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배냐?인정이냐?-낸시 프레이저와 악셀 호네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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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2장 분배와 인정의 통합 | 도덕철학의 문제들

분배와 인정을 포괄적으로 다루는 통합적 관점을 탐구할 때 마주치는 어려움들이 존재한다. 도덕철학, 사회이론, 정치이론과 같은 이론적인 문제들뿐만 아니라 정치 실천과 관련된 실천적 문제들이 바로 그것이다. 도덕 철학의 영역에서는 사회 평등과 차이 인정을 통합 가능하게 하는 개념이 문제가 된다. 사회이론 영역에서는 계급과 신분 사이의 분화와 상호교차를 설명하는 이론이 필요하다. 정치이론 영역에서는 불평등과 무시를 모두 치료하는 제도적 배치와 개혁 정책을 구상하는 것이 핵심 쟁점이다. 정치 실천 영역에서는 더 나아가 분배 정치와 인정 정치를 통합하는 프로그램을 위해 기존의 분열을 넘어서는 민주적 연대를 강화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논의해야 할 것이다.

이번 장에서는 우리의 통합적 관점이 도덕철학 영역에서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을 다루게 될 것이다.

  1. 정의인가? 자기실현인가?

우리가 다룰 도덕철학의 문제들은 총 네 가지이다.

(1) 인정은 정의에 관한 문제인가? 자기실현에 관한 문제인가?

(2) 분배와 인정은 독자적 범주인가? 아니면 어떤 범주는 그 범주로 종속적 혹은 포섭 가능한가?

(3) 정당한 인정 요구와 정당하지 않은 인정 요구를 구별할 수 있다면 그 기준은 무엇인가?

(4) 정의는 특정 개인 혹은 집단의 특수성을 인정해야 하는가? 아니면 모두가 공유하는 인간성만을 고려하면 충분한가?

(1)은 도덕철학의 표준적 구별들을 인정할 때 성립한다. 그 구별들에 따르면 정의는 옳음과 관련된 문제이고 도덕의 영역에 속한다. 이에 반해 자기실현은 좋음과 관련된 문제이고 윤리의 영역에 속한다. 또한 정의는 보편적 구속력을 가진다. 왜냐하면 어떤 행위자의 특수한 가치와 무관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윤리는 그러한 보편적 구속력을 가지지 못한다. 윤리는 문화적이고 역사적이며 특수한 가치의 의존하는 개념이기에 보편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정을 어떤 정의와 자기실현 중 어떤 범주에 넣느냐에 따라 상당히 다른 결론이 뒤따른다. 흔히 자기실현을 인정으로 보는 대표적인 철학자로는 찰스 테일러와 악셀 호네트가 거론된다.

테일러에 따르면 인정은 왜곡되지 않은 온전한 주체성에 필수적이다. 만약 불인정과 무시를 당하게 되면 인간 번영의 필수적인 요소가 박탈당하는 것이고 억압당하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억압은 단순히 존중받지 못한 것이 아니다. 이는 인간이 삷을 살아가기 위해 필수적인 요소를 빼앗긴 것이다. 또한 호네트는 인격적 소중함과 가치는 인정과 승인에 의존한다고 주장한다. 만약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자신의 인격적 소중함과 가치에 대한 긍정적 자기이해를 얻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상호 주관적 이해 훼손은 좋은 삶을 살아가게 하는 능력을 훼손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인정을 자기실현에 관한 문제로 보기보다 정의에 관한 문제로 볼 것을 요구한다. 무시와 같은 불의가 문제인 이유는 실천적 자기이해 왜곡으로 자기실현을 막기 때문이 아니다. 이것이 문제인 진짜 이유는 그들의 독특성(그것들이 어떤 부정의한 문제도 벌이지 않았음에도) 비난하거나 왜곡하는 제도화된 문화적 가치유형들로 인해 특정 개인과 집단이 사회적 상호작용에 참여하는 것을 막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인정을 정의에 문제로 특히 사회적 신분으로 다룰 것이다. 만약 제도화된 문화적 가치 유형들이 행위자들를 동등하게 사회생활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동료(peers)로 인정한다면 신분평등과 상호인정에 대해 말할 수 있다. 반대로 제도화된 가치 유형들이

특정 행위자를 열등함,배제,이질적,비가시적인 것으로 낙인찍어 동등한 사회활동을 참여하지 못하게 막는다면 이는 무시이고 신분종속이다.

