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르트 제 3성찰 신 존재 증명과 표상적-형상적 실재성의 구분

데카르트 제 3성찰 신 존재 증명과 표상적-형상적 실재성의 구분

학부시절 읽었던 데카르트를 다시금 이렇게 읽고 그것에 대해 또 작게나마 글을 쓰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하지만 윤선생님과 뉴헤겔 선생님의 코멘트를 읽으면서 어쩌면 데카르트 읽기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순탄치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관념의 형상적 실재성의 여부가 논쟁거리가 된다는 것이 저를 갸우뚱하게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이에 대하여 제 이해를 다시 한 번 평이하게 밝혀보고 제가 혹시나 놓친 것이 있는지 여러 선생님들께 고견을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데카르트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어떤 실재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키메라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아무런 실재성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키메라의 관념은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은 어떤 실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관념들은 사유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그런 형식적인 면에서 동등한 실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유하지 않는 한 그것들은 모두 존재하지 않고, 사유하는 한 그것들은 모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데카르트는 이러한 존재론적 의존관계를 통해서 실재성의 위계를 설정합니다. 때로 데카르트는 이것을 더 완전하다거나 덜 완전하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에 따르면 모든 관념들은 동등한 형상적 실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았을 때, 관념마다 지니고 있는 내용에 따라 실재성의 차이가 생깁니다. 내용에 있어서 어떤 관념은 더 완전한 관념이고 어떤 관념은 덜 완전한 관념이지요. 신의 관념의 내용은 최고의 완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 돌이나 키메라의 관념의 내용은 그보다 완전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표상적 실재성의 차이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표상할 때 혹은 그것이 우리에게 떠오를 때 그런 식으로 표상하거나 됩니다.

이러한 이상한 구분이 왜 중요해지냐면 이 스콜라적 구분을 데카르트는 그대로 자신의 신 존재 증명에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가장 근본이 되는 전제는 두 분께서 모두 잘 인용해주신 부분처럼 스콜라의 인과율입니다. 덜 완전한 원인에서 더 완전한 것이 결과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우리의 관념들의 형상적 실재성은 모두 동등하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 실재성에 차이가 생깁니다. 어떤 관념의 내용은 더 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사유실체의 속성들보다 낮거나 같은 정도의 완전성을 지닌 사유 양상들및 관념들은 여기서 문제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관념의 내용이 이 관념의 형식적인 원인인 사유 실체보다 더 완전하다면 이 관념을 어떻게 이해해야하는지가 문제시 될 수 있습니다. 특히 신의 관념 말이지요.

모든 관념들은 사유하지 않는 한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모든 관념들은 사유 실체에 종속되며 존재론적으로 의존적입니다. 신에 대한 관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관념의 형상적 실재성이 뜻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신의 대한 관념은 이상하게도 그 내용에서 완전성 같은 무한 실체의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표상적 실재성에서 이 신의 관념은 그 관념의 원인인 사유를 넘어섭니다. 이는 인과율에 따라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신 관념의 이 표상적 실재성은 분명 존재합니다. 신이 완전하다는 생각 말입니다. 따라서 이 관념의 원인 역시 어딘가에 존재해야만 합니다. 인과율의 또다른 함축 때문입니다. 어떤 것도 무에서 결과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신 관념의 원인은 말했듯 유한 실체일 수 없고 그래서 사유실체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유할 수 없는 것을 사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유할 수 없는 무한 속성에 대한 관념은 더 높은 존재, 즉 무한 실체로부터 결과한 것이여야만 합니다.

