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는 왜 자본주의를 비판하는가?

잡념에 가까운 메모 글입니다.


『아침놀』의 두 구절이 니체가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이유를 잘 드러낸다. 그리고 여기서 드러나는 니체가 자본을 비판하는 이유가 니체 철학 전체 프로젝트를 아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들여다볼만하다. 출처와 서술 방식만 약간 바꾸면 지은이가 (통념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니체라고 생각하기 힘들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을 범죄자로 만드는 이 과도한 초조함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 어떤 사람은 불공정한 저울을 사용하고, 어떤 사람은 고액의 보험을 든 후에 자신의 집에 방화하고, 어떤 사람은 위조 화폐의 제조에 참여한다. 상류 사회 사람 중 4분의 3이 합법적인 사기에 몰두하고 주식 거래와 투기로 인한 양심의 가책 때문에 괴로워해야 할 때, 그들을 부추기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이 실제로 궁핍하기 때문은 아니다. … 그들을 이렇게 부추기는 것은 돈이 쌓이는 속도가 너무 느리다는 초조함과 그와 못지않게 축적된 돈에 대한 끔찍한 욕망과 애정이 밤이든 낮이든 그들을 몰아대는 것이다. 이 속에서 힘에 대한 저 열광적인 욕망이 다시 나타난다. … 힘에 대한 욕망이 자신을 채우는 수단은 변화되었지만 동일한 화산이 여전히 불타오른다. … 이전 사람들이 '신을 위해' 행한 일을, 지금 사람들은 돈을 위해, 오늘날 힘의 감정과 떳떳한 양심을 제공하기 위해 행한다.

<아침놀 中 다나에와 황금의 신> (KSA5, p. 179)

핵심은 무엇인가? 자본은 하나의 신으로 정립되어 인간들을 궁핍하게 만든다. 그 궁핍함으로 인해 사람들은 "불공정한 저울"로 정의를 심판하고, "자신의 집"을 없애고, "위조"한다. 물론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도 하지만, 우리는 "합법적" 외양을 가진 사기와 투기 등에 참여한다. 그럼에도 바뀌지 않는 사실은 우리의 "돈에 대한 끔찍한 욕망과 애정"이 우리 자신을 파괴한다는 점이다. 소유 대상과 주체의 관계가 전도된다. 이제 인간이 돈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돈이 인간을 소유한다.

가난하면서도 즐겁고 독립적이라는 것! 그것들은 동시에 가능하다. 가난하면서도 즐겁고 노예라는 것! 이것도 가능하다. 그리고 나는 공장 노예 제도의 노동자들이 이보다 더 좋은 상태에 있다고 생각할 수 없다. 만약 그들이 지금 상태처럼 기계의 나사로, 또 말하자면 인간의 인간의 발명품에 대한 보완물로 소모되는 것을 치욕이라고 느끼지 않는다고 가정한다면 말이다! 높은 급여를 통해 그들의 비참한 삶이 본질적으로 극복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어리석다. 즉 임금이 높아진다고 해서 그들이 당하고 있는 비인격적인 노예화가 지양되는 것은 아니다. … 아! 인간이 아니라 나사가 되는 대가로 하나의 값을 갖게 되다니! … 그대들이 해야 하는 것은 얼마나 많은 내면적 가치가 그러한 외면적인 목표를 위해 포기되는지에 대한 대차대조표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들이 자유롭게 호흡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더 이상 알지 못한다면 그대들의 내적인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 그대들이 자신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을 조금도 갖지 못하고 있다면? … 모든 사람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차라리 이민을 가자. 세계에 아직 남아 있는 야만적이고 신선한 지역의 주인이 되고 무엇보다도 나 자신의 주인이 되려 하자. 그 어떤 것이든 노예 제도의 징후가 조금이라도 보이는 한, 장소를 바꾸자. 모험과 전쟁을 회피하지 말고 최악의 경우에는 죽을 각오를 하자. 이 불결한 노예 제도만은 더 이상 안 된다. 이렇게 음침하고 악의적이며 음모적으로 변하는 것은 더 이상 안된다." 이러한 것이야말로 올바른 정신 자세일 것이다. 지금부터 유럽의 노동자들은 하나의 계급으로서 자신들의 상태를 인간이 참을 수 없는 것으로 천명해야 하며, 보통 주장되는 것처럼 단지 가혹하고 불합리하게 조직된 것이라 천명해서는 안 된다. … 이러한 대규모적이고 자유로운 이민에 의해 기계, 자본 그리고 지금 그들을 위협하고 있는 선택, 즉 국가의 노예가 되든지 아니면 국가를 전복하려는 정당의 노예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선택에 저항해야 한다. … 그렇지 않을 경우 그들은 더 이상 자신의 삶을 견뎌낼 수 없게 되고, … 성미가 까다롭고 예민하며 쾌락을 탐닉하게 될 위험에 빠지게 될 것이다. 더 순수한 공기가 … 늙은 유럽에 다시 한번 찾아온다면! …

<아침놀 中 용인할 수 없는 상태> (KSA5, pp. 183-185)

위 구절과 비판의 핵심은 동일하다. "기계의 나사"로 전락한 인간은 "자본(돈)"이라는 "외면적 목표"를 위해 "내면적 가치", "자유로운 호흡", "내면적 가치"를 포기하고 "비인격적인 노예화"의 길을 걷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위 구절과 달리 이번 구절에서 니체는 나름의 대안을 제공하고 있다. 규범적으로 그는 우리가 비록 "가난할지라도 즐겁고 독립적"인 존재가 돼야만 한다면서, "자신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을 길러서 "나 자신의 주인"이 돼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를 위해 "이민"을 가자고 말한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이민"이 무엇인가? 이것이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다. 물리적인 의미의 이민인가? 그 당시 자본의 영향이 덜 했던 아시아를 언급하며 니체는 물리적 의미의 이민을 주장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민을 가기만 한다면 우리가 자본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즉, 우리가 우리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인가? 니체의 의도가 이것은 아닐 테다. 니체 주장의 요지는 우리 내부에 자리 잡은 습성을 없애야 한다는 것,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욕망과 쾌락에서 정신적으로 이민을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인 방안이 무엇인가? 니체가 위 구절에서 그 구체적인 방안 로드맵을 그려주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철학 전체를 통해서, (특히 『안티크리스트』에서) 우리를 지배하는 하나의 외적 목표가 있다면 그것은 신과 마찬가지로 극복해야 할 대상임을, (특히 『도덕의 계보』에서) 또 그것을 위해서는 그 계보를 추적해야 하고, (특히 『비극의 탄생』과 『이 사람을 보라』에서) 결국 그 계보의 끝에는 우리 스스로가 있으니 자기비판을 시도해야 한다는 점을, (『아침놀』과 『도덕의 계보』에서) "최악의 경우에는 죽을 것을 각오"해야 함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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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느끼지만 니체 문장들은 열정적이라 매력적입니다. :slightly_smiling_face:

1개의 좋아요

저도 그것 때문에 니체를 읽기 시작했는데, 이제 단순히 읽고 느끼는 사람이 아니라 분석적으로 접근하는 학자의 길을 걷다보니 열정적인 문장이 방해가 되곤합니다.

읽다가 동화되어 날카로운 시선이 무뎌지기도 하고, 산문 읽듯이 분위기만을 읽어버리고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가 갖는 구체적인 의미를 놓치기도 하구요. :joy:

듣고보니 확실히 학자로서는 곤란한 면이 있겠네요 :sob: :sob:
일반적인 철학책이라기보다는 마치 연설문을 읽는듯한 느낌도 드니까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