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의 철학』, 제1장 「초월적 경험론: 들뢰즈 인식론의 칸트적 배경」

들뢰즈 전공인 지도교수님 밑에서 공부를 하면서도 정작 들뢰즈를 각 잡고 읽어본 적은 없는데, 마침 아무것도 할 게 없는 코로나 격리 기간을 기회 삼아서 한번 읽어봤습니다. 여기에 계실지도 모르는, 들뢰즈에 관심 있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 한 번 정리한 걸 올려봅니다.


서동욱, 『들뢰즈의 철학』, 민음사, 2002, 17-57.

1 초월적 경험론: 들뢰즈 인식론의 칸트적 배경

1) 감성에서의 내적 차이와 강도 이론: 대칭적 대상들의 역설과 지각의 예취

들뢰즈 철학 전반의 기획은 “차이 자체”의 가능성에 대한 탐구이다. 차이 자체는 “어떤 방식으로든 동일성에 종속되지 않는 차이”이다. 다르게 말하면, 그것은 개별적인 것들을 하나의 표상 내지 개념 아래 포섭하기 위한 차이가 아니다. 그것은 비개념적이면서 대상의 발생을 가능케 하는 선험적인 조건이다.

차이 자체는 두 항 사이에서 경험적으로 찾아질 수 있는 차이가 아니라, “하나의 개별자가 그 개별자로서 발생할 수 있게 해주는 근거”로서 하나의 초월적 조건이다. 한편 “경험론”이라는 말을 통해 들뢰즈는 감성적인 것에 우위, 특권을 부여한다. 결국 그는 “초월적 경험론”을 통해 차이 자체를 감성적인 것 안에서 발견하려고 한다.

들뢰즈는 『순수이성비판』의 「원칙의 분석학」에서 제시되는 ‘지각의 예취’에 주목한다. 지각의 예취들과 관련하여 칸트는 모든 감각적 대상들이 “강도적(intensiv) 크기”를 갖는다고 말한다. 강도적 크기는 ‘직관의 공리’에서 제시된 “외연적(extensiv) 크기”와 대조되는데, 외연적 크기의 포착은 연속적이지만, 강도적 크기의 포착은 순간적이다. 다시 말해 외연적 크기는 서로 독립적인 요소들을 종합한 것에 상응하지만, 강도적 크기는 그렇지 않다. 가령 1미터는 100개의 1센티의 종합에 상응하지만, 100도는 100개의 1도의 종합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의식에 의해 포착되는 강도는, 포착되지 않는 미세한 지각들 사이의 “변별적[차이적, 미분적] 관계”(rapport différentiel)에 의해 비로소 가능하다. 가령 배고픔은, 이러저러한 요소들의 결핍들을 외적으로 단순히 모아두는 것으로는 설명되지 않고, 그 요소들이 교호적, 내적으로 결합됨으로써 발생한다. 한데 이 미세 지각 사이의 변별적 관계는 지성에 근거하지 않고 순전히 감각들 사이에서 성립한다는 점에서 비개념적이다. 바로 여기서 들뢰즈는 차이 자체가 실재의 발생 조건이라는 자신의 핵심 테제의 실마리를 찾는다.

들뢰즈는 이러한 강도 이론을 바탕으로 자주 “실재를 이러한 강도적 크기의 발생으로 기술”하고자 한다. 대표적인 예로 다음을 들 수 있다. 스피노자에서 양태는 한낱 유일실체의 환상이 아니라 개별자로서 나름의 고유성을 갖는가? 들뢰즈의 해석에 의하면, 양태─“양태의 본질은 힘이다.”─가 강도적이기 때문이다. 개별자들은 유일실체의 양태이지만, 그것이 유일실체의 단순한 외연적 부분이라는 뜻은 아니다.

