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철학자의 현대적 주체 이해: 데카르트에 대한 가상디의 반박


피에르 가상디

왜 시각은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고, 또 지성은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는 것일까 하는 물음에 대해 생각하면, 내게는 그것들이 자기 자신들에게 작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손 또한 (또는 엄지손가락) 자기 자신을 때리지 못하고 또 발도 자기 자신을 밟지 못합니다. 어떤 것에 대한 앎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다른 곳으로부터 인식능력에 작용해야 합니다. 즉, 인식능력 안으로 자신에 대한 형상(모습, speciem)을 들여보내야, 혹은 자신의 형상으로 인식능력을 형상화해야(sui specie facultatem cognoscentem informare) 합니다. 그런데 인식능력이 자기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식능력이 자기 자신에 대한 그러한 형상을 자기 자신 안으로 들여보낼 수 없다는 것, 혹은 같은 의미로, 자기 자신을 지각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왜 눈이 자기 자신 속에서는 자신을 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거울 속에서는 자기 자신을 본다고 당신은 생각합니까? 눈과 거울 사이에 어느 정도 거리가 있어서 눈이 자신에 대한 형상을 거울에 보내 거울에 작용을 가하고 그 결과로 거울이 눈 안으로 눈의 고유한 형상을 되돌려 보내면서 눈에 다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정신인] 당신이 그런 식으로 작용하는 거울을 내게 줘 보십시오. 나는 당신에게 그 거울이 당신에 대한 형상을 [정신인] 당신에게 반사시키기 때문에, 비록 당신이 직접적인 인식을 통해서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접적인 인식을 통해서 당신 자신을지각하게 될 것임을 맹세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정신인] 당신이 당신 자신을 알 희망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피에르 가상디, 「다섯 번째 반박」, 『성찰: <성찰>에 대한 학자들의 반론과 데카르트의 답변』, 제1권, 르네 데카르트 지음, 원석영 옮김, 나남, 2012, 276-277쪽.)

데카르트의 『성찰』에 대한 가상디의 반박을 읽다가 재미 있는 내용을 발견해서 올려봅니다. 정신이 자기 자신을 직접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데카르트의 주장에 대해, 정신은 자기 자신을 간접적으로만 인식할 뿐이라고 가상디가 비판하는 부분입니다. 손이 손 자신을 때릴 수 없고, 발이 발 자신을 밟을 수 없는 것처럼, 정신도 정신 자신을 곧바로 인식할 수는 없다는 거죠. 우리의 눈이 우리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조차 거울이라는 매개물이 필요하듯이, 정신은 자신의 형상을 자기 바깥으로부터 자신에게 반사해 줄 다른 무엇인가를 필요로 한다는 주장입니다.

보통 철학사를 공부할 때 이런 식의 주장은 소위 '의심의 세 대가들'이라고 하는 니체, 프로이트, 마르크스 이후로 20세기 초에 제기된 것이라고 소개되곤 하죠. 주체는 자기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힘에의 의지', '무의식', '하부구조' 같은 은밀한 조건을 통해 구성된다는 사실이 니체, 프로이트, 마르크스에 의해 밝혀졌다는 식으로요. 한 마디로, 우리 자신조차 우리를 생각하도록 하고, 욕망하도록 하고, 행위하도록 하는 진정한 동기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거죠. 그래서 주체가 자기 자신을 투명하게 인식할 수 있는 것처럼 가정한 채 성립한 근대의 의식철학은, 의심의 세 대가들 이후에 근본적으로 비판받았다는 것이 현대철학에 대한 대부분의 교양서적의 도입부에 등장하는 설명이죠.

그런데 주체의 직접적 자기 인식에 대한 비판을 데카르트와 동시대 인물인 가상디가 이미 제기하였다는 것을 보니 신기하네요. 사실, 가상디의 반박에는 데카르트의 주장을 오해해서 논점을 잘못 짚은 내용도 많고, 소박한 유물론을 너무 당연하게 가정하고 있어서 그다지 철저하지 못하다고 생각되는 내용도 많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다른 매개물을 통하지 않고서는 우리 자신을 인식할 수 없다는 지적만큼은 참 선구적이라고 생각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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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는 어떻게 답변했을지 정말 궁금하네요. 말씀처럼 가상디의 논지가 우리 관점에서는 좀 구식이거나 어설퍼보이는 비유논증으로 이루어진 것 같긴 하지만 자기 의식에 대한 직접적 인식의 가능성에 대해 의구심을 던진 것은 명확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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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 갈 수록 철학사를 두고 나오는 이런 거대서사를 볼 때마다 의구심이 들고는 합니다. 대략

모르긴 몰라도, 분명히 이런 비슷한 아이디어는 아마도 중세 서유럽 어드메의 이름모를 수사가 되었든, 고대 인도 어드메의 비하라(Vihāra)에서 머리를 싸매던 이름모를 수행자가 되었든, 누구 한명쯤은 이미 들고 나온 적이 있을듯?

이라는 삐딱한 생각이 들고는 합니다.

말씀해주신 '자기 의식 문제'의 경우 구글링을 해본 것만으로는 얼른 사례를 찾는건 쉽지가 않았는데요. 가상디 사례는 그 자체로도 멋지지만, 뭔가 그 이 전에도 이미 선례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게 됩니다. 이를테면

가상디의 배경을 좀더 연구해보니, 사실 가상디 반박의 근저에는 당시 아비뇽 대학을 중심으로 논의되던 특정한 스콜라 철학 이론이 있었다 카더라

하는 얘기를 접하게 되어도 저는 그리 놀랍지 않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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