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르트 『성찰』에서 실재성에 관한 질문

안녕하세요. 철학에 입문한지 얼마 되지 않은 뉴비입니다. 학부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터라 철학에 대한 지식도, 글 재주도 뛰어나지 못해서 한동안 눈팅만 했는데 이제서야 글을 쓰게 되네요. 첫글이 지식과 통찰력을 공유할 수 있는 글이 아니라 죄송합니다… 그래도 데카르트 『성찰』에서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구절이 있어 질문 드립니다.

또한 나는 내가 내 관념들 속에서 고찰하는 실재성은 그저 객관적인 것이므로 이 실재성은 이 관념들의 원인 속에서 형상적으로 있을 필요는 없고, 객관적으로 있기만 하면 된다고 억측해서는 안 된다. (중략) 그리고 한 관념이 다른 관념으로부터는 생길 수는 있지만, 이것은 무한히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고 마침내 최초의 관념에 이르게 된다. 이 관념의 원인은 이를테면 원형이라 할 것으로 관념들 속에는 그저 객관적으로만 있는 실재성 즉 완전성 전체가 거기에는 형상적으로, 즉 실제로 내포되어 있다.

여기에서 마지막 문장, 특히 “실제로 내포되어 있다”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실제”가 인식 주체 외부의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가리키는지, ’정말‘과 같은 강조의 의미로 쓰였는지 모르겠네요… 전자의 의미로 해석했을 때는 특정 관념의 객관적 실재성은 궁극적으로 다른 어떤 형상적 실재성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이고 후자의 것이라 두고 해석했을 때는 하나님과 같이 객관적 실재성을 부족함 없이 완전하게 지닌 명석하고 판명한 존재를 요구하는 것으로 이해되네요.

저는 ”객관적으로 있기만 하면 된다고 억측해서는 안 된다“, “형상적으로, 즉 실제로 내포되어 있다”, “최초의 관념”과 같은 구절에서 미루어 볼 때 전자의 의미에 가깝다고 생각했는데 혹시 데카르트를 공부하신 분 있으시면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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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성찰이네요. 어떤 번역본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마지막 문장은 어떤 의도로 저렇게 번역했는지 짐작은 갑니다만 약간 헷갈릴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아래 인용은 표준영역본인 CSM(K)판의 해당 부분입니다.

And although the reality which I am considering in my ideas is merely objective reality, I must not on that account suppose that the same reality need not exist formally in the causes of my ideas, but that it is enough for it to be present in them objectively. (...) And although one idea may perhaps originate from another, there cannot be an infinite regress here; eventually one must reach a primary idea, the cause of which will be like an archetype which contains formally all the reality which is present only objectively in the idea. (AT 42; CSM Selected Writings p.92)

우선 'objective reality'라는 표현은 직역하면 '객관적 실재성'이지만 의도된 의미를 좀 더 잘 보여주는 번역어는 '표상적 실재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데카르트가 실재성에 관해 말할 때 정도를 갖는 것으로 많이 말하는데요, 여기서 실재성은 쉽게 말하면 긍정적 속성들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어떤 것이 긍정적 속성을 많이 갖고 있을수록 degree of reality가 높고, 그렇지 않을수록 낮죠. ("all the reality ") 달리 말하면 실재성은 어떤 것을 완전한 무(sheer nothingness)가 아니게끔 해주는 규정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표상적(객관적) 실재성과 형상적 실재성(formal reality)는 무슨 차이냐, 어떤 관념이 내용적 측면에서 갖는 실재성을 표상적 실재성이라고 하고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혹은 개체)이 갖는 실재성을 형상적 실재성이라고 이해하시면 대략 맞을 겁니다.

마지막 문장은 관념의 기원을 좇아가다보면 그 인과의 계열 끝에 있는 X는, X에 대한 관념이 갖고 있는 모든 실재성(긍정적 속성), 즉 표상적 실재성을 형상적 실재성으로 갖고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즉, X는 실제로 존재하고 X에 대한 관념이 갖고 있는 이러저러한 속성들을 갖고 있기도 한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라는 말이 들어가지 않았나 싶습니다.

《성찰》이 철학 입문으로 많이 권해지는데, 제 생각에 그건 제 1,2,6성찰 정도에 한정인 것 같습니다.. 3 4 5성찰은 정말 읽기 까다롭더라구요.

(저는 데카르트나 근대철학 전공자는 아니고, 수업 때 들었던 걸 더듬어서 써본거라 틀릴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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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표상적 실재성'이라고 번역되었던 성찰을 읽었었던 것 같은데, 객관적 실재성으로 번역한 책도 있었군요. 학부 때 말곤 데카르트를 접하지 않아서, 처음으로 영어번역을 접하게 됐는데, 흥미롭네요.

지금 생각해보니 데카르트의 신 존재 증명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무한 소급을 피하기 위해선 신을 가정할 수 밖에 없다'는 아리스토텔레스식 신존재 증명과 '(신이라는) 최상의 개념은 개념상 이미 실재성을 가지고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안셀무스의 신존재 증명이 짬뽕된 것처럼 보이네요. 그리고 안셀무스식 신존재증명은 플라톤식의 이데아(형상)의 실재성, 일종의 플라톤주의를 전제해야만 할 것 같구요.