따라서 무시는 주체의 심리 왜곡이나 자기 실현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다. 무시는 정의를 파괴하는 제도화된 종속이다. 이는 동등한 사회참여를 막는 불의이다. 이에 따라 무시는 사회제도와 관습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동성 결혼이 혼인법에 적용되지 못하여 격는 불의, 미혼모가 무책임하다 낙인찍히는 사회제도, 특정 인종을 범죄와 연결하여 인종차별적 정보 수집을 일삼는 치안 관행 등등이 있다.

인정이 요구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종속을 극복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인정은 동등한 참여를 방해하는 가치 유형들을 해체하여 동등한 참여를 강화하는 가치 유형으로 대체함으로써 이루어진다.

  1. 신분 종속인가? 손상된 주체성인가?

내가 위에서 제시한 신분 모델이 가지는 정치적,제도적 함축은 무엇인가? 이는 자기실현 모델에 비해 신분 모델이 가지는 네 가지 장점의 개념적 설명을 통해 제시될 수 있다. 첫째 오늘날과 같은 가치다원주의 사회에서 신분 모델은 인정요구의 도덕적 구속력을 정당화할 수 있다. 그러나 자기실현 모델은 그러한 정당화를 하기 힘들어 보인다. 왜냐하면 가치다원주의 사회 속에서는 자기실현이나 좋은 삶에 대한 공통되고 보편적인 이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좋음"에 대한 다양한 전망 속에서 자기실현에 대해 서로 다른 이해를 가진 사람이나 집단에게 그들과 다른 특정한 좋음에 대한 인정요구는 도덕적 구속력이 없다. 이에 반해 신분 모델은 의무론적 모델로서 인정을 자기실현이나 특정 좋음에 호소하여 정당화하지 않는다. 신분 모델에서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 자기실현이나 좋음 삶에 대한 이해는 개인에 따라 다양할 수 있다. 그러나 신분 모델은 인정을 정의에 문제로 보기 때문에 각기 다른 좋음에 대한 이해를 가진 사람들 모두 수용할 수 있거나 수용해야만 하는 정의관, 즉 규범에 호소한다. 동등한 참여 규범은 보편적이며 도덕적 구속력이 존재한다.

둘째 신분 모델은 무시와 같은 신분종속을 사회적 관계로 보지 상호주관적 심리 문제로 보지 않음으로써 자기실현 모델이 가지는 치명적인 단점을 피할 수 있다. 자기실현 모델은 무시와 같은 불의가 사람들에 자기의식 속 내적 왜곡을 일으켜 사람들을 고통에 빠지게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무시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치명적인 두가지 약점을 노출한다. 첫째 억압하는자가 억압받는자를 역비난할 수 있는 여지가 이 관점에는 존재한다. 예컨대 인종차별주의자가 흑인으로 인해 자신이 심리적 상처를 입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둘째 만약 무시를 억압하는 자의 편견으로 본다면 그들의 관점에 따라 이러한 편견을 막아야 한다. 그러나 이는 한 개인의 신념을 단속하는 것이다.이는 비자유주의적이며 권위적인 해결책을 함축한다. 반면에 신분 모델은 인정을 정체성의 관한 상호주관적 조건과 연관시키지 않고 사회적 지위와 연관시킴으로서 외적이고 검증 가능하게 만든다. 따라서 억압받는 자가 정체성의 훼손을 입었든 편견을 가지든 간에 어떤 사회의 제도화된 문화적 가치 유형이 구성원의 동등한 참여를 훼손시킨다면 그 사회는 부당한 사회인 것이다. 물론 무시가 가지는 윤리적이고 심리적 효과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무시가 문제가 되는 이유는 주체성이 훼손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동등한 참여를 막기 때문이다.

셋째 신분모델은 모든 사람이 사회적 존경1(esteem)에 대한 동등한 권리를 가졌다는 무리한 요구를 거부할 수 있다. 애초에 사회적 존경에 대한 동등한 권리는 존경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존경은 특수한 업적이나 공헌을 한 사람들에게 차별적으로 부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네트에게 사회적 존경은 왜곡되지 않은 정체성 형성을 위한 필수 조건이다. 따라서 도덕은 이를 보호해야함으로 모든 사람이 사회적 존경을 획득할 자격이 있다는 결론을 내리지만 이는 무리한 요구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이는 존경을 무의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존경은 차별적으로 부여됨으로써 가치를 얻는다. 반면에 신분 모델 호네트의 결론을 거부한다. 대신 우리가 받아드리는 권리는 모든 사람이 동등한 기회와 공정한 조건을 전제로 사회적 존경을 추구할 권리이다. 사회적 상호작용과 관계 없이 문화적 가치 유형으로 인해, 예컨대 여성이나 동성애자나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로 존경을 얻을 기회나 공정한 조건을 박탈당해서는 안된다.

