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천아카데미 추계강좌] 철학의 길, 제1강: 철학에 이르는 길

연세대학교 철학과 이승종 교수님이 성천아카데미에서 진행하시는 강좌 <철학의 길>의 제1강이 업로드되었습니다. 다음은 그 내용 중 일부입니다.


대화의 하이라이트

1. 도를 닦았던(?) 비트겐슈타인

윤유석: 비트겐슈타인을 설명하시면서 “도를 닦았던 사람이다.”라고 하신 게 굉장히 재미있네요. 절대,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일반적인 연구서에서는 볼 수 없는 설명이잖아요. 그러니까, 비트겐슈타인에게서는 “도를 닦았다.”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엄격하게 자신의 삶을 닦아나가는 자세를 배웠고, 하이데거에게서는 철학사를 관통하는 혜안을 배웠다는 말씀이시네요. 혹시, 그렇다면, 비트겐슈타인과 하이데거 사이의 차이점으로는 어떤 게 있을까요?

이승종: 일단 유석 씨가 재미있는 표현을 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이 분석철학자인데 “도를 닦았다.”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는 거죠.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라는 흥미로운 반론인데, 러셀의 자서전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

러셀은 당시 케임브리지 대학교 수학과와 철학과의 교수로 유럽 최고의 지성인이었죠. 그가 제자로 받은 사람이 비트겐슈타인이었는데요. 비트겐슈타인이 자기 연구실로 밤에 찾아와서 침묵으로 일관해 있었거든요. 러셀이 보니까, 내보내면 바로 자살할 모습이었어요. 그래서 떠듬떠듬 물었다죠. “너는 지금 논리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거니, 사람이 지은 원죄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거니?” 그랬더니 비트겐슈타인은 짤막하게 “둘 다입니다.”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즉, 비트겐슈타인에게는 논리학과 (‘원죄’로 표상되는) 윤리가, 논리와 윤리가 같은 차원에서 사유되고 있었던 거죠.

사실 그가 생전에 지은 유일한 작품인 『논리-철학 논고』에도 후반부에 윤리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씩 나옵니다. 저는 『논리-철학 논고』에서 논리와 윤리에 대한 이야기를 잘 부각시키는 것이 그 책에 대한 올바른 해석법이라고 생각해요. 거기에 대해서 별도의 연구서를 준비 중입니다.


노르웨이 숄덴에 있는 비트겐슈타인의 오두막


자신의 오두막으로 노 저어 가는 비트겐슈타인

2. 하이데거와 비트겐슈타인의 차이점

이승종​: 유석 씨가 지금 던진 하이데거와 비트겐슈타인의 차이점에 대해서 제가 간략히 답변해 보겠습니다. 저는 대략 네 가지 정도의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우선, 비트겐슈타인은 시대의 대세를 이루던 과학주의에 대해 정면으로 반대한 사람입니다. 이것도 상당히 흥미로운 게, 사실 비트겐슈타인은 누구보다도 과학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열역학의 선구자로 알려진 루트비히 볼츠만을 찾아가서 그에게 사사 받으려고 했는데, 간발의 차이로 못 만나게 되죠. 비트겐슈타인이 방문하기 직전에 볼츠만이 자살해서, 볼츠만과의 물리학 연구는 없던 일이 되어버렸죠. 또 케임브리지에서 그가 사사했던 (조금 전에 인용한) 러셀도, 『수학의 원리』(Principia Mathematica)라는 20세기 수학사의 금자탑이 되는 작품을 낸 대표적인 수학자였죠. 그런데 그러한 지적인 환경에서 성장한 비트겐슈타인이 과학주의에는 정면으로 반대를 했습니다. 과학주의라는 게 뭐냐면, 세상의 모든 학문이 (철학을 포함해서) 다 과학으로 환원된다는, 과학만이면 충분하다는 믿음인데요. 비트겐슈타인은 그러한 시대의 흐름에 대해서 정면으로 거부한 사람입니다.


비트겐슈타인과 하이데거

그런데 하이데거는 과학주의에 대한 찬성/반대보다도, 과학의 계보에 대해서 아주 깊이 천착한 사람입니다. 하이데거가 『사물에 대한 물음』(Der Frage nach dem Ding)이라는 작품에서 보여준 뉴턴의 고전역학에 대한 눈부신 연구는, 제가 미국에서 유학하던 끝 무렵에 읽고서 하이데거에 빠져들게 된 대표적인 과학철학저서였습니다.

