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디어 구상: 존재와 무의 기이한 통일

월말에 「존재와 무의 기이한 통일: 파르메니데스와 플라톤을 통한 헤겔의 존재 변증법 이해」라는 제목으로 발표하는데, 기본적인 아이디어를 여기도 공유합니다.


본 작업은 헤겔의 『논리의 학』 초두에 나오는 다음의 기이한 문장에 대한 것이다.

순수 존재와 순수 무는 동일하다.

이 문장은 비상식적이며 부조리해보이기까지 한다. 'x가 있다'와 'x가 없다'는 서로 부정이기 때문이다. 이 문장의 부정은 사소하게 참인 듯하다.

존재와 무는 다르다.

파르메니데스는 이 명제를 철저하게 일관적으로 고수했는데, 그 결과 사물들의 생성과 소멸, 변화, 운동 일체를 부정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 개념들은 한 사물이 (어떤 경우에는) 있으면서 (어떤 경우에는) 없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한편 플라톤의 경우 『소피스트』에서 이 문제를 고찰하는데, 그는 'x가 있다'와 'x가 있지 않다'의 해석을 달리 함으로써 모순율을 위반하지 않은 채 생성과 변화의 세계를 구제한다. 그에 의하면 'x가 있다'는 'x가 ~[형상]에 참여한다'를 뜻하며, 'x가 있지 않다'는 'x가 ~와 다르다[다름의 형상에 참여한다]'를 뜻한다. 플라톤의 분석은 파르메니데스와 달리 생성과 변화를 긍정하지만 이 긍정은 감각적 사물들에 제한되며, 그는 비감각적인 대상들인 형상들에 대해서는 여전히 생성과 변화를 부정하게 된다.

헤겔이 보기에 순수 존재라는 개념은 논리적으로 존속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혼자서는 아무 내용도 갖지 않는 무의미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는 순수 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존재와 무가 고립되어 홀로 생각되는 한 두 범주는 변별될 수 없다. 존재라는 개념은 제3의 범주인 생성 속에서 자기의 반대 범주인 무와의 관계 맺음으로써 비로소 의미를 지닌다. 이것이 "존재와 무가 동일하다"는 이상한 주장의 진정한 함의이다.

이 함의로부터 나오는 가장 중요한 귀결은,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생성 중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헤겔의 존재론은 생성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파르메니데스와 생성을 제한적으로만 긍정하는 플라톤과 달리 생성을 존재의 핵심적인 원리로 격상시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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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이니 영어로 쓰겠습니다.

This is a very interesting post. As long as I understand it, your logic goes as follows:
P1: Pure being as a logical category turns out to be becoming.
P2: Every being has to have a form of pure being.
P3: If x is in a form of d1, and if d1 turns out to be d2, then x is in a form of d2.
C: Every being is becoming.

You have explained how the first premise works. I also believe the first premise has been dealt sufficiently in 서강올빼미. The second premise also seems to be true. Determinate beings are in a form of determinate being, but determinate being has a moment of pure being. Therefore, every determinate being has to have a form of pure being. The category of pure being might not be the fullest explanation of that being, but we can still have some account of any determinate beings by ascribing to it the form of pure being.

What I don't understand is the third premise, which I took from:

Because every being is in a form of being and being is nothing, every being is becoming. Although I agree that Hegel thinks there are only becomings in the world, I don't think this logic takes us to conclude like that. The fact that a form of a being turns out to be another form doesn't take us to conclude that the being turns out to take another form. Suppose we have a living thing, a category of life as demonstrated in Logic of Concept. Life as a form in Science of Logic turns out to be absolute idea. But that doesn't mean that every being in a form of living thing turns out to have a form of absolute idea. Therefore, I don't see how the third premise follows.

Instead, I think the relevant logic to take us to conclude that every being is becoming is something like this:
P1: Every form other than pure being and nothing is a sublated form of becoming.
P2: If x is a sublated form of y, then x includes y (from Aufhebung).
C: Every form other than pure being and nothing includes becoming.
In other words, any determinate being is determinate only as having its form as a sublation of becoming, and that, I think, is what allows Hegel to say that every being in this world is becom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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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ually, I think this logic might be of your interest.

P1: Only possible starting point is pure being.
P2: Pure being turns out to be becoming.
P3: Every other determinacy is a sublated form of becoming (P1, P2).
C: Every form is becom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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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우선 제 멍청함으로 인해 선생님들 논의를 진전시키기능 커녕 발목잡는 질문을 하게 된 점에 대해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yhk 선생님 해석으로 이해하지 않고 오히려 정반대로 이해를 했는데요.. ㅠㅠ 어디서 잘못된 건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우선 yhk선생님께 다음의 질문을 드립니다.

