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계적 변명으로서의 도덕?

(0) 요근래 생각하고 있던 몇 가지 윤리학적 개념들에 대한 정리? 낙서입니다. 사실 정확히 어느 분야에 해당할지도 모르겠고, 관련된 정확한 용어들도 모르겠고, 선행 문헌도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렇습니다.

(1) 기본적으로 도덕이란 (a) 특정한 상황에서 (b)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c) 옳은 것인지 묻는 질문/학문이다. 이 정의에 대해서는 대다수 사람들이 별 문제 없이 수용할 것이라 생각한다. 쟁점은 각 부분들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일 것이다.

(2) 규범윤리학/메타윤리학에 있어서, 가장 치열하게 논쟁을 벌였던 부분은 (c) '옳음'이란 도대체 무엇인지 일 것이다. 하지만 내 질문은 이를 살짝 빗겨 나가있다. 내가 볼 때, 우리가 아무리 (c)에 대한 합의에 이른다 해도, 우리는 윤리적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a)와 (b)가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있기 때문이다.

(3) '옳다'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특정한 상황에서 특정한 행동에 대해 적용되는 평가다. 문제는 이 범위가 한정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내가 X를 죽였다고 해보자. 이 행동은 일반적으로 도덕적이지 않다. 이제 이 상황의 범위를 넓혀보자. X가 미래의 연쇄살인범이 되는 것을 내가 알았기 때문에 죽였다고 하자. 그럼 이 상황은 (트롤리 문제 같은) 윤리적 딜레마 상황으로 바뀐다. 한 번 더 가정해보자. 이 미래의 연쇄살인범이 죽인 피해자 중에, 대량학살을 저지르는 미래의 독재자가 있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내가 연쇄살인범을 죽인 행위는 곧 독재자를 살려놓는 행위가 된 셈이다. 이는 한층 더 복잡한 윤리적 딜레마로 사람을 몰아넣는다.

(3-1) 이런 극단적인 예시를 배제하더라도, 일상적인 상황에서도 이러한 범위의 모호성은 지속된다. 계속 지각하는 친구가 있다고 해보자. 이 친구가 이번에도 지각할 경우, 수업에서 지나친 결석으로 F를 맞는 상황이라 해보자. 난 이 친구를 도와서 대리 출석을 해줘야 하는가? 이 행동의 '옳음'을 평가할 관점은 내 생각에는 적어도 3가지 측면은 존재할 수 있다.
(i) 친구가 F를 받지 않게 도와줬다는 점에서, 그것은 옳다.
(ii) 친구가 요청하지 않았던 일을 했다는 점에서, 그것은 옳지 않다.
(iii) 뭐가 되었든, 거짓말을 했으므로 그것은 옳지 않다.

(3-2) 결국 내가 말하려는 핵심은 이렇다.

(i) 도덕이란 (a) 특정한 상황에서 (b)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c) 옳은 것인지 묻는 질문이다.
(ii) (옳음이 무엇인지 자체는 차치하더라도) 이 옳음은 맥락(context sensitive)이 있어야 하는데, 이 맥락은 상황의 범위라던가 상황의 측면에 있어서 정확히 경계 지을 수 없는 모호성(vagueness)을 가지고 있다.
(iii) 그러므로 도덕적 판단이란 언제나 (부분적으로) 실패할 수 밖에 없다.

(4) 전지/전능한 신이 아닌 이상, 우리의 도덕적 판단은 언제나 실패한다. 모든 맥락의 '옳음'을 측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특정한 상황이 윤리적인지 조차 문제가 될 수 있다. 윤리적 고려의 범위에 논쟁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줄기 세포, 동물, 식물, 생태계 혹은 미래 세대. 이들은 윤리적 고려의 범위 안에 있는가? 있다면, 우리가 윤리적으로 문제 삼지 않는 여러 일상적 활동들조차, 사실 윤리적 상황일 수 있는 셈이다.

(5) 언제나 실패하는 도덕적 판단을 해소할 방법이 무엇인가? (이 질문이 어떠한 사실의 기술을 목표로 하는지, 아니면 규범적으로 마땅히 해야 된다는 주장인지 나조차 모호하다.)