2) ‘초월적 경험론’이라는 말의 의미

들뢰즈의 철학은 어떤 의미에서 ‘초월적 경험론’인가? 먼저, 의식에 경험되는 대상들은 변별적 요소들의 종합을 통해서만 발생하는 복합체들이다. 이 복합체들을 구성한다는 점에서 변별적 요소들은 ‘근거’들이다. 한데 변별적 요소들은 의식의 경험을 구성하면서도 그 자체로는 파악되지 않는 무의식적 요소들이라는 점에서 경험되지 않는 것이다. 이 점에서 변별적 요소들은 무엇보다도 ‘선험적’인 근거가 된다. 초월적 경험론은 이처럼 경험되지 않으면서도 (현실태로서의) 경험을 가능케 하는 (잠재적인 것으로서의) 근거들을 탐구한다는 점에서 종래의 (영국)경험론과 변별되는 ‘초월적’ 경험론일 수 있다. 한편, 초월적 경험론의 탐구 대상인 경험의 가능 근거들은 선험적 개념 쪽에서 찾아지기보다 감각 지각 속에서 찾아진다는 점에서 ‘경험론’이다. 변별적 요소들은 주관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고 주관의 수용 대상이며, 주관에 실제로 주어지는 대상이다. (이런 의미에서 들뢰즈는 의식 상관적 경험은 대상을 갖지 않는 환각적[hallucinatorie]인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주관에 실제 수용되는 이 요소들의 변별적, 미분적 관계들, 그리고 그것들의 관계를 산출하는 차이 자체는 주관과 독립적으로 성립한다. 그렇지 않고 이 관계들이 주관에 귀속될 경우 이 철학은 사실 초월적 ‘경험론’이 아닌 ‘관념론’으로 복귀할 것이기 때문이다. 들뢰즈에 의하면, 차이 자체는 다양이나 소여가 아니라 이를 산출하는 “예지체” 또는 “이념”의 심급에 위치한다(『들뢰즈의 철학』, 31-32). 한데 차이 자체는 지성적 직관의 대상이나 형이상학적 실재가 아니라는 점에서 종래의 의미에서의 이념과 다르다. 그리고 이 이념은 하나나 다수(multiple)가 아닌 다수성(multiplicité) 개념으로서, 변별적 요소들, 요소들 사이의 변별적 관계, 나아가 우리의 경험을 구성한다(『들뢰즈의 철학』, 32).1) 이념으로서의 차이 자체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성격 규명이 뒤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덧붙이자면, 초월적 경험론은 그 발상의 철학사적 근간을 셸링의 기획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후기 셸링의 철학 또한 “상위 경험론”이라는 이름 아래, 후험적으로만 발견될 수 있으면서도 경험 자체는 아닌 그런 최상의 인식 원리를 탐구하고 있다(『들뢰즈의 철학』, 33).

3) 개념의 획득 문제: 능력들의 일치와 도식 작용론의 한계

칸트에 의하면 ‘초월적’이란 대상들이 아닌 대상 일반에 관한 조건들에 붙는 수식어이다. 들뢰즈의 초월적 경험론은 대상의 선험적 근거에 관한 이론이라는 점에서 칸트의 정의에 부합하지만, 칸트와는 달리 대상 일반이 아니라 실재 대상, 가능한 경험의 조건이 아닌 실재 경험의 조건을 제시하려 한다. 다르게 말하면, 칸트의 초월철학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전칭 판단의 대상인 데 반해, 들뢰즈의 관심은 단칭 판단의 대상의 조건을 구명하는 것이다. 들뢰즈는 칸트의 가능한 경험의 조건이 지나치게 일반적인 조건이라고 비판하며, 이에 따라 들뢰즈 인식론의 모델은 『순수이성비판』보다도 『판단력비판』의 숭고론을 따른다.

들뢰즈는 미세한 변별적 지각으로부터 실재가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실재는 아직 하나의 대상이라고 할 수 없는데, 직관에 나타난 이 실재를 동일한 것으로서 식별하는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동일성(정체성)이 없는 대상 없는 형상(figures sans objet)이다. 그렇다면 동일성 없는 실재로부터 어떻게 개념적으로 파악 가능한 대상들이 성립할 수 있는가? 이는 지성과 감성이라는 이종적인 두 능력의 일치가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칸트의 물음을 경유하여 답해져야 한다. 칸트 자신은 초월적 도식론에 의해 양자의 일치가 보장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도식론에서 상상력은 지성에 종속된 능력으로 나타난다. 상상력은 지성에 근거한 규정들에 따라서만 지성과 감성을 매개한다. 그렇다면 지성에 종속된 능력이 어떻게 지성과 이질적인 능력을 매개할 수 있는가? 양자를 일치시키는 능력은 지성의 하위 능력이 아니라 그보다 근원적인 것에서 찾아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양자의 일치는 한낱 우연적이고 임의적인 것으로 남을 터이다. 들뢰즈는 칸트가 미완으로 남겨놓은 문제를 계속 쫓아 완전한 답을 내놓고자 한다.

