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 규정/성립의 주관성과 객관성에 대한 의문

용기를 발휘하는 경험의 구조 및 발생에 대한 현상학적인 관심을 갖고 사적인 탐구를 진행 중인데, 막히는 부분이 생겨 고견을 구하고자 용기를 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i)과 (ii)가 서로 모순되는 것 같아 고민입니다.

(i) 저는 그 자체로 용감한 행위의 목록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동일한 행위가 주체의 개인사 및 그가 속한 상황에 따라 용감한 것일 수도, 비겁한 것일 수도, 용기와 무관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심각한 불안장애 환자에게 외출은 용감한 행위이지만, 그러한 고통을 모르는 사람에게 외출은 용기와 무관한 행위가 됩니다. 따라서 무엇이 실존적인 위기이고 무엇이 그에 대적하는 용감한 행위인지는 주체가 처해있는 지평에 상관적으로 규정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무엇이 실존적인 위기이고 무엇이 그에 대적하는 용감한 행위인지는 해당 주체의 입장에서—말하자면 1인칭의 관점에서—밝혀져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용기에 대한 현상학적 접근이 온당하다고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ii) 그런 동시에, ⟪라케스⟫에서 영감을 받은 직관인데, 어떤 행위는 그것이 훌륭한 또는 고귀한 목적을 지향하거나 그 자신이 고귀해야만 용감한 행위로 규정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달리 말해, 훌륭하거나 고귀하지 않은 목적을 지향하거나 그 자신이 고귀하지 않은 행위는 아무리 용기의 지향성을 규정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이런저런 조건들(e.g. 세계 편에서의 어떤 위기상황, 주체 편에서의 두려움과 그 두려움에 대한 극복, 자유로운 행위자성에 입각한 선택, 인내 등등)을 만족한다 하더라도 용감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자신보다 훨씬 힘이 센 이웃이 백화점에 폭탄을 설치할 것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힌 한 사람이 세상을 보호하겠다는 목적을 위해 ‘용기’를 내 이웃을 선제공격하는 상황은 용감한 행위가 성립한 상황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 경우, 무엇이 실존적인 위기이고 무엇이 그에 대적하는 용감한 행위인지는 해당 주체의 입장에서 고려되어선 안 될 것 같습니다. 1인칭 관점에서의 분석은 주체의 인식적, 윤리적 오류를 도외시할 위험이 있어 보입니다.

당장 떠오르는 해결책으로는 (i)의 직관을 유지하되, (ii)를 일종의 규제적인 조건으로 내거는 것입니다. 무엇이 용감한 행위인가를 판단할 적에 가장 마지막 단계에서 행위자에게 중대한 인식적, 윤리적 오류가 없었어야 한다는 조건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해결책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애초에 이 문제가 용기에 대한 현상학적 탐구라는 저의 목적과 과연 유관한지부터 의문스럽습니다. 용기의 체험이 아니라 어떤 행위에 용기라는 덕성을 할당할 것이냐는 판단의 문제인 것 같아서요. 그러나 또 마음 한 켠으로는 용기에 대한 경험이 대체 무엇에 대한 경험인지를 파악하고자 하는 작업에서 그 둘이 구분될 수 있는지 모르겠고요.

저는 정확히 어떤 문제에 처해있는 것이고,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까요……?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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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용기에 관한 현상학적 접근에 크게 두 가지 접근법(?)이 섞여있는 듯합니다.

(a)

이 부분은 결국 '용기'라 행위의 심적 상태 (감정, 기억, 경험, 판단 등등을 포괄해서 이리 말하겠습니다)에 대한 기술을 시도하고 싶으시다는 말로 들립니다.

(b)

한편 이 부분은 '용기'라 (남들이 부를 만한) 상황에 대한 '(메타윤리인지 규범윤리인지) 윤리학적 정의를 시도하는 상황으로 보입니다.

(2)

이 부분에 대한 답은 @HARIBO 님이 상황을 어떻게 보시는지에 따라 달려있는 듯합니다. 이제 (ii)에서 말하신 이웃을 공격하는 상황을 '만용'이라 정의하겠습니다.

