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문트 후설에 대한 플라톤주의적 오해

(전에 올린 글을 포함해 후설의 『이념들 I』을 읽어나가면서 써온 글이 몇 개 있는데, 오늘은 그 중에서 하나를 더 올려보려고 합니다.)

에드문트 후설의 이른바 "현상학"은 1900~1년의 『논리연구』에서 출범하였다. 그 책의 주요 쟁점은 논리학을 심리학으로 환원하고자 하는 심리학주의에 대립하여 그것을 비판하고 논리학을 참된 인식론적 토대 위에 정초하려는 것이다. 후설은 이 책에서 심리학주의를 이념성(Idealität)과 실재성(Realität)이라는 두 가지의 대립적 개념을 통해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가령 '2+3=5'와 같은 논리법칙은 그 계산하는 사람의 심리적 작용과 상관없이, 시공간적으로 불변적이다. 예컨대 2+3=5라는 계산을 100번 수행해도 그것의 진리는 변하지 않으며, 더한다는 작용 또한 근본적으로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심리적 작용은 이와 달리 시공간적으로 유한하며, 말하자면 곧 흘러가 사라져 버리게 되고, 사람마다 다른 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논리법칙은 모두에게 동일한 진리내용을 가지므로, 만약 이러한 논리법칙을 심리법칙으로 환원시키고자 한다면 그것은 이념성과 실재성의 혼동이며, 사고법칙의 기초인 논리법칙이 주관적이라는 말이 되므로 상호적인 사고 공유 또한 불가능해진다. 따라서 후설은 이러한 심리학주의의 모순을 "회의적 상대주의"라고 비판한다.

후설이 도입한 이 구별, 즉 이념성과 실재성의 구분은 그의 다음 저작이자 가장 영향력 있고 유명한 저작인 『순수현상학과 현상학적 철학의 이념들 1: 순수현상학의 일반적 입문』(1913)에서도 그대로 유지된다. 이 책의 1부인 "본질과 본질인식"에서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보여진다.

모든 종류의 개별적['사실적'] 존재는, 아주 일반적으로 말하면, '우연적'이다. 그것은 본질상 달리 존재할 수도 있다. [...] 그러나 여기에서 '사실성'이라는 이 우연성의 의미는 우연성이 어떤 '필연성'—공간-시간적 사실을 조정하는 타당한 규칙의 단순한 사실적 요소를 뜻하는 필연성이 아니라, '본질-필연성'의 특성을 지니며 이와 함께 '본질-일반성'과 관련된 필연성—에 상관적으로 관련된다는 정에서 제한된다. 우리가 모든 사실은 '자신의 고유한 본질에 따라' 달리 존재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이미 이것으로써 '바로 어떤 본질과 따라서 순수하게 파악할 수 있는 어떤 형상(Eidos)을 갖는다는 것은 모든 '우연적인 것'의 [의미론적] '의미'에 속한다는 [...] 사실을 표현한 것이다. 개별적 대상은 결코 단순히 개별적인 것, 여기에 있는 이것(Dies da!),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이러저러한 성질을 지닌 것으로서 자신의 '독자성'을 [...] 지닌다. (『이념들 1』, 62쪽)

어떠한 진리도 사실, 즉 시간적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물론 '어떤 사물이 있다' '어떤 상태가 존재한다' '어떤 변화가 일어난다'와 같은 것들을 그 의미로 지닐 수 있다. 그러나 진리 그 자체는 모든 시간성을 뛰어넘는다. 다시 말해 진리에 시간적 존재, 생성 혹은 사라짐을 귀속시키는 것은 어떠한 의미도 갖지 못한다. (『논리연구 1』, 87쪽)¹

여기서(특히 『논리연구』에서) 후설은 '플라톤주의'의 누명을 쓰게 된다. 즉 후설의 입장은 플라톤주의처럼, "본질을 인식할 수 있고, 모든 것에는 본질과 비본질의 이분법적 구분이 있으며, 이때 감성적(사실적)인 것인 비본질적인 것은 단지 '시뮬라크르' 즉 '환영' "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10%만 맞았다. 후설은 본질을 인식할 수 있다고는 생각했지만(본질직관), 감성적인 것을 시뮬라크르적인 환영이라는 지위에 두지는 않았다. 후설에게서 본질 인식은 플라톤적 지성적 인식이 아니라, 본질'직관'이며, 이것은 한갓 관념론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의 활동적 작용이다. 즉 이것은 '감성적 직관'에서 시작하여 그것에서 이념화작용 내지 상상변양이라는 작용을 통해 얻는 직관이며, 그러므로 그것은 불안정하여 틀릴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은 상호주관적 탐구가 축적됨에 의해 지속적으로 수정될 수 있다.)

또한 '모든' 대상이 시공간적으로 불변적이라는 이해 또한 오해이다. 후설은 '특정'대상의 본질특성을 이념성으로 특징지었을 뿐, 모든 것을 이념적 불변성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때 '이념적'은 '본질적'의 유의어로서, 결코 신(神)-형이상학적 이데아를 뜻하는 말이 아니다. 단 자하비(Dan Zahavi)가 말하듯이, 그는 '논리적 플라톤주의'는 옹호했지만 형이상학적 플라톤주의는 옹호하지 않았다(『후설의 현상학』, 22쪽 주).

"나는 실로 일반적 대상개념을 고안해낸 것이 아니라, 모든 순수 논리적 명제에 의해 요구된 대상개념을 회복했을 뿐이다." (『이념들 1』, 106쪽)

후설의 현상학은 대상들의 다양한 주어지는 방식, 즉 다양한 본질적으로 다른 특성의 대상들이 주어지는 다양한 방식을 연구하고자 했다(또한 이때 동일한 대상에 대한 상이한 방식도 연구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후설 현상학에서 직관적-감성적 대상은 결코 시뮬라크르적 허구가 아니며, 오히려 모든 인식의 토대이며 시작점, 타당성의 원천이다. (이것은 후기에 '생활세계(Lebenswelt)' 논의에서 더욱 풍부해진다. 『유럽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 3.A부 참조.)


¹ 단 자하비, 『후설의 현상학』22쪽에서 재인용.

참고문헌
에드문트 후설, 『순수현상학과 현상학적 철학의 이념들 1』 이종훈 옮김, 한길사, 2021.
단 자하비, 『후설의 현상학』 박지영 옮김, 한길사,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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