4) 『판단력비판』의 매개적 의미: 능력들의 일치와 숭고

칸트는 이 문제가 『순수이성비판』 안에서 해결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가 밝혀낸 것은 경험에 대한 인식이 가능하기 위해 감성과 지성이 일치해야 한다는 것뿐, 이 일치의 근거가 무엇인지는 제1비판에서는 답해질 수 없다. 비판철학의 프로그램을 견지하려면 합리론자들처럼 신을 끌어들이거나 실체로서의 자아에 호소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판단력비판』에서 이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도식론에서 기술된 상상력의 활동은 지성에 귀속된 채 이루어지는 제한적인 활동인 반면, 판단력비판에서 개진되는 숭고에 관한 분석은 지성에 제한되지 않는 상상력의 자유로운 활동, 나아가서는 지성과 감성의 자유로운 일치를 보여준다. 전자의 규정된 일치는 후자의 규정되지 않은 일치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 그리고 후자의 일치는 감정(Gefühl)에서 이루어지는 숭고에서 나타난다.

숭고란, 자연이 이념에 도달하지 못함으로써 이념이 현시된다고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숭고는 이념의 절대적 전체성에 대한 이성의 요구가 직관에 부과될 때, 표상들의 총괄을 통해 이념적인 것을 직관에 현시하도록 요구받는 상상력이 한계에 직면함으로써 성립한다. 상상력은 이념의 총괄에 부적합한 것으로 드러나고 이념에 도달할 수 없다는 점을 현시함으로써, 이념을 부정적인 방식으로 표현한다. 이처럼 부정적인 방식으로 자연 속에 나타나는 대상을 숭고한 것이라고 한다. 이때 상상력은 부정적인 방식으로이기는 하지만 초감성적 용도(übersinnliche Bestimmung)로 사용되었으며, 정신을 감성의 너머로 확장시키고 있다. “이성뿐 아니라 상상력도 ‘초감성적 용도’를 가진다.”(서동욱, 2002: 41에서 재인용) 이처럼 초감성적 용도를 위한 능력들의 실행은 변형을 거쳐 들뢰즈에게 ‘초재적 실행’이라는 개념으로 수용된다.

숭고는 미리 규정된 법칙에 따라 일어난 일치가 아니라, 이성과 상상력이 제각기 활동하면서 충돌하고 모순을 빚어냄으로써 만들어내는 불일치의 일치이다. 도식론에서처럼 지성과 감성이 규정된 일치를 이룰 수 있는 것은 이처럼 일치가 발생적으로 성립하기 때문이다.

칸트 해석의 측면에서, 들뢰즈는 『판단력비판』의 주된 목표인 사변적 관심과 실천적 관심의 연결을 능력들의 일치라는 관점에서 독해하고 있다. 칸트에 의하면 숭고는 우리가 도덕적 존재임을 표현하는 감정인데, 그렇다면 도식론의 기저에 숭고에서의 능력들의 일치가 자리한다는 말은 이론적 관심이 실천적 관심에 종속함을 뜻한다. 이것은 실천이성을 우위에 두고 이론이성과 실천이성을 매개하는 칸트의 기획에 부합한다.

5) 초월적 경험론의 모델로서의 숭고 분석

칸트 연구자로서 들뢰즈는 숭고 분석을 통해 도식의 심연에 있는 근원을 드러내지만, 초월적 경험론자로서 그는 숭고론을 하나의 인식적 모델로 차용한다. 그는 칸트에 의해 구별된 두 종류의 감성(아이스테시스, aisthesis), 즉 시공간 형식을 통해 수용되는 객관적 요소와 판단력비판에서 문제시되는 미감적 즐거움이라는 주관적 요소의 구분을 철폐한다.

들뢰즈는 두 종류의 문자를 구별한다. ‘우리의 지성에 의해 쓰인 문자’는 지성에 매개된 표상인 반면, ‘사물의 형상이라는 문자’는 강도적으로 발생한 크기로서 ‘형상’, ‘기호’와 같은 개념이다. 이 기호는 숭고의 대상이 상상력을 자극해서 상상력과 이성의 발생적 일치를 일으키듯이 폭력적으로 정신에 사유를 강제함으로써 개념을 발생시킨다. 지성에 매개되지 않은 미지의 형상이 사유로 하여금 개념을 발생시키는 과정에 대한 분석을 들뢰즈는 프루스트론을 통해 수행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마르셀은 홍차에 적신 마들렌을 맛보면서 불현듯 마들렌을 먹었던 옛날의 고향 콩브레를 떠올린다. 들뢰즈가 이 예시에서 지적하는 핵심은, 콩브레라는 과거에 대한 사유가 의식적·의도적으로 수행된 것이 아니라, 마들렌으로 상징되는 감각적 기호에 의해 비자발적으로 일어난 기억이라는 점이다. 의식이 자발적으로 과거를 떠올릴 때 출현하는 과거는 현재 의식의 회상 능력으로 환원되는 것이며, 따라서 진정한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심적 상태의 변양에 불과하다. 의도적으로 기억해낸 과거와 현재의 차이는 회상된 상(像)과 지각된 상의 차이에 불과하며, 양자의 차이는 정도 차이에 불과하다. 반면 비자발적 기억을 통해 의식에 출현하는 과거는 의식의 회상 작용으로 환원되지 않는 과거 자체(즉자적 과거)를 가리킨다는 점에서 진정으로 과거와 현재 사이의 공명(résonance)이다. 기호로부터 사유의 발생과 개념의 형성은 이처럼 “비의존적인 이질적인 항들 간의 ‘이웃 관계’의 조화”(서동욱, 2002: 47에서 재인용)인 공명과 더불어 일어난다. 공명으로부터 두 항(예컨대 과거와 현재)의 자기동일성(정체성), 두 항의 유사성, 두 항의 차이성 등 비로소 개념이 형성된다.2)