순수 존재랑 순수 무는 사유가 불가능하다는 것 아닌가요? 순수 존재가 생성과의 연관 하에서만 의미를 얻는다는 말은 곧 순수 존재 자체는 아무 내용이 없기 때문에 그것 자체로는 무의미하고 사유될 수도 없다는 것 아니에요?

글고 생성과 연관된 존재나 determinate being이 순수 존재의 형식을 갖는 모먼트가 있다는 yhk선생님 말씀도제가 첫번째 질문의 맥락 아래에 있기에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순수 존재가 지양되어(?) 모든 존재들이 생성된다는 이해는 애초에 어떻게 가능하죠? 순수 존재는 전혀 사유될 수 없는 것이니 그것이 지양을 하는지 아닌지 알 수 없을 것 같거든요.

제가 이해한 바로는 첫째, 순수 존재란 단적으로 사유 불가능하고 무의미한 것이므로 존재론에서도 다룰 수 없는 대상이다, 그리고 둘째, 따라서 우리가 존재에 대해 무언갈 말한다면 그것은 모두 생성중인, 비순수한 존재자들에 관한 것이다. 내용있는 존재, 유의미한 존재는 항상 생성과 매개해서만 존립 가능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인데요.

근데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또 yhk선생님께 드렸던 두 번째 질문과 비슷하게 다시 두 분 선생님께 통합질문을 드리고 싶은 것은,
순수존재가 (플라톤 식으로 말해) 다른 어떤 형상과도 결합되지 않는 그런 것이라면 애초에 순수존재가 아무 내용없다는 것은, 그래서 그것이 순수 무와 동일하다는 것은 어떻게 이야기될 수 있는 것이죠? 이 명제들은 이미 순수존재를 서술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혹시 그렇게 이해해서는 안 되고 순수존재가 개념 상 아무 내용이 없다는 것이 <우리에게> 그렇게 드러난다는 뜻이라고, 그래서 저 순수존재에 대한 명제들은 순수존재 스스로의 속성이 어떠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에게는> 순수존재가 무의미한 것임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라면, 헤겔은 어떤 의미에서 (부지불식 간에) 현상학적이라거나 어떤 의미에서 인간중심적이라고 보여집니다. 그러나 이 장광설은 제 뇌피셜이고 허수아비 지푸라기 뜯는 소리일 것 같네요..

편달 지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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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글 감사드립니다. 일단,

이 글 자체가 "아이디어 구상"인 만큼 명료하게 쓴 글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정보 전달보단 한 번 씀으로써 더 익숙해지기 위해 쓴 글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도 제가 잘 이해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작성자분도 모두가 잘 이해하는 글을 목적으로 쓴 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언가 "잘못된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사유가 불가능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사유가 불가능하다면 대논리학이 순수 존재와 순수 무로 시작할 수 없겠죠. 다만, 순수존재가 사유되려면 determinate being/생성 등이 있어야한다거나, 순수존재를 사유하는 것이 순수무를 사유하는 것과 같다던가, 등의 표현이 더 적절하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이 부분이 제가 이해가 힘든 부분이고, 위에 댓글에서 언급한 부분입니다. 순수 존재가 지양 (sublate, aufheben이 지양 맞나요?)된다 -> 모든 존재들이 생성된다에 대한 논리를 쓰려면,
전제 1: 모든 존재들은 존재 형식이 있다 (form of being).
전제 2: 모든 존재형식들은 생성으로부터 지양된 결과들이다.
전제 3: x가 y로부터 지양됐다면 y는 x를 포함한다. 혹은 x가 y를 설명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다.
전제 4: 모든 존재 형식들은 생성을 포함한다.
결론: 모든 존재들은 생성을 포함한 존재형식이 있다.
와 같은 논리를 써야할 것 같습니다. 즉, 존재 방식들을 생성의 지양 말고는 얻을 길이 없기 때문에, 모든 존재는 생성의 형식을 갖고 있다, 등의 논리가 더 맞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글 자체가 아이디어 구상이니 작성자님이 그냥 전개를 안 시킨 것일 수도 있고요.

이 부분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헤겔의 존재론에서 순수 존재를 다루고 있으니깐요.

