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법의 캐주얼화

<예기>의 대의를 보면 상례는 슬픔의 감정을 조절하고 문식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상중에는 고기와 술을 먹지 않고, 음악을 듣지 않는게 오랜 예법이었다고 합니다. (첨부한 기사의 사례인)장례식에서 춤을 추는 것에 대해 비판적인 의문을 가지는 건 제가 그냥 ‘꼰대’이기 때문일까요? 예법을 파괴하는 게 자랑이 되고 언론에 소개되는 현실이 안타깝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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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를 찾아보니 장자가 돌아온 건 아닌 것 같네요.
다만 말씀하신 것처럼 '슬픔의 감정을 조절'하는 것이 상례의 본질이라면, 슬픔의 감정을 다루는 법은 각자가 다를 수 있으니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근데 좀 무식한 질문을 하나 하자면, '문식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요? 사전을 찾아보긴 했는데, 사전과 다른 의미인 것 같아 여쭙니다. 부끄럽네요. 편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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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식(文飾)은 꾸미다, 장식하다라는 뜻입니다. 식(飾)은 꾸미다는 의미이며, 문(文)은 글이나 학문 일반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꾸미다는 의미할 때도 있습니다. 문식은 여러 뉘앙스를 가지는데, 긍정적으로 장신구, 장식물, 치장하다는 물론, 글이나 학문의 (수사학적) 우아함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부정적으로는 거짓으로 꾸미다, 위장하다 라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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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법은 시대마다 그 모습이 꾸준히 변화해왔고, 같은 시대라도 문화권에 따라 상이합니다. 장례식을 축제처럼 지내는 가나나 미크로네시아에서는 그런 방법이 상을 치르는 예법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보기에는 저런 사례가 단순한 "예법의 파괴"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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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자>에 이르기를 ”3년상은 25개월로 끝마치고 상복을 벗는데, 이것은 효자들이 목숨이 끊어지도록 슬퍼하지 않도록 슬픔을 조절하기 위함이다. … 상중에는 거친 옷을 입고 음악과 고기와 술을 폐하는데, 이것은 (슬프지 않더라도)슬픈 마음을 꾸며서 예의를 다하기 위함이다“라고 합니다.

기사를 보니 상을 당하신 분께서, 장례식장에 고인의 공연용품을 벌여놓고 음악을 틀며 춤을 췄다고 합니다. 이것이 슬픈 마음을 꾸미기 위함일까요? 고인의 빈소에서 단체로 춤을 추고 활짝 웃으며 단체샷을 찍는 행위는 슬픈 마음을 꾸미는 것은 아닐 겁니다. 슬픔을 조절하기 위함일까요? 고인께서 작고하신지 얼마되지도 않았을 삼일상에서 춤을 추는 건 아예 조절할 슬픔조차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기사를 보니 상을 당하신 분께서 가부장주의에 깊은 반감을 가지고 계신데 그걸 상례에 투영한 것 같습니다. 물론 <예기>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동일하게 상례와 제사를 받들도록 되어있는데, 한국에서는 남성이 중심이 되는 걸 보면 저도 남성중심의식에 대한 문제의식에 동감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 반이데올로기를 행위로 표현한 것이 친언니 상에서의 단체춤과 인증샷이라니,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가족에게 할 수 없는 유치한 짓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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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은 <예론>에 흡사한 구절이 있는걸 기억하는데,

이 부분은 제 기억상에도 없고, 몇 번 가능한 한문을 검색해봐도 유사한 구절이 나오지 않네요. 혹시 어느 구절이신지 알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이번 사례는 구체적인 배경을 몰라 판단하기 어렵지만, 예법으로 대표되는 전통 파괴가 무분별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은 지적할 만한 사회문화적 현상인 것 같습니다.

요즘 개인의 권리 증진이라는 미명 하에 전통적인 것(혹은 공동의 에토스)을 거부하는 것 같습니다. 또는 전통이란 것이 그 자체 부정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지고, 거부를 위한 거부가 사회문화적 현상이 된 것 같습니다. 이때 그러한 부정 행위는 주로 옳은 것으로, 전통은 예스럽고 허물어져야만 하는 것으로 치부되고요. 이에 더해, 어디서 철학 좀 주워들어본 자들은 니체나 들뢰즈를 인용(악용)하며 자신의 행위를 멋지게 정당화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개인의 권리라는 것 또한 인간을 사회적 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조건 아래에서만 성립할 수 있기 때문에 무분별하게 전통을 거부하는 행위 또한 지양해야 할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분별 있는 거부를 정확히 규정하기는 어려우나, 적어도 거부를 위한 거부는 지양되어야 하며, 전통 자체와 전통의 부정적 효과(혹은 현대와 맞지 않는 점)를 분리하고 가능하다면 후자를 버려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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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둘러싼 해석은 다양하겠지만, 유가에서 예를 이해하는 기본적인 관점은 '형식'인 것 같습니다. 어떤 내용을 드러내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죠. 저의 관심사에 입각해서 이야기를 조금 더 이어나가자면, 주희의 경우 “천리의 절문(天理之節文) 인사의 의칙(人事之儀則)” 이라고 예를 정의하였습니다. 이 중에서 "천리의 절문"을 현대의 언어로 풀어보자면 '도덕적 가치를 적절하게 드러내는 형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통상 나이가 어린 사람은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허리를 굽히는 방식으로 윗사람에 대한 공경(내용)을 표현하곤 하는데 공경이 없는 허리 굽힘은 무의미한 물리적 움직임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공경을 따귀라는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부적절한 가치의 표출일 것입니다.

물론 글쓴이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적절한 형식응 통해서 '감정'을 표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볼 경우 기쁨을 적절히 드러내는 형식이 있을 것이고, 분노를 적절히 드러내는 형식이 있겠죠.

그렇다면 '안에 담아야 할 내용이 무엇일까?' '내용을 표현하는 적절한 형식은 어떻게 정할까? 등을 둘러싸고 다양한 이견이 발생할 수 있겠지만, 예란 '형식'과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두 가지가 적절히 호응할 때 '예의를 다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글쓴이께서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 옳고 그름의 여부를 따질 수야 없겠지만, 예를 둘러싼 다양한 논의들 속에서 특정한 관점 하나만을 취하셔서 일방적으로 평가하고 계신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은 듭니다. 가족과 친지의 죽음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반드시 슬픔이라는 감정이 생기지는 않을 것이며, 다양한 문화권 속에서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기도 할 것입니다. handak님이 잠깐 언급하신 것처럼 아내의 죽음에 북을 두드리고 노래를 불렀던 장자도 예를 어겼다고만 할 수 있을까요?

저 역시 지나치다는 생각도 들긴 합니다만, 나름대로 고인을 추모하는 형식이라고 한다면 용인해주지 못할 이유도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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