한편 동일성, 유사성, 차이성3)은 근원적인 것이 아니라 파생적인 것이다. 공명을 통한 개념 형성의 선험적 근거는 앞서 ‘즉자적 과거’로 칭해졌던 차이 자체이다. 프루스트의 예시에서 비자발적 기억에 의해 발견된 과거의 콩브레는 경험상의 현재나 경험상의 과거와 다르기 때문에 차이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즉자적 콩브레는 그 자신이 고유한 본질적 차이로 정의된다.”(서동욱, 2002: 49에서 재인용) 이 차이는 경험상의 항들 사이에 차이를 만들어내는 까닭에 ‘차이를 만들어내는 자’(différenciant)로 불리며, 경험적인 것들의 차이, 동일성, 유사성을 성립시키는 선험적 근거이다.

차이 자체는 하나의 이념으로서 마치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상기를 통해 발견되며 경험적 차이, 동일성, 유사성 등의 원천이 된다. 그러나 차이는 이데아처럼 세계를 전체성 아래 통일시키는 방식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사유는 칸트의 숭고론에서와 같이 감각적 기호에 의해 차이 자체에 대해 사유하도록 한계로 내몰린다. 비자발적 기억에 의한 즉자적 과거의 현시란 다름 아닌 능력들의 초재적 실행에 의한 차이 자체의 현시이다. 한편 칸트에서 전체성의 이념이 부정적이고 모순적인 방식으로 현시되는 것과 달리, 차이의 이념은 부정적인 방식으로 나타나지 않으며 공명을 통한 경험의 발생의 차원 너머에 있는 ‘상위의 관점’으로서 어떤 모순 없이 나타난다. 또한 칸트의 이념이 전체성을 띤 채 세계를 하나의 통일된 목적으로 인도하는 것과 달리 차이 자체는 경험들이 통일성 없이도 차이를 지닌 채 공명하게 해주는 분열의 원리이다.

6) 경험의 필연성 문제

칸트가 경험의 필연성을 보증하기 위해 경험의 근거들을 주관에 귀속시키고 범주들에 의해 경험을 규정한 반면, 들뢰즈는 경험의 근거를 주관 밖에 귀속시킴과 더불어 필연성에 대해 칸트와는 상이한 입장을 취한다. 들뢰즈는 (니체와 마찬가지로) 경험의 필연성을 보장하는 것이 우연성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의 핵심에는 세계가 필연적 법칙에 의해 질서 지워지지 않는 혼돈, 카오스라는 생각이 자리하며, 들뢰즈는 세계의 원리로서 긍정될 것은 이 카오스뿐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어떤 우연적 요소가 경험 가운데 출현하든 그것은 세계의 원리(카오스_로부터 근거를 부여받은 필연적인 출현일 수밖에 없다”(서동욱, 2002: 54).4) 이런 의미에서 우연성과 필연성의 구별은 철폐되며, 들뢰즈는 칸트처럼 ‘가능한 경험 일반’에 대해 필연적이고 보편적인 조건을 탐구할 필요를 덜게 된다.