이제 (a) 용기의 심적 상태와 만용의 심적 상태가 그저 다른 모든 외부요소들 없이 일종의 '윤리적 조건' (의무라던가 결과적 좋음이라던가 뭐 이 자체로도 여러 논쟁이 있을 수 있는 말이지만)의 문제라면, 현상학적 기술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용기의 심적 상태는 곧 만용의 심적 상태와 동일해 보입니다.
반대로 (a) 용기의 심적 상태와 만용의 심적 상태가 '윤리적 조건' 이외의 어떠한 심적 상태 - 현상학적 기술의 차이에 의해서 발생한다면, (a)와 (b)가 합치되는 (만용을 제외한) 용기의 심적 상태에 대한 기술이 성립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달리 말해, 용기와 만용의 차이가 '현상학적으로 유의미한 기술의 차이'를 가져올 수 있다면 둘을 구분하는 현상학적 기술을 시도해봄직 하시고, 이게 아니라면 윤리적 규정을 배제한 채 일반적인 용기-만용의 심적 구조에 대한 기술을 시도하셔야 하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3)

예전에도 말한 바 있지만,

현재 영미권 분석철학/인지과학/도덕 심리학 일반에서 하는 시도들이 나름 현상학과 접점이 있는 듯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Moral Psychology of the Emotions | Rowman & Littlefield 다음 총서가 나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쉽게도 용기에 관한 모노그래프는 없네요.)

예컨대, 분노에 관한 모노그래프 서장에서는

'분노'를 정의하기 위해 진화론적-심리학적 분석/라틴어에 기반한 어원론적 분석/비교문화적 분석을 모두 동원하며, '분노'를 일종의 '가족유사적'/다원적 용어로 쓰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결국 분노의 유형을 7가지로 분류합니다. (사실 보면 기준도 없고 조금 중구난방인 분류에요.)(보복 분노, 고통 전가 분노, 수단적 분노, 정치적 분노, 비-인간적 대상에 대한 분노, 척하는 분노 등)

용기에 대한 분석도 이처럼 좀 더 좁은 상황을 설정하시고 논의를 전개하는게 좀 더 편하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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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야에 대한 식견이 지극히 얕은만큼 더 "용감하게(?!)" 마구 제 의견을 늘어놓아 보겠습니다 :crazy_face:


한국어 "용감(勇敢)"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저는 (i)가 훨씬 더 핵심적인 조건인 것으로 느껴집니다. @Mandala 님께서 짚으신 것처럼 (ii)가 "윤리적 조건"을 나타내는 것은 분명해보이는데, 이건 어디까지나 "용감"과는 독립적인 것 같다는 막연한 느낌을 받습니다.

요컨대 (ii)는 일단 무시하고 (i)만 척도로 고려하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겁쟁이 - 용감함 - 무모함'을 따질 수 있다는 직관이 있습니다. 즉

도 저는 "용감하다"라는 말을 붙이는게 그렇게 결정적으로 틀렸다는 느낌은 들지가 않네요. 물론

는 명백해 보이지만요. 어쩌면 한국어 "용감함"과 희랍어 "ἀνδρεία"가 길이 갈리는 대목일지도 모르겠다 ...는 제멋대로의 생각을 해봅니다.


덧붙여 (i)와 (ii)를 화해시키는 해법으로 저한테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ii)를 기준으로 "용감한 행위의 목록"을 설정하고, 각 주체마다 '합격점'을 달리 조정하는 방식으로 (i)를 살려내는 것이었습니다. @HARIBO 님의 해법과는 반대네요.

