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의 학』, 「존재」 장 주석 2 번역

주석 2: 표현의 결점: 통일, 존재와 무의 동일성

존재와 무의 명제에 대한 반감에 관하여 도움이 되는 또 다른 근거를 언급해야 할 것이다. 이 근거란, 존재와 무에 대한 고찰로부터 밝혀지는 결과의 표현이 “존재와 무는 하나의 똑같은 것이다”라는 명제를 통해서는 미완성이라는 점이다. 강조는 이 중에서도 하나의-똑같은-것임에 놓인다. 이는 비로소 주어가 무엇인지를 언표하는 것이 술어인 한 판단 일반에서와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그 의미는 구별이 [93]부인된다는 것인 듯 보이는데, 그러나 이 구별은 명제 속에서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구별은 규정들을 언표하고 이들을 구별된 것으로 함유하기 때문이다.─이 규정들이 사상되고 통일만이 고수되어야 한다는 점이 동시에 사념될 수는 없다. 이러한 의미는 자기 자신 일면적인 것으로 드러날 터인데, 왜냐하면 사상되어야 하는 것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제 속에서 현전하고 명명될 것이기 때문이다.─이제 “존재와 무는 똑같다”라는 명제가 이러한 규정들의 동일성을 언표함에도 마찬가지로 사실상 이 동일성이 양 규정을 구별된 것으로 함유하고 있는 한, 이 명제는 자기 자신 내에서 모순되며 자기를 해소한다. 우리가 이 점을 보다 면밀히 확인한다면 이에 따라 여기서 하나의 명제가 정립되는데, 이 명제는 보다 상세히 고찰될 경우, 자기 자신을 통해 소멸하는 운동을 지닌다[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이와 더불어 명제 자신에서 그 본래의 내용을 구성해야 하는 것, 즉 생성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명제는 결과를 함유한다. 명제는 자기 자체적으로 이 결과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되어야 할 상황은 결과가 그 자신 명제에서 표현되지는 않는다는 결여이다. 이 결과를 자기 내에서 인식하는 것은 외적인 반성이다.─이에 더해 마찬가지로 시작에서는, 판단의 형식에서는 명제가 사변적 진리를 표현하기에 적절하지 않다는 이러한 일반적 지적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숙지는 사변적 진리에 대한 많은 오해들을 불식시키는 데에 알맞을 터이다. 판단은 주어와 술어 사이의 동일적 관계이다. 여기서는 주어가 술어의 규정보다 더 이상의 규정들을 지닌다는 점은 사상되며, 술어가 주어보다 나아간 것이라는 점 역시 사상된다. 그런데 이제 내용이 사변적이라면 주어와 술어의 비동일함[das Nichtidentische] 역시 본질적 계기이지만, 이는 판단 속에서는 표현되어 있지 않다. 이 역설적이고 기이한 빛 속에서 사변적 사유에 익숙하지 않은 자들에게 근래 철학의 많은 것들이 드러나는데, 단순한 판단의 형식이 사변적 결과들의 표현으로 사용된다면 이 빛은 판단 형식에 다양하게 속하게 된다.

[94]결여는 사변적 진리를 표현하기 위해 먼저 대립되는 명제가, 위에서 마찬가지로 언표되어 있는 “존재와 무는 똑같지 않다”라는 명제가 덧붙여지는 방식으로 보충된다. 그러나 이 명제들이 결합되어 있지 않다는 점, 따라서 내용을 이율배반 속에서만 서술할 뿐이라는 방식으로 속행하는 결여가 발생한다. 반면 이들의 내용은 하나의 똑같은 것과 관계하며 두 명제 속에서 표현되어 있는 규정들은 단적으로 통합되어야 한다.─그렇다면 이 통합은 동요이자 동시에 양립 불가능한 것, 하나의 운동으로서 언표될 수 있다. 사변적 내실에 가해지는 가장 일상적인 부당함은 이 내실을 일면적으로 만드는 일, 즉 명제들 중 한 쪽을 부각시키는 일이다. 내실은 이 명제들 속으로 해소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명제가 주장된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언명은 옳은 만큼 거짓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한 쪽 명제가 사변적인 것으로부터 취해진다면 최소한 다른 쪽 명제도 마찬가지로 주목되고 언명되어야 할 터이기 때문이다.─여기서 말하자면 불행한 단어인 “통일”도 특별히 언급되어야 할 것이다. 통일은 주관적 반성을 동일성보다도 훨씬 많이 가리킨다. 통일은 무엇보다도 비교, 외적 반성으로부터 발원하는 관계로 취해진다. 외적 반성이 두 상이한 대상들 속에서 똑같은 것을 발견하는 한, 하나의 통일은 다음의 방식으로 현전한다. 여기서 비교되는 대상들 자신의 완전한 무관함이 이러한 통일에 반하여 전제되어서, 이러한 비교함 및 통일은 대상들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고 대상들에 외적인 행함이자 규정함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통일은 완전히 추상적인 똑같음을 표현하며, 똑같다고 언표되는 것들이 자기를 단적으로 구별된 것으로 보여줄수록 더욱 단단하고 두드러지게 들린다. 그러므로 이런 한에서, 통일에 대해서는 비분리성분리 불가능성을 말하는 것이 더 나을 터이다. 그러나 전체의 관계가 지니는 긍정적인 면[das Affirmative]은 이와 더불어 표현되어 있지 않다.

