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백가 연구에 있어서 '묵경'의 중요성

(1) 솔직히 난 제자백가 연구자들이 <묵경>을 읽지 않는 것은 직무유기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a) 춘추전국시대 문헌 중에서 '철학적 개념'들을 가장 엄밀하게 정의한 책이 <묵경>이며 (2) 묵가에 대해서는 공자/노자 이후 거의 모든 학자들이 잘 알았다는 점에서 그들이 <묵경>에서 정의된 용어를 사용한 것은 이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바탕으로, 책들을 겹쳐보면, 우리는 단순한 이해를 넘어선 심도 깊은 논의가 가능하다.

(2) 대표적 예시 두 가지를 보겠다. 하나는 <맹자>의 [이루 상] 7.17이다. 이 구절은 순우곤이 맹자에게 '도덕적 패러독스'를 제시하는 내용이다.

순우곤 : 남녀가 물건을 직접 주고 받지 않는 것이 '예'입니까?
맹자 : 예입니다.
순우곤 : 그러면 형수가 물에 빠진 경우, 손을 뻗어 구해줘야 맞습니까?
맹자 : 형수가 물에 빠졌는데 구하지 않는 것은 짐승입니다. 남녀가 서로 주고받지 않는 것은 예입니다. (허나) 형수가 물에 빠졌을 때, 손을 뻗어 구하는 것이 권(權)입니다.

여기서 권은 보통 '저울질'로 번역된다. 그리고 이렇게 번역해도 내용은 잘 이해된다. 허나 이 권에 대한 <묵경>의 정의를 참고하면, 우리는 보다 깊은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

<묵경>의 [대취]에 권(權)은 다음과 같이 정의되어 있다.

권(權) : 권은 바른 것을 위한 것도 아니며 바르지 않은 것을 위한 것도 아니다. 권이란 '올바른' 기준이다. 손가락을 잘라 팔을 보존했다면, 이로움 가운데 큰 것을 취함이요, 해로움 가운데 작은 것을 취함이다. 해로움 가운데 작은 것을 취했다면, 해로움을 취한 것이 아니고 이로움을 취한 것이다.

달리 말해, 권은 항상 올바른 정답이 아닌, 나쁜 것들 사이에서 차악을 고르는 방법인 것이다. 이 권의 용법을 통해 우리는 맹자가 왜 이 상황에서 '권'을 말했는지 보다 명확히 알 수 있다. 형수를 구하는 것이 예의 이상적 상황은 아니지만, 주어진 상황에서는 가장 '의로운' 행위라는 것이다.

(참고로 <맹자>에서는 이렇게 숨겨진 묵가적 용어들이 꽤 많다. 추도 그렇고, 변도 그렇다.)

(3) 다음 예시는 <장자>의 [제물론]이다.

말이란 단순히 숨을 내쉬는 것이 아니다. 말은 무언가를 말한다. 다만 말하는 바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말하는가? 아니면 말하는 바가 전혀 없는 것인가? (중략)
어떤 사물도 '저것'(彼)이 아닌 게 없고, 어떤 사물도 '그것'이 아닌게 없다. (중략)
'저것' 또한 그것이고, 그것 또한 저것이다.

<장자>의 이 구절은 단순한, 어떤 회의주의에 대한 표명 혹은 언어에 대한 불신으로 해석될 것이다. 허나 마찬가지로 <묵경>을 거치면 우리는 보다 명확히 이 비판 지점을 이해할 수 있다.

<묵경>의 [경][경설 상]에 피(彼)는 다음과 같이 정의되어 있다.

피 : 두 가지(시/비 - 그것이다/그것이 아니다) 다 옳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한 마디로, 피는 사물을 지칭함에 있어서 적어도 '그것'이든 '그것이 아니든'이 가능해야한다는, 지칭의 기본적인 조건을 가리킨다.
이를 통해서 본다면, 장자는 이 지칭 자체가 불가함을 지적하는 부분으로 [제물론]을 독해 가능하다.

(참고로 정확히 이 독해가 무엇인지는 여전히 어려운 난제다. 당장 묵가에서도 이 부분이 명확히지 않고, 따라서 이 부분을 통해서 장자를 읽는 것 역시 어려운 일이다. [묵가를 통하지 않고 읽는다고 하더라도, 장자의 제물론은 명확히 읽기 어려운 부분이다.])