나는 일종의 변명이라 생각한다. "살인은 안 된다."라는 이상적인 도덕적 명제는 "하지만 지금은 상대방이 날 죽이려고 하는 상황인지 살인으로 이 상황을 벗어나야 한다." 아니면 "상대방은 최악의 학살자이니 살인으로 그 참사를 막아야 한다." 등등의 변명을 통해, 예외 상횡이 설정된다.

[적어보니 위의 언급했던 아이디어와는 결이 다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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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명료해서 재밌게 읽었습니다 :slightly_smiling_face: 제가 예전에 정언명령을 접했을 때 들었던 모호한 의구심이 이거였다는 생각이 드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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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및 (3-1)은 사실 특정한 규범 윤리 이론의 문제 같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그 대답이 만족스러운지 여부는 매우 의심스럽습니다만) 칸트 본인의 이론 같은 경우에는 각각 '결과는 어찌되었건 아직은 죽이면 안된다', '거짓말을 했다는 점에서 그르다'라는 명쾌한 답을 제시할 것 같습니다.

전지/전능한 신이 아닌 이상, 우리의 도덕적 판단은 언제나 실패한다. 모든 맥락의 '옳음'을 측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적해주신 부분은 근본적인 문제임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메타윤리적 객관론자들은 이러한 인식적 문제가 도덕적 판단만의 문제는 아니라 항변할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과학적 판단도 비슷한 문제를 겪는다고 볼 여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전지/전능한 신이 아닌 이상", 구체적인 상황에서 내놓은 과학적 판단이 무오하다고 보는 것은 되려 과학적 이상과 배치된다는 견해도 있을 법 합니다.

물론 과학적 판단과 비교해봤을 때, 도덕적 판단은 잘 알려진 다양한 메타윤리적 문제에 직면합니다. 다만

상황의 범위라던가 상황의 측면에 있어서 정확히 경계 지을 수 없는 모호성(vagueness)

라는 문제에만 국한해 보았을 때는 도덕적 판단이 아닌 다양한 인식적 맥락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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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후한 평가 감사드립니다.

(1) 저도 쓰면서도 이건 지나치게 내(가 옹호하는 규범윤리적) 입장에 입각한 이야기 아닌가, 라는 의문을 가지고 있긴 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의무론보다는 결과주의를 좋아하는 편입니다.) 그러다보기 예시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옳음"과 "좋음"이 어느정도 상호 대체가 되는 (결과론 비스무리하게) 구성한 듯합니다.
이 부분은 제가 생각을 발전시킬 때, 고민해보도록 하겠습니다.

(2)

사실 이 부분은 정확히 무엇을 의도하신지 제가 파악하지 못해서 답변을 어떻게 남겨야할지 모르겠네요.

우선 (a) 제 글의 목적이 "과학적 판단" (혹은 다른 인식론적 판단들)과 대비되는 "도덕적 판단"의 특징을 정의하려는 시도는 아니였습니다. (b) 그렇기 때문에

은 저는 충분히 수용 가능합니다만.

(c) 이와

제가 언급했던 "도덕적 판단에서의 모호성"이 동일한지는 조금 고민해봐야 할 문제일 듯합니다. 이 문제는 아마 모호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가지고 있는 문제와 연관될 듯 합니다.

과학의 탐구 대상이 모호할 수 있다는 것은 저도 인정하는 바입니다. 고전적인 예시인 대머리만 해도, 그 경계를 결정 짓는 일이 모호하죠.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도덕적 판단에서의 모호성은 대략 두 가지 주장이 혼재되어 있는 듯합니다. (i) 맥락의 다원성. 즉 같은 상황에 대해서도 우리는 어떠한 가치를 추구하느냐에 따라, 여러 경합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듯합니다. (물론 여러 규범 윤리학자들은 이 중 어느 가치가 더 중요한지 각기 다른 이유로 각기 다른 주장을 할 수 있지만요) (ii) 무엇이 도덕적 상황인지 판단할 수 없는 모호성.