그치만 저 또한 얘기를 해놓은게 무색하게도 털끝만큼도 마음에 들지 않는 해법이라는게 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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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 정말 적확한 지적이네요. 총서는 살펴보았는데 정말 멋져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연구 대상이 되는 용기의 종류를 세분화해야 한다는 조언도 새겨 듣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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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감한 코멘트 감사합니다 :slight_smile: 합격점을 달리 조정한다는 말을 혹시 조금만 더 부연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중요한 것은 와일드버니 님도 저도 용기의 문제를 접근함에 있어 주관주의적이기만 한 접근도, 객관주의적이기만 한 접근도 부당하며 둘 모두가 아울러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점 같습니다. 현상학만큼 주객의 상관관계를 중시하는 학도 없으니, 어쩌면 저는 괜찮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코멘트 덕에 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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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와 (ii)사이의 missing link를 고민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 자체로 용감한 행위의 목록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은 곧 "용기"에 대한 순수 "객관적" 접근이 불가능하다는 것으로 저는 이해합니다. 그리고 이는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따라서 용기에 대해 접근하기 위해 개인사 등의 1인칭적 접근 즉 주관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주장 역시 어느 정도 동의합니다. 그러나 저는 "용기를 발휘하는 경험의 구조 및 발생에 대한 현상학적" 탐구가 1인칭 시점으로 환원될 수 있다거나 환원되어야 한다는 주장에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1인칭의 주체가 용기와 유관한 행위를 할 때 "용기"라는 모종의 범주를 인지하고 있고 이러한 "용기"라는 의미범주는 단순히 1인칭의 것이 아니라 상호주관적으로 공유되는 의미의 지평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만약 1인칭의 주체가 (우리가 보기에) 용기와 유관한 행위를 할 때 "용기"의 범주를 전혀 인지하지 않고 행위를 하는 경우라면, 애초에 "용기"에 대한 현상학적 탐구의 대상이라고 보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 경우 용기라는 범주보다는 무언가 본능적인 것에 더 가까워지겠죠.) 즉 1인칭의 주체가 "용기"라는 범주를 의식하고 있다면, 이는 곧 다른 주체들이 "용기"라는 범주를 어떻게 인식하고 받아들이고 향유하는지를 1인칭의 주체가 인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불안장애 환자가 외출을 감행할 "용기"를 고려하고 있다는 것은, 상호주관적 지평에서 "용기"가 어떠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그리고 내가 지금 외출을 감행하는 것이 "용기"의 경우에 해당하는지, 혹은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이 나의 행위를 용감한 것으로 인정할지를, 1인칭 주체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고려하고 있다는 것이죠. 의미론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순수한 1인칭시점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습니다 (사회와 유리된 극단적 로빈슨 크루소가 아니라면요).

의미의 상호주관적 지평을 도입하게 되면, (ii)가 문제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용기"란 단순히 1인칭 시점에서 이러저러한 것으로 믿는 어떤 "사적인 것"이 아니라, 1인칭 주체가 "용기"라는 상호주관적/사회적 범주의 맥락을 인지하고 지금의 상황인식이 "용기"라는 사회적 범주에 들어맞는지를 고려하는 상호주관적/객관적 지평에 걸쳐 있기 때문입니다. 즉 순수한 1인칭시점을 넘어서는, 의미의 상호주관적 지평과 현실에 대한 객관적 인지가 동시에 작동해야 합니다. 이 경우 "망상"의 가능성이 대폭 제거됩니다. 행위주체가 현실에 대한 객관적 인지를 통해서 지금 상황이 폭탄이 설치된 상황인지를 고려하게 되고, 설령 폭탄이 설치되었다고 판단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어떤 행위가 "용기"있는 행위인지를 고려하게 되고 등등의 일련의 숙고를 통해서 행위가 나타나기 때문이지요. 혹은 주어진 정황들로 말미암아 정말 일촉즉발의 상황이라고 판단이 되어 내 이웃을 선제공격하는 상황이 충분히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웃을 선제 공격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정당하지 못한 행위일 수는 있으나, 행위주체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러한 행위에 이르기까지의 충분한 reasons가 있을 수 있는 것이죠. 포인트는 "용기"에 대한 탐구에 있어서 의미의 상호주관적 지평과 현실에 대한 인지를 강조하게 되면, "망상"과 같은 관념론적 위험성을 대폭 제거할 수 있고 (물론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습니다만 유의미한 탐구의 대상으로서는 충분히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귀함" 등과 같은 불분명한 플라톤적 범주를 도입하지 않아도 되며, 윤리적 옳고 그름의 문제와 구별될 수 있습니다. 즉 "가장 마지막 단계에서 행위자에게 중대한 인식적, 윤리적 오류가 없었어야 한다는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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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호주관적 지평에 대한 고민도 해보겠습니다, 코멘트 감사합니다! :slight_sm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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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용기를 내어 댓글을 달아봅니다.