마지막으로 인정을 정의 문제로 보면 인정과 분배요구를 통합하기 쉽다. 이러한 관점에서 인정과 분배 모두 의무론적 도덕성을 가지는 것으로 보기에 보편적인 구속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자기실현 모델은 통합하기 힘들어 보인다. 인정을 윤리 문제로 보기 때문에 보편적 구속력을 갖기 힘들기 때문이다.

  1. 환원주의에 대한 반박-정의에 대한 이차원적 이해

인정과 분배가 구별된다면 두 범주는 각각 자립성을 가지는가? 아니면 (1) 인정은 분배로 환원될 수 있는가? 아니면 반대로 (2) 분배는 인정으로 환원될 수 있는가? (1)부터 답하자면 그럴 수 없다. 대부분의 분배 이론가들은 물질적 행복과 같은 자원과 권리를 분배하면 무시와 같은 불의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무시는 단순한 법적 차별과 불평등이 아니다. 예컨대 월 스트리트에서 일하는 흑인이 택시를 잡지 못하는 경우를 생각해보라. 이러한 불의를 해결하려면 동등한 참여를 방해하는 문화적 가치유형을 문제 삼아야 한다.

(2)또한 나는 거부한다. 대표적인 인정 이론가인 호네트는 경제적 불평등과 같은 불의는 특정 노통에 특권을 부여하는 문화적 질서에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문화적 질서를 변혁하면 경제적 불평등 또한 사라진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투기적인 기업합병으로 인해 공장이 없어져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은 숙련된 백인 산업 노동자를 생각해보라. 이러한 불의는 무시와 상관없다. 모든 경제적 불평등이 무시로 인해 생기는 것은 아니다.이는 특권구조와 상대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특수한 경제질서로 인해 발생하는 불의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동등한 참여를 방해하는 경제적 구조를 문제 삼아야한다.

따라서 (1),(2)와 같은 환원들은 실질적인 환원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아무런 효용도 없다. 뿐만 아니라 분배와 인정이 모두 문제시 되는 이원론적 범주에서도 환원을 어떤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물론 나는 이러한 환원 불가능성을 선험적인 것으로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미래에 어떤 이론가가 이러한 환원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 환원적 이론들은 실질적 문제를 은폐하고 있을 뿐이다.그러므로 나는 분배와 인정을 모두 포괄하는 관점, 즉 정의에 관한 '이차원적 이해'로 이행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포괄적 관점에서 핵심은 바로 동등한 참여 규범이다. 이 규범은 모든 사회 구성원이 동료로서 상호작용할 수 있도록 해주는 사회 요구라고 말할 수 있다. 이때 이 규범을 성립하게 하는 2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 물질적 자원 분배를 통해 모든 참여자가 경제적으로 독립적이고 사회 문제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발언권을 보장해야 한다. 이를 객관적 조건이라고 부르자. 둘째 제도화된 문화적 가치유형이 모든 사회 구성원을 동등하게 존중하고 사회적 존경을 얻을 기회를 동등하게 보장해야 한다. 또한 과도한 차이를 부과하든 개별성 인정을 거부하든 구성원의 동등한 참여를 훼손하는 문화적 가치유형을 거부해야 한다. 이를 상호주관적 조건이라고 부르자.

  1. 인정 요구들에 대한 정당화

정당한 인정 요구와 정당하지 못한 인정 요구를 구별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에 자기실현 모델은 답할 수 있는가? 호네트는 모든 사람이 자부심(self-esteem)을 가질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왜곡되지 않은 정체성을 얻기 위해서는 자부심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은 자신의 특수성을 인정받을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호네트는 자부심을 높이는 인정요구는 정당한 반면 자부심을 떨어뜨리는 인정요구는 정당하지 못하다는 기준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치명적인 약점을 지닌다. 예를 들어 백인 인종차별주의자들의 정체성도 어느정도 인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보기에 자신보다 열등한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함으로써 자부심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주장들은 그들의 주장이 백인들의 자부심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반론에 직면할 수도 있다. 수 많은 사례들은 자부심을 인정 요구를 정당화하는 기준으로 사용할 수 없음을 예증한다.