(i)에서 과학과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역시 고전적인 가치 주장일 듯합니다. 과학은 반증이 되든 어찌되든, '사실'을 기반으로 가장 그럴듯한 견해로 합의를 볼 수 있지만, 도덕의 문제는 가치의 문제인 이상 그러한 합의가 어려워 보이긴 합니다.
(ii)는 사실 좀 더 미묘한데, 제 직관에 따르면 이와 같은 차이로 보입니다. 대머리의 예시로 돌아와 봅시다. 대머리라는 것이 보더라인 케이스가 존재하는 모호한 것이지만, 이 대머리를 '어떻게' 연구할 것인지에 대해서 착오 있기 어려워 보입니다. 대머리라는 생물학적인 현상을 연구하는 이상, 생물학적 방법을 쓰지 수학적 방법을 사용하진 않을 것처럼 보입니다.
반대로 도덕적 판단은 이 "어떻게" 연구할 것인지에 대해 일종의 착오가 생기는 듯합니다.

즉, 무엇을 윤리적 고려의 대상으로 삼을지에 따라서, "도덕적 판단"이라는 방법의 대상이 되는 범위가 모호하다고 전 여깁니다. (과학적 판단의 모호성보다는 좀 더 메타적인 층위 아닐까, 저는 생각하는 듯합니다.)

(3) 학부나 대학원 때 제대로 된 윤리학 수업을 듣지 않은 거 좀 아쉽네요. 특히 제가 적절한 용어나 논증을 쓰고 있는지 잘 모르겠는 지금 같은 상황이면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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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 비판적인 제언을 남깁니다.
우선 “도덕적 판단이 실패한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더 명확해졌으면 좋겠어요. 어떤 도덕 판단 a는 참이 아니라는 것인지, 아니면 도덕 판단이 실천적으로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인지 불명확합니다. 전체적으로 도덕 판단의 이론적 영역과 실천적 적용의 영역을 구분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다음으로 (i)과 (ii)에서 (iii)이 도출되지 않습니다. 행위자와 행위의 상황 의존성이 도덕 판단의 참이나 거짓을 가른다는 결론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이미 도덕 내지 윤리 개념에 있어 많은 것들을 전제해야만 합니다.

끝으로 이와 관련된 현대 윤리학의 논쟁을 하나 참조하시길 권합니다. McDowell이 70년 대에 아리스토텔레스 윤리 담론을 끌어와 도덕원리 없이도 성립 가능한 윤리학을 논한 뒤로 이 입장은 도덕 개별론(moral particularism)이라는 이름으로 David McNaughton, Jonathan Dancy 같은 사람들에 의해서 발전되었어요. 이 입장이 애초에 도덕 원리에 입각한 윤리학적 입장인 도덕 일반론(moral generalism)을 공격하면서 나온 터라 두 입장 간의 메타윤리학적 논쟁이 꽤나 있었습니다.

이 입장도 스펙트럼은 다양한데요. 주요 주장을 간략히 말씀드리면 보편적으로 타당한 도덕 원리는 없다는 쎈 주장, 도덕 원리 없이도 윤리적 판단은 상황에 대한 지각을 통해가능하다는 인식론적 주장, 도덕 원리는 실제 행위에서 쓸모없거나 심지어 방해된다는 실천론적 주장 등이 있습니다.

끝으로 종합적으로 다시 위 코멘트에 연결하자면, i-iii의 논증은 도덕 보편론 비판 논지이긴 한데요. iii 자체는 도덕 개별론도 받아들이지는 않겠지요.