(1) 용기에 대한 현상을 그대로 드러내어 용기의 본질을 탐구하려는 것이 @HARIBO 선생님의 가장 기본적/근본적인 연구 방향이 되겠죠. 그렇다면 일단 문제가 되는 것은 "전형적인" 혹은 "대표할 만한" 용기의 현상학적 기술(記述)이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하고, 여기에 대한 예외적 사례들이 있으면 그 사례들이 "전형적/대표적"인 것의 의미와 위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닌 한, '예외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i) 저는 그 자체로 용감한 행위의 목록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동일한 행위가 주체의 개인사 및 그가 속한 상황에 따라 용감한 것일 수도, 비겁한 것일 수도, 용기와 무관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심각한 불안장애 환자에게 외출은 용감한 행위이지만, 그러한 고통을 모르는 사람에게 외출은 용기와 무관한 행위가 됩니다. 따라서 무엇이 실존적인 위기이고 무엇이 그에 대적하는 용감한 행위인지는 주체가 처해있는 지평에 상관적으로 규정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무엇이 실존적인 위기이고 무엇이 그에 대적하는 용감한 행위인지는 해당 주체의 입장에서—말하자면 1인칭의 관점에서—밝혀져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용기에 대한 현상학적 접근이 온당하다고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여기에서 @HARIBO 님은 용기의 발현으로서 '용감한 행위'를 제시하시면서 그 자체로 '용감한 행위'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로 용감한 행위는 원래 어떤 선험적인 것이 아니라 상황 내지는 문맥의존적인 것이기 때문이라고 이해했습니다. 그렇다면 용감한 행위는 구체적 맥락에서 파악되어야 한다는 것이 자연스러운 귀결일 텐데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용기'라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 동의/합의할 수 있는 형태의 요소들이 먼저 제시되지 않는다면 결국에는 '용기' 자체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용기가 문제되는 상황'의 집적을 갖게 될 것이고, 이는 카주이스틱한 결론으로 이어지게 될 거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2) 그리고 @HARIBO 님의 관심과 의도는 "용기를 발휘하는 경험의 구조 및 발생에 대한 현상학적인 관심"이었지요. 여기서 용기를 발휘하는 경험의 구조 및 발생을 1인칭의 관점에서 파악하시려는 것 같습니다. 현상학에서는 내재적 본질을 직관적으로 파악하려 하기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여기서 현상학적인 판단중지 혹은 환원 등과 같은 현상학의 방법은 근원적으로 @HARIBO 님께서 하실 수 있는 것이고, 가정된 문제상황에서 등장하는 1인칭 주체가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해야 맞지 않을까요. 1인칭 주체가 어떻게 느끼고 생각할지 유추/추리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추이며 작성자 님의 판단/해석 등에 따라 용기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정당화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자신보다 훨씬 힘이 센 이웃이 백화점에 폭탄을 설치할 것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힌 한 사람이 세상을 보호하겠다는 목적을 위해 ‘용기’를 내 이웃을 선제공격하는 상황은 용감한 행위가 성립한 상황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 경우, 무엇이 실존적인 위기이고 무엇이 그에 대적하는 용감한 행위인지는 해당 주체의 입장에서 고려되어선 안 될 것 같습니다. 1인칭 관점에서의 분석은 주체의 인식적, 윤리적 오류를 도외시할 위험이 있어 보입니다.

(3) 여기서 "해당 주체의 입장에서 고려되어선 안 될 것 같습니다. 1인칭 관점에서의 분석은 주체의 인식적, 윤리적 오류를 도외시할 위험이 있어 보입니다"라는 소결론을 제시하신 것은, 가정된/유추된 주체의 심리적 판단이 모두 정당화될 수는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신 귀결로 보입니다. 즉, 위에서 제시하신 사례들에서 @HARIBO 님께서는 (1인칭) 주체가 내적으로 인식적, 윤리적 판단을 한 것이 항상 옳을 수는 없으므로 (1인칭) 주체를 고려해서는 안된다는 결론을 이끌어 내셨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어느 주체에게도 마찬가지의 결론이 나오지 않을까요. 소박하게 생각해도 세상의 어느 누구의 판단도 다 옳을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할 수 있는 것은 또다시 가상의 행위자에 대한 유추/추리로 귀결되며, '용기를 발휘하는 경험의 구조 및 발생'에 대한 탐구는 아포리아에 봉착하게 될 것 같습니다.

저는 정확히 어떤 문제에 처해있는 것이고,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까요……?

(4) 여기서 저는 '용기를 발휘하는 경험의 구조 및 발생'에 대한 현상학적 탐구에 있어서 위의 용기와 관련된 '실재 자체'가 아닌, **'용기라는 실재가 @HARIBO 님 주관에 드러나는 의식현상을 탐구'**하는 것, 감정이입과 직관의 도움으로 경험의 구조를 사태 그 자체에서 파악하려는 것으로 방법론적 방향전환이 필요할 지도 모른다고 조심스럽게 말씀드려 봅니다.

