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랑바르트, 하얀 방을 통해서 본 생성형이미지 고찰

한 때 회화는 갈 길을 잃고 방황을 했던 시기가 있었다. 사진의 등장으로 더이상 사실적 묘사가 의미를 잃어갔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해보겠다. 좋게 말하면, 회화가 새로운 기회를 찾을 수 있었다. 나쁘게 말하면 회화는 시대의 전유물로 전락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어떨까? 지금 이 글을 보는 모든 사람들 혹은 회화, 그림의 역사를 공부하신 분들이라면 초현실주의, 인상주의파 화가들의 등장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게 회화는 제 갈길을 찾았다. 오히려 기회가 되었다.

사진은 그 사이 다양한 이론과 배경을 쌓으면서 자신만의 철학을 찾아갔다. 대표적인 이론이 바로 푼크툼(punctum)과 스투디움(studium)이다. 스투디움은 어떤 한 문화권에서 혹은 어떤 한 사회에서 내가 길들여진 지식을 통해 느끼는 감정을 말한다. 예를들면 우리가 수능이나 모의고사 문학 문제를 풀 때 화자의 의도를 어떻게 파악하는 가를 푸는 것과 비슷하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푼크툼은 그와 다르게 사진을 보는 응시자의 주관적인 감정이다. 우리가 문학 문제를 풀다, 그저 이 내용이 감동적이라 느끼는 한 구절을 생각하면 될 것이다. 문화, 혹은 하나의 코드 - 나는 이것을 유행이라고 생각한다 - 에 종속된 기분을 스투디움, 그리고 내 자신의 개성을 감정적으로 느끼는 것을 푼크툼이라고 생각한다.

왜 이 이야기를 하는가 궁금한 분들이 많으실 것이다. 좀만 참아달라.

롤랑 바르트는 자신의 모친 사진을 보면서 하나의 사실을 깨닫는다. "그것이-존재-했음(ça-a-été)"이다. 사진은 그것이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수단이었다. 프레임에 종속된 하나의 과거가 현재에 투영된다. 그렇게 사진은 다양하게 사용된다. 전쟁, 사랑, 더 나아가 다양한 과거를 현실로 불러내는 매체가 된다. 우리는 사진을 통해 하나의 과거를 다시금 현재로 불러일으켜 왔다.

하지만 과연 지금도 그럴까?

위에서 회화의 종말을 이야기했지만, 결국 회화는 자신만의 길을 찾아서 나아갔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사람이 아닌 물체, 매체 모든 시간적 함의를 품고 있는 것들에게 모두 적용되는 듯 하다. 미드저니같은 생성 이미지의 등장으로 사진은 더이상 보증 수단으로서 작용하지 못한다. "그것이-존재-했음"이라는 대전제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러한 제너레이티브 AI로 - 특히 - 사진은 점점 자신이 과거에 정말로 존재 했는가를 큰 틀에서 흔들리고 있다.

다시금 위에서 말한 푼크툼과 스투디움을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우리는 다양한 문화권과 사회에서 살아가지만, 그곳에는 정보의 바다, 점점 더 많은 생성형 인공지능으로 인한 정보 과다복용을 하고 있다 - 이 의미는 곧 내가 생각하기에 더이상 하나의 문화권, 제도권 그리고 더 나아가 사회가 이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넘쳐나고 있는 코드가 생성된다고 본다 - 그렇게 우리는 한 때 통일 되었던 하나의 푼크툼 - 정확히는 그나마 비슷한 의식 - 을 가지고서 스투디움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한다.

생성된 사진, 만들어진 사진을 비롯한 여러 사진, 이미지는 "그곳에-존재-했는가?"라는 의문형으로 변했다. 푼크툼은 더이상 신뢰할 수 없는 코드로 해석된다. 스투디움은 이제 더이상 개인의 주관에서 벗어나, 개인의 통제권을 넘어섰다.

말이 길어졌다. 결국 우리에게 있어 만들어진 사진, 생성형 사진을 비롯한 현재 만들어진 사진과 직접 그곳에 있었음을 증명하려고 애쓰는 사진들은 어떤 길을 찾을 것인가? 아예 분리된 하나의 분야가 될것인가? 아니면 흡수될 것인가?

우리에게 있어 과연 생성형 사진을 비롯한 다양한 기술들은 우리를 일깨우는 하나의 망치인가 아니면 거대한 폭력인가?

예전에 썼던 글을 한번 올려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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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의 글들은 저에게 익숙하지 않은데, 바르트는 이런 종류의 논의를 했군요.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생성형 이미지 시대에 '사진' 혹은 '이미지'의 의의를 "그것이-존재-했음(ça-a-été)"에서 찾기는 어려워 보여요. 사실, 모던 아트의 역사만 보더라도, 이미지가 무엇인가를 재현한다는 생각은 다소 낡은 것이 되어버렸잖아요. 개인적으로, 요즘은 이미지들이 '디자인'이라는 관점에서 매우 실용적으로 소비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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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실용적으로 소비된다는 관점 감사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글을 쓴지가 오래되서 좀 더 발전해 나갈 부분인것 같습니다 ㅎㅎ 좋은 비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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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주제를 다루고 있는 글 감사합니다. 사실 요즘은 인공지능의 발달로 사진의 존속 및 의미가 위협을 받고 있을 뿐아니라, 영상의 영역 또한 점점 인공지능에 의해 잠식되어가고 있죠.

물론 사진도, 영화도, 이전에 회화가 그러했던 것처럼 위기에 처하더라도 사라지지는 않을 거예요. 하지만 사진(일단 사진만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이 존재하는 공간이 이미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사진 또한 의미의 변화를 겪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변화하는 시대에 놓이게 되었는데, 이러한 상황은 우리에게 어떤 과제를 부여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무의미에 직면해서 의미를 지켜내는 것 말이죠.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올빼미 포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앞으로 활동하시면서 또 뵙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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