조금의 도움이라도 됐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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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음이 아린 것을 보니, 훌륭한 비판적 제언 같습니다. 이리 부족한 글에 좋은 답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 그래도 몇 가지 답변을 드리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i) 우선 전 도덕 판단 자체가 참/거짓의 문제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러면 메타윤리학적으로 비-인지주의던가요?)
(ii) 그리고 이 주장 자체는 (제 메타윤리학적 입장과 별개로)(와일드버니님과 alektryon님의 댓글을 보고 고민하니) 실천적 영역의 주장에 해당할 것 같습니다. 무엇이 옳은지 (혹은 좋은지) 우리는 알지만, 그걸 어떠한 실천의 차원으로 '추론해 나갈 때', 언제나 최선의 답을 찾기는 어렵다는 생각입니다. (이렇게 보면 moral reasoning의 문제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iii)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도덕 판단 속에 존재하는 '좋음' 등의 가치(value)가 저는 '무엇이 적절한지'(fitting)에 관한 문제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적절성이라는 것은 언제나 맥락을 전제해야 하는데, 한 상황에서 그 맥락이 '지나치게 다양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특히 도덕적 판단의 상황에서는 말이죠.)

그렇기에 가장 '적절한' '좋은' 행동을 추론해서 실천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굉장히 어렵다 결 내렸고, 이를 "도덕적 판단이란 언제나 부분적으로 실패할 수 밖에 없다."라는 워딩으로 표현한 듯 합니다.

(iv) 나아가, 제가 가장 문제적이라 여기는 부분은, 도덕적 지위를 가지는 대상의 범위가 논쟁적이라는 점 때문입니다. 인간은 역사적으로 많은 대상들이 도덕적 지위를 가지지 않는다 여겼습니다. (노예라던가, 게이라던가 등) 또한 오늘날에도 도덕적 지위를 가지는 대상의 범위를 넓히려는 시도는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동물뿐 아니라, 줄기세포, 지구 그 자체, 생태, 나아가 미래 세대까지.)

이렇게 윤리적 고려 대상이 확정되지 않는다면, 사실 우리에게 (도덕적 원칙이 존재하고, 이를 개별 사태에 적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더라도. 아니면 개별론처럼 개별 사태마다 잘 처리할 수 있는 도덕적 능력이 있더라도) 실천적 영역에서 도덕은 사실상 실패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자연)과학에 비유하자면, 과학적 방법론도 다 있고 그런데 제가 탐구해야 할 것이 실제 이 세계에 존재하는 물리적인 것인지 아니면 유령처럼 실체가 없는 것인지 알 수가 없는 상황에 처해 있는 셈인거죠.

(v) 사실 도덕 일반론이나 도덕 개별론은 딱히 이 주장에서 고민했던 바는 아닙니다. (물론 제 개인적인 입장은 도덕 개별론에 가깝습니다.)

(3) 번외이지만, 삭제하신 크리톤 해설이 어떠한 내용이었는지 매우 궁금하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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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아리게 했다니,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기쁘게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만약에

는 근거로

는 주장이라면, 이것은 윤리학적으로 큰 의미는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실은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사소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학적으로 이를 다루는 것은 많은 윤리학자들에게 시작점이지 결론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극단적인 도덕 상대론이나 도덕 회의주의가 아니라면 말입니다. 플라톤 형님 오랜만에 불러보겠습니다.

ὅτι νόμος οὐκ ἄν ποτε δύναιτο τό τε ἄριστον καὶ τὸ δικαιότατον ἀκριβῶς πᾶσιν ἅμα περιλαβὼν τὸ βέλτιστον ἐπιτάττειν: αἱ γὰρ ἀνομοιότητες τῶν τε ἀνθρώπων καὶ τῶν πράξεων καὶ τὸ μηδέποτε μηδὲν ὡς ἔπος εἰπεῖν ἡσυχίαν ἄγειν τῶν ἀνθρωπίνων οὐδὲν ἐῶσιν ἁπλοῦν ἐν οὐδενὶ περὶ ἁπάντων καὶ ἐπὶ πάντα τὸν χρόνον ἀποφαίνεσθαι τέχνην οὐδ᾽ ἡντινοῦν.
법은 결코 모두에게 동시에(pasin hama) 최선의 것(to ariston)과 가장 올바른 것(to dikaiotaton)을 정확하게(akribôs) 포함하면서도 가장 좋은 것(to beltiston)을 명할 수 없기 때문이양. 왜냐면 사람들과 사건들의 비유사성, 그리고 말하자면 인간적인 것들의 어떤 것도 결코 쉬지 않음이, 무슨 기술(technê)이 됐든 그게 하나의 간단한 것을 모든 것들에 있어 모든 때에 선언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당. Plt. 294a-b.