너무 추상적인 대안을 제시한 것 같아 송구스럽습니다. 아무쪼록 힘을 얻으시고 연구가 좋은 결과물로 이어지길 기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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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위에 @HARIBO 선생님께 제가 쓴 댓글에서 현상학적 연구 방법론이 정확히 무엇이며,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안내나 소개 없이, 너무 원론적인 현상학의 견해를 주장하는 것 같아서, 내용을 수정/보충하는 의미로 "현상학적 연구"란 무엇이며 어떤 방법으로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글을 소개합니다.

현상학적 연구(phenomenological research)란 무엇인가?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이 글은 주로 사회학에서 말하는 질적연구방법론으로서 현상학적 연구를 소개하고 있지만, 선생님의 연구에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서울대 철학과 이남인 교수님의 논문 " 현상학과 질적연구방법"도 참고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 현상학과 질적 연구 방법(Phenomenology and Qualitative Research Method), 철학과 현상학 연구 제24집, 2005.01, 91 - 121 (3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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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염두에 뒀던 것은 그냥 소박한 발상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외출에 필요한 용기: 30점

이라고 할 때, 불안장애 환자에게는 30점을 넘는 것만으로도 "용감해!"라고 해줄 수 있지만, 또 다른 사람은 그냥 외출을 하는 것만으로는 '용감하다'는 평가를 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사실 제가 드린 이 "해법"은 (i)와 (ii)를 단지 "화해"시키고 싶다면 이를 화해시킬 것일지 문제를 염두에 둔 것이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는 여전히 "객관주의적" 접근인 (ii)는 "용기"와는 독립적인 별도의 문제로 취급하고 싶다는 직관이 드는 것 같습니다.

물론 @Herb 님께서 지적하셨듯이

라는 점은 중요한 점이고, 개인적으로는 이건 한국어 "용기"가 무슨 뜻을 갖는지를 따지는 경험적 문제가 될 것 같기도 합니다. 상기한 제 직관은 이런 언어학적/사회과학적 성과에 의해 충분히 반증될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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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으로 의미 깊은 연구를 수행하고 계시는 @HARIBO 선생님의 연구가 현재 정체되어 있는 것 같은데요, 개인적으로는 이 연구를 주로 분석철학적인 방식으로 수행하시는 것이 더 적합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방향으로 연구를 수행하실 경우를 염두에 두고 질문하신 것에 대한 제 개인적인 견해를 간략히 말씀드리고 싶어요.

'용기'의 고유한 의미 내용은 많은 부분이 결정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각종 사전 등에서 용기의 의미를 규정하고 있기도 하고요.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용기의 발현으로서 '용감한 행위'는 현실이라는 문맥에서 이루어지므로 그에 대한 정확한 판단/평가가 어렵다는 것이죠. 즉, 추상적인 '용기'개념과 구체적인 '용감한 행위'는 다른 컨텍스트에 놓여 있는 것이죠.

또, '용감한 행위'가 평가의 문맥에 놓인 것이라면 행위 자체에 대한 규정과, 그 행위가 속한 상황 등을 고려한 평가는 구분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착오'의 경우가 대표적입니다. 즉, 도둑인줄 알고 용기를 내어 약간의 폭력을 사용하여 잡았는데, 실은 영화 촬영 중이었다는 사례가 있다면, 여기서 도둑을 잡은 용감한 행위라는 외적인 행위 자체와 그것이 실은 도둑이 아니어서 오히려 피해만 끼친 행위였다는 평가를 내리는 것은 구분된다는 것이죠.

따라서 이제 용기, 용기의 발현으로서의 행위라는 구분, 그리고 그 행위 자체와 실제적 문맥을 고려한 평가라는 하위 구분이 생기게 됩니다. 이를 명확히 하면 '용기'의 분석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여기에 더해야 할 것은 용감한 행위를 판단하는 주관적 기준을 정하는 것입니다. 즉, 행위자의 입장에서 판단할 것인가, 일반인의 입장에서 판단할 것인가, 행위자에 대한 특수지식이 있는 일반인의 입장에서 판단할 것 등이 문제가 되니까요.

따라서 이러한 기반을 바탕으로 용기와 용감한 행위가 문제되는 사례군을 철저히 분석하면 혼동을 막고 철저한 연구 수행에 도움이 될거라 생각합니다.