두 번째로, 비트겐슈타인은 개념을 새로 만들어 쓰는 것을 아주 싫어했습니다. 우리가 아는 일상 언어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하이데거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내는 데 거의 뭐 마술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새로 만든 개념이 너무 많아서, 심지어 독일 사람들도 “하이데거의 책은 언제 독일어로 번역되나?”하는 농담을 한다고 하죠. 독일인들도 알아먹을 수 없는 온갖 이상한 낱말들의 홍수가 하이데거의 언어입니다.

세 번째로,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사에 대해서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죠. 본인이 원래 공대에서 공학을 전공한 사람이다 보니, 인문학에 대한 체계적인 학습이나 철학과 학생이라면 당연히 받았어야 할 철학사에 대한 세례가 없습니다.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처럼 천재성만을 가지고 철학을 하는 거죠. 그에 반해서, 하이데거는 하이데거 자신이 철학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걸어 다니는 철학사라고요. 철학에 대한 깊은 이해와 온고이지신의 정신으로 자기의 사유를 전개한 사람이기 때문에, 여러 분이 읽어보면 두 사람은 스타일에서나 방향성에서나 너무나도 다릅니다.

​끝으로, 비트겐슈타인은 형이상학을 배격하는 방향으로 자기의 철학을 잡아나가는 데 반해서,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의 해체를 자기의 과제로 삼았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형이상학을 배격하는 거랑 형이상학을 해체하는 게 무슨 차이가 있는 거지?’하고 반문하실 텐데요. 이 반문은 제가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 형이상학에 대해 우리가 이야기할 때, 그때 다시 대답해 보겠습니다.​

이 정도로 제가 네 가지 차이점을 말씀드렸습니다.

윤유석: 아주 잘 설명해 주신 것 같습니다. 교수님 말씀하신 것을 듣다 보니, 특별히 철학사를 대하는 하이데거와 비트겐슈타인의 차이를 듣다 보니, 제가 최근에 읽은 어느 글에서 저자 분이 이렇게 말하신 게 기억나네요. “비트겐슈타인은 자기가 아무 것도 읽지 않은 것처럼 글을 쓰는데, 하이데거는 자기가 모든 것을 다 읽은 것처럼 글을 쓴다.”라고 하더라고요.

3. 논리학으로도 해탈에 이를 수 있다!

이승종: 비트겐슈타인이 논리와 윤리를 동등한 차원에서 사유했다는 것이 상당히 흥미롭다고 유석 씨가 말하셨는데… 그렇죠, 서양철학의 흐름에서는 흥미로울 수 있습니다. 굉장히 이례적이고요. 그런데 전통을 좀 달리 해서, 불교의 철학사를 보면, 논리에 아주 능한 분들이 해탈의 문제나 불교의 교리에 정통한 경우도 상당히 많습니다. 그래서… “논리학으로도 해탈이 가능할까요?” 불교를 공부해 보면 “예”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비트겐슈타인도 논리학으로 도를 깨달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전쟁터에서 쓴 종군일기를 편집한 책의 제목도 『논리-철학 논고』 아닙니까? 그리고 그 『논리-철학 논고』의 궁극적인 목적은 깨달음이거든요. 논리학을 통해서도 깨달음이 가능하고요. 이것이 의심스럽다면, 여러분은 불교의 훌륭한 논리학자들과 그들의 깨달음을 비트겐슈타인을 공부할 때 곁들여 보면 이질감이 좀 덜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

윤유석: […] 이번 답변도 굉장히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한 번도 불교를 공부하면서 ‘불교가 논리학에서 나왔구나.’라든가 ‘불교가 논리학과 굉장히 긴밀한 관계가 있구나.’하는 생각을 떠올려 본 적이 없는데, 정말 인도 논리학과 해탈 사상 사이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그 둘을 떼어놓기가 힘든 것 같네요.

4. 리처드 로티를 둘러싼 논쟁: 철학은 취미의 문제인가?