πῶς γὰρ ἄν τις ἱκανὸς γένοιτ᾽ ἄν ποτε, ὦ Σώκρατες, ὥστε διὰ βίου ἀεὶ παρακαθήμενος ἑκάστῳ δι᾽ ἀκριβείας προστάττειν τὸ προσῆκον; Plt. 295a-b.
도대체 누가, 소크라테스(동명이인)야, 사는 내내 항상 각자 옆에 앉아서 마땅한 것(to prosêkon)을 정확하게 말해줄만큼 유능하게 될 수 있겄어?

이런 실천적 문제를 차치하고서 다른 윤리적 문제를 다루기 위해 요즘은 제가 보기에는 대충 이상적 도덕행위자를 가정하거나 완전한 정보 상태(full information theory)를 가정합니다. 물론 이것 자체도 논쟁적입니다. 다만 이런 식으로 우리가 실행에 있어서, 행위에 있어서 만나게 되는 불완전함을 차치하고 다른 윤리적 구조와 문제들을 다룰 수 있게 되지요.

다시 원래 논증으로 돌아가서, (iii)의 결론이 전제들로부터 도출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예로서 도덕 개별론을 조금만 더 상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보통 도덕 개별론자들은 맥락을 하나의 변수로 취급합니다. 그리고 이 변수에 편입되는지 되지 않는지를 가르는 또 다른 변수를 도입합니다. 그리고 이 변수의 규준은 어떤 도덕 원칙이 아니라 상황에 대한 행위자의 도덕적 인지 능력입니다. 말하자면 '이 상황에서는 이 사실을 고려하고 저 사실은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각한다고요. 우리에게는 익숙하게도 눈치라는 표현이 있죠. 그런 비슷한 능력을 가정합니다. 따라서 이 이론에 따르면 (i)과 (ii)를 가정하더라도 (iii)이 따라나오지는 않습니다. (이 이론이 가지는 엄청난 결함 때문에 저는 이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래도 얼마간 설명력은 있고 따라서 설득력이 없지는 않다는 것도 부정하기는 힘듭니다. 그러니 논쟁이 시작됐겠지요.)

(ii)를 조금 더 논증하시면 가능할까요? 즉 맥락의 복잡성(혹은 말씀처럼 모호성)이 결코 단순한 명제들로 치환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앞서 말했던 것처럼 이상적 도덕행위자나 좋음에 대한 완전한 정보론을 비판하시게 될 것 같습니다. 그것도 아니라면 도덕 개별론의 지각 이론을 비판하시고 그 후에 아마도 상대론이나 회의주의를 주장하시면 설득력있고 내실있는 주장이 될 것이라 사료됩니다.

이번에는 기분 좋으셨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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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첨언하자면 말씀하신 "도덕적 지위를 가지는 대상의 범위"에 대한 문제도 도덕 개별론자들에겐 큰 문제가 되지 않겠지요. 그들은 "지금 맥락"에서는 예를 들면, 복날의 삼계탕 집 앞에서는 닭의 행복은 고려치 않는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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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리고 크리톤 해설은 아주 예전에 이 커뮤 처음 왔을 때 해볼까 하고 몇 문장 써놨다가 치워둔 것이랍니다. ㅋㅋㅋ 제가 폰을 잘 다룰 줄 몰라서 다른 글 쓰다가 그걸 올려버렸지 뭐에용. 아마 완성될 일이 있을까 싶습니다. 바빠도 너무 바쁘네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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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세한 답변 감사드립니다. 마음이 아리다는 건, 제가 어찌 반박하지 못할만큼 좋은 비판을 해주셨다는 의미이니 미안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런 비판을 해주시는 것 자체가 귀찮은 일이고, 전 귀찮은 일을 해주셨다는 것 자체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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