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호 형식-의사결정 방식>과 <사회적 규모-여론 형태>에 따른 민주주의 유형 구분 - 피시킨 2020 中

피시킨은 「챕터 3」 말미에서 <선호 형식-의사결정 방식>에 따른 민주주의 유형과 <사회적 규모-여론 형태>에 따른 민주주의 유형을 구별하고 설명한다. 그것을 정리하고, 책 절반을 읽었음에도 풀리지 않은 의문을 정리한다.

1 . 저자는 <선호 형식 방식>과 <의사결정 방식>에 따라 민주주의 유형을 분류한다. 이는 <선호집합적 이론>과 <숙의적 이론> 이분법 사이에서 유형을 선택하는 종래의 방식과 다르다. 종래의 방식에 따르는 경우, 전자를 추구하는 자가 후자에게 가할 수 있는 치명적 비판은 다음의 둘이다. ①합의를 찾느라 너무 큰 비용을 소모한다. ②사회적 압력에 의해 왜곡될 수밖에 없기에 그 합의조차 그들이 추구한 완전한 합의가 아니라 일종의 가짜 합의이다.

그러나 저자는 '선호집합적 이론이냐 숙의적 이론이냐'라는 이분법을 거부한다. 저자에 따르면 숙의는 선호 형성 방식에 따른 것이고, 집합적이란 것은 의사결정 방식에 따른 것이기에 범주를 달리한다. 그러니 우리는 선호 형성 방식 범주에 있는 <숙의/비정제>와 의사결정 방식 범주에 있는 <집합적/합의적>에 따라 네 가지 민주주의 유형을 구별할 수 있고, 이를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Ⅰ) 숙의 조사와 균형 잡힌 정보를 제공하고자 노력하는 경우 숙의에 기여하는 것으로 간주할 때의 선택지 설문이 여기에 속한다.

(Ⅱ) 코헨, 구트만, 톰슨이 제시하는 대표적인 숙의 민주주의 입장이 여기에 속한다.

(Ⅲ) 비숙의적 선호를 가진 참여민주주의와 대중민주주의가 여기에 속하며, 국민투표, 프라이머리, 전통적 여론조사들이 그 예이다.

(Ⅳ) 숙의 없는 합의를 내세우는 외관상의 공적 의지 형성을 제공하는 경우가 여기에 속한다. 집단적 세뇌 혹은 단순히 엘리트가 결정을 내리고 대규모 선전 캠페인을 통해 이 결정에 동의하도록 공중을 설득하는 대중민주주의의 한 형태가 예시이다.

저자의 이번 주장에서 주의할 점은 다음과 같다.

(1) <선호 형식 방식>과 <의사결정 방식>에 따라 민주주의 유형을 분류하는 것과 민주주의 모델을 네 개로 나누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2) 선호를 취합하는 의사결정 방식과 선호 형성을 위한 숙의를 결합하는 것이 가능하다. 즉, 합의에 대한 요구를 피하면서도 숙의를 진행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앞서 설명한 숙의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면서 범주(Ⅲ)에 속하는 경쟁적 민주주의 모델을 채택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포스너와 샤피로 등의 주장에 대해 반박할 수 있다.

2 . 저자는 <사회적 규모>와 <여론 형태>에 따라서도 민주주의 유형을 분류한다. 저자는 사회적 규모에 따라 <대중/소규모 선발 그룹>을 나누고, 참여 여론 형태에 따라 <숙의적 여론/비정제 여론>을 나누고, 이것을 교차시켜 네 가지 유형의 민주주의를 형식화한다.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Ⅰ) 숙의적 대중 여론: 숙의 민주주의가 이상적으로 이루어졌을 때 발생하는 유형이다. 하지만 이전에 살펴봤듯이, 이는 3중 딜레마를 겪게 된다는 점에서 현실적이지 않다.

(Ⅱ) 소규모 선발 그룹의 숙의 여론: 인민을 위해 숙의하는 선발된 그룹이 있을 때 언제나 발생하는 유형이다.

(Ⅲ) 소규모 선발 그룹의 비정제 여론: 대중 민주주의의 전통적인 여론조사 참가자들에 의해 발생하는 유형이다. 전통적 여론조사는 무작위 추출법으로 뽑힌 시민의 선발 그룹에 자신들의 비정제된 거르지 않은 선호를 정책 과정과 공적 대화에 끼워 넣는 것을 허용한다. 이런 점에서 전통적 여론조사가 정치나 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만큼, 전통적 여론 조사에 영향을 받는 선출된 대표들이 비정제 여론에 의해 좌우되는 만큼 (Ⅲ)이 실현된다.

(Ⅳ) 비정제 대중 여론: 전 세계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취하는 대중 민주주의가 실현됐을 때 발생하는 유형이다.

하지만 저자는 네 유형 중에서 고려할 만하며 효과적인 유형은 (Ⅱ)와 (Ⅲ) 둘 뿐이라 지적한다. 우선, (Ⅰ)은 실현 가능성이 없다. (Ⅲ)의 경우, 우리가 만약 비정제 여론에 따르기로 했다면, 소규모 그룹보다 더 많은 대중의 목소리를 들을 때 엘리티즘 비판을 피할 수 있기에 (Ⅳ)보다 덜떨어진 파생물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개혁과 반개혁의 물결이 반복됨에 따라, 정치 유형은 북동과 남서 사이에서 진동할 뿐이다. 즉, 정치 현장에서 우리는 계속 (Ⅱ: 소규모의 대표성 있는 숙의)와 (Ⅲ: 대규모의 비숙의) 사이를 오갈 수밖에 없다는 딜레마에 봉착해있다.


아무리 숙의 민주주의 이론(과 그 토대가 되는 사상가와 사회과학자)을 읽어봐도 동의되지 않는다. 저자가 소개하는 포스너와 샤피로의 비판대로 숙의 민주주의는 더 많이 교육받고 더 많은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의 지적 헤게모니를 단순히 반영하는 것은 아닌가?

또, 그들은 좋은 숙의 환경(하버마스적인 이상적 발화 상황)이 갖추어지면, 사람들이 당파적이지 않은 대안적 관점을 제기하고 받아들일 수 있고, 토의할 수 있으며 신중히 그리고 성실히 판단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정말로 가능하다는 말인가? 숙의 민주주의 지지자들은 나와 다른 인생과 세상을 살았나 보다.


출처: 피시킨 2020, pp. 155-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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