따라서 무한 실체이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 관념의 표상적 실재성의 원인인 존재가, 즉 신이 존재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3성찰의 신 존재 증명입니다. 데카르트 3성찰의 신 존재 증명의 포인트는 우리가 우리보다 완전한 관념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이 관념의 원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며, 그럼에도 이 관념이 존재하므로 이 관념의 원인인 더 높은 존재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파악했을 때 중세인이 아닌 우리가 문제시할 수 있는 점은 명확해지는 것 같습니다. 바로 인과율 자체입니다. 왜 인과율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데카르트는 따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연의 빛에 의해 명석판명한 것이라고 합니다. 저는 적어도 이것이 굉장히 의심스럽습니다. 하지만 이런 비판 지점이 명확해지려면 먼저 그의 개념 체계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인과율 외에 또 한 가지 더 문제시할 수도 있는 것은 바로 존재론적 위계일 것 같습니다. 데카르트는 존재론적 의존 관계를 통해 무한실체-유한실체-양상으로 위계 관계를 설정합니다. 사유 실체는 유한실체이며, 사유실체로부터 파생되는 모든 개별 사유와 관념들은 사유실체의 양상입니다. 인과율에 따르면 윗 존재는 아래 존재를 낳지만 아래 존재로부터 윗 존재가 결과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 우리가 가진 관념들을 살펴보면, 우리가 가진 관념들 가운데는 신 관념이 있습니다. 신 관념은 우리 사유에 의존하므로 양태의 지위에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관념들과 함께 가장 낮은 실재성을 가집니다. 그런데 신 관념의 내용은 완전함과 같은 무한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형식적으로는 가장 낮은 실재성을 가지고 있는 이 관념이 그 내용으로는 가장 높은 실체의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신의 관념의 형상적 실재성이 양태인 것은 인과율에 위배되지 않습니다. 원인인 사유실체가 양태인 신의 관념을 거느리는 것에 대해 아무 문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의 관념의 내용이 가지고 있는 이 표상적 실재성은 문제가 됩니다. 이것은 인과율에 따라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관념의 내용을 가능하게 하는 다른 실체가, 즉 이 경우 무한실체가 존재해야만 하고 그것이 신입니다.

이런 이해에 따른다면, 관념의 내용이 가지는 완전성과 관념의 형식이 가지는 완전성으로 그 실재성의 정도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관념의 내용에 따른 실재성을 표상적 실재성이라고 부르고, 관념의 형식적 의존관계에 따른 실재성을 형상적 실재성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모든 관념은 형상적 실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관념인 한 사유의 양태로 가장 낮은 단계의 실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어떤 관념은 내용의 측면에서 사유실체보다 높은 실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표상적 실재성입니다. 표상적 실재성의 위계는 적어도 동등한 형상적 실재성의 위계로부터 결과해야만 한다는 것이 성찰에서 데카르트가 상술하는 인과율입니다. 물론 이 위계를 현대인인 우리가 받아들여야할지는 또 다른 문제일 것입니다.

식사하러 가기 전 짬이 나서 생각나는대로 줄줄 써내린 바람에 중언부언하고 같은 말을 여러번 반복하게 되어 읽는 이로 하여금 짜증을 유발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제 이해를 어느정도 드러냈다고 생각하며 이에 대한 비판을 기다립니다. 고기 먹으러 가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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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그냥 읽고 적는 두서 없는 코멘트입니다.

(1)

이 부분은 사실 오늘날 관점에서는 좀 갸우뚱하게 되는 생각이네요. 사유되는 것 = 존재하는 것, 이라는 도식은 두 가지 문제를 가져올 듯 합니다. (i) 누구도 사유하지 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겠죠. 이에 따르면 예를 들어, 그 당시 중세인들이 생각/상상조차 못 했던 안드로메다 성운은 존재하지 않은 것이 되겠죠. (ii)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사유를 통해 무언가를 "존재하게" 창조할 수 있네요! 예컨대, 누구도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돈키호테를 처음 만든 세르반테스는 일종의 창조 행위를 한 셈 아닌가요? 이걸 데카르트나 스콜라 철학자들은 어떻게 생각했는지 궁금하네요.

(2)

이 부분은 데카르트(와 스콜라 철학자들이) 왜 그렇게, 무엇을 근거로 생각했는지 궁금하네요. 실재성의 차이를 구분할 기준이 있었나요?