윤유석: 사실 제가 이런 질문을 드린 이유 중 하나가, 리처드 로티라는 철학자 때문인데요. 리처드 로티는 (교수님이 방금 이야기하신 것처럼) 오늘날 철학 안에서 실존적인 문제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시도들, 특별히 학술적인 철학에서 그런 문제들을 다루려는 시도들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고 주장하죠. 또 전통적 형이상학이 찾아온 영원하고 보편적인 진리나 실재에 대한 탐구가 오늘날에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고 지적하면서 소위 ‘철학의 종말’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거든요. 그런데 철학의 종말을 이야기하면서 로티가 대안으로 강조하는 것 중 하나가, 문학이나 문학 비평인데… 말하자면, 모든 사람이 각자가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영역에서 글쓰기를 계속 하면서, 자기가 재미있어 하고, 자기가 좋아하고, 자기가 의미 부여하는 활동들을 꾸준히 해 나갈 뿐이지, 더 이상 과거처럼 철학을 통해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는 시도가 부질없고 의미가 없다고 이야기하거든요. 교수님은 혹시 이런 생각에 대해서는 어떻게 바라보시나요?

이승종​: 저는 로티를 사람으로서는 존경하고 좋아하지만, 그분이 하신 말씀(유석 씨가 요약한 그 말씀)에 대해서는 반대로 생각합니다. 로티는 철학의 자기 부정과 그에 따르는 현대철학의 위기를 본인 스스로가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여겨지는데요. 사실, 그는 심리철학에서 제거주의자로 알려져 있는데, 이런 성향을 철학 자체에 들이대서, 철학도 제거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요. 문학과 철학의 가교를 놓기보다는, 철학의 역할을 축소시키는, 그런 발언을 하고 있어서 저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가교를 놓자는 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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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로티

윤유석: 제가 여기에 대해서 조금 더 로티의 입장을 옹호하면서 교수님께 반론을 제기해 볼게요. 로티가 철학을 제거하고 있다기보다는, 철학을 더 확장시킨다고 볼 수 있는 여지가 많지 않을까 생각하거든요. 왜냐하면 로티는 진리라든가 영원한 실재를 찾으려는 전통적인 탐구가 중지된 대신, 그게 종말을 맞은 대신, 우리 각자가,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서, 말하자면, 각자의 ‘취미’를 중요시하면서, 그 취미에 대해 글쓰기를 계속해 나가는 활동이 필요하다고 하잖아요. 이게, 다른 말로 하면, 교수님이 바라보시는 철학의 고유한 모습과 닮아 있지 않을까 하거든요.

이승종: 글쎄요… 로티 같은 도시인에게는 철학이 ‘취미’가 되는군요? 사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을 죽고 사는 절실한 문제로 생각했는데, ‘취미로서의 철학’은… 그건 로티의 길인지는 모르지만, 비트겐슈타인이나 저의 길은 아닌 것 같은데요? 저는 철학을 취미로 생각해 보지 않아서요.​

윤유석: 여기서도 다시 로티 입장에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물론, 철학을 죽고 사는 문제라고 본 비트겐슈타인이 로티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면, 정말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서 화를 냈을 것 같거든요. 반대로, 비트겐슈타인을 자신의 영웅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하는 로티의 입장에서 보면, 좀 서운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어떻게 생각하냐면, 로티가 철학이 문학 비평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할 때, 취미가 중요하다고 할 때, 각자의 소중한 것들을 지향하면서 글쓰기를 계속해야 한다고 할 때, 이게 단순히 철학을 가벼운 문제로 취급해 버리자는 주장을 제시한 건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하나의 구체적인 예시를 들자면, 테리 이글턴이라는 유명한 비평가가 한 번은 로티를 만나고 난 다음에 이런 고백을 하거든요. ‘로티(rorty)’라는 영어 단어가 사전적으로는 ‘유쾌한’, ‘즐거운’, ‘경박스러운’, ‘떠들썩한’이라는 의미인데, 정작 테리 이글턴 본인이 만난 로티는 굉장히 진중하고 진지한 사람이었다고 하면서 로티를 변호하더라고요.