부디 연구를 잘 마치실 수 있으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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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tes 님, 달아주신 댓글들 모두 잘 읽었습니다. 전형적인 것과 예외적인 것을 나누어도 좋겠다는 지침, 그 어떤 1인칭 관점에 선 주체도 오류 불가능한 경지에 오를 수는 없다는 지적, 용기를 판단하는 주체들의 다원화 그리고 무엇보다 선생님의 응원들에 특히 감사합니다. 감히 두 가지만 첨언하고자 합니다.

첫째, 저는 '[용감한] 행위 자체에 대한 규정'과 '그 행위가 속한 상황 등을 고려한 평가'가 서로 엄밀하게 구분될 수 없다는 직관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해당 행위가 속한 상황에 대한 고려 없이 말하자면 이념적인 행위를 상정하고 그것의 성격을 규정하는 작업은 지나치게 추상적이 될 우려가 있으며, 그 추상성으로 인해 결국 오류를 낳을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예를 들어 제시해주신 착오의 사례에서 저는 행위자가 도둑을 잡은 행위가 용감하다고 생각이 되지 않았습니다. 혹시 제가 선생님께서 제시해주신 저 둘 사이의 구분에 대해 오해한 바가 있을까요? 편하게 말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둘째, 현상학적 연구 방법과 관련하여, [형상적 환원 등의 이후] 주관에 드러나는 용기에 대한 체험의 지향적 구조 자체가 용기의 본질과 일치한다는 믿음이 현상학의 핵심 테넷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용기와 관련된 '실재 자체'가 아닌, '용기라는 실재가 주관에 드러나는 의식현상을 탐구'하는 것, 감정이입과 직관의 도움으로 경험의 구조를 사태 그 자체에서 파악하려는 것으로 방법론적 방향전환이 필요"하다는 말씀을 제가 100퍼센트 이해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전환 이전의 항과 전환 이후의 항이 저에게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아서요. 이에 대해서도 제가 오해한 바가 있다면 바로잡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열성과 정성 모두를 담은 코멘트에 대해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slight_sm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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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b 님, 코멘트 감사합니다. 용기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객관적으로, 혹은 상호주관적으로 규정하되 그 용기가 해당/적용되는 상황의 범위가 주체마다 달라진다는 의미로 이해했습니다. :slight_smile: 합격점이라는 표현은 재치 있고 흥미롭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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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질문을 통해 미흡했던 부분을 보완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HARIBO 님.

(1) 먼저 첫번째 질문에 대해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저는 '[용감한] 행위 자체에 대한 규정'과 '그 행위가 속한 상황 등을 고려한 평가'가 서로 엄밀하게 구분될 수 없다는 직관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해당 행위가 속한 상황에 대한 고려 없이 말하자면 이념적인 행위를 상정하고 그것의 성격을 규정하는 작업은 지나치게 추상적이 될 우려가 있으며, 그 추상성으로 인해 결국 오류를 낳을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일단 이것은 방법론적인 차원의 문제이고 반드시 어떤 방법으로 접근해야만 옳다는 결론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언급된 둘을 구분해서 생각해야 된다고 말한 것에는 이유가 있는데요, 조금 더 자세히 말하면, 1) '(용감한) 행위 자체에 대한 규정'이란 용감한 행위라는 외부적으로 발현된 것, 아직 어떤 가치평가를 내리기 이전의 물리적인 작위/비작위를 의미합니다. 즉, 정확히 말하면 아직 그것이 진짜 용감한 것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것이죠. 이를 A라고 하죠. 그리고 2) '그 행위가 속한 상황 등을 고려한 평가'에 의해 그 행위가 용감한 것인지 아닌지가 결정되어진 행위를 B라고 하죠.

여기서 외부에서 볼 때, 완전히 같은 행위인 A들이 B의 단계에서는 용감한 것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즉, A가 위험한 물건을 들고 누군가에게 달려가는 사람을 저지하는 행위라고 하면, B의 단계를 거치기 전에는 완전히 A행위의 의미를 결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A가 진짜로 누군가를 해칠 뻔한 상황을 막아서 용감한 행위로 평가될 수도 있고, 혹은 A가 실은 그 도구(칼, 가위 등 위험한 물건)로 누군가를 급히 도우려는 상황일 수도 있는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죠. 의사가 칼 등으로 기도가 막힌 환자에게 응급조치를 하려는 것이라든지, 도로에서 갑자기 양수가 터진 임산부에게 응급조치를 한다든지 (의학적인 면을 제가 자세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상정해 볼 수는 있겠지요?) 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 상황을 고려하기 전에 A와 B를 구분하지 않고, 그 행위를 저지한 것을 용감한 행위로 일률적으로 판단한다면 오히려 부조리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2) 두번째 질문에 대해 설명드려보겠습니다.