(3)

사실 이 부분만 보면, 데카르트가 왜 심신이원론을 주장했는지 저는 좀 아리송해집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흔히 철학사적으로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 문제가 해결되지 못했다고 말하곤 하는데,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잘 모르겠네요.
결국 무한 실체에 존재론적으로 모든 것이 의존한다면, 연장 - 정신의 상호작용은 무한실체 어딘가를 통해서 해결된다고 보면 되지 않나요? (어렴풋이 생각해보면, 데카르트가 이렇게 문제를 해결했던 것 같긴하네요. 그러면 비판자들은 왜 이게 문제가 된다 여겼는지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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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데카르트의 텍스트를 그다지 깊이 공부한 적이 없기 때문에 조심스러운 입장이긴 하지만, handak님께서 적어주신 글은 제가 대학원 강의에서 배운 내용이나 새로 읽은 논문들과는 꽤 상충하는 것 같습니다. 위의 내용대로라면,

(a) 형상적 실재성은 모든 관념이 지니는 실재성이고,
(b) 표상적 실재성은 더 완전한 관념과 덜 완전한 관념 사이의 차이를 만드는 실재성

일텐데, 제가 알고 있는 바로는,

(a') 형상적 실재성은 실존하는 개별자가 지니는 실재성이고,
(b') 표상적 실재성은 정신 속 관념이 지니는 실재성

이라서요.

가령, handak님의 구분에서는 (키메라의 관념을 비롯한) 모든 관념이 형상적 실재성을 지녀야 하지만, 제가 아는 구분에서는 형상적 실재성은 (키메라의 관념은 물론이고) 지성 속의 어떠한 관념에도 적용될 수 없어요. 굳이 형상적 실재성을 '관념'에 귀속시키려고 한다면, '인식된 대상' 혹은 '표상'으로서의 관념이 아니라 '인식 활동'으로서의 관념에만 귀속이 가능하죠. 반대로, handak님의 구분에서는 표상적 실재성이 관념의 내용 사이의 위계를 나누는 기준이 되지만, 제가 아는 구분에서는 표상적 실재성이 이러한 기준이 되지는 않아요.

채플(V. Chappell)의 "The Theory of Ideas"에서도 두 실재성을 (a')와 (b') 같이 정의한 내용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김은주 교수님의 논문의 내용을 인용해 봅니다. 수아레즈의 구분을 데카르트가 어떻게 차용하였는지 설명하는 부분이에요.

관념에 인과성을 적용할 수 있다는 데카르트의 관점은 토미스트에게만 생소한 것이 아니다. 그가 주요 준거로 삼는 후기 스콜라 철학자 수아레즈(Francisco Suárez)의 관점에서도 마찬가지다. 물론 ‘인식 활동’으로서의 개념의 형상적 실재성 외에, 지성 안의 ‘인식된 대상’(혹은 표상)이 무가 아니며 어떤 실재성을 갖는다는 표상적 실재성 개념은 여러 후기 스콜라 철학자들을 거쳐 수아레즈에 의해 정식화된 것이다. 나아가, 그는 실재성의 근거(ratio realitatis) 자체를 정신 바깥의 사물이 아니라 지성 안의 이러한 ‘표상적 존재(esse objectivum)’에 둔다. 그것이야말로, 본질적 존재(esse essentiae), 실재적 존재(esse realis)로서, 확실성과 진리의 준거이다. 표상적 존재는 가능한 존재 혹은 사유될 수 있는 존재이지만, 허구적 존재나 사고상의 존재(entis rationis)와 달리 실존할 가능성이 있고, 이런 실존의 능력(aptitudo ad existentiam)만으로도 진리는 확보된다. 그런데 이 본질주의는 수아레즈 철학의 일차적 구도에 불과하다. 다른 한편, 현실적으로 실존하는 개별자의 실재성이 있다. 이 ‘실존하는 존재(esse existentiae)’ 혹은 ‘기체적 존재(esse subjectivum)’는 단지 지성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작용인에 의해 원인 바깥으로 나온 것(extra causas suas sistere), 정립된 것(res positiva), 현실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면에서는 이런 존재가 표상적 존재인 본질보다 실재성에서 우위를 갖게 된다. 이 두 측면이 어떻게 양립가능한지는 우리 관심사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작용인과 구별되는 본질(관념의 표상적 존재)의 구도가 있고, 본질은 작용인인 신의 창조에 선행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관념의 표상적 존재가 무가 아니라 어떤 것(aliquid)이라 하더라도, 그것의 작용인 을 물을 필요는 없다. 이 같은 수아레즈의 관점과 대조해볼 때, 관념의 표상적 실재성의 원인을 묻는 데카르트적 행보의 형이상학적 함의가 드러난다. 그것은 영원진리창조라는 모순형용적인 테제로 집약된다. 가능한 본질들은 물론 ‘불변적이고 영원한’ 진리지만, 이 진리는 신의 창조에 앞서 신의 지성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실존하는 것들과 마찬가지로 신의 의지에 의해 ‘창조’된 것이다. (김은주, 「데카르트 『성찰』의 신 존재 증명과 새로운 관념이론」, 『철학연구』, 제104권, 2014, 71-72쪽 인용자 강조.)