순수존재가 "다른 어떤 형상과도 결합되지 않는 그런 것"이라는 전제를 깨는 게 대논리학 아닐까요? 그 동안은 순수존재가 되게 순수하고 무엇가도 결합되지 않는 noble한 무언가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생각해보면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고 순수 무와 같다는 얘기죠.

헤겔이 인간중심적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그렇게 드러다는 뜻"은 맞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드러나는 만큼 그게 존재 입장에서도 맞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이면서

입니다.

너무 추상적으로 글이 써지는 것 같으니, 조금 더 생성에 대한 얘기를 예를 들어가면서 해보겠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헤겔이 생성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것 중 하나는, 모든 것을 멈춰있는 상태로 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유클리드는 원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A circle is a plane figure contained by a single line[which is called a circumference], (such that) all of the straight-lines radiating towards [the circumference] from one point amongst those lying inside the figure are equal to one another." 헤겔은 이 정의가 멈춰있는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요). 이 원을 생각을 하면 원의 생성과정이 전혀 들어가있지 않으니깐요. 홉스가 De Corpore에서 원에 대한 정의를 수정하는데, "한 점으로부터 중심으로 같은 거리를 지키며 선을 그은 것" 과 같은 정의를 합니다 (지금 홉스 책을 갖고 있지 않아 정확한 워딩은 기억이 안 나네요). 즉, 원이 생성되는 과정을 원의 정의로 두게 된 거고, 우리는 원을 생각을 하면 원의 생성 과정을 생각하게 되겠죠. 즉, 원의 존재 형태는 그 존재로써 영원히 존재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런 생각을 헤겔을 어느 정도는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멈춰있는 것이 아닌 그것의 생성으로 모든 것들이 존재한다 -- 이런 식의 생각 아닐까 싶네요. 이 생성이 어떻게 순수 존재와 순수 무의 지양으로 표현될 수 있는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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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딥변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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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존재'와 '무' 같은 개념을 어떻게 정의할 거냐의 문제인 거 같은데요. '존재'에 아무 내용이 없다고 규정한다면 당연히 아무 내용 없는 무와 비슷해질 거 같습니다. 반면 파르메니데스와 플라톤의 존재 및 무 개념을 비판한 아리스토텔레스 식으로 '존재'를 '각 존재자를 통칭하는 유비적 개념'으로 이해한다면 존재에서 무로의 미끄러짐을 방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있다'라고 하는 것은 그때마다 실체의 있음, 질의 있음, 양의 있음 등이고 '없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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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첫 수업으로 <소피스트> 강독을 수강할 때 진짜 머리 터지는 줄 알았는데 오랜만에 보니 반갑네요. 그때는

한다는 점에서 플라톤과 헤겔이 연결된다는 점을 생각하지 못했는데, 뉴헤겔님 글을보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이 드네요. 이런 비교 시도가 원래 있던 것일까요?

그나저나 <소피스트>를 읽은지 4년 정도가 되어서 잘 기억은 안나는데, 요 부분의 서술 의도가 잘 이해되지 않네요.

그 이전의 서술은

1.운동은 있음과 다르다 → 운동은 있는 것이 아니다.
2.운동은 있음에 참여한다(혹은 결합한다/몫을 나누어 가진다) → 운동은 있다.

라는 점에서 플라톤이 생성과 변화를 긍정했다는 점을 말씀하시려는 것을 알겠는데, 이 긍정이 "감각적 사물에 제한"된다고 말씀하시는 의도를 모르겠습니다. 제 기억엔 플라톤의 위 논리가 최고류들의 결합에 관해 설명하는 부분에서 등장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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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읽으셨다니 흥미롭군요. 실제로 이렇게 해석한 사람들이 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순수 존재와 순수 무는 결국 한 thought category를 두 개의 다른 이름으로 규정했기 때문에, 존재와 무가 생성을 일으키지 않는단 비판이죠. 하지만, 이 해석은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즉, 헤겔은 비규정성을 "순수 존재" 혹은 "순수 무"로 규정을 하는 것이 아닌, 존재 자체가 비규정성이라고 하는 것이죠.

그리고 흥미롭게도,

이 말은 헤겔에 대한 비판이 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있다라고 하는 것은 실체의 있음, 질의 있음, 양의 있음 이라고 말하셨죠. 하지만 무언가가 있음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것은 순수 존재가 아니죠. 있음이란 개념 자체를 헤겔은 보고 싶은 것입니다. 순수 존재, 즉 있음 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 있음이라는 것에는 아무것도 없기에 순수 무가 되는 것이겠죠. 그리고 흥미롭게도, Arigato님이 말씀하신 실체의 있음, 질의 있음, 양의 있음, 이 세가지 전부를 헤겔은 순수 존재, 즉 있음 자체로부터 유도해냅니다. 그렇기 때문에 헤겔의 순수 존재에 대한 조금의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아보입니다.

