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 환원주의와 수학적 환원주의에 대한 잡념

Benacerraf는 집합론적 실재론에 대한 다음 반론을 제기했다. 산술을 집합론으로 환원하려는 아래 두 정의를 비교해 보자.

R1: ∅, {∅}, {∅, {∅}}, {∅, {∅, {∅}}}, ...
R2: ∅, {∅}, {{∅}}, {{{∅}}}, …

두 집합열 모두 자연수 0, 1, 2, 3, ...의 적합한 환원이다. 그러나 다음 질문을 고려해 보자.

Q: 1은 3의 원소인가?

R1에 따르면 답은 '그렇다'이지만, R2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이다. 둘 중 무엇이 올바를까? Benacerraf는 주어진 환원이 올바를 필요충분조건은 다음과 같다고 주장한다.

(i) '1', '자연수', '덧셈' 등 산술 언어의 의미를 정의한다.
(ii) 세기(counting)과 같은 수의 적용을 설명한다.

두 조건을 정합성 조건이라고 부르자. R1과 R2 모두 정합성 조건을 만족한다. 따라서 두 환원 모두 올바르다. 그런데 두 환원이 올바르면서 자연수의 본질에 관한 질문(Q)에 다르게 답할 수 있다고? 이것은 이상하다. 이에 Benacerraf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그러나 만약 자연수 3이 정말로 집합이라면, 두 가지 올바른 집합론적 환원이 자연수 3을 서로 다른 두 집합으로 환원시키는 일은 있을 수 없다. [...] 따라서 자연수는 집합이 아니다. (Benacerraf 1965, What Numbers Could Not Be)

이로써 Benacerraf는 집합론적 실재론을 거부한다. 대신 그는 구조적 실재론(structuralism)을 주장한다. 이에 따르면 수학은 집합이나 수와 같은 대상을 연구하는 학문이 아니다. 수학은 구조에 대한 학문이다. 산술의 연구 대상은 무한 선형 순서 구조이고, 집합론의 연구 대상은 [이곳에 당신이 선호하는 집합론을 삽입하세요] 구조이다.

그런데 Benacerraf의 논증은 수학적 환원주의에만 국한되는 것일까? 그의 논증을 다음과 같이 일반화해 보자.

  1. 환원이 올바를 필요충분조건은 정합성 조건을 만족하는 것이다.

  2. 환원은 환원되는 대상의 본질을 기술한다

  3. 2에 의해, 올바른 두 환원은 대상의 본질에 관한 모든 질문에 일치하는 답을 제시해야 한다.

  4. 따라서 정합성 조건을 만족하는 두 환원이 불일치한다는 사실은 해당 대상이 그러한 방식으로 환원될 수 없음을 보인다.

정합성 조건을 다음과 같이 바꾸면 우리는 어떤 과학 이론이 관측 가능한 대상들의 성공적인 환원일 필요충분조건을 얻는 것으로 보인다.

(i') '운동량', '빛', '열' 등 관측 가능한 대상들의 의미를 정의한다.
(ii') 충돌과 같은 관측 가능한 대상들의 작용을 설명한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심리학 환원주의를 검토해 보자. 심리학 환원주의에 따르면 '고통'은 아래와 같이 환원될 수 있다.

R1: 고통은 c-섬유가 자극된 상태이다.

그러나 아래와 같이 환원될 수도 있다.

R2: 고통은 조직의 손상을 유발하는 자극에 대한 반응이다.

R1과 R2 모두 정합성 조건을 만족한다. 그러나 두 환원이 다음 질문에 제시하는 답은 다르다.

Q: 고통은 축삭돌기를 가지는가?

R1에 따르면 '예', R2에 따르면 '아니오'이다. 따라서 Benacerraf의 결론을 그대로 적용해 본다면,

그러나 만약 고통이 정말로 물리적 유형이라면, 두 가지 올바른 물리적 환원이 고통을 서로 다른 유형으로 환원시키는 일은 있을 수 없다. [...] 따라서 고통은 물리적 유형이 아니다.

이것은 각각의 '고통 사태'가 어떤 물리적 사태와 동일할지언정, 고통을 한 가지 물리적 유형과 동일시할 수는 없음을 시사한다. 즉, 고통은 물리적 사태와 token-equivalent할지언정 type-equivalent하지는 않다. 이것은 그 유명한 Fodor의 환원주의 반박이다. 따라서 Fodor의 반환원주의와 Benacerraf의 수학적 구조주의는 서로를 보강할 수 있는 것으로 기대된다.

비슷한 논의를 양자역학에서 진행할 수 있다. Tensor product에 대한 다음 두 물리적 해석을 고려해 보자.