이에 반해 신분 모델은 동등한 참여 규범을 기준으로 사용한다. 분배와 인정 요구 모두 동등한 참여가 방해 받고 있음을 입증해야 한다.다시 말해 분배 요구는 객관적 조건을, 인정 요구는 상호주관적 조건을 침해받고 있음을 입증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화적이고 종교적인 관행과 관련된 인정 요구 같이 어려운 사안을 윤리적 평가 없이 동등한 참여 규범을 통해 의무론적 요구로 정당화 할 수 있을까? 이때

동등한 참여 규범은 두 가지 사안에 적용된다. 첫째는 집단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다룬다.이때 동등한 참여 규범은 다수자에 비해 소수자 집단이 가지는 상대적 지위에 대해 평가할 수 있게 한다. 예를 들어 옛 캐나다 법에서 기마 경관들에게 동일한 모자를 쓰도록 명령하 여 시크교도들이 그 직업에 종사할 수 없게 했던 것을 생각해보라.이는 명백히 구성원의 직업의 자유를 침해한 것으로 동등한 참여 규범에 호소하여 이 법이 부당한 다수자 중심의 공동체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둘째는 집단 내부 문제를 다룬다. 이때 동등한 참여 규범은 소수자 관습들이 가지는 내부 효과를 평가하는 기준으로 사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교육에 있어서 성별을 분리하는 유대교 관습을 생각해보라. 이러한 관습이 유대인 소녀를 부당하게 주변화하기 때문에 세금 면제나 학교 보조금 등의 문제와 관련하여 그것을 공적으로 인정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를 다룰때 우리는 동등한 참여 규범에 호소할 수 있다.

따라서 문화적 인정 요구가 충족될 수 있기 위해서 요구되는 두 가지 조건을 제시할 수 있다. 첫째 제도화된 다수자 문화적 규범이 동등한 참여를 감소시켜서는 안된다. 둘째 인정받고자 하는 관습은 동등한 참여를 부정해서는 안된다. 인정 요구가 정당하려면 이 두 가지 조건 모두를 충족시켜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 기준을 가지고 프랑스에 일어난 머리 스카프 문제를 검토해보자. 공립학교에서 이슬람교도 소녀들의 두건을 쓰지 못하게 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부당할까? 두건 사용 인정 요구가 정당하려면 다음 두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첫째 두건 사용 금지 조치가 동등한 참여를 감소시키는 예컨대 이슬람 소녀들의 평등한 교육권을 침해함을 입증해야 한다. 둘째 머리 두건이 이슬람 사회 구성원이건 아니건 여성을 종속시키는 징표나 표식이 아님을 입증해야 한다. 첫번째 조건은 어렵지 않게 충족한다. 공립학교에서 기독교 십자가 착용을 금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이슬람 공동체에거 동등한 지위를 부여하지 않은 것이다. 이에 반해 두번째 조건은 논란에 여지가 있다. 몇몇 공화주의자들은 이슬람교 교리에서 두건은 여성 종속의 표지임을 주장하며 두건 사용 금지가 성차별을 막기 위한 조치라며 정당화한다. 그러나 몇몇 다문화주의자들은 이는 남성중심주의적 교리 해석만을 유일한 이슬람교 해석으로 인정하는 것은 독단이며 변화를 겪는 이슬람 정체성도 인정해야 한다고 반박한다. 오히려 두건 사용을 인정하는 것이 젠더 평등으로 나아가는 길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는 다문화주의자들의 주장이 설득력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여성 할례와 같은 이슬람교의 관행은 그들과 나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성기 절단으로 여성들의 성적 쾌락과 건강을 추구하는데 누려야할 동등성을 침해하는 것이다.

어쨋든 내가 말하고 싶은 바는 이러한 민감한 인정 요구 논쟁은 동등한 참여 규범을 매개로 해서 올바르게 다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분모델은 인정요구 정당화를 위한 설득력있는 기준을 제시할 수 있다.

  1. 결정 이론인가? 민주적 토의인가?

지금까지 나는 동등한 참여 규범이 정당화를 위한 효과적인 기준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예를 통해 살펴보았듯이 이 규범은 민주적 토의를 매개로 문제되는 사항에 적용되지 어떤 결정 절차를 통해 적용되지 않는다. 이러한 기준은 어떤 산술적인 기준 적용과 같이 '독백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 규범은 상충하는 판단을 검토하고 경쟁적인 해석을 평가하는 논증 교환과 같은 민주적 토의를 매개로 적용되는 것이다.