이 인용문에서도 특별히 다음 두 부분을 주목하면 좋을 것 같아요.

(1) 인식 활동과 인식된 대상

물론 ‘인식 활동’으로서의 개념의 형상적 실재성 외에, 지성 안의 ‘인식된 대상’(혹은 표상)이 무가 아니며 어떤 실재성을 갖는다는 표상적 실재성 개념은 여러 후기 스콜라 철학자들을 거쳐 수아레즈에 의해 정식화된 것이다.

수아레즈는 '인식 활동'이 갖는 실재성을 형상적 실재성으로, '인식된 대상(표상)'이 갖는 실재성은 표상적 실재성으로 정식화해요. 그렇다면 예로 드신 키메라의 관념은 '인식된 대상'에 해당하기 때문에 '형상적 실재성'은 가지지 않고 '표상적 실재성'만을 가진다고 해야 할 거예요.

(2) 사유될 수 있는 존재와 실존하는 개별자

표상적 존재는 가능한 존재 혹은 사유될 수 있는 존재이지만, 허구적 존재나 사고상의 존재(entis rationis)와 달리 실존할 가능성이 있고, 이런 실존의 능력(aptitudo ad existentiam)만으로도 진리는 확보된다. 그런데 이 본질주의는 수아레즈 철학의 일차적 구도에 불과하다. 다른 한편, 현실적으로 실존하는 개별자의 실재성이 있다.

여기서도 '사유될 수 있는 존재'와 '실존하는 개별자'에 각각 '표상적'과 '현실적'이라는 수식어가 적용되고 있어요. 즉, '표상적 존재'와 '표상적 실재성'은 사유될 수 있는 인식 대상에 귀속되고, '현실적 존재'와 '현실적 실재성'은 실존하는 개별자에 귀속되는 거죠. ("The causal principle relating objective reality to formal or actual reality is, after all, the crucial premise in Descartes' main argument for the existence of God." (V. Chappell, "The Theory of Ideas", Essays on Descartes' Meditations, A. O. Rorty (ed.),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6, p. 189 my emphasis.)에서도 볼 수 있듯이 '형상적(formal)' 실재성이라는 용어는 '현실적(actual)' 실재성이라는 용어와 동의어로 사용되죠.)