+) 혹은 이렇게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실체의 있음, 질의 있음, 양의 있음은 어떻게 유도해낼 수 있을까요? 있음이란 개념부터 시작해야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있음이란 개념부터 시작을 해서 다른 있음들을 유도해내는 것이라면, 있음 자체를 사유할 때 실체, 질, 양, 등의 것을 가져오면 안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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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가 더 편하시다고 해서, 지하철에서 한번 영작 연습 삼아 브로큰 잉글리쉬로나마 답을 써봅니다. (오타, 어색한 표현 지적 받습니다.

Thank you for sharing detailed comments on my idea. I think your overall point is valid, I concur that one cannot infer that e.g. life itself is the absolute idea from that life eventually turns out to be the absolute idea.

However, I think the fact that Hegel primarily poses being and nothing as pure distinguishes them from all other following categories. The logical unsustainability of the first two categories makes different the way they turn out to be becoming. The transition is distinctly characterized as immediate, as Hegel puts it in the past tense (übergegangen). This indicates, in my view, that we cannot even maintain the coherent concept of being without regarding it as a moment of becoming, and this is especially the case when it comes to every being (Seiendes). It is possible that a living being does not yet turn out to have a form of the absolute idea, whereas the same does not go for a being which is supposedly yet to prove itself to be a becoming being at the same time. It is worth noting Hegel's remark that we are only making statements about determinate beings as far as concrete, finite things are concerned.

Therefore, we cannot find any instantiation of pure being or nothing unlike all other categories (e.g. a living being). For this reason, I do not see P2 and P3 to be the case, and on the other hand, albeit for different reasons, I find your second formulation of my argument wholly agreeable.

Ps. I elaborated my argument in full detail on my paper, unfortunately I could not share it on the internet since I am planning to polish it for my further publication. Thank you again for sharing your thoughts on my ide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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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잊고 있었던 포인트들을 다시 상기시키게 하는 답글이었네요. 감사합니다. 혹시라도 출판되면 포스트를 올려주시길 바랍니다. 플라톤의 소피스트를 읽어본 적은 없지만 항상 공부해보고 싶었던 글이었거든요. 어떻게 뉴헤겔님이 소피스트와 헤겔을 연결시킬 지도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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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리한 지적이십니다. 사실 헤겔 자신은 『소피스트』를 굉장히 높게 평가합니다. 헤겔이 보기에 그 대화편은 순수 사유 범주들의 변증법적 운동을 통해 통일을 이룩한 플라톤의 최고 작품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이해는 헤겔 자신의 체계를 플라톤에 투사한 왜곡이라는 지적이 연구자들 사이에서 공유되고 있습니다. 플라톤 자신은 형상들의 상호 결합을 이야기하기는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형상들이 서로 관여한다는 점에 머무를 뿐이지 이들이 다른 형상들로부터 발생한다거나 새로운 형상을 출현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각 형상들은 상이한 채 생성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머물러 있다는 점이 『소피스트』에도 명시되어 있으며 『국가』를 비롯한 다른 대화편에서도 계속해서 언급되기 때문에, 저는 플라톤과 헤겔을 저런 식으로 대조시키는 게 좋겠다고 결론 내리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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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이 그렇게 이해했다는 얘기는 아니고요, 존재와 무가 같다는 '이상한' 결론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한 가지 제시한 것뿐입니다.

제가 보기에 관건은 순수하고 내용이 없다는 존재 개념에서 어떻게 실체, 양, 질과 같은 비순수한 내용들이 '유도'되는지 설명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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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게도, 헤겔은 이상한 것 같습니다. 헤겔을 좀 덜 이상하게 만드려는 시도는 많았지만, 제가 알기로 성공한 사례는 아직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냥 헤겔이 이상하다는 걸 받아들이고 그 이상한 주장이 성공할 수 있는지를 봐야하는 것 같습니다. 많은 철학자들이 헤겔은 이상하다, 혹은 헤겔 작업물 전체가 gibberish에 불과하다, 등의 말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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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이 부분이 어느 대화편에 나오는지 알 수 있을까요?

위에서 밝혔듯 『소피스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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