R1: Tensor product는 다중 세계의 분화이다.
R2: Tensor product는 양자 상태의 얽힘이다.

두 환원은 경험적으로 동일하지만, 다음 질문에 답하는 방식이 다르다.

Q: 양자역학은 결정론적인가?

R1과 R2가 이 질문에 답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둘 중 어느 하나를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는 없다(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수학자가 산술의 어느 한 집합론적 환원을 선택할 수 없다는 사실이 구조주의적 전회를 요구하듯이, 과학자가 이론의 어느 한 해석을 선택할 수 없다는 사실 또한 구조주의적 전회를 요구할지도 모른다. 일찍이 Worrall은 과학적 구조주의를 내세워, 과학적 언어의 의미론(semantic)은 대상(object)이 아니라 구조(structure)라는 주장을 펼쳤다. 이에 따르면 쿼크의 의미는 어떤 입자가 아니라 원자의 행동을 예측하는 데 도입될 수 있는 수식이다.

따라서 Benacerraf의 논증은 집합론적 실재론을 반증하는 데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환원주의 일반, 그리고 과학적 실재론에 대한 반박으로서 유효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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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읽다보니 수정되어있네요. 원래는 더밋과 언어철학-수리철학에 관한 내용이 있었던 것 같은데 ;ㅁ; 괜찮으시다면 지우신 내용을 알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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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증은 심리철학의 문제를 수학철학을 빌려 답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한편 동일한 문제를 언어철학을 빌려 답할 수 있다. 행동주의 의미론의 관점에서 '고통'의 의미는 찡그리는 표정, 짧은 비명 등등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c-섬유의 자극은 고통을 일으킨다"고 주장할 수 있을지언정, "c-섬유의 자극은 고통이다"고 말할 수는 없다.

수학철학과 언어철학이 동일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면, 거꾸로 언어철학을 빌려 수학철학의 질문에 답하는 논증, 또는 그 역도 가능할 것이다. 예를 들어 '자연수'의 의미는 그 개념이 사용되는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은 카이사르 문제나 참-증명가능성 구분과 같은 적잖은 수학철학의 질문에 답할 수 있다. 실제로 Dummett은 이 주장을 근거로 직관주의 논리학을 피력함으로써 모든 참인 명제는 알려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이상의 논의는 Antireductionism - Antirealism about Truth - Behaviouristic Theory of Meaning - Structuralism이라는 현대 분석철학의 넓은 지평을 어느 정도 가늠하는 듯하다.

라는 내용이 있었는데 너무 휘리릭 적었고, 수학철학에 관한 심리 및 언어철학적 논의는 다른 글로 자세히 써 보고 싶어서 지웠습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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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읽었습니다. 베나세라프가 던지는

Q: 1은 3의 원소인가?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텐데 말이죠..

그런데 약간 의아하게 보이는 부분이 있습니다.
산술을 집합론으로 환원한다는 예시를 보면, 환원의 대상과 환원의 결과는 이론들이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베나세라프의 논증을 재기술한 부분을 보면 "환원되는 대상의 본질을 기술한다"라고 되어 있고, 이때는 왠지 이론적 환원이 아니라 존재론적 환원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론 T는 이론 Tr로 환원된다 <-> Tr과 적절한 교량 법칙(bridge law)로부터 T가 도출된다.

여기서 교량법칙이란 이론 T의 용어들을 Tr의 용어들로 정의하는 정의들의 집합 정도로 보면 될 것입니다. 이론적 환원에 대한 대략적인 이런 정의는 베나세라프의 정합성 조건과도 거의 일치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론적 환원에 대한 위 정의에 따르면 이론 T가 복수의 이론들, 요컨대 TA와 TB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것은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가능합니다.
논리적으로 양립가능한 두 환원이 "올바른" 환원인지를 가름해주는 것이 TA와 TB가 T가 다루는 대상의 본질을 동일하게 기술하는가이고 이를 테스트하는 방식이 본질에 관한 질문에 동일한 답을 제시하는가라고 보여집니다.
그런데 베나세라프가 이런 전제를 도입하는 것은 대상의 본질에 대한 기술이 이론독립적으로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을 가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가령 마지막 질문을 보면 "양자역학은 결정론적인가?"라는 질문이 양자역학의 본질에 관한 질문이라고 할 때, 마치 양자역학이 결정론적인 이론인지 아닌지가 미리 정해진 채로 있고 R1과 R2가 그 사실을 포착해내는지를 묻는 것처럼 보이는데, 반드시 이런 방식으로 질문을 이해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오히려 양자역학이 결정론적인지 아닌지는 양자역학이라는 이론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의존적이라고 보는 것이 (적어도 제 눈에는)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설령 이것이 양자역학이라는 이론이 아니라 미시세계의 현상이 결정론적인가 아닌가에 대한 질문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조금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미시세계의 현상이 결정론적인가"하는 질문의 답은 미시세계의 현상을 결정론적으로 기술할 것인가 아닌가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고, 궁극적으로는 경합하는 이론들이 현상을 얼마나 더 많이, 체계적으로, 적절한 이해를 주는 방식으로 설명하는지가 더 받아들일만한 이론인지 아닌지를 가름할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본다면 어느 정도 내적 안정성을 가진 경합하는 두 이론이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자연스럽게 들리구요.

