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idegger, Martin, 1927, Sein und Zeit (Tubingen),
Ricceur, Paul, 1983, Temps etre cit :I L'intriguee tle r ecit historique (Seu ii).
Ricceur, Paul,1984, Tempse t recit I: La configuration dans le recit de fiction (Seuil).
Ricceur, Paul, 1985, Tempse tre cit Ill: Let empsr aconte( Seui ).
Ricceur, Paul, 1990, Soi-meme comme un autre (Seuil).
이런 인용 방식은 그다지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이데거와 리쾨르의 책을 초판본으로 읽은 것이 아닌 이상, (a) 자신이 읽은 판본을 인용하거나 (b) 초판본의 출간년도와 자신이 읽은 판본의 출간년도를 병기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독자가 인용의 출처를 훨씬 수월하게 직접 찾아볼 수 있으니까요. 가령, 다음의 인용처럼요.
야마노 히로키의 글을 훑어보면서 드는 생각은, 버튜버 문제가 새로운 "철학적" 문제인가? 라는 의문이었습니다. "버튜버"라는 개념 자체가 새로운 미디어매체와 함께 등장한 개념이다보니, 마치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철학적" 문제 즉 버튜버의 "존재론적 위상"에 대한 문제라고 착각하기 쉽지만, 사실 버튜버 문제에서 중요한 것은 버튜버의 "존재론적 위상"이라기 보다는 미디어 향유자들이 버튜버를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향유하는가에 대한 "현상학적 태도"라는 것이죠.
예컨대 버튜버들은 그 신비주의적이고 판타지적인 요소 때문에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현상인 것처럼 보이지만, 존재론적 위상과 관련해서는 까놓고 말해서 김경욱-다나카 의 경우와 다른 바가 없어보입니다. 즉 존재론적 문제는, 동일한 "안의 사람"이 서로 다른 페르소나를 보여준다는 것으로서, 양자의 경우에서 사실상 동일하게 드러난다는 것이죠. 양자의 경우에서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차라리 수용자들의 태도입니다; 예컨대 다나카의 경우 김경욱이 하는 다른 페르소나 연기라는 것을 대중들이 사실상 인지/인정한 상태에서 향유한다고 한다면, 버튜버의 경우 그 수용자들이 해당 버튜버를 안의 사람과 독립된 인격체로서 인정하는 "태도"를 보인다는 점 등이죠.
야마노 히로키의 서술은 이 양자를 명확히 구별하고 있지 않은듯 한데, 예컨대 "양립설"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그러나 우리는 전형적인 버튜버를 감상할 때, "X라는 버튜버는 뒷편에 있는 안의 사람 A이고, 또한 앞에 있는 아바타 B이다"라는 (각각의 구성요소로 환원된) 두가지 판단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X라고 하는 버튜버는 안의 사람 A 및 아바타 B가 상호작용함으로써 나타나는 X이다" 라는 하나의 통합적인 판단을 한다고 보는 편이 자연스럽다. 그렇다고 한다면, 안의 사람 A와 아바타 B의 상호작용 (조화와 갭)에 의해 그 매력이 높아지는 존재자 X (버튜버)는, 즉 안의 사람 A나 아바타 B와 단순하게 동일시될 수 없는 독립적인 존재자로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여기에서의 서술을 보면 저자는 "우리"가 버튜버를 "감상하는 태도"로부터, 버튜버의 "존재자로서의 위상"을 추론하고 있는데, 이는 마치 현상학적 태도의 다양성으로부터 존재론적 실재의 복수성을 추론하는 것만큼이나 비약적이라는 것이죠.
요지는, 인격의 동일성 문제라는 "철학적 문제"는 버튜버 문제에도 여전히 적용가능한 문제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버튜버가 "새로운" 철학적 문제를 보여준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버튜버가 새로운 문제를 보여줄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버튜버의 "존재론적 문제"가 아닌 바로 우리 감상자들의 "현상학적 태도"라는 것이죠.
맞아요. 버튜버에 대한 철학적 논문이 나온다는 사실은 흥미롭지만, 사실 이 논의의 구도 자체는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다는 생각이에요. 오히려
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저도 비슷한 관점을 지니고 있어요. 존재론의 한 예시로서보다는 문화현상으로서 버튜버가 지니는 의의에 관심이 있어서요. 이때 제가 염두에 두고 있는 건, 버튜버라는 새로운 직업군의 등장이 어떻게 사회에 파급력을 미쳐서 기존에는 없었던 혹은 불가능하였던 문화를 가능하게 하였는지에 대한 일종의 현상학적 논의에요. 아예 형이상학이나 존재론과는 맥락이 다른 거죠.
사실, 이와 관련해서 작년부터 왁타버스와 이세돌에 대한 좀 학술적(?)인 성격의 글을 써볼까 하고 생각하고 있기도 한데, 잡다한 일들로 시간이 없어서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주제를 선점했어야 했는데..!! (이런 주제로 온라인에서 연구프로젝트를 한 번 해볼까 하는 망상을 20분 정도 해봤었습니다)
함께 나눴던 글에서 저의 물음은, 지금 생각해보면 버츄얼 유튜버에 대해 우리가 갖는 여러 가지 믿음들이 사로 정합적인가하는 물음이었던 것 같아요. 이 물음은 여전히 저에겐 남아 있는 물음이긴 합니다.
말씀하신대로 고전적인 언어철학적 문제 등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구요.
저도 왁타버스와 이세돌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방식으로 뜯어볼 것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말이 나와서 덧붙이는 얘기지만, 왁타버스를 보고 있으면 놀이에서 비롯되는 엄청난 창의력과 생산성, 상호발전성 같은 게 이론적으로만 얘기되는 게 아니라 정말로 가능한 거였구나 하는 생각을 자주하게 됩니다. (실제로 그 내막이 어떤지는 몰라두요)
그 외에도 버튜버들의 활동을 꾸준히 보다보면 완전히 새로운 질문은 아닐지라도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는 문제들을 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YOUN 선생님의 이세돌 논문이 꼭 완성되길 바랍니다 ㅋㅋㅋ
저는 본문의 문화도 잘 모르고 크게 관심도 없었는데, 존재론보다는 문화현상 쪽으로 논의의 방향을 트는 선생님의 댓글을 보고 나니 갑자기 관심이 생기네요. 예컨대 가상의 인물이 아이돌화되어 인터넷에서 인기를 끈다면, 현실의 실물 아이돌 일자리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지 등등에 대해 궁금증이 생기네요.
예전에 AI가 운전하게 될 미래를 대비해 윤리학적 논의가 활발히 일어날 때도, AI도입으로 인한 택시 기사의 실업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부터 고민한 옛날의 제가 떠오르네요. 선생님이 현상학쪽으로 사고하는 것처럼 저도 사회철학쪽으로 생각하는걸 보니 각자의 관점은 뚜렷한가봅니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