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존재론에 대해서 (다시)

(1)

(2)

사회적 존재에 대해서 우리는 자연적 존재와 많은 차이를 구분해 볼 수 있다.

(a) 사회적 존재는 형이상학적 필연성을 가지지 않는다.
; 단순히 생각해보면, 돈은 어느 가능 세계에서든 '돈이 상정하는 기능만 한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이 없다. (심리철학 용어를 빌리자면, 다중 실현 논변인듯하다.)

(b) 사회적 존재는 하이브리드한 특징을 가진다.
; 사회적 존재는 자연적 속성에 특정한 '사회적 속성' 혹은 '기능'을 부여함으로서 작동하는 듯하다. 인종이나 젠더가 대표적이다. 흑인이 검은 피부를 가졌다는 것은 자연적 사실이며, 자연적 속성에 따른 지칭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검은 피부색'이라는 자연적 속성을, '흑인'이라 분류함으로서 훨씬 다양한 사회적 속성 (혹은 암묵적 전제들을) 여기에 귀속시킨다. (단순히 말하자면, "흑인성"이라 말할 수 있다.)
예술에 대해서도 우리는 동일한 말을 할 수 있다. (일단 1차적으로) 예술은 미적 속성을 가진 사물이라 여길 수 있다. (역으로 모든 미적 속성을 가진 사물을 예술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리고 이제는 미적 속성이 없을지라도 예술이라 부르기도 한다.)

(c) 사회적 존재는 가족 유사적이다.
; 예술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이제 미적 속성이 없을지라도 예술이라 부른다 했다. 왜 그런가? 예술이라는 속성을 귀속시키던 제도-신념 등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 만든 생산물들도 (가족 유사적으로) '예술'이라는 카테고리로 귀속시켰기 때문 아닌가?
인종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원 드랍 룰처럼, '검은색 피부'라는 자연적 속성이 결여된 사람조차 , (가족 유사적으로) '흑인'이라는 카테고리로 귀속된다.

(비트겐슈타인의 가족 유사성은, 내 기억상, 언어를 구성하는 단어/개념에 해당하는 단어였다. 나의 경우, 단어/개념뿐 아니라, 이 단어를 통해 지칭하려는 '사회적 속성'에 대한 언급까지 확장해서 썼다.)

(3)

미국 철학사에서 다시 주목받아야 하는 학자들이 몇 있다 여겨진다.
주류 철학계의 영웅인 콰인과, 콰인의 대척점에서 (일종의) 대항 철학의 아이콘처럼 보이는 셀라스뿐 아니라, 그 중간에 있던 몇몇 학자들은 더 연구되어야 한다 본다.
그 두 사람이 로드릭 치솜과 넬슨 굿맨이라 생각한다. (우연치 않게도 둘 다 C.I. Lewis의 제자다.)

둘 다 일종의 그랜드 theory를 만들려던 학자이면서, 결이 다르다. 치솜은 형이상학적 실재론을 지지하면서도, 흄적인 측면도 있고 기묘했다. (그에 비해 콰인은 형이상학적으로 반-실재론이었다.) 굿맨은 상식과 사회적 존재에 대해서 몇 가지 코멘트를 남겼다.

(독일에서 공부하신 분들은 베버나 게오르그 짐멜처럼 고전적인 사회학자들을 '사회 철학자'라 말하시면서, 철학의 범주 안에 포함시키곤 한다. 사실 미국 사회학 전통에서는 사회적 존재에 대한 철학적 접근은 이제야 진지하게 통합적으로 논의되는 분야로 여겨진다.
아마 기존 논의가 산발적이였을텐데, 몇 가지를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아서 단토의 '예술의 사회적 존재론' 언급이라던가, 존 설 말년에 한 사회적 존재론 언급, 마이클 브렛맨/알빈 골드만의 집합적 행위자/의도를 논의하면서 시작된 사회적 존재에 대한 논의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제대로 모르는 페미니즘 철학에서의 젠더 접근도 선조 중 하나일 것이다.)

(데이빗 루이스, 솔 크립키의 부상은 로드릭 치솜의 형이상학/논리학에 대한 지지와 데이빗 암스트롱의 자연과학과 형이상학의 통합이라는 프로젝트를 기반으로 성립하는 느낌이다.)

3개의 좋아요

오오, 재미있네요.

여기에 동의합니다~!

(1) 콰인 정도면 뭐...용비어천가를 써도 되죠 ㅎㅎ. 제자도 많고 분명 오늘날 영미권 철학을 형성하는데 있어서 굉장히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니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