물론 동등한 참여가 완전히 이루어졌다고 모두가 인정할만한 표지는 없다. 이러한 표지는 그 자체가 해석과 논쟁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대화를 통합 접근은 인정 정치, 특히 정체성 정치의 두 가지 관점을 거부한다. 첫째는 대중 추수적 관점으로서 그들은 인정받지 못한 주체만이 적합하게 인정받을 수 있는 방법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자부심을 훼손당한 주체만이 최종적 결정권이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권위주의적 주장인데 그들은 인간적 번영을 위해 필요한 것을 결정할 수 있고 결정해야만 하는 주체로 철학자를 내세운다. 이러한 두 관점은 정의를 해석하는 권위를 특정 주체에게 양도하는 독백적 모델인 것이다.

그러나 신분 모델은 동등한 참여 규범을 절차적 기준으로서 요구를 결정하는 어떤 특권적 주체도 내세우지 않는다. 인정 요구는 모두가 참여함으로써 정당화된다.요구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일반 대중이든 전문가이든 변경될 수 없는 견해는 없다. 또한 이에 대한 합의가 결정된 후에도 결정은 비판에 열려있으며 변경 가능하다.따라서 민주적 통의는 가능한 토론자 모두에게 토론에 동등하게 참여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이러한 토의는 정당한 분배와 인정을 요구한다. 이러한 순환성은 악순환이 아니다. 오히려 민주주의적 정의가 가진 성찰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가 제거해야할 순환성은 이론적인 순환성이 아니라 실천적인 순환성이다. 우리는 부정의한 현실이 정의로워질때까지 정의에 대한 요구를 멈추어서는 안된다. 현재 결여되고 있는 동등한 참여 규범의 조건을 실현하기 위해 계속 투쟁하는 과정에서 민주적 정의가 가진 성찰성이 표현되는 것이다.

따라서 민주적 토의는 메타적 수준의 논의를 포함하여 급진적 비판 가능성을 보존한다. 기존 정의 담론에 내제하는 보수성, 예를 들어 기존 사회적 재화에 대한 공정한 접근만 다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재화 자체가 공정한가?"에 대한 질문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존하는 사회적 상호작용이 동등성을 보장하는가?라는 질문뿐만 아니라 어떤 상호작용이 동등성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도 대한 토론에 사회 구성원들이 동등하게 참여할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현 상태에 내제한 편견을 명시적 토론을 통해 교정함으로써 민주적 토의는 역사적 역동성을 수용한다.

6.특수성에 대한 인정? 실용주의적 접근

민주적 통의를 통한 정당화는 민주주의적 실용주의 정신을 공유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우리가 다룰 마지막 질문에 답하기에 적합하다. 정의는 우리가 공유하는 인간성에 대한 인정을 넘어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특수성까지 인정할 것을 요구하는 가? 동등한 참여는 보편주의적 규범이다. 이 규범은 상호작용에 참여 가능한 모든 사람을 포함해야 하고 모든 인간의 도덕적 가치가 동등함을 전제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규범은 저 질문에 대해 양자택일적 답을 하지 않는다. 이러한 질문을 실용주의적 정신으로 접근하기 때문이다. 인정은 사회적 불의에 치유책이지 일반적 인간의 요구를 총족시키는 것이 아니다. 필요한 인정은 무시의 형태에 따라 달라진다. 예컨대 흑백 분리 정책같은 흑인의 인간성을 부정하여 공통적 인간성을 부정하는 무시에 경우 "인종을 차별하지 않는" 보편적 시민권과 같은 보편주의적 인정이 필요하다. 반면에 무시가 특정한 참여자들의 특수성을 부정하는 것이라면 예를 들어 출산을 고유하고 특수한 여성들의 능력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 페미니스트들과 같이 차이성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실용주의적 접근은 기존의 분배/인정 담론이 가지고 있던 단점들을 극복한다. 실용주의적 접근은 몇몇 분배 이론가들이 정의는 인간이 공유하는 몇가지 공적 인정만을 요구한다는 주장을 거부한다. 소수자 우대 정책을 반대하는 입장이 선호하는 이러한 접근은 동등한 참여를 위해 그 정책이 필요한지 생각도 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거부할 뿐이다. 또한 실용주의적 접근은 앞서 호네트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모든 이가 자신의 특수성을 인정받을 필요가 있다는 결론을 거부한다. 그들은 모든 요구가 아닌 일부 요구만이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하지 못한다. 결국 실용주의자들에게 관건인 것은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이나 집단이 사회 생활에 동등하게 참여하기 위한 조건이 가장 중요하다. 따라서 모든 상황에서 동일한 요구를 한다고 가정해서는 안된다. 상황에 따라 특수성 인정을 고려할 수도 있고 상황에 따라 지배집단의 특수성을 보편적인 것으로 확장한다고 비판할 수도 있고 상황에 따라 차이에 대한 기준을 해체할 수도 있다. 어떤 인정이 필요한가?는 동등한 참여와 관련하여 어떤 장애물을 가지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추상적인 철학적 논쟁으로 어떤 인정이 필요한지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규범적 방향, 경험적 정보, 불의 극복에 대한 실천적 의도를 가진 비판적 사회이론을 통해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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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저는 「재분배에서 인정으로?」라는 논문을 통해 낸시 프레이저의 정치철학을 처음 접하였어요(참고: 잡념과 공상 : 네이버 블로그). '변혁적 재분배'와 '변혁적 인정'이라는 접근을 바탕으로 부정의의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는 프레이저의 주장이 상당히 설득력 있더라고요. 특별히, 프레이저가 제시하는 '변혁적 인정' 접근은 일종의 해체주의적 전략이기도 해서, 데리다의 해체주의가 지닌 정치철학적 함의를 프레이저가 잘 살리고 있다는 생각도 하였고요.