저는 handak님의 설명과 제가 읽은 논문들의 설명이 내용적으로 상충되는 것인지, 아니면 표현이나 강조의 차이만 있을 뿐 본질적으로는 같은 말을 하는 것인지는 아직 판단할 수 없어요. 다만, 지금으로서는 '형상적 실재성'은 모든 관념에 공통적인 반면, '표상적 실재성'은 관념들의 완전성에 따라 다르다는 설명을 제가 받아들여도 괜찮을지 확신이 서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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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 선생님 자세한 답변 감사드립니다. 우선 표상적 실재성이 관념들만 가지는 실재성이라는 이해는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형상적 실재성이 존재하는 개별자들의 실재성이라면 그것도 틀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만약 형상적 실재성이 시공간에 연장적으로 존재하는 개별자들만이 가지는 것이라고 이해하셨다면 이것은 오해리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제 3성찰을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한글 번역본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CMS II 28쪽을 보시면 명확하게 데카르트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The nature of an idea is such that of itself it requires no formal reality except what it derives from my thought, of which it is a mode.
관념의 본질은 그 자체로는 내 사유에서 이끌어진 것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형상적 실재성도 요하지 않으며 그건 양태다.

즉 관념의 형상적 실재성은 내 사유에서 이끌어져 나오며 그렇기 때문에 이 실재성은 사유실체의 양태에 불과합니다. 이건 사실 너무나 명시적으로 언급되어 있으므로 논쟁의 여지가 없어보입니다.

수아레즈의 글은 제가 읽어보지 않았으므로 제가 할말이 없네요. 다만 데카르트가 수아레즈의 개념을 그대로 가져온 것은 아니라는 것은 확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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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는 질문들을 해주셨네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미리 말씀드려야 할 것은 저도 데카르트나 스콜라 철학을 전공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학부 시절 데카르트의 성찰과 방법서설을 번역하셨던 이현복 선생님께 데카르트와 스피노자를 배우긴 했습니다. 하지만 제 이해가 깊다고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시 어마어마한 스콜라 철학과 유대교 철학 심지어는 아랍철학까지 이어진 거대한 빙산의 일각을 건드리고 질려버렸던 기억은 납니다.

(1) 우선 첫 번째 질문에 관해서 데카르트라면 아마 우리가 새롭게 만들어낸 픽션적 존재자들의 관념은 복합적인 수준에서 새롭지만 그 관념을 구성하는 단순관념들은 이미 다 우리가 가지고 있다고 여길 것 같습니다.

또 우리 마음이 사유하지 않은 것이라고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하겠지요. 제 논의가 신 존재 증명이고 그것의 시발점이 사유실체이다 보니 사유실체만 이야기해서 그런 오해를 하신 것 같습니다만 원래 데카르트에게 있어 무한실체인 신 밑에 유한실체는 사유실체와 연장실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안드로메다같은 것은 연장실체의 양태가 되겠지요. 우리가 인식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아직 인식하지 않은 것)을 아직 사유하지 않았으므로 우리에게 아무런 관념도 낳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니 표상적 실재성은 가지고 있지 않겠지요.

(2) 실재성의 정도의 차이는 말씀드렸듯 그 존재론적인 의존에 따라 나누어집니다. 사유의 양태들은 사유실체에 의존합니다. 내 믿음 a 내 감정 b 내 열망 c 이런 것들은 내가 믿지 않고 느끼지 않고 열망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유하는 나가 있어야 개별적 사유들도 가능합니다. 따라서 사유실체보다 사유 양태들은 실재성이 낮습니다. 다른 말로는 보다 완전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사유실체 또한 무한실체가 없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존재론적 의존관계가 각 심급마다 상이한 정도의 실재성을 갖게 합니다.

언급하신 맥락에서는 관념의 실재성을 논하고 있습니다. 관념은 사유실체의 양태입니다. 따라서 관념의 형상적인 실재성은 양태에 불과합니다. 반면에 어떤 관념은 완전성을 속성으로 가집니다. 신이죠. 신의 완전성은 사유실체의 유한성이 모두 담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사유실체는 자기를 능가하는 관념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이 관념의 표상적 실재성은 그 관념의 형상적인 원인인 사유실체를 능가합니다. 다만 이런 관념이 가능하려면 사유실체의 보증으로는 안 되고 무한실체가 있어야만 하지요. 그래서 신의 존재가 증명되는 것입니다.