경험의 필연성에 관한 칸트와 들뢰즈의 입장 차이는 각각의 시대에 출현한 과학관의 차이를 반영한다. 칸트는 뉴턴 물리학의 출현과 더불어 대두된 과학적 지식의 보편성과 필연성이라는 패러다임에 부응하여 순수이성비판을 기획했다. 한편 들뢰즈의 사상에는 현대에 출현한 카오스 이론을 배경으로 하여 통일적이고 필연적인 법칙의 수립이라는 목표에서 벗어난 현대 과학의 패러다임이 반영되어 있다.5) “과학은 탐험할 수 있는 카오스의 작은 끄트머리를 위해서라면, 자신이 열망하는 합리적 통일성을 모두 포기할 것이다.”(서동욱, 2002: 55에서 재인용) 이러한 배경에서 들뢰즈는 고전 물리학에서와 같은 합법칙적 필연성이 인위적으로 조작된 가설들 위에서만 성립한다고 주장한다. 세계에서 성립하는 필연적 법칙과 그에 대한 인식은 같은 조건 아래 같은 일이 일어나도록 조성된 환경 아래에서만 제한적으로 타당하다는 것이다. 들뢰즈는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의 곳곳에서 주장했던 자연법칙의 보편성과 필연성을 하나의 “억견”(doxa)이라고 비판한다. 세계가 필연적 법칙들에 의해 정돈된 채 있다는 생각은 그 배후에 있는 카오스적 세계를 은폐하고 그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들뢰즈와 칸트의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들뢰즈의 철학 곳곳에는 칸트에 대한 끊임없는 수용과 재전유가 녹아들어 있다. 미세 지각의 미분적 관계를 통한 강도적 크기의 발생, 공명을 통한 기호의 인식, 인식에서 능력들의 초재적 실행과 같은 들뢰즈의 사유는 지각의 예취, 칸트의 숭고 이론 등을 독해하고 여기에 새로운 해석을 가하면서 얻어낸 것들이다.


1)베르그손이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2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다수성 개념, 즉 수적인 일(一)과 다(多)와 변별되는 다수성 개념에 관한 논의를 상기케 한다.
2)여기서 경험에 출현한 과거와 즉자적 과거가 구분되어야 한다. 공명 관계의 두 항 중 하나로서 현재와 쌍을 이루는 과거는 경험상의 과거이다. 반면 들뢰즈가 ‘즉자적 과거’라 부르는 것은 공명 속에 있는 항이 아니라 공명 자체를 가능케 하는 조건이다.
3)이때의 차이 역시 들뢰즈의 ‘차이 자체’ 개념과 구분되어야 한다. 여기서의 차이는 이미 개념적 층위에서 출현하는 차이인 까닭에 동일성에 종속되어 있는 반면, 차이 자체는 개념을 가능케 하면서 개념적 동일성에 종속되지 않는 상위 관점이다.
4)이 견해는 앞서 능력들의 규정된 일치의 근저에 능력들의 발생적 일치가 자리한다는 들뢰즈의 주장과 상통한다. 규정된 일치는 지성의 법칙에 따라 필연성을 띠고 나타나는 반면, 발생적 일치는 미리 정해진 법칙 없이 제각기 발현된 능력들의 우연적 일치이기 때문이다.
5)과연 카오스 이론을 비롯한 현대 과학 자체에 들뢰즈가 주장한 바와 같은 함축이 있는지는 비판적으로 검토해봐야 할 것이다. 한편 카오스 이론과의 관계와는 별개로 들뢰즈의 주장은 그 자체로 하나의 유의미한 패러다임을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출처:
https://blog.naver.com/wndyd75/221321869863
https://blog.naver.com/wndyd75/221496486589
https://blog.naver.com/wndyd75/222705038394
https://blog.naver.com/wndyd75/222705678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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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할 게 없다고 들뢰즈를 읽으시다니 정말 참 철학과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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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ㅋㅋㅋㅋ 군대 격리시설이라 컴퓨터도 뭣도 아무것도 없고 할 게 핸드폰이랑 공부밖에 없어서 그렇습니다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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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본인은 차이 자체가 다양이나 소여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지만, 솔직히 저는 차이 자체를 통해 개념의 발생을 설명하려는 시도와 '소여의 신화' 사이에 정말 본질적인 변별점이 있는 것인지 의문스럽네요.

현재와 과거 사이의 공명 효과를 통해 주어지는 옛날의 고향 콩브레가 '차이' 혹은 '차이 자체'라는 주장은 꽤나 독특하다고 생각해요. 아마도 이 주장은 소여의 신화에서 면제되어 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사실 이 주장조차도 '미세한 변별적 지각'을 '감각적 기호'로 상정하고 있는 이상, 다시 소여의 신화로 귀결되는 게 아닐까요? (사실, 제가 보기에는, 옛날의 고향 콩브레가 아니라 콩브레를 회상하도록 만든 미세한 변별적 지각이 차이 자체라고 해야 들뢰즈 본인의 입장에서는 더 일관성이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이렇게 미세한 변별적 지각이 차이 자체라고 인정하게 되면, 과연 들뢰즈의 주장이 기존 영국경험론과 본질적으로 다른지 의문스러워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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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들뢰즈의 입장을 영국 경험론자들의 주장에 접근시켜 설명하는 대목이 이 책 1장의 보론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답글을 보니 한번 그 부분을 보고 생각해봐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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