[형상적 환원 등의 이후] 주관에 드러나는 용기에 대한 체험의 지향적 구조 자체가 용기의 본질과 일치한다는 믿음이 현상학의 핵심 테넷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용기와 관련된 '실재 자체'가 아닌, '용기라는 실재가 주관에 드러나는 의식현상을 탐구'하는 것, 감정이입과 직관의 도움으로 경험의 구조를 사태 그 자체에서 파악하려는 것으로 방법론적 방향전환이 필요"하다는 말씀을 제가 100퍼센트 이해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전환 이전의 항과 전환 이후의 항이 저에게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아서요.

'용기라는 실재가 주관에 드러나는 의식현상을 탐구'하는 것, 감정이입과 직관의 도움으로 경험의 구조를 사태 그 자체에서 파악하려는 것이란, 일단 탐구하려는 주제에 관련된 외적 조건들, 즉 정치, 경제, 기타 불필요한 선입견 등을 판단중지하고 괄호치고서 생각해 본다는 것입니다. 어떤 행동은 판단하는 이의 정치적 경향에 따라 용감한 것으로 평가되거나 혹은 그 반대로도 평가될 수 있겠지요? 그래서 이렇게 정치 등등을 괄호 안에 넣고 현상학적 환원에 의해 생각을 해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컨대 (다양하게 나올 수 있는 것들 가운데 하나의 예일 뿐입니다) 용감한 행위란 1) 위험한 상황에 타인에게 도움을 베푸는 행위(작위/부작위)를 말한다 2) 미리 어떤 이익을 상정하거나 또다른 목적이 개입되지 않는다.....등등의 논의로 이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보충하자면 후설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본질직관이고 이 본질은 '무수히 많은 개별적 대상들을 하나의 이름으로 부를 수 있게 해주는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요소'입니다. 용기에 대하여 문제가 될 수 있는 수많은 대상들을 하나의 이름, '용기'라고 부를 수 있게 해주는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요소가 무엇일지를 생각해 보시면 현상학적 연구 수행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이것은 용기의 체험의 본질에 해당하는 것이지요.

저도 전문적인 학자는 아니니 미진한 부분이 많울 것으로 압니다. 이렇게 함께 의견을 주고 받을 수 있어서 기쁘고요, 감사드립니다. 또 질문하실 것이 있으시면 거리낌 없이 하셔도 좋고요,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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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충하자면 이 본질직관은 어떤 체험의 본질에 대한 것이지 사실적 구조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주의해야 합니다.

체험의 본질과 사실적 구조의 차이는...이를테면 용기를 '행위자 자신을 포함한 대상에 대해 자신의 피해를 무릅쓰고 무조건적으로 도움을 제공하려는 의식의 발현'이라고 본다면 체험적인 면을 기술한 것에 가깝고, 만약 이를 행위자의 신체 및 뇌의 활동으로 파악하려 한다면 사실적 구조를 보는 것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만, 이에 대해 상당히 복잡한 세부적 이론 등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래서 제가 한 설명은 엄밀한 것이 아니라 무척 거친 것이라는 점을 감안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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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학적 연구의 예를 소개합니다. 용기에 대한 것은 아니고, 같은 정신작용 중 하나인 '공감각'에 대한 연구인데요, 참고해 보시면 도움이 될 거예요.

'잠재적인 것'으로서 공감각에 대한 현상학적 연구 / 김화자, 美學·藝術學硏究 (The Journal of aesthetics & science of art). 통권 제30호 (2009년 12월), pp.387-415

국회전자도서관에서 인터넷으로 로그인 등 필요없이 원문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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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tes 님, 댓글들 모두 잘 살펴보았습니다. 선생님의 의견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어요, 감사합니다! :slight_sm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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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RIBO 님. 감사합니다. 제가 지금 '현상학적 방법이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글을 쓰고 있는데요, 올리면 한번 참고해 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주말 잘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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