[95]이 점에서, 여기서 밝혀진 전체의 참된 결과는 생성으로, 이 생성은 순전히 존재와 무의 일면적 혹은 추상적인 통일이 아니다. 오히려 생성은 순수 존재가 직접적이고 단순하다는 점, 따라서 그것은 마찬가지로 순수 무라는 점, 양자의 구별은 존재하지만 마찬가지로 자기를 지양하존재하지 않는다는 이러한 운동에서 존립한다. 따라서 결과는 존재와 무의 구별을 주장하지만 오직 사념된 구별로서만 그러하다.

사람들은 존재가 무이기보다 오히려 단적인 타자라고 사념하는데, 이들의 절대적 구별보다 명확한 것은 없으며, 절대적 구별을 언명할 수 있는 일보다 쉬운 일은 없는 듯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점, 이 구별이 말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에 설득되는 일 역시 쉽다. 존재와 무의 구별을 고집하고자 하는 자들이 이 구별이 어디에서 존립하는지를 요구하고 언명하든 상관없다. 만일 존재와 무가 양자가 구별되도록 하는 여하한 규정성이라면, 상기되었던 바대로 이들은 규정적 존재와 규정적 무이지 여기서 있는 바대로 순수 존재와 순수 무가 아닐 터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구별은 완전히 공허하며, 양자 각각은 동등한 방식으로 무규정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구별은 이들 자신에서가 아니라 제3의 것인 사념함 속에 존립한다. 그러나 사념함은 이러한 일련의 서술에 속하지 않는 주관적인 것의 형식이다. 그러나 존재와 무가 그 안에서 이들의 존립을 지니는 이 제3의 것 역시 여기에서 등장해야 한다. 그리고 제3의 것 역시 여기에 등장했거니와 그것은 생성이다. 생성 속에서 존재와 무는 구별된 것으로 있다. 생성은 이들이 구별되어 있는 한에서만 존재한다. 이 제3의 것은 존재와 무와는 다른 것이다.─존재와 무는 하나의 타자 속에서만 존립하며, 이는 마찬가지로 이들이 독자적으로 존립하지 않는다는 점을 뜻한다. 생성은 존재의 존립인 만큼 비존재의 존립이다. 혹은 이들의 존립은 이들의 하나 속 존재이다. 이들의 이러한 존립은 곧 이들의 구별을 마찬가지로 지양하기도 하는 것이다.

