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르트 제 3성찰 신 존재 증명과 표상적-형상적 실재성의 구분
학부시절 읽었던 데카르트를 다시금 이렇게 읽고 그것에 대해 또 작게나마 글을 쓰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하지만 윤선생님과 뉴헤겔 선생님의 코멘트를 읽으면서 어쩌면 데카르트 읽기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순탄치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관념의 형상적 실재성의 여부가 논쟁거리가 된다는 것이 저를 갸우뚱하게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이에 대하여 제 이해를 다시 한 번 평이하게 밝혀보고 제가 혹시나 놓친 것이 있는지 여러 선생님들께 고견을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데카르트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어떤 실재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키메라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아무런 실재성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키메라의 관념은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은 어떤 실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관념들은 사유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그런 형식적인 면에서 동등한 실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유하지 않는 한 그것들은 모두 존재하지 않고, 사유하는 한 그것들은 모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데카르트는 이러한 존재론적 의존관계를 통해서 실재성의 위계를 설정합니다. 때로 데카르트는 이것을 더 완전하다거나 덜 완전하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에 따르면 모든 관념들은 동등한 형상적 실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았을 때, 관념마다 지니고 있는 내용에 따라 실재성의 차이가 생깁니다. 내용에 있어서 어떤 관념은 더 완전한 관념이고 어떤 관념은 덜 완전한 관념이지요. 신의 관념의 내용은 최고의 완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 돌이나 키메라의 관념의 내용은 그보다 완전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표상적 실재성의 차이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표상할 때 혹은 그것이 우리에게 떠오를 때 그런 식으로 표상하거나 됩니다.
이러한 이상한 구분이 왜 중요해지냐면 이 스콜라적 구분을 데카르트는 그대로 자신의 신 존재 증명에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가장 근본이 되는 전제는 두 분께서 모두 잘 인용해주신 부분처럼 스콜라의 인과율입니다. 덜 완전한 원인에서 더 완전한 것이 결과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우리의 관념들의 형상적 실재성은 모두 동등하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 실재성에 차이가 생깁니다. 어떤 관념의 내용은 더 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사유실체의 속성들보다 낮거나 같은 정도의 완전성을 지닌 사유 양상들및 관념들은 여기서 문제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관념의 내용이 이 관념의 형식적인 원인인 사유 실체보다 더 완전하다면 이 관념을 어떻게 이해해야하는지가 문제시 될 수 있습니다. 특히 신의 관념 말이지요.
모든 관념들은 사유하지 않는 한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모든 관념들은 사유 실체에 종속되며 존재론적으로 의존적입니다. 신에 대한 관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관념의 형상적 실재성이 뜻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신의 대한 관념은 이상하게도 그 내용에서 완전성 같은 무한 실체의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표상적 실재성에서 이 신의 관념은 그 관념의 원인인 사유를 넘어섭니다. 이는 인과율에 따라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신 관념의 이 표상적 실재성은 분명 존재합니다. 신이 완전하다는 생각 말입니다. 따라서 이 관념의 원인 역시 어딘가에 존재해야만 합니다. 인과율의 또다른 함축 때문입니다. 어떤 것도 무에서 결과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신 관념의 원인은 말했듯 유한 실체일 수 없고 그래서 사유실체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유할 수 없는 것을 사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유할 수 없는 무한 속성에 대한 관념은 더 높은 존재, 즉 무한 실체로부터 결과한 것이여야만 합니다.
따라서 무한 실체이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 관념의 표상적 실재성의 원인인 존재가, 즉 신이 존재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3성찰의 신 존재 증명입니다. 데카르트 3성찰의 신 존재 증명의 포인트는 우리가 우리보다 완전한 관념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이 관념의 원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며, 그럼에도 이 관념이 존재하므로 이 관념의 원인인 더 높은 존재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파악했을 때 중세인이 아닌 우리가 문제시할 수 있는 점은 명확해지는 것 같습니다. 바로 인과율 자체입니다. 왜 인과율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데카르트는 따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연의 빛에 의해 명석판명한 것이라고 합니다. 저는 적어도 이것이 굉장히 의심스럽습니다. 하지만 이런 비판 지점이 명확해지려면 먼저 그의 개념 체계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인과율 외에 또 한 가지 더 문제시할 수도 있는 것은 바로 존재론적 위계일 것 같습니다. 데카르트는 존재론적 의존 관계를 통해 무한실체-유한실체-양상으로 위계 관계를 설정합니다. 사유 실체는 유한실체이며, 사유실체로부터 파생되는 모든 개별 사유와 관념들은 사유실체의 양상입니다. 인과율에 따르면 윗 존재는 아래 존재를 낳지만 아래 존재로부터 윗 존재가 결과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 우리가 가진 관념들을 살펴보면, 우리가 가진 관념들 가운데는 신 관념이 있습니다. 신 관념은 우리 사유에 의존하므로 양태의 지위에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관념들과 함께 가장 낮은 실재성을 가집니다. 그런데 신 관념의 내용은 완전함과 같은 무한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형식적으로는 가장 낮은 실재성을 가지고 있는 이 관념이 그 내용으로는 가장 높은 실체의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신의 관념의 형상적 실재성이 양태인 것은 인과율에 위배되지 않습니다. 원인인 사유실체가 양태인 신의 관념을 거느리는 것에 대해 아무 문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의 관념의 내용이 가지고 있는 이 표상적 실재성은 문제가 됩니다. 이것은 인과율에 따라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관념의 내용을 가능하게 하는 다른 실체가, 즉 이 경우 무한실체가 존재해야만 하고 그것이 신입니다.
이런 이해에 따른다면, 관념의 내용이 가지는 완전성과 관념의 형식이 가지는 완전성으로 그 실재성의 정도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관념의 내용에 따른 실재성을 표상적 실재성이라고 부르고, 관념의 형식적 의존관계에 따른 실재성을 형상적 실재성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모든 관념은 형상적 실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관념인 한 사유의 양태로 가장 낮은 단계의 실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어떤 관념은 내용의 측면에서 사유실체보다 높은 실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표상적 실재성입니다. 표상적 실재성의 위계는 적어도 동등한 형상적 실재성의 위계로부터 결과해야만 한다는 것이 성찰에서 데카르트가 상술하는 인과율입니다. 물론 이 위계를 현대인인 우리가 받아들여야할지는 또 다른 문제일 것입니다.
식사하러 가기 전 짬이 나서 생각나는대로 줄줄 써내린 바람에 중언부언하고 같은 말을 여러번 반복하게 되어 읽는 이로 하여금 짜증을 유발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제 이해를 어느정도 드러냈다고 생각하며 이에 대한 비판을 기다립니다. 고기 먹으러 가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