늘 잘 보고 있습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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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베나세라프의 논증이 존재론적 환원에 대한 논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산술을 집합론으로 환원하는 예시 또한 존재론적 환원이라고 생각합니다. 페아노의 공리들이 산술을 환원한다는 사실(이론의 환원)은 베나세라프도 인정할 것입니다. 베나세라프가 지적하는 것은 수를 특정 집합들로 정의하는 환원(존재론적 환원)입니다. 따라서 베나세라프가 제기하는 의문이 "'수'를 ...과 동일시할 수 있는가?"라면, 그의 논의를 "'고통'을 ...과 동일시할 수 있는가?", 또는 "'양자 상태'를 ...과 동일시할 수 있는가?"로 확장할 수 있다고 봅니다.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집합론과 산술의 예시와 비교해 보자면, 1 ∈ 3에서 '∈'은 R1 환원과 R2 환원에서 잘 정의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 정의가 동일하므로, 둘의 불일치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양자역학의 경우 '결정론적이다'라는 술어는 어느 이론을 사용하냐에 따라 그 의미가 조금씩 다르게 정의될 것입니다. 따라서 양자역학이 결정론적이냐는 질문에 두 환원(해석)이 다른 대답을 내놓는 현상은 괜찮을 뿐 아니라 자연스럽다는 것이 @Raccoon 님의 지적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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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라쿤님의 지적과 결이 비슷할 수도 있는 의문인데, 구조와 대상이 정말 그렇게 딱 떨어지게 구분되는지 의문스럽네요.

결국 구조라는 것이, 대상들이 가진 관계(적 속성)에 대한 기술이라면, 대상이 가진 존재론적/형이상학적인 기술의 일부인 것 아닌가요?
그렇다면 구조를 옹호한다는 것은 우리가 대상에 대한 다른 것은 모를지라도 관계적 속성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 수 있다는 주장인 셈인데, 대상에 대해선 일종의 반-실재론을 주장하면서 그 부분에 대해선 어떻게 실재론을 옹호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렇다면
(a) 구조와 (구조과 구분되는) 대상을 명확히 정의하고
(b) 구조에 대한 이론/지식과 대상에 대한 이론/지식이 어떻게 성립되고 다른지를 설명해주셔야할 듯합니다.

(2)

수학에 대한 구조주의가 성립한다해도, 과학적 실재론을 반박할 수 있는지 저는 살짝 의문스럽습니다.

수학에 대한 구조주의가 실재론을 반박하는 건 크게 두 주장을 통해 이루어지는 듯합니다.
(i) 수학은 구조에 대한 학문이다.
(ii) 그리고 우리는 이 정합적인 여러 구조를 가질 수 있다.

과학에 대한 구조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i)은 수용할듯합니다. 과학은 구조에 대한 학문이다. 그렇지만 (ii)를 수용하기는 어렵지 않나 싶습니다. (그렇다면 여전히 과학적 "구조" 실재론인 것처럼 전 보입니다.)
(아마 직관의 영역이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의 자연 법칙이, 최소한 물리과학의 영역에서라면 단일하다 여기기 때문인듯합니다.)

말씀하신 양자역학을 온전히 이해하진 못했지만, 과학자들이라면 이렇게 주장할 수 있지 않을까요?
"두 기술은 한 대상이 가진 다른 속성에 대한 구조적 기술이다."

앞선 수학의 예시가 수학적 대상이 가진 "동일한 수학적 속성"을 기술하는 정합적인 두 구조에 관한 이야기였다면, 이제 양자역학에서는 물리학적 대상이 가진 "다른 물리적 속성"을 기술하는 두 구조에 관한 이야기가 되는 셈이죠.

(3)

혹은 인간이 가진 인식론적 한계로 인해 생기는 "부분적 기술"로 (양자역학에서) 두 가지 기술이 생긴다 주장할 수도 있어 보입니다. (이럴경우 수학의 정합적인 여러 구조가 인식론적 한계로 성립하는 건 아닌 것 같아 보이니 좀 결이 달라지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