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올빼미 초창기 시절, 동북아 철학 전공자분들과 선진, 특히 맹자의 수행법을 가지고 핑퐁을 한 적이 있었다. 아주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내 해석은 영미권에 가까운 편이다. 영미권에 가깝다 함은, 선진 특히 맹자 해석에 있어서 후대에 이루어진 성리학적 해석과 거리를 두고, 당대에 있었던 묵가 등 다른 학파와의 유사성을 더 강조하는 방향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각자의 입장과 근거가 있을 것이다.
이 이야기를 끌어온 것은, 개인적으로 맹자가 사람을 도덕적 인간, 즉 군자로 만들기 위해 수용했던 방법 중 하나에 대한 해석을 제시하기 위해서이다. 특히 사람들이 잘 아는 성선설-사단-유자입정과 관련된 부분이 아닌, 도덕적 추론(moral reasoning)과 관련된 부분이다.
구절은 [양혜왕 상 1-7]이다. (집에 있는 홍익출판사, 박경환 본이다.)
(앞서 제사에 제물로 바치려던 소를 왕이 살려주었던 일화를 말했다.)
맹자가 말했다.
"그런 마음이라면 통일된 천하의 왕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백성들은 모두 왕께서 소 한 마리가 아까워서 그랬다고 하지만, 저는 왕께서 끌려가는 소의 모습을 차마 볼 수가 없어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왕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중략) 그 소가 두려워 벌벌 떠는 것을 마치 아무런 죄도 없으면서 사지에 끌려가는 것 같아서 차마 볼 수 없었기에 양으로 바꾸라고 했던 것입니다."
(중략)
(이제 소를 애처롭게 여기는 마음이 곧 백성을 잘 돌볼 수 있는 능력이며, 왕이 천하를 가질 수 있는 능력이라 맹자는 역설한다.)
나는 맹자의 이 방법이 일종의 유사-칸트적 설득이라 느낀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은 모순된 믿음을 가지지 않고, 어떻게든 이를 해소하려는 논리적 규범성을 가진 듯하다. 맹자는 왕이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이러한 논리적 모순 상황을 지적함으로서, 왕이 도덕적 행동을 하도록 촉구하는 셈이다. (서양 철학적 구분에 따르면 믿음[belief]의 영향을 건드린 셈이다.)(물론 동시에 '왕이 천하를 가질 수 있는 능력'이라는 사실을 역설함으로서, 욕망[desire]의 측면 역시 자극한다. 맹자는 볼수록 말 하나는 끝내주게 잘하는 사람이다.)
맹자의 논변을 단순화해서 다음과 같이 도식화 해보자.
(i) 너(왕)는 소를 불쌍하게 여겼다. 왜냐하면 아무런 죄도 없으면서 사지에 끌려가는 것 같은 모습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단순화하자면, 윤리적 고려 대상으로 보았기 때문이라 해보자.)
(ii) 너는 소를 불쌍하게 여겼기 때문에, 이에 대한 도덕적 행동을 했다.
(iii) 따라서, 백성 역시 이러한 윤리적 고려 대상으로 느껴진다면, 너는 이에 대한 도덕적 행동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모순이다.)
[양혜왕 1-7는 이보다 훨씬 복잡하다. 뒷 부분에서는 맹자의 유명한 '불능'-'능' 논변도 나오고, 항심 논변도 나온다. 그리고 한문의 애매성 때문에 '할 수 있다'의 번역인지 '해야 한다'의 번역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1-1)
내가 이 방식을 유사-칸트적이라 한 이유는, 칸트-롤즈를 재해석하면서 도덕적 행위의 동기에 있어서 실천적 이성(pratical reasoning)을 강조하는 그룹의 논변과 이 논변이 작동하는 방식이 유사하기 때문이다. (물론 여러 측면에서 다르기도 하다.)
나는 이 논변과 믿음-실천 이성이 동기로 작용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별 문제가 없다 여긴다. 다만 이 방법이 '절대적'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
(a) 이 형태의 도덕적 추론은 너무나 쉽게 손상될 여지가 있다. 이 논리적 모순이 굳이 '도덕적 실천'이라는 행동으로 해소될 필요가 없어 보인다. 예를 들어, 우리는 여러 다른 믿음을 수용함으로서, '백성이 소와 같은 윤리적 고려 대상이 아니다.'라는 '변명'을 할 수도 있다. 아니면 모순이기지만 일종의 '판단 중지'를 통해 모순을 해소하지 않으려 할 수도 있다. (즉, 이게 모순으로 느껴지는 이유를 인지자 자신이 가진 한계에서 찾는 것이다. 논리적 모순이 아닌, 세상을 명제로 변환할 때 잘못된 번역을 한 것으로 여기는 셈이다.)
(b) 설사 이 모든 변명과 판단 중지가 생기지 않고, 도덕적 행동을 해야한다는 믿음에 도달했더라도, 우리는 실제 행동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있다. (난 의지박약을 전적으로 신봉한다.) 물론,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불편함 혹은 죄책감을 가지겠으나 뭐, 실제 행동은 하지 않을 수 있다 여긴다.
이것이 언젠가, 도덕에 있어서 '변명'이라는 테마로 내가 써보려고 했던 아이디어의 기본적인 얼개다.