검색해보니, 이미 이곳 커뮤니티에도 관련 타래가 있었네요. 참고하시길: 데카르트 제 3성찰 신 존재 증명과 표상적-형상적 실재성의 구분 - handak 님의 게시물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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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잘 이해하지 못 하고 있지만 근래 개정된 이현복 역 성찰(2021)에서 해당 부분 발췌하니 참고하시고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또한 나는 내가 내 관념들에서 고찰하는 실재성이 그저 표상적인 것이므로, 그 실재성이 이 관념들의 원인들 안에 형상적으로 존재할 필요는 없고, 그 원인들 안에서도 표상적으로 존재하면 충분하다는 의혹을 품어서도 안 된다. (...) 그리고 혹시라도 한 관념이 다른 관념에서 생길 수 있다고 해도, 그렇지만 여기에 무한 진행이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어떤 최초의 관념에 도달해야 하며, 이 최초의 관념의 원인은 원형과 같은 것이라, 그 안에는 관념 안에 그저 표상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실재성이 형상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pp. 6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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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선생님들께서 잘 설명해주셨는데요.

이런 설명은 흥미롭습니다만, 조금은 오해의 여지가 있는 것 같아 사족을 달아보겠습니다.

우선 형상적 실재성은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갖는 실재성입니다. 즉, 있는 것들은 다 형상적 실재성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연장적인 사물이나 개체 외에도 사유된 것들, 생각 속에 있는 것들도 다 형상적 실재성을 갖고 있습니다.

표상적 실재성은 우리가 사유하는 관념들이 갖는 실재성입니다. 우리가 기뻐하거나 두려워하는 것들만이 아니라 우리가 상상하고 사유하는 모든 것들이 다 표상적 실재성을 갖습니다.

위와 같은 구분을 숙지한다면 우리의 관념만이 표상적 실재성과 형상적 실재성을 모두 가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표상적 실재성을 갖는 것의 대상이 즉 관념들의 대상이 형상적 실재성을 반드시 가질 필요는 없다는 것 등을 논리적으로 유추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전자에 따르면 우리가 상상하는 것들은 어쨌든 존재하기는 한다는 것이고, 후자에 따르면 우리가 상상하는 것이 실제로 존재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지요.

단적인 예로 키메라는 형상적 실재성을 갖지 않습니다만, 우리가 그것을 사유할 때 표상적 실재성을 갖습니다.

이제 더 풍부한 논의가 이루어지는 것은 이 실재성들의 정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인데요.
데카르트의 존재론에 따르면 존재하는 것은 세 가지 급을 갖습니다. 무한실체-유한실체-양태가 그것입니다. 무한실체는 신입니다. 유한실체는 사유실체와 연장실체입니다. 양태는 각 유한실체들의 개별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각각의 급들이 나뉘는 기준은 존재론적인 의존에 있습니다. 즉 유한실체는 무한실체없이는 있을 수 없고, 양태는 유한실체 없이는 있을 수 없습니다. 신 없이 사유 실체나 연장적 공간이 존재할 수 없고, 사유하는 실체없이 사유실체의 양태들인 개별적인 사유, (데카르트는 느낌, 열망, 상상 등을 모두 사유의 양태로 보기 때문에) 느낌들, 열망들, 상상들, 사유들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생각하는 나가 없으면 개별 생각이 존재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연장적 실체없이 연장실체의 양태들인 (외부 세계의) 사물들이 존재할 수 없지요. 공간이 없이 그 공간에 존재할 수 있는 3차원적 개체들이 존재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키메라의 관념이 갖는 형상적 실재성과 천사의 관념이 갖는 형상적 실재성은 정도가 같을까요, 다를까요? 키메라는 존재하지도 않는 괴물에 불과하고 천사는 (적어도 데카르트에게는) 신의 사자로서 인간보다도 우월한 존재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 질문의 답은 같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둘 모두 우리가 떠올리는 관념인 한 그 형상적 실재성은 사유실체의 양태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가 이것들을 떠올릴 때 (즉 사유할 때) 이것들이 갖게 되는 속성들이 어떠하다는 데에는 당연히 차이가 있습니다. 키메라는 상상 속에나 있는 것으로 우리가 떠올리지만, 천사는 (적어도 데카르트에게는) 능력에 있어 인간보다도 훨씬 우월한 존재로 표상됩니다. 따라서 천사는 표상에 있어서 키메라보다 더 많이 실재하지요.