(3) 제가 알기로 데카르트적 심신이원론이 발생하는 이유는 우리가 신이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입니아. 인간은 사유실체와 연장실체 모두를 가집니다. 둘은 독립적이고 자립적입니다. 이 때문에 어떻게 마음이 몸을 움직이는지에 대한 설명이 요원해지는 것입니다. 신이야 당연히 심신이원의 문제를 가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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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답변 감사드립니다. 항상 서양 근대 철학은 최선을 다해 피해다녔는데 막상 글을 읽어보니 굉장히 재미있네요 ㅎㅎ.

그리고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스콜라 철학자들은 예상외로 오늘날 분석철학에서 했던 여러 논의들 (특히 가능세계를 도입해서 논의된 여러 분야의 이야기들)을 선취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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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학기동안 데카르트를 공부하고서 우연히 이 글을 다시 읽으니, handak님이 말씀하신 내용이 이제야 제대로 이해가 되네요!

처음 글을 썼을 당시에는 정신의 '활동'으로서의 관념(idea m)과 정신의 '대상'으로서의 관념(idea o)이 엄격하게 구분되어야 한다는 점에만 주목한 나머지, 그 두 가지를 모두 '관념'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색하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적어도 데카르트의 철학에서는, 그 두 가지가 언제나 붙어 있을 수밖에 없군요. 대상으로서의 관념은 그 관념을 의식하는 정신의 활동에 수반되고, 정신의 활동은 대상으로서의 관념을 의식하는 방식으로 일어나니까요.

그래서, handak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모든 관념이 '형상적 실재성'과 '표상적 실재성'을 같이 지닌다고 할 수 있겠네요. 다만, 그 관념들이 모두 '나'의 관념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한 형상적 실재성을 지니더라도, 그 관념들이 서로 구분된다는 점에서는 서로 다른 표상적 실재성을 갖는 거고요.

특별히, 어제 베이사드(J, M. Beyssade)의 논문을 읽다가 정확히 그 내용을 설명한 구절을 보았네요.

But an idea can also be considered objectively—as it represents such and such an object and compared with a second idea, also so considered. So compared, the objective reality of one idea can be different from and unequal to that of a second idea. For there is something else when I think of the sun than when I think of a lion. And there is something more when I dream of a five-legged lion than when I see a four-legged lion: something more, namely one more exhibited leg. There is nothing else in the formal reality of this idea, because I remain the same. There is nothing more in the formal reality of things, it is just the contrary, there are four formal legs less, because I assume that in a dream there is no formal reality of any thing at all. But there may be something more in the represented content of my thought, which I call its object. (J. M. Beyssade, "Descartes on Material Falsity", Minds, Ideas, and Objects: Essays on the Theory of Representation in Modern Philosophy, Phillip D. Cummins & Guenter Zoeller (eds.), Ridgeview, 1992, p. 8 인용자 강조)

여하튼, 좋은 글 감사합니다! 도움이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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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쓴 원글을 읽어보니 도통 수월히 읽히지 않네요. 그럼에도 잘 이해하시고 이렇게 보충까지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이 구분은 데카르트의 답신에서도 그런 함축을 찾아볼 수 있고, 실제로 체계적인 이해를 위해서도 필요한 구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잘 이해하신 것처럼 형상적 실재성과 표상적 실재성의 차이를 설명하는 맥락에서는 큰 역할을 하지는 않는 것 같네요.

사실 이 통찰이야말로 중요한 것 같습니다. 대상으로서의 관념과 활동으로서의 관념이 실제로는 서로를 구성하기 때문에 동일하지만, 개념적으로는 분명히 다르니까요.

요즘 잠시 Tugendhat를 내려놓고 있는데요. 쓸데없이 한 마디 얹자면, Tugendhat는 이런 도식이 자기의식의 문제에 도입될 때에는 일종의 Reflexionstheorie, 그니까 반성적 이론만을 생산할 수밖에 없고, 이것이 순환을 낳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데카르트에서 시작된 이 전통이 독일 관념론까지 이어진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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