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연의 『순간의 존재』를 읽다가

"'1+1=2'라는 수학적 진실이나 이런저런 자연과학적 법칙들은 초역사적이고 가치중립적이라는 식의 주장은 철부지 어린아이의 잠꼬대만큼이나 순진하고 터무니 없다. 그렇게 믿고 싶거든 계속 그렇게 믿으라. 구체적인 삶의 맥락으로부터 유리된 소위 학문적 진술들을 늘어놓으며 자신이 평범한 사람들과 달리 공평무사한 진리의 사도라고 믿는 자만큼 역겨운 속물도 찾기 어렵다."(한상연, 『순간의 존재』, 세창출판사, 2022, 25쪽.)

전적으로 동의하는 내용이긴 한데, 한상연 선생님의 어조가 상당히 강하시네요. 학술 논문이 아니라 단행본 저서라서 평소에 하고 싶으셨던 말씀을 여과 없이 쏟아내셨나 봅니다. 여하튼, 이런 강하고 직설적인 어조 때문에 책 자체는 매우 재미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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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음... 전후 맥락을 제가 몰라서 해당 진술에 동의할 수도 유보적일 수도 있을 듯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격정적 수사보다는 담담한 논변이 더 와닿더라구요. 격정적 수사는 종종 논변적 정당화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잘못된) 인상을 불러일으키거든요.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 역시 몇몇 단어만 바꿔서 똑같이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1+1=2'라는 수학적 진실이나 이런저런 자연과학적 법칙들이 역사적이고 가치상대적이라는 식의 주장은 철부지 어린아이의 잠꼬대만큼이나 순진하고 터무니 없다. 그렇게 믿고 싶거든 계속 그렇게 믿으라. 구체적인 정당화로부터 유리된 소위 철학적 진술들을 늘어놓으며 자신이 나이브한 학자들과 달리 심오한 진리의 사도라고 믿는 자만큼 역겨운 속물도 찾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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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자, 이제 논증을 보여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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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하이데거조차도 수학에 대해서는 정말 조심스럽던데요. 하이데거가 수학을 다룬 책에 대해서 제가 아는 건 "사물에 대한 물음" 뿐이지만 거기서도 수학의 그리스어 어원과 탈은폐를 찾지 "1+1=2조차도 역사적이다!!" 같은 과격한 말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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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러셀과 화이트헤드의 "Principia Mathematica"와 괴델의 "Über formal unentscheidbare Sätze der Principia Mathematica und verwandter Systeme I"를 가지고 오실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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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연 교수는 하이데거 연구자인 동시에 시인이기도 한 걸로 아는데 왜 "역겨운 속물"과 같은 표현을 썼을까, 좀 의아하긴 하네요. 이 구절을 읽으면서 떠오른 다른 책이 있는데, 바로 김상봉 교수의 『자기의식과 존재사유』(1998)입니다. 이 책의 서론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오직 우리가 죽음 앞에 마주설 때, 우리는 비로소 삶의 소중함에 눈뜨게 되고, 삶에서 무엇이 참으로 소중하고 가치있는 것인지 되돌아보게 된다. 나는 언젠가 찻집에 앉아, 여자를 앞에 두고 향수와 포도주에 대해 끝없이 수다를 늘어놓는 남자를 본 적이 있다. 그에게 향수와 프랑스 와인은 마치 삶의 존재 이유인 듯이 보였다. 하지만 향수와 포도주가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를 그가 깨닫기 전에는 끝끝내 그는 삶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죽음과 존재의 허무를 상기하지 않는 한, 도대체 무엇이 그에게 향수와 포도주의 하찮음을 깨닫게 해줄 수 있겠는가? 모름지기 남자의 어리석음을 깨우치는 존재는 여자일 수밖에 없으나, 불행히도 그 남자 앞에 앉은 여자는 그 남자의 수다에 매혹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5-16쪽)

김상봉 교수가 하이데거 풍으로 쓴 이 구절에서 두 남녀를 무척 한심해 하며 감각만 쫓는 태도를 비판하는 게 상당히 거북했던 기억이 납니다. 향수 뿌리고 포도주 마시며 허세 부리는 세태를 꼬집는 건 알겠는데, 어떤 사람에겐 '향수와 포도주'가 그냥 '하찮은 것'이 아니라 '존재 이유'가 될 수도 있는 겁니다. 그리고 "모름지기 남자의 어리석음을 깨우치는 존재는 여자일 수밖에" 없다는 말도 낯설고 이상하네요. 고전 문학에서 남자의 타락한 영혼을 구원하는 여인을 염두에 둔 것 같은데, 그렇게 이상화된 여성은 현실 속엔 존재하지 않는, 남자들의 공상의 산물에 불과한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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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저는 한상연 교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고, 또 다들 제기하신 비판처럼 저런 강한 어조가 학술 논문을 쓸 때는 그다지 적절하지 않다는 데도 동의하지만, 엄밀한 학술 논문이나 학술서를 벗어난 곳에서는 가끔씩 저런 어조도 허용할만 하지 않을까 해요. 철학에서 저런 강한 어조로 쓰인 작품들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니까요. 게다가, 저 책이 하이데거 철학을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연구서와 에세이 사이의 글이기도 해서, 저자의 어조가 강하게 반영되어 있는 것이 저에게는 특별히 이상하게 느껴지지는 않더라고요. 오히려 문제를 뱅뱅 에두르지 않고 곧장 직설적으로 다루는 점은 좋기도 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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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동의합니다. 철학 연구서라면 주장을 해야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크게 문제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조지오웰의 동물농장을 읽을 때 공산주의의 논리적 비판을 바라지 않는 것처럼요. 하이데거의 철학을 공부할 동기, 하이데거 학자의 개인적인 생각들을 보여주는 책이라고 생각하면 괜찮지 않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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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하고 관련 있는 내용은 아니지만, 한상연 선생님 실제로 만나뵈어서 대화를 잠깐 나눈 적이 있었는데, 굉장히 좋으신 분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분이 알려준 독일 유학 이야기도 흥미로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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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논문이 아닌 단행본 혹은 에세이 같은 경우라면 훨씬 자유롭고 유연하게 바라볼수 있습니다.
짧은 의견을 남기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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