(2)
실천적 추론(pratical reasoning)과 논리적 추론은 같은 추론이지만 굉장히 다른 형태처럼 느껴진다. (굳이 이론적 추론으로 하지 않은 이유는, 과학적 추론은 논리적 추론과 실천적 추론의 중간 형태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주 단순한 구분부터 해보자. (a) 실천적 추론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추론이라면, 논리적/이론적 추론은 '무엇이 참인지'에 대한 추론이다. (b) 모든 추론은 다음과 같은 요소로 이루어진다. (x) 전제 (y) 추론의 규칙 (z) 결론
(i) 실천적 추론과 논리적 추론의 첫번째 차이는 (x) 전제에 있어 보인다. 논리적 추론의 전제는 (유사)언어학적 명제로 의미론적 정보값을 가진다. 따라서 전제를 이해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두 종류의 값만이 가진다. (마치 믿거나 믿지 않는 것처럼.)(물론 이 명제에는 여러 애매성이나 모호성의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어쨌든 의미를 이해하는데는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한편 실천적 추론에 있어서 전제는 상황 그 자체다. 문제는 이 상황은 명제와 다르게 '분할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지금 상황이 어떠한 실천적 상황인지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따라서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할 수 있다.) 예컨대, 내가 카페에 앉아있다 해보자. 우리는 이 상황에 대한 다양한 정보들을 무엇에 주의집중(attention)에 따라 다르게 분할한다. 내 옆에서 대화하고 있는 사람들은 사실 납치범과 피해자의 관계였고, 내가 만약 주의 집중(attention)을 한다면 알 수도 있었다. 또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에게 집중하거나, 내 눈 앞에 있는 텍스트에 집중하거나 하는 등등에 따라 이 상황에 대해 얻는 정보값은 다 달라진다. (유비적으로 보자면, 믿고-믿지 않고의 형태와 대비되는 믿음의 정도에 따른 믿음으로 볼 수도 있어 보인다.)
(ii) 아마 이번 견해는 더 논쟁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 내가 볼 때 실천적 추론은 (z) 결론들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는 점에서 논리적 추론과 차이가 있어 보인다. 논리적 추론에서 우리는 (x) 전제와 (y) 추론의 규칙을 안다면, (z) 결론을 모르더라도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실천적 추론은 그러한가? 그러지 않다 생각된다. 우리는 (이미)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들, (z) 결론들을 이미 알고, 이에 대한 평가 - 추론의 규칙을 통해 이 중 하나를 선택하는 듯하다.
예컨대, 심장 마비에 걸린 사람이 있다. 우리가 CPR 방법을 모른다면, 우리는 애당초 적절한 '실천적 추론'에 실패할 것처럼 보인다. (아마 행위자는 자신이 가진 정보의 한정성에서 최선의 답을 찾고자 할 것이지만, 이게 이상적인 최고의 답은 아닌 셈이다.)
이 견해가 실천적 추론의 '어느 영역'에서 발생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실천적 추론의 '형이상학적 한계'인가? 아니면 '현실적 한계'인가? 달리 말해, 실천적 추론의 (ii)라는 차이는 인지적 정보값이 한정된 인간이, 불완전한 정보 상황에서 판단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인가? 아니면 완전한 인간이라도 이러한 한계에 부딪치는 형이상학적 한계인가?
음. 모르겠다. 지금은 일단 현실적 한계 상황에서 실천적 추론은 저렇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만으로 충분해 보인다.
(아마 이는 그동안 여러 방식으로 들었던 도덕 개별론에 대한 나의 [우회적인] 견해인 듯하다.)
(3)
(2)에 따르면, 도덕적 덕을 가진 이상적 행위자는 상황에 대한 주의 집중(attention)을 적절하게 해야 할 것이며, 상황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식도 풍부하게 갖춰야 할 것이다.
나는 사실 덕 윤리학에서 덕을 성향(disposition)으로 보는 것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성향으로 보지 않더라도 동기와 관련된 부분으로 보는 것도 딱히 좋아하지 않았다.
성향으로 본다면, 상황주의 논변에 꽤 난감한 상황에 처하는 것 같다.
성향은 마음을 가진 행위자든 그냥 물리적인 것이든 어떠한 조건 X에서 Y라는 반응/결과/변화를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이 100도에서 끓는 것과 아이가 우물에 들어갔을 때, 그걸 구하기 위해 사람이 뛰어드는 것을 동일한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전제하는 셈이다.
상황주의 논변은 사회심리학에서 나온 것이다. 그 유명한 스탠포드 감옥 실험 등에 따르면, 인간 행위자는 주어진 상황 압력에서, 개인이 가진 성격과 무관하게 상황 압력에 굴복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덕 윤리학은 피실험자들이 충분히 덕스러운 성향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라 역설할 수도 있다. 근데 그러면 이게 세뇌와 다를 바가 무엇이며 (즉, 개인이 어떠한 자발적 의지로 바꾸기가 어려운 영역), 지나치게 현실 인간에게 가혹한 기준, 일종의 성인(saint)가 되길 강요하는 것이 아닐까?
인간이 도덕적 행위자가 되지 못하는 것은, 동기의 문제가 아니라, 주의 집중과 지식의 결핍(주어진 상황에서 다른 현명한 해결책을 탐색해낼 지혜[practical wisdom]과 그러한 행동을 실제로 구현할 수 있는 노하우 지식)이 아닐까?
(물론 또다른 중요 요소는 자기 통제[self control]처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