존재와 무의 구별을 [96]언명하라는 요구는 존재인 것과 무인 것을 말하라는 요구를 자기 내에 포함한다. 반면 한 쪽 요구와 다른 쪽 요구를 그저 상호 이행으로 인식하라는 요구에 거역하며 존재와 무에 관해 이런저런 주장을 하는 이들이 무엇에 관해 말하는지를 언명하든, 즉 존재와 무의 정의를 제시하고 이 정의가 옳다는 점을 가리키든 상관없다. 이들은 다른 경우에서라면 고대 학문의 논리적 규칙들을 승인하고 적용하는데, 존재와 무에 대한 저 모든 주장들은 고대 학문의 이 첫째 요구를 충족시키지 않고서는 한낱 확언들, 학문적 부당성들일 뿐이다. 그밖에 실존을 처음부터 존재와 같은 의미로 간주하는 한에서 사람들이 실존이 가능성에의 보충이라고 말했다면, [여기서는] 이와 더불어 다른 규정인 가능성이 전제되며, 존재는 그 직접성 속에서가 아니라 심지어 자립적이지 않은 것으로, 제약된 것으로 언표된다. 매개되어 있는 존재에 대해 우리는 실존이라는 표현을 간직해둘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존재를─어떤 순수한 빛이라는 상 아래에, 선명한 바라봄의[ungetrübten Sehens] 명확성으로, 그러나 무는 순수한 밤으로─곧잘 세우고는[표상하고는] 하며, 존재와 무의 구별을 이러한 잘 알려진 감성적 상이성에 결부시킨다. 그러나 사실은, 사람들이 이러한 바라봄을 보다 정확히 표상한다면 다음을 쉽게 보증할 수 있다. 한 쪽을 바라보는 일은 다른 한 쪽을 순수하게 바라보는 일인 무를 바라봄과 진배없다는 점을 절대적 암흑 속에서만큼이나 절대적 명확성 속에서 볼 수 있거나 혹은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순수 빛과 순수 암흑은 똑같은 두 공허이다. 규정적인 빛 속에서야─그리고 이 빛은 암흑을 통해 규정된다─, 따라서 탁한 빛 속에서야 비로소, 마찬가지로 규정적인 암흑 속에서야─그리고 이 암흑은 빛을 통해 규정된다─, 밝아진 암흑 속에서야 비로소 어떤 것이 구별될 수 있는데, 이는 탁한 빛과 밝아진 암흑이라야 비로소 구별을 자기 자신에서 지니며 따라서 규정적 존재인 현존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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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해한 헤겔의 텍스트를 번역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사실 전에 '존재와 무의 기이한 통일'이라는 글을 포스팅하여 주셨죠. 아마도 이 텍스트에 대한 사유의 결과를 공유해 주신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 개인적인 소감을 간략히 여기 남기고 싶은데요, 제가 아직 부족한 점이 많아서, 혹시 오류가 있다면 부디 질정을 바랍니다. 여기서 "존재와 무는 동일하다(똑같다)"는 것을 편의상 '테제'라고 하겠습니다.

제 어설픈 생각이긴 하지만, 존재와 무의 동일성이라는 테제를 생성을 계기로 하여 해결하려는 것은 논리적 난국에 빠지게 되는 것 같아요. 즉, 헤겔은 존재, 무, 생성을 3개의 다리를 가진 구식 카메라의 다리들처럼 그 중 하나라도 없다면 완전한 의미가 성립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고 있죠.

존재와 무가 그 안에서 이들의 존립을 지니는 이 제3의 것 역시 여기에서 등장해야 한다

생성은 이들이 구별되어 있는 한에서만 존재한다.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존재, 무, 생성의 정립(鼎立)은 미리 요구되는 전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미리 이 3요소가 정립하고 있다면 존재와 무는 이미 구별되어 있습니다. 만약 이중 하나라도 결여되어 있다면 애초에 테제 자체가 해결될 수 없습니다. 위 인용 문장의 대우 명제처럼 존재와 무가 구별되어 있지 않으면 생성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선해해보았을 때, 이 테제를 설명하기 위한 방법적 시도로 단지 처음에 존재와 무가 같은 것이라고 했고 이를 해명하기 위해 생성의 논리가 등장한다는 정도로 말할 수는 있겠지요.

결론적으로, 위에 말씀드린 것처럼 일종의 아포리아가 이 테제에 계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뉴헤겔 선생님께서 포스팅해주시는 번역 등의 자료, 많은 도움이 됩니다. 깊이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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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하신 것은 제가 예전에 작성했던 글 존재와 무의 기이한 통일에 대한 반박으로 이해가 됩니다. 반박의 골자는 다음과 같은 듯합니다.

존재, 무, 생성은 서로를 개념적으로 구성하고 있다. 그런데 이 구성 관계 속에서 존재와 무는 이미 구별되어 있다. 그러므로 존재와 무의 동일성은 생성을 통해 해명될 수 없다.

만일 헤겔이 "존재와 무가 동일하다"와 "존재와 무가 구별된다"를 양립 불가능한 것으로 보고 전자를 배척한 뒤 후자를 받아들였다면 말씀하신 반박이 맞겠지요. 문제는 헤겔이 두 문장 모두를 승인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생성 범주를 구성하는 데 두 문장이 모두 필요하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생성은 기본적으로 존재에서 무로, 무에서 존재에로의 이행을 의미하는 범주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존재와 무가 구별된다는 점만을 견지하는 입장은 헤겔이 아니라 해당 글에 언급된 파르메니데스의 입장에 가깝습니다. 양자가 단순히 분리되기만 할 뿐이라면 존재와 무를 뒤섞는 "있으면서 있지 않다", "~이면서 ~이지 않다" 등의 형식을 지니는 문장들은 모두 거부되어야 할 것이고, 이는 발생과 소멸, 변화의 개념들을 모두 배격하는 입장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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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글을 자세히 읽어주시고 답변까지 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헤겔이 "존재와 무가 동일하다"와 "존재와 무가 구별된다"를 양립 불가능한 것으로 보고 전자를 배척한 뒤 후자를 받아들였다면 말씀하신 반박이 맞겠지요. 문제는 헤겔이 두 문장 모두를 승인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존재와 무가 동일하다"를 문장1이라고 하고, "존재와 무가 구별된다"를 문장2라고 하겠습니다. 문장 2가 헤겔이 승인하는 것이며, 저와 @TheNewHegel 님 모두 승인하고 있으니, 일단 문제는 문장1을 이제 어떻게 보느냐에 관한 것이 되겠지요.

