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미권 윤리학의 (대략적인) 역사 비스무리한 것

(0) 매우 개인적인 취미 생활로 만든 정보의 덩어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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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영미권이 곧 분석철학을 말하는 것이니, 시작은 분석 철학의 발흥지인 영국이 되는 것이 맞아 보인다.
그리고 윤리학에서만큼은, 조지 에드워드 무어(G.E. Moore, 1878-1958)이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게 옳아 보인다. 무어의 영향력은 결국 "열린 질문 논증'(Open Question Arguments)로 귀결된다. 즉 '좋음'이라는 윤리학의 가장 중요한 개념은 딱히 분석적으로 다른 개념들로 환원되기 어려워 보인다는 점이다.

이 질문은, 형이상학을 대체로 부정하는 논리실증주의와 결합될 때, 윤리학에 사실상 사형선고를 내리는 듯 했다. '좋음'이 분석되지 않는다면, '좋음'은 좋음 그 자체여야 한다. 근데 그럴려면, '좋음'이라는 속성은 어떠한 (자연적 속성이 아닌) 형이상학적 속성으로 보인다. (근데 논리실증주의에 따르면, 이러한 형이상학적 속성은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윤리학이 좋음에 대한 논의인 이상, 윤리학은 사실상 학문으로서의 지위를 잃는다.

그렇기에 전통적인 1세대 분석 철학자들은 윤리의 문제를 거의 다루지 않았다.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1951), 프레게(Gottlob Frege, 1848 - 1925)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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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분석철학에서 윤리학이 부활하는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비트겐슈타인으로 보인다.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은 철학을 축소해버리는 것이었다. '그래, 철학은 윤리학을 다루지 못한다. 그런데 그건 철학의 문제이지, 윤리의 문제인 것이 아니다. 윤리는 여전히 중요하다.'

이 정신을 이어받았지만, 기어이 철학의 영역에서 윤리학을 다루고자 했던 학자들이 1세대 메타 윤리학자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윤리적 문장(sentence)가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일종의 뒤틈'을 통해 윤리학을 구하려고 하였다. 즉, 윤리학은 형이상학이 아닌 셈이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윤리학은 이제 언어 철학으로 다 바뀌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의 동료였던 길버트 라일(Gilbert Ryle, 1900-1976)의 제자인 알프레드 에이어(A.J. Ayer, 1910-1989)는 윤리적 문장이 감탄사와 같은 감정의 표현일 뿐이라 주장했다. 라일의 또 다른 제자인 리처드 헤어(R.M. Hare, 1919 - 2002)는 잘못된 형식으로 표현된 명령법이라 주장한다. 윤리적 문장은 사실의 진실이지만, 이에 해당하는 사실이 없다는 오류 이론을 주장한 존 맥키(J.L. Mackie, 1917 - 1981)도 이 세대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호주 출신으로, 러셀-무어의 학풍을 이어받은 John Anderson의 제자였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무어 밑에서 공부했었던 (박사는 하버드에서 받았다) 찰스 스티븐슨(Charles Stevenson, 1908 -1979)도 에이어처럼 윤리적 문장과 감정 표현을 연결시켰다.

그리고 끝이다.

놀랍게도, 도덕적 문장에 대해 논의하는 메타윤리학은 50년대 이후 급속도록 사람들의 관심사에서 멀어진다. (중요한 앤솔로지를 보아도, 50-70년대까지는 거진 비어있다.) 그 이후로도, 메타윤리학은 어디까지나 자신들의 형이상학적 입장을 확장해서, 윤리적 문제를 다룰려 시도하는 과정의 일부로서 등장할뿐이다.

길버트 허먼(Glibert Harman, 1938-2021)는 윌리엄 콰인(W.V,O. Quine, 1908-2000)의 제자로, 일종의 주관주의 이론을 개척하면서, 메타윤리학적 입장을 개진하였다. 존 맥도웰(John McDowell, 1942-)은 영국 옥스퍼드 전통 속에서 성장했다. 그 역시도 일종의 주관주의 이론(처럼 보이는 것)을 제시한다. (더밋 밑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놀랍게도 맥도웰은 박사학위가 없다. 위키에 박사 지도 교수가 없길래 CV를 뒤져보니 69년에 옥스퍼드에서 딴 MA가 전부다.)

한편 자연주의 전통에서는 다음과 같은 학자들이 등장했다. 리처드 보이드(Richard Boyd, 1942 - 2021)는 코넬 리얼리즘을 주장하며, '좋음'이라는 속성도 자연적 속성으로 환원될 수 있다 보았다. 그리고 과학의 방법론으로 이 좋음을 탐구할 수 있을 것이라 전망했다. (이는 '도덕심리학'이 철학과에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계기이다.)(보이드는 리처드 캇라이트[Richard Cartwright, 1925-2010]의 제자이고, 캇라이트는 로드릭 치솜[Roderick Chisholm, 1916-1992]의 제자다. 치솜은 콰인과 함께 하버드에 있었다.) 또 다른 입장은 프랭크 잭슨(Frank Jackson, 1943-)의 도덕 기능주의다. 그 역시 좋음이 자연적 속성이라 보았는데, 그는 환원보다는 좀 느슨한, 네트워크 분석이라는 일종의 '정합론' 같은 주장을 했다.