이 글에서는 변혁적 재분배-인정 전략이 '실용주의적 접근'이라는 이름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 같네요. 변혁적 재분배-인정 전략의 핵심은 특정한 젠더나 특정한 인종을 미리부터 특별대우의 대상이나 사회적 수혜의 대상으로 (소위 '사회적 약자'로) 상정하지 말자는 데 있는데, 실용주의적 접근 역시 바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 읽혀서요. 특히, 아래의 부분이요.

다만, 이 글만으로는 의미가 다소 불분명한 부분도 있는데, 아래 내용은 정확히 어떤 의미로 쓰신 것인지가 궁금해요.

이 문장을 어떻게 끊어 읽어야 하나요? 가령, "실용주의적 접근은 [몇몇 분배 이론가들이 (정의는 인간이 공유하는 몇가지 공적 인정만을 요구한다는) 주장을] 거부한다."로 끊어 읽어야 하나요? 그러니까,

(a) 인간은 몇 가지 공적 인정만을 요구한다.
(b) 몇몇 분배 이론가들은 몇 가지 공적 인정을 채워주는 것만으로 정의가 실현된다고 주장한다.
(c) 그러나 실용주의적 접근은 정의 실현을 위해 필요한 공적 인정이 정해져 있다는 주장에 반대한다.

아마 이런 의미인 것 같은데 말이에요. 그렇다면, 그 다음 등장하는

라는 문장에서 "소수자 우대 정책을 반대하는 입장이 선호하는 이러한 접근"이란 '실용주의적 접근'을 의미하는 말이겠죠? 즉, '소수자 우대 정책 반대'와 '실용주의적 접근'이 같은 맥락에 있다는 의미라고 보이는데, 그리고 실용주의적 접근을 지지하는 낸시 프레이저 본인 역시 소수자 우대 정책에 반대한다는 의미라고 읽히는데, 제가 제대로 독해한 게 맞나요?

요즘 미국 대법원에서 대학의 소수인종 우대정책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린 것으로 미국 사회가 떠들썩하더라고요. 이런 논의와 관련해서도 프레이저의 입장이 흥미롭게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적어도 제가 프레이저에 대해 알고 있는 배경 지식과 bigalan님의 글 내용으로 보았을 때, 프레이저는 대학의 소수인종 우대정책을 비판할 것 같네요. 혹시라도 제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코멘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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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죄송합니다. 그냥 노트 정리한다는 생각으로 쓴 글이라서 명료하게 쓰지 못했네요.

네. 그렇게 이해하시면 될거 같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오류가 있는것 같네요. 위에서 프레이저가 거부한 접근법은 분배 이론가에 접근입니다. 그들이 소수자 우대 정책을 몇 가지 공적 인정 너머에 있다고 생각하여 독단적으로 거부한다고 프레이저는 지적하는 것이죠. 그 정책이 사회 구성원들의 동등한 참여를 높일수 있다는 전망이 충분하다면 실용주의적 입장은 그 정책을 충분히 고려해야한다는 것이죠.반대로 소수자 우대 정책이 역차별과 같은 문제로 오히려 사회 구성원들에 동등한 참여를 축소시킨다면 그 정책을 거부해야 하는 것이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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