이런 맥락에서, 로티가 얼핏 가볍게 보일 수 있는, “철학을 종말시키고 우리는 문학 비평을 해야 한다.”, “우리 각자의 사적인 취미들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라는 말을 했을 때, 그 말이 그냥 경박하게 살자는 의미라기보다는, 정말 자기 인생을 바쳐서 진지하게 추구해나가야 하는 각자의 것들을 가지고서 글쓰기를 해야 한다는 이런 의미가 아닐까 하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이승종: 예, 저도 로티를 만나보고서, ‘취미로도 저렇게 훌륭한 경지에 이를 수 있구나!’하고 조금 놀랐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가 텍스트에서 한 말과 자신이 보여준 인품의 깊이가, 일종의 부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는데요. 사실 그가 남긴 텍스트에서는, 유석 씨가 지금 제시한 깊은 해석을 저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5. 데이비드 베너타의 반출생주의에 대한 단상

윤유석: 이 강좌에 오기 전에 제가 후배랑 대화를 하다가, 데이비드 베너타라는 소위 ‘반출생주의’를 주장하는 철학자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어요.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니, 반출생주의를 주장한다고?’ 물론, 제가 그 입장을 철학적으로 진지하게 공부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제가 인상비평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라요. 그런데 인생에 대해서 결국 한다는 말이 “태어나면 안 된다.”라는 말밖에 없다면, 그건 그냥 철학의 파산 선고 아닌가 해요. 철학자가 인생에 대해 고민해서 내리는 답변이 그 정도밖에 안 된다면, 그리고 그 근거로 드는 논리가 태어났을 때의 이득과 태어나지 않았을 때의 이득을 따지는 것이라면, 그건 너무 순진한 공리적 계산에 의존하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이런 것이 철학에서 요즘 사람들 사이에 많이 회자되는 입장이라는 것은… 이건 정말 철학이 스스로 파산 선고를 내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어요. […]

이승종​: 지금 유석 씨가 소개한 (저에게는 낯선) 반출생주의에서도 목도하듯이, 물질주의의 큰 문제, 그리고 우리 시대의 큰 문제는 그것이 지닌 반생명성에 있습니다. 생명력이 너무 없고, 오히려 그걸 없애려고 하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람에게 내재해 있는 영성과 신성을 회복해서, 이에 부합하는 친생명적인 철학이 나와야 합니다. 부활해야 하는 거죠.​

저는 철학의 원형이자 모든 문명의 원형인 샤머니즘이 친생명적인 철학의 첫 발자국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샤먼이 세상 만물과 두루 교감하고, 또 생명성을 높여주는 역할을 했던 것이 샤머니즘이었죠. 그게 친생명적인 철학의 원형이고요. 모든 원초적인 철학은 다 샤머니즘이었고 다 친생명적이었습니다. 샤머니즘은 곧 미신이라는 시대적인 편견과 오해를 극복해서, 샤머니즘이 재평가되고 새로이 거듭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지향하는 철학도 이를 위한 개념적인 장치를 모색하는 데 있고요.

철학의 길_1강(1) : 철학에 이르는 길

00:00-04:43 들어가는 말
04:44-05:24 이승종 교수 소개
05:25-07:22 윤유석 소개
07:23-35:59 철학 배우기와 짓기
35:60-39:29 철학이란 무엇인가요?
39:30-41:59 현대철학은 주로 무엇을 고민하나요?
42:00-43:12 어떤 주제에 관심을 가지시나요?
43:13-44:30 교수님께서 높이 평가하는 철학, 철학자, 철학의 스타일은 무엇인가요?
44:31-45:22 J. S. Bach, Wachet auf, ruft uns die Stimme, BWV 140
45:23-49:04 수강생과의 질문과 대답: 철학은 과학이나 수학과 어떻게 다른가요?(1)
49:05-53:38 수강생과의 질문과 대답: 철학은 과학이나 수학과 어떻게 다른가요?(2)