아마 전통적 메타윤리학을 가장 '고전적으로' 계승한 인물은 케임브리지에서 학위를 받은 사이먼 블랙번(Simon Blackburn, 1944-)일 것이다. (고전적으로 계승했다는 의미는, 그가 윤리학을 언어철학의 입장으로 우선적으로 접근한다는 점이다.) 그는 무어-비트겐슈타인 밑에서 학위를 받은 Casimir Lewy (1919-1991)에게서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이상한 방식으로 메타윤리학에 정착한 앨런 기버드(Allan Gibbard, 1942-)도 있다. 그는 원래 존 롤즈(John Rawls, 1921-2002) 밑에서 사회-정치철학을 전공했다. 그 후 논문도 사회적 선택 이론 등이었는데 커리어 후반기에 갑자기 메타윤리학, 그것도 언어철학에 집중하는 고전적인 메타윤리학적 주제로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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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보이드, 프랭크 잭슨, 길버트 허먼의 등장은 영국과는 구분되는 미국/호주 전통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콰인이 주창한 자연주의 프로젝트에 큰 공감을 하던 흐름 속에서 등장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기본 입장은 굉장히 자연주의적인 틀에서 이루어진다. 동시에 과학철학과 [당대의 신경과학-심리학의 발전에 힘입어 심신 관계에 대한 정합적인 틀을 제시하려 했던] 심리철학에도 호의적이다. 또한 과학의 영역을 구분 짓기 위한, 인식론 일반의 계획 [예컨대, 콰인의 분석/종합의 구분과 같은 주제들]도 관심의 영역이었을 것이다.

동시에 이들이 언어철학에 접근하지 못한 것은, 당대 언어철학은 정말 미친듯이 발전하고 있던 고도로 복잡한 학문 체계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실상 오늘날 언어학과에서 배우는 의미론(semantic) 이론들은 60-70년대 철학자들에 의해서 정립되었다.

흥미롭게도 고전적 메타윤리학의 귀환을 가져온 블랙번의 원래 전공은 논리학과 언어철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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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영국으로 돌아가보자.
메타윤리학은 쇠퇴하였지만, 비트겐슈타인이 열어놓은 '삶'에 대한 관심은 영국 분석 철학에서 두 주제를 중요하게 만들었다. 첫째는 행위(action)이고, 다른 하나는 개인의 정체성(personal identity) 등과 같은 한 인간의 주관적 영역이다.

길버트 라일은 노하우(knowledge how)를 최초로 언급한 학자로 유명하다. 피터 스트로슨(Peter Stawson, 1919-2006) 역시 자신의 두번째 저서 《Individual》에서 주어적 표현과 술어적 표현을 구분하며, 인간의 주관적 영역을 철학적으로 설명하려 했다. 거트루드 앤스콤(G.E.M. Anscombe, 1919-2001) 역시 행위 철학의 초석이라 여겨지는 의도(intention)에 관한 논문을 저술하였다. 이 흐름은 계속 영국 철학에 면면히 이어진다. (존 맥도웰 역시 이 흐름을 어느정도 감안하고 있었을 것이다.)

필리파 풋(Philippa Foot, 1920 - 2010)은 도덕적 동기의 외재주의 이론을 주창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녀는 옥스퍼드 출신으로 정치-경제-철학 트랙이었다. 앤스콤과 주로 대화를 나누었다 한다.) 라일의 제자인 버나드 윌리엄슨(Bernard Williams, 1929-2003)은 도덕적 동기에 관한 가장 중요한 학자로 여겨진다. 데이빗 위긴스(David Wiggins, 1933-)도 빼놓으면 안 될 학자다. 제임스 그리핀(James Griffin, 1933-2019)도 중요하다. 그는 주로 가치 이론에 관해 썼다. 주디스 톰슨(Judith Thomson, 1929-2020)도 가치 이론을 연구했다.

