘못된 비판이다.

데리다는 "현상은 기호에 의한 근원적인 오염을 전제한다 (p. 61)"라며 기호가 현상(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대리보충의 기능을 한다고 말한다. 결국 데리다의 기호는 레비나스의 흔적과 사실상 같고, 둘은 대리보충을 통해 경험의 현전을 가능하게 해준다. 레비나스나 데리다 둘 다 흔적[궁극적 경험, 데리다에게는 기호]은 타인이 아니라 타인의 근거라고, 현전이 아니라 현전의 근거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로써 데리다가 레비나스에게 가한 <레비나스가 말하는 경험은 현전의 형이상학으로서의 경험>이라는 비판은 허수아비 때리기임이 밝혀진다. 레비나스가 자신의 경험론에서 집중하여 논하고자 한 것은 현전의 형이상학으로서의 경험인 결과로서의 경험이 아닌 근거로서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2. 경험론과 존재 사유

위에서 제쳐둔 문제인 레비나스 논리의 옳고 그름을 따질 차례이다. 특히, 흔적이 대리보충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이유, 달리 말해 흔적이 무한을 현시할 수 있는 이유에 대해 레비나스는 우리에게 납득 가능한 대답을 제공해야 한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무한은 "절대적으로 부정적인 방식으로서가 아니라 유한을 매개로 한 방식, 즉 경험을 통한 부정적 현시에 의해서만 (p. 63)"나타난다. 즉, 무한은 언제나 "유한 속의 무한 (p. 63)"이므로, 무한은 경험 안에서만 현시될 수 있다.

레비나스의 위 대답 때문에 레비나스의 경험론은 다시 데리다의 비판 속에 놓이게 된다. 데리다의 레비나스 해석에 따르면 레비나스의 주장 <유한을 통해 무한이 나타난다>로부터 <무한이 유한성의 지평을 가능케 해주는 '존재'에 매개되어 있음>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레비나스가 말하는 무한을 부정적으로 현시할 때에 흔적은 유한 속에서 그것을 행하는 것이고, 이는 곧 흔적이 유한성의 지평을 가능하게 해주는 '존재'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뜻한다. 결국 <흔적에 근거한 레비나스의 주장은 본성상 비경험적인 '존재'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므로 참다운 의미에서 경험론을 수행하지 않고 있다>가 데리다의 레비나스 비판의 핵심이다. 그리고 이를 확장해 보자면 경험론이 본성상 존재 사유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말은 모든 철학이 존재 사유(로고스)를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 밝혀진다. 데리다식으로 표현하자면 철학은 어쩔 수 없이 그리스인들의 손아귀에 있다.

3. 경험론에서 계사는 존재 동사가 아니라 접속사이다.

레비나스 철학은 사실 데리다의 경험론 성립 불가능성에 대한 비판이 지적하는 바로 그것, 즉 존재 사유를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기술된 것이다. 그는 존재 사유는 필연적으로 타인에 대한 폭력을 함축하기에 그것을 멈추기 위해 존재 사유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 방안으로 제시된 것이 바로 '존재한다(있다; etre)'라는 술어(와 그러한 술어 기능)이 배제된 언어 활동이다.

위에서 살핀 데리다의 레비나스 비판을 이 맥락에서 번역해 보면 '존재한다’가 배제된 언어활동은 불가능하다로 번역된다. 만일 레비나스의 경험론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계사(copula) 기능 또한 포기해야 한다. 그 결과 타인도 존재와 다른 것일 수 없고, 오히려 어떤 식으로든 존재와 매개되어 있는 것이게 된다. 따라서 존재의 언어 활동에서의 근본성 때문에 경험론이라는 기획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알아본 데리다의 경험론 비판은 레비나스를 겨냥한 것이었지만, 그 범위가 경험론 전체로 확장된 바 초월적 경험론을 주장하는 들뢰즈도 데리다의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들뢰즈는 "계사는 존재동사가 아니라 접속사 (p. 67)"라며 존재 사유 없이도 우리는 사유(언어) 활동을 수행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하늘은 푸르다(sky is[est, ist] blue)>라는 문장은 계사 역할을 하는 존재동사를 포함하고 있는데, 이 말은 사실 '하늘임'과 '푸름'이라는 두 속성이 이웃(혹은 배치)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할 뿐이므로 계사를 존재동사라고 여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들뢰즈의 주장이다. 오히려 계사는 속성들의 배치를 의미하는 접속사(et; and)일 뿐이다. 이 주장을 주체의 영역에서 생각해 보자. 경험론에 따르면 주체는 서로 관련이 없는 속성들의 배치 또는 상태들의 연결 상태에서 성립하는 것이고, 속성 혹은 상태와 별도로 주체가 존재한다는 주장은 틀렸다. 그리고 자신들의 주장이 참임을 입증하는 것이야말로 경험론자들의 사명이다.

4. 경험론은 철학인가? 혹은 들뢰즈와 레비나스는 그리스인인가?

앞선 데리다의 주장에 따르면 철학은 본성상 존재 사유를 일컫는 것이기에 참된 의미의 경험론은 철학일 수 없다. 만일 사실이 그렇다면 들뢰즈나 레비나스는 자신 사유가 철학이 아니라고 공언할 것이다. 하지만 위 3절에서 보았듯이 그들은 존재 동사가 배후에 은폐되어 있지 않은 언어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들뢰즈 경험론의 핵심 주장 가운데 하나"가 바로 "(철학의 기초 )개념들은 그것들이 탄생했고 사용되었던 그리스적 토양을 완전히 상실 (p.71)"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들뢰즈에게 있어 "개념은 결코 그리스인들의 것이 될 수 없고", "획득된 경험을 기술하는 언어는 본성상 결코 존재 사유를 전제하지 않는다. 사유는 이제 그리스인들의 소멸 뒤에 유목민들에게 돌아간 땅, 바로 경험론의 땅이다 (p. 72)" 결국 데리다의 경험론의 성립 불가능성 비판은 들뢰즈가 보기엔 반박 가능하다.


들뢰즈(나아가 들뢰즈를 옹호하는 듯한 저자)의 데리다 반박이 옹호되기 위해서는 <계사는 존재동사가 아니라 계사>라는 그들의 주장이 참이라고 밝혀져야만 한다. 그러나 "계사는 존재 동사를 함축하는 것이 아니라 속성들의 배치를 의미하는 접속사임을 밝히는 것"이 아직 "경험론의 사명 (p. 67)"이라면, 경험론자들의 주장을 적어도 지금은 수긍할 수는 없다. 그러니 "획득된 경험을 기술하는 언어는 본성상 결코 존재 사유를 전제하지 않는다. 사유는 이제 그리스인들의 소멸 뒤에 유목민들에게 돌아간 땅, 바로 경험론의 땅이다 (p. 72)"라며 사실상 들뢰즈를 옹호하는 저자의 말 또한 아직 받아들일 수 없다. 내가 보기에 "(철학의 기초) 개념들은 그것들이 탄생했고 사용되었던 그리스적 토양을 완전히 상실 (p.71)"했다는 들뢰즈의 경험론은 여전히 그저 주장인 채로 남아있고, 데리다의 들뢰즈 비판이 더 납득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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