철학의 길_1강(2) : 철학에 이르는 길

00:00-02:55 하이데거와 비트겐슈타인을 소개해주실 수 있나요?
02:56-07:15 하이데거와 비트겐슈타인에게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07:16-15:29 하이데거와 비트겐슈타인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15:30-19:18 하이데거의 철학에서는 주로 어떤 부분에 주목하시나요?
19:19-20:45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서는 주로 어떤 부분에 주목하시나요?
20:46-27:51 철학이 과연 인생의 문제들에 대한 답을 찾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27:50-30:21 실존에 대한 답은 문학이나 종교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30:22-36:26 리처드 로티를 둘러싼 논쟁: 철학은 취미의 문제 아닌가요?
36:27-38:07 오늘날의 지배적인 인생관과 세계관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38:08-39:51 데이비드 베너타의 반출생주의에 대한 단상
39:52-41:00 교수님이 지향하는 대안적 인생관과 세계관은 무엇인가요?
41:01-44:22 수강생과의 질문과 대답: 리처드 로티는 누구인가?
44:23-48:53 수강생과의 질문과 대답: ‘깨달음’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요? (1)
48:54-51:40 수강생과의 질문과 대답: ‘깨달음’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요? (2)
51:41-55:23 수강생과의 질문과 대답: 왜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을 굳이 위험한 상황으로 몰아붙였을까요?
55:24-56:37 수강생과의 질문과 대답: 무엇에 대해 유한성을 느끼셨나요?
56:38-1:02:59 학술적 철학의 성과중심주의가 반드시 잘못된 것일까요?
1:03:00-1:06:42 오늘날 대학의 성과평가 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1:06:43-1:09:09 철학적 연구에 대해서도 가치의 우열에 대한 분명한 평가 기준이 있어야 하지 않나요?
1:09:10-1:12:20 연구비를 지원받기 위해서는 성과를 신경 쓸 수밖에 없지 않나요?

철학의 길_1강(1) : 철학에 이르는 길

철학의 길_1강(2) : 철학에 이르는 길

9개의 좋아요

(1)

이 부분은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인도 철학/종교에서 논리학(혹은 추론/정당한 인식의 수단)과 해탈론이 밀접한 관련이 된 것은 많지만, 과연 논리학으로 해탈에 도달한다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예전에 와일드버니님이 말하셨듯, 논리학의 가장 큰 특징은 결국 '주제 중립성'이고, (이는 제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전제가 옳다면 결론이 옳다는 것을 '보장하는' 시스템일뿐이입니다. (그렇기에) 전제의 옳음은 보장하는 시스템은 아니죠.

결국 전제의 옳음이란 직관 혹은 경험 아니면 믿음 같은 영역에서 성립할텐데, 불교든 베단타든 논리학을 사용해서 치열하게 다투지만, 결국 해탈론과 밀접히 연관된 형이상학들과 윤리학은 결국 어떠한 공리 속에 존재하는 듯합니다.

(사실 그래서 삶의 의미라 그런 측면에 대해서는 저도 논리나 담론보다는 경험, 어떤 의미에서 [기존 교단 종교적 색채가 없는] 영적인 측면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긴 합니다. 그저 철학 혹은 논리학은 이와 같은 영역을 지키기 위한 파수꾼의 역할이면 충분하지 않나....나머지는 그저 삶 속에 오롯이 존재하는 것에 불과한 것 아닐까....)

(2)

이 부분은 흥미로운 동시에, 원론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신론 혹은 샤머니즘 등의 복구는 60년대 히피 이후로 지속적으로 학자들 혹은 사상가들이 주장하던 부분이지만, 사실 그래서 어쩌라고? 라고 라는 생각 밖에 들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세상을 존중하는 것이 과연 철학적 담론의 영역에서 해결되는 것일까요? 이는 위에서 말했듯, 그저 침묵하고 경험해야 할 영역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요근래 이야기가 좀 되던 개념 공학의 영역일까요? '생명'이라는 개념의 범위를 조정한다....잘 모르겠습니다.)

(3)

여기서는 저는 윤님의 견해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하하.
사실 철학과 문학의 가교를 놓자고 이승종 교수님이 말하시지만, 그래서 '철학의 역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제대로 답을 내놓지 않고 계신 듯합니다.

뭐랄까요.
이제 저한테 철학은 앞서 말한 (a) 담론/논리의 영역으로 환원될 수 없는 삶의 영역을 지키는 파수꾼이거나 (b) 능력의 부족으로 과학적으로 (아직 혹은 영원히) 검증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한 '가장 그럴듯한' 추론을 시도하는 학문 정도로 지금은 이해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모래성이며 구름 위에 둥둥 떠있는 셈이죠. 그렇지만 너무나도 아름답고 정교한 성이기에 기반이 어설퍼도 사람들이 끊임없이 이 성을 마개조하는 기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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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제기하신 문제들이 서로 연관되어 있는 것 같아요.