(4) 이처럼 <묵경>을 거쳐서 읽는 제자백가 문헌들은 보다 심도 깊은 해석을 가능케한다. 난 학자들이 이 가능성을 놓친다는 게 너무 아쉽다. 특히 <묵경>이 이런 식으로 쓸 수 있는 유일한 문헌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최초의 한문 사전인 <이아>도 <묵경>보다 늦으며, 대체로 고유명사와 동의어에 집중하고 있어서 정확한 의미 파악도 어렵다. 철학 사전의 경우, <묵경> 이후 <묵경>의 영향 아래에서 <순자><시자><할관자> 등이 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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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묵경』은 전기묵가와 후기묵가의 저서를 구별하기 힘들지 않나요?
  2. 『묵경』에서 제시한 개념 이해를 당대의 지식인들이 공유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나요? 예를 들어 권權이라는 용어는 『논어』에도 제시되어 있는데 『논어』의 '권' 역시 묵가적 용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이런 2가지 지점에서 『묵경』의 개념어를 이해하는 것 자체는 중요하더라도 이를 다른 학파의 텍스트에 적용하는 것은 조심스러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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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기 묵가와 후기 묵가의 구분이 여기선 의미가 없는 지점이, 공자 - 노자 - 양주 이후의 문헌이라면 이미 전기 묵가가 후기 묵가로 이행된 후의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앞선 글에서도 언급되었지만, 공자 - 노자 - 양주에 묵가적 내용을 적용하는걸 주장하는건 아닙니다. 아마 이들보다 묵가가 나중에 나왔을텐데, 학파도 다르고 여러보로 무리가 있다고봅니다.)

시기적으로도 <맹자>에 묵가로 나오는 이지와 고자 모두 유가와 어느정도 섞인 주장을 하고 이게 묵가의 3파 분화 이후 후기 묵가의 내용이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1-2) 그리고 글에는 언급되어있지 않지만, 저런 정의가 명확히 나오는 경, 경설 상하, 대취, 소취는 흔히 후기 묵가로 구분됩니다. 전기 묵가와 후기 묵가의 차이가 사실상 이 인식론적/논리적 방법의 유무가 가장 핵심이라는 점에서, 전기 묵가는 사실상 무시해도 된다고 보여집니다.

(2) 그리고 적어도 맹자 이후 문헌에 (후기) 묵가 내용을 적용하는게 문제가 없는 이유는, 그들이 묵가를 어느정도 공부했으며, 묵가의 용례대로 개념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윤리적 개념 정의인 인이나 의, 애에 대해서는 다르지만, 적어도 인식론 - 언어철학적인 술어들에 있어서는 동일한 의미로 사용합니다.)

맹자에서 맹자 본인이 직접 세상을 양분한건 묵가와 양주이고, 묵가를 공부하면 양주로 넘어가고 그러다가 결국 유가로 넘어온다는 언급을 합니다.
또한 맹자의 고자와의 논변이라든가, 이지의 후장에 대한 지적을 보았을 때도, 맹자가 묵가에 대한 이해가 어느정도 있다고 가정해도 별 상관이 없어 보입니다.

(또 양혜왕 상에 할 수 없음에 대한 구절에서도, 산을 들고 갈 수 없다였나...그 인용도 기실 묵경 전반부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맹자가 묵가와 동일한 개념을 동일한 방식으로 쓰고 있다면, 적용에 무리가 없다고 봐야하지 않을까요? 제가 제시한 권이라든가, 니비슨 이후 서양학계에서 지속적으로 주목하는 [양혜왕 상]의 추 개념 역시, 맹자는 묵가의 추 개념과 동일한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3) 물론 모든 개념을 묵가적으로 해석하는건 오류일겁니다. 다만 인식론적 개념에서, 그것도 묵가를 잘 알았다고 가정하는게 타당해보이는(이 사실 제자백가 핵심 사상가들이죠. 맹자, 장자, 순자) 학자에게 묵경의 정의를 통해서 연구를 심화시키는건 유용한 수단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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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저는 선진제자 전공자는 아니지만, "특정 철학자 혹은 사상가가 어떠한 개념으로, 정확히 무엇을 나타내고자 했는가?"를 주된 질문으로 삼아 연구한다 하더라도,

이라는 점에서, 맹자가 사용한 權 개념에 묵자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약간 과도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단적인 예로, 저는 누군가가 특정 개념에 부여한 내용을 비판하며, 그 개념으론 그러한 내용을 담지 못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기 때문이죠. 물론 맹자의 權 개념을 묵자식의 이해를 바탕에 깔고 독해하면,

이와 같은 효용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이해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얘기는 달라질 것입니다. 이 경우에는, 묵경을 거쳐서 읽는 것이 맹자의 원의에 보다 접근하는 길일 수 있다는 점이 아니라, 그러한 독해로부터 얻는 효용이, 그렇게 읽어야 할 당위성을 말해줄 것입니다.