이 전통은 많은 학자들을 배출하였다.
피터 엉저(Peter Unger, 1942- ; 회의주의, 모호성, 개인의 정체성, 가치 등에 관한 논문을 썼다), 데렉 파핏(Derek Parfit, 1942 - 2017 ; 개인의 정체성, 실천 이성, 도덕적 동기에 관한 썼다.), 토마스 후루카(Thomas Hurka, 1952 - ; 가치 이론에 대해 썼다.), 조나단 단시(Jonathan Dancy, 1946 - ; 도덕 개별론으로 유명하다.), 조셉 라즈(Joseph Jaz, 1939 - 2022, 법 철학 전공이지만 실천 이성과 규범성, 가치에 관해 썼다) 시드니 슈메이커(Sydney Shoemaker, 1931 - 2022, 자기지식, 개인의 정체성 등에 관해 썼다.) 존 페리(John Perry, 1943 - ; 자기지식, 정체성에 관해 썼다. 슈메이커의 제자다.) 브라이언 오쇼네시(Brian O'Shaughnessy, 1925 - 2010 ; 의지와 의도에 관해 썼다.), 제니퍼 혼스비(Jennifer Hornsby, 1951 - ; 행위에 관해 썼다.)

(또한 몇몇 중요한 덕 윤리학자들도 이 명단에 포함될 수 있다. 로잘린드 허스하우드[Rosalind Hursthouse, 1943-])

최근 명단으로는 루스 창(Ruth Chang, 1963-), 존 블룸(John Broome, 1947 - ; 원래는 경제학자였다.) 등이 있을 것이다. (재미있게도 이들 연구는 공리주의 연구의 연장 선상에 있기도 하다.)

어떤 의미에서, 영국은 미국의 자연주의에서 벗어난 채 여전히 가치라던가, 행위, 정체성 등 개인의 주관성에서 중요한 부분을 연구하던 셈이다. 이들 연구는 오늘날 규범성(normativity) 연구의 초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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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자연주의 철학에서 벗아나면서도, 도덕에 관한 연구를 하던 그룹은 롤즈의 제자들이다. 롤즈가 있던 하버드 프로그램은 굉장히 실천적인 영역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이제 도덕은 옳은 규범을 만드는 일이 되었고, 어떻게 하면 옳은 규범을 만들 수 있는지 탐구한 것이 롤즈라 볼 수 있다. 즉 도덕 철학이 일종의 법철학과 유비적인 형식인 셈이다.)

토마스 네이글(Thomas Nagel, 1937-)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도덕적 동기와 윤리학적 문제들을 다루었다. 또한 규약주의와 도덕적 동기에 관한 중요한 연구도 롤즈의 제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크리스틴 코스가르드(Christine Korsgaard, 1952 -), T.M. 스칼론 (T.M. Scanlon, 1940-)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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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 철학은 미국에서 영국과는 구분되는 전통을 만들었다.
아마 이들은 개인의 주관성의 영역을 나름대로 확보하려뎐 영국-비트겐슈타인 전통과 다르게, 자연주의의 영향을 받아 (과학철학의 기반이 되는) 인과를 엄밀히 만드는 과정의 부산물처럼 보인다. 인과 - 심적 인과 - 행위로 이어지는 셈이다. (이 지점이 영국과 미국 전통이 갈라지는 지점이다. 영국 전통에 서 있는 학자들은 대체로 인과성이나 심신 문제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큰 관심을 가진다.)

우선 명단의 처음은 치솜이 가져가야할 듯하다. 그 뒤로는 도널드 데이비슨(Donald Davidson, 1917- 2003)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데이비슨의 제자인 마이클 브랫맨(Micheal Bratman, 1945-)와 데이빗 루이스의 제자인 데이빗 벨레만(David Velleman, 1952-)도 중요하다.

살짝 다른 계통으로는 알프레드 멜레(Alfred Mele)가 있다. (미시건대학교에서 박사를 받았는데 박사 지도 교수가 누군지 명시가 안 되어있다. Robert Audi 비판이 있는거 봐선 아우디 제자 같기도하고, 초창기 작업이 전부 아리스토텔레스니 고대철학 전공자의 제자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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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자료를 좀 더 뒤질 수 있으면, 도덕 심리학이 어떻게 윤리학 내부로 들어올 수 있는지 기술해보고 싶다.
사실 인지과학은 자신들의 야심에 비하면, 철학과 내로 온전히 융화되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도덕 심리학이야 말로, 윤리학 내부에 온전히 자리 잡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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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더 적을만한 내용은 미국과 영국에서는 윤리가 정당화되는 층위를 대체로 다르게 여기는 듯하다.
길버트 허먼, 데이빗 벨레만, 앨런 기버드, 데이빗 왕 등은 사회적 규범(norm)을 강조한다. (그래서 허먼/벨레만/왕은 도덕 상대주의를 옹호한다.)(롤즈의 영향인가?)

반대로 영국에서는 가치를 강조하는 편이다. 존 맥도웰이 허먼과 같은 주관주의 느낌이 있지만 그는 상대주의로 빠지지 않고 가치에 호소하는 일반론으로 가는 것에 가깝다. 기버드와 같은 비인지주의로 묶이는 사이먼 블랙번도 규범에 호소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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