아시는 것처럼 헤겔은 순수 존재와 순수 무가 무규정성이라는 관점에서 동일하다는 견해를 취하고 있지요. 그럼 이 문장1에서 제시된 순수 존재 및 순수 무가, 문장2의 존재 및 무와 동일한 것이냐가 문제가 될 것이라고 사료됩니다. 위에 번역해 주신 주석2텍스트를 보면, 문장1에서 양자의 무규정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구별은 완전히 공허하며, 양자 각각은 동등한 방식으로 무규정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구별은 이들 자신에서가 아니라 제3의 것인 사념함 속에 존립한다. 그러나 사념함은 이러한 일련의 서술에 속하지 않는 주관적인 것의 형식이다.

그렇다면 문장2에서의 존재 및 무도 여전히 무규정적인 것일까요.

만일 존재와 무가 양자가 구별되도록 하는 여하한 규정성이라면, 상기되었던 바대로 이들은 규정적 존재와 규정적 무이지 여기서 있는 바대로 순수 존재와 순수 무가 아닐 터이다.

뉴헤겔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구절을 제가 오해하거나 읽다가 의미를 놓친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설명에 동의하고요, 제가 제시한 설명은 절반밖에 해명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모로 이해를 도와주셔서 감사드리고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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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상적으로 구별이 규정성과 연관된다는 점을 떠올린다면, 말씀하신 문장 2의 존재와 무는 문장 1에서와 달리 규정적 무와 규정적 존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주의해야 할 것은, 헤겔이 존재와 무의 구별이 절대적이라는 단서를 덧붙인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절대적이라는 말의 의미는, 양자의 구별을 확립해주는 그 어떤 기준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설명을 위해 「현존재」 장에 나오는 실재와 부정의 구별을 대조적인 예시로 들어보겠습니다. 실재는 질(Qualität)의 존재적(seiend) 측면, 부정은 질의 비존재적(nichtseiend) 측면으로 정의됩니다. 이때 실재와 부정은 모두 질이라는 공통적인 기준을 가지면서도 그것이 존재적이냐 비존재적이냐에 따라 변별되는 까닭에, 양자의 구별은 규정적 구별입니다.

반면 존재와 무는 그 어떤 규정도 갖지 않기 때문에, 실재와 부정의 경우처럼 두 범주의 공통적인 규정이 되면서 둘을 변별해줄 기준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존재와 무의 구별이 절대적이라는 말은 사실 구별이 전적으로 무규정적이라는 말과 상통합니다. 구별의 절대성은 구별이 그 자신을 지속 불가능한 것으로 드러내고 곧바로 붕괴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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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군요. 친절하게 보충 설명도 해주셔서 뭐라 감사드려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실례지만 혹시 영미권의 저작 중에 분석적인 방법으로 헤겔의 "논리의 학"을 설명하는 학자의 책을 한두권 쯤 추천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헤겔은 이제 영미권 쪽에서도 많이 연구가 되어서 좋은 자료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마도 그 중에 윈필드의 책도 포함이 될 것 같습니다만...

논리학 연구서는 이제 상당히 많아져서, 윈필드의 책처럼 주요 챕터들을 해설하는 책에 한정해서 적겠습니다.

Winfield, R. D. (2012). Hegel’s Science of Logic: A Critical Rethinking in Thirty Lectures. Rowman & Littlefield Publishers.

Burbidge, J. (2006). The Logic of Hegel’s Logic: An Introduction. Broadview Press.

Carlson, D. G. (2007). A Commentary to Hegel’s Science of Logic. Palgrave Macmillian.

Rosen, S. (2014). The Idea of Hegel’s Science of Logic.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존재논리학에 한정해서는 저는 훌게이트의 책을 많이 봤습니다.

Houlgate, S. (2006). The Opening of Hegel’s Logic: From Being to Infinity. Purdue University Press.

Houlgate, S. (2022). Hegel on Being. 2 Vols. Bloomsbury Academ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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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정성스럽게 목록을 작성해 주셨으니 꼭 하나하나 읽어보겠습니다. 헤겔의 원서와 함께 봐도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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