만달라 님은 글에서, 이 두 가지("맹자의 원의는 정확히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이해)를 추구하는 방향, "효용"을 추구하는 방향)를 모두 언급하셨는데, 제 생각으론, 물론 이 두 가지가 '우연적으로' 같이 갈 수도 있겠지만, 이 두 방향이 서로 다른 목적을 향하는 이상, 결국에는 갈라지는 지점이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이럴 때는 어느 한 방향을 선택해야 하고, 두 방향 모두를 택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두 방향이 서로 다른 지점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혹시 이렇게 두 방향이 '충돌'할 여지, 내지는 가능성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리고 이렇게 충돌할 때, 어떻게 하는 것이, 내지는 어떤 방향을 취하는 것이 좋다고 보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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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전 맹자 관련된 글에 대한 제 댓글에서도 아실 수 있겠지만, 적어도 맹자의 지성적 측면을 가리키는 용어(권, 추)에서는 묵가적 적용이 원의와 효용 모두에서 동일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텍스트적 비약을 피할 수는 없지만, 맹자 텍스트 내에서 권이나 추의 (묵자의 정의만큼이나) 일상어를 넘어선 해석을 찾아내가 어려워 보이기 때문입니다. (제 기억으로는 맹자가 양혜왕 마지막에서 꽤 강조하듯 사, 권, ,추 등을 언급하지만 이 용례가 각자 한두번 많아야 세네번 스쳐가듯 언급되는 걸로 기억합니다.)
(뭐 물론 과잉해석일 수도 있습니다만...@.@)

(두서가 없긴한데, 결국 이 적용에 대한 반박은 그저 과잉해석의 여지가 있다 정도 아닌가, 하는게 제 생각입니다. 왜냐면 맹자 텍스트에서 벗어난 자료로 해석하는거니깐요. 다만 이 적용이 (1) 역사적 배경에서도 잘 부합하고 (2) 실제 단어 용례에서도 맞다면, 이걸 틀린 해석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덤으로 앞선 댓글에서도 지적했다시피, 맹자가 묵가를 꽤 잘 알았다고 생각할 근거들도 텍스트 내에 남아있고요. 장자의 경우도 제물론 파트에서 자기가 직접적으로 유묵을 비판한다면서, 묵가적 개념어들을 비판하고요. 순자 역시 정명과 예론, 악론 등의 파트에서 묵가에 대해 꽤 정확히 표현합니다.)

(2) 두 방향성이 충돌한 여지가 있을까요? 왜냐면 윗 댓글에서 말했듯, "묵가가 윤리학에서 쓰던 용어 정의로 딴 텍스트를 보자!"라기보단 "묵가가 제일 잘했고, 아마 이들의 용어를 차용한듯한 제자백가 텍스트에서, 인식론적/논리학적 개념들을, <묵경>에 있는 보다 심화된 정의를 통해서 이해해보자." 정도인데

이 해석이 충돌이 있을만한 구석이라면 인식론적 - 언어철학적 - 논리학적 케이스에서 같은 단어를 쓰지만 다른 의미로 쓰일 경우일텐데...흠....
우선 완전히 다르게 쓰일 경우라면, 당연히 묵가의 용어로 해석하지 않겠죠.
다만 미묘하게 다르다, 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죠. (이 경우, 과잉해석이다라고 볼 여지도 있겠죠.) 근데 적어도 제가 본 제자문헌 중에서선 별로 없다고 느껴집니다.

(3) 증명하긴 어렵지만, 전 사실 묵가의 논리학적 술어들이 비단 '묵가만의 사상'이었다기보단 당시 여러 제자백가들이 공유하던 술어가 아닐까, 라고 생각합니다. (기실 묵가 자체도 공자가 사용한 개념들을 심화시켜서 정의한 것에서 시작한 것이기도 하고요.)
예를 들자면,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이 비단 페리파토스 학파만의 사상으로 취급되지 않고 당대 모든 학파가 공유하던 도구였던 것처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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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 해석학 전공자이지만, <묵경>에 이렇게 자세한 개념 해설이 있는 줄은 처음 알았네요;; 이후에라도 선진철학쪽 책을 읽게 되면 꼭 <묵경>을 참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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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게 잡담에 적다보니 가벼운 맘으로 써서 논지가 좀 부정확하게 전달된거 같습니다. 참고하셔도, 윤리적 개념어들은 좀 걸러보시고, 논리적/인식론적 술어들만 자세히 보세요.
참고로 엄청 파편적이고 단편적이라 주석 빼곡한 한길사판 묵경이 읽기 가장 나을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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