이제 문제는 신인데요. 신을 떠올릴 때 우리는 신이 완전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완전성은 무한실체에게만 속할 수 있는데요. 문제는 그러한 완전함을 떠올리는 우리 사유의 실체는 유한실체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유한실체가 자기보다 더 큰 표상적 실재성을 가지고 있는 신을 떠올릴 수 있을까요? 기발한 상상력을 동원하면 되겠다 싶은데, 실은 이것이 데카르트에게는 문제가 됩니다. 왜냐하면 데카르트는 중세 스콜라 철학의 인과율을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인과율에 따르면 결과가 되는 것의 실재성은 원인이 되는 것의 실재성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이상한 소리같지만, 실은 '무로부터 어떤 것도 생기지 않는다'는 말을 이리저리 스콜라에서 씹고 뜯고 맛본 결과물입니다. 우리 사유의 양태들, 즉 모든 개별적인 생각들은 다 사유실체에 의해 결과된 것들입니다. 사유실체가 원인이고 사유양태들은 결과인 것이죠. 그러니 신에 대한 관념도 어쨌거나 사유양태로 사유실체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죠. 사유양태, 즉 사유실체의 결과인 신의 관념이 갖는 표상적 실재성이 완전합니다. 사유실체의 표상적 실재성은 완전하지 않지요. 사유실체는 유한실체에 불과합니다. 결과가 완전하다면 원인도 최소한 완전해야한다는 것이 인과율에 따르는 길입니다. 그러나 원인인 사유실체보다 결과인 신의 관념이 더 많은 실재성을 갖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사유실체의 보증으로는 이 신의 관념이 갖는 완전성이 전혀 확립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신의 관념은 존재하지 않아야 하거나 신의 관념의 원인이 사유실체가 아닌 것이 됩니다. 그러나 신의 관념은 존재하지요. 따라서 신의 관념의 원인은 사유실체가 아닌 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다른 것은 적어도 신에 맞먹는 실재성을 가져야 합니다. 실재성은 표상적이거나 형상적이지요. 그런데 그것이 표상적 실재성일 수는 없다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에 그것은 반드시 형상적 실재성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신의 관념을 낳을 수 있는 것은 형상적 실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신의 관념의 원인이 되는 존재의 형상적 실재성은 완전성과 맞먹는 급의 실재성을 가집니다. 즉 무한실체여야 합니다. 우리는 그걸 신이라고 부르지요. 따라서 신은 형상적으로 존재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데카르트가 3성찰에서 선보이는 소위 '후험적 신 존재 증명'입니다. 우리가 신의 관념을 가지고 있다는 '경험'에서부터 증명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은 것입니다.

물론 데카르트는 성찰에서 세 가지 신 존재 증명을 제시합니다. 첫 번째가 이 증명이고, 나중에 선험적 증명 내지는 존재론적 증명이라고 불리는 것들도 나옵니다. 결국 @Nahverkehr 선생님 말씀처럼 앞에 것은 아퀴나스, 뒤에 것은 안셀무스의 신 존재 증명과 유사하게 보이니,

같다는 말씀에 저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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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감사합니다! 여기에 추가적으로 질문이 생겼는데,

여기에서 ‘표상적 실재성’을 갖는 대상(우리의 관념)이 ‘형상적 실재성’을 반드시 가질 필요는 없다는 것은 그것이 확실한 참으로서 형상적 실재성을 지닌 ‘생각하는 나‘가 있는 한에서 그렇다는 건가요? 데카르트는 3성찰 ‘신 현존 증명’에서 신 관념이 지닌 표상적 실재성이 너무 큰 나머지 나 자신이 그 원인이 될 수 없다는 이유로 나 외부에 형상적으로 존재하는 신이 있다는 타당한 결론을 내세운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제가 추론한 것은 모든 관념은 적어도 그와 동등한 정도의 형상적 실재성을 지닌 대상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떤 관념의 표상적 실재성이 나의 그것보다 더 크다는 이유로 나 이외의 다른 존재(위에서는 신)을 형상적으로 요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관념의 형상적 실재성이 문제되지 않는 경우, 즉 형상적 실재성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경우는 그것이 표상적으로 나 자신이 그 원인이 될 수 있는 경우이며 그렇지 않은 경우는 다른 존재를 형상적으로 요구한다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제가 이해한 것이 맞을까요?

표상적 실재성을 갖는 대상이 아니라 표상적 실재성을 갖는 것의 대상입니다.. 조금 지저분한 표현이지요? 그러나 표상적 실재성을 갖는 것은 관념들이구요. 표상적 실재성을 갖는 것의 대상은 그 관념의 대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키메라의 관념을 떠올린다면 그 관념의 대상은 키메라이지요. 이때 이 키메라가 형상적 실재성을 반드시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표상적 실재성을 갖는 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므로 당연히 형상적 실재성도 갖습니다.

형상적 실재성을 가지지 않는 경우는 그것이 이 세상에 연장적으로든 관념적으로든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경우입니다. 다시 한 번 예시를 들겠습니다. 키메라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요. 따라서 키메라는 형상적으로 실재하지 않습니다. 또는 형상적 실재성을 갖지 않습니다. 반면에 우리가 키메라를 떠올릴 때 즉 표상할 때, 우리는 키메라의 관념을 갖습니다. 따라서 키메라의 관념은 존재하며 키메라의 관념은 관념인 한 표상적 실재성을 갖고, 존재하는 한 형상적 실재성 역시 갖는 것입니다. 그러나 키메라의 관념의 형상적 실재성의 정도는 사유실체의 양태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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