(1) 비트겐슈타인이나 불교가 말하는 '논리'나 '논리학'이 오늘날 흔히 대학에서 가르쳐지는 형식논리학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는 불교를 자세히는 모르기 때문에 불교의 논리학에 대해서는 언급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비트겐슈타인에게 논리학은 왜곡된 사유를 바로잡는 분야거든요.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와 '논리학'이라는 용어를 일종의 치유적 의미로 이해하는 거죠. (뉴턴 가버와 이승종 교수님의 저서 『데리다와 비트겐슈타인』에도 이 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이 사용한 '논리학'이라는 개념이 다소 독특하다는 사실이 지적되어 있어요.) 그래서 오류에서 벗어나고, 무지에서 깨어나고, 죄를 자각하는 모든 일들이 비트겐슈타인에게는 일종의 '논리적'인 일들로 여겨지는 거고요. 명료한 정신으로 내가 놓인 상태를 자각하는 게 논리라는 거죠..

(2) 그리고 바로 이 맥락에서, 오늘날의 물질주의와 과학주의는 정신적 오류의 산물이라는 게 비트겐슈타인의 진단이죠. 세계와 우리 자신의 관계를 논리적으로 잘못 파악했기 때문에, 현대가 물질주의와 과학주의에 빠져버렸다는 거에요. 그래서 이런 문제를 벗어나 '샤머니즘'을 지향해야 한다는 건, 단순히 복고적인 생명존중의 시대로 돌아가자는 뜻이라기보다는, 왜곡된 인식을 벗어났을 경우에 세계가 우리의 투명한 시선에 어떻게 보이는지를 제대로 기술하자는 의미에요. 쉽게 말해, 니체로부터 하이데거와 비트겐슈타인을 거쳐 엘리아데에 이르는 학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현대의 문명에 의해 수리물리학화된 세계를 비판적으로 성찰해서, 소위 '생활세계적' 경험을 회복해야 한다는 거죠. 그리고 이런 작업은 다른 무엇도 아닌 '철학'만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치유라는 거에요.

(3) 저는 기본적으로 철학이 일종의 '취미'라고 (다만, 매우 진지한 취미라고) 생각하는 관점이긴 하지만, 과학주의에 경도된 분들을 볼 때면 철학적 치유라는 게 정말 우리 시대에 생사를 건 문제가 될 수도 있겠다는 종종 생각이 들기도 해요. (특별히, 제가 신앙인이다 보니, 신앙의 문제에서까지 과학주의가 만연한 걸 보면 정말 참기가 힘들더라고요;;) '과학주의'는 일종의 구성적 형이상학이고, 그런 형이상학을 치료할 수 있는 건 치유적 철학밖에 없으니까요. 과학주의를 극복하려면, 과학주의에 내재된 모순점들을 논리적으로 지적해서, 그런 식의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가 정당하지 않다는 걸 보여줘야 하는 거죠. 바로 이런 의미에서, (a) 논리학이 단순한 전제와 결론 사이의 타당한 관계에 대한 학문을 넘어서 '치유적' 의미를 지니는 거고, (b) 그렇게 우리 시선이 논리학으로 치유받을 때에야 비로소 수리물리학에 의해 왜곡되지 않은 '원초적 삶'에 도달할 수 있게 되는 거고, (c) 그런 원초적 삶을 강조하는 것이 물질주의와 과학주의에 빠진 우리 시대의 가장 시급한 철학적 과제가 되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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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공부해본 바에 의하면 불교와도 상통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수 많은 불교 논서가 만들어지지도 않았겠죠. 불교의 팔정도 중 '바른 견해(正見)'가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공부하는 분야에서도 이런 의식을 굉장히 중시하는 것 같습니다. '여여如如하게 사태를 바라봐라!'라고 옛 사람들은 말했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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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강(2)의 50분 이후의 담론 내용이 참 재밌어보이네요! 다음에 꼭 들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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