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가지 민주주의 모델 - 피시킨 2020 中

저자는 「챕터 2」에서 다룬 네 가지 원칙을 기반으로 민주주의 모델 네 가지를 제시한다. 저자는 <경쟁적 민주주의>, <엘리트 숙의>, <참여 민주주의>, <숙의 민주주의> 이 네 가지 모델을 「챕터 3」의 중심 내용으로 다루고 있다. 이론상으로는 16가지 모델이 가능하다. 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나머지 열두 가지 모델은 네 가지의 변종이거나, 3중 딜레마에 의해 제외되거나, 네 가치 중 한 가지만을 추구하거나, 넷 모두를 거부하거나, 이상적으로 넷 모두를 모두 달성하려 한다는 한계가 있다. 저자의 주장을 정리하고, 내 입장도 덧붙인다.

1 . 경쟁적 민주주의 모델

이 모델은 <정치적 평등>과 <비폭정>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하여 이 모델의 핵심은 '정치적 권리의 존중'과 '경쟁적 선거를 통한 통치 엘리트의 평화로운 교체'와 '법적이고 헌법적 제약을 통해 통치엘리트가 결정할 수 있는 바에 대한 분명한 한계 설정'이다. 반면 이 모델은 <참여>와 <숙의>에 대해 비관적이기에 '공적 의지 형성 과정의 의의' 혹은 '인민의 의지의 의미'에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는다. 즉, '공적 의지'의 내용은 중요하지 않기에 정당들은 대개 중도성향 유권자의 선호를 만족시키려 하고, 외견상 서로 간에 큰 차이가 발견되지 않게 된다. 그런데도 이 모델에 따르면 "혁명이나 폭력 없이 누가 권력을 쥐게 되는지 결정되며, 시민들의 권리가 보호받을 수 있게 된다면, 그것만 해도 상당한 성취이다."

저자는 이 모델에 다음의 두 비판을 제기한다.

첫째, 일반 시민들이 정말로 복잡한 정책 이슈를 다룰 능력이 없고, 숙의는 정말로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하는가?

둘째, 이 모델은 "대중 참여가 대중을 자극하여 나쁜 일을 하도록, 다수의 횡포를 저지르도록 이끌지도 모른다"고 보지만, <대중참여>와 <다수의 횡포>를 초래하는 군중 심리 사이에 정말로 인과관계가 있는가?

내가 보기에 이 모델의 가장 큰 문제는 정당의 중도화이다.

이 모델은 '공적 의지의 형성'과 '선거의 승패 및 권력 이임'에 집중한 나머지 '공적 의지의 의의나 의미'를 놓친다. 그렇기에 저자의 언급대로 정당은 자연스레 중도화되고, 양 극단의 입장을 지지하는 유권자들은 자신 입장을 대변해 줄 정당에 투표할 기회를 놓치게 된다. 이 모델은 극좌나 극우 성향의 시민들의 <정치적 평등>을 실질적으로 보장해주지 못한다.

2. 엘리트 숙의 모델

이 모델은 <숙의>와 <비폭정>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하여 이 모델의 핵심은 '파벌을 형성하는 정념과 이익'을 방지하고 '차분하고 숙의적인 공동체 감각'을 표현하기 위해, '관리가능할 정도의 소규모 숙의 기구에서 수행하는 토의에서 차분하고 공정한 방식으로 공적 견해'를 거르는 것이다. 여기서 엘리트들은 "선거구 유권자들이 사안에 대해 잘 알게 되고 사실을 파악하며, 찬반양론의 논변을 듣고 사안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볼 이성적 기회를 얻게 될 경우 생각하게 될 바를 고려"할 수 있는 자이고, 그렇기에 이들은 "(자신들은) 잘 알지만, 공중이 사안에 대해 잘 알지 못할 경우 여론의 압력에 저항할 근거를 제공"할 수 있다. 쉽게 알 수 있듯이, 이 모델은 <정치적 평등>과 <참여>에 호의적이지 않다. 유권자 각자에게 실질적 의사결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동등한 기회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델에 따르면 정제된 여론이 전체 대중에게 반사실적이지만, 전체 공동체를 위한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내리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즉, '인민에 의한 숙의'보다 '인민을 위한 숙의'를 더 높은 가치를 지닌다.

저자는 이 모델을 설명하기 위해 페더럴리스트(메디슨)의 사례를 드는데, 그것이 구식이라는 점을 비판하고 있다. 또한 명시적이지 않지만, 저자는 이 모델이 인민의 "실질적 동의의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는 한계를 갖는다고 본다.

내가 보기에 이 모델의 이론적 결함은 엘리트에 대한 과대평가이다.

이 모델에 따르면 엘리트는 일반 대중과 달리 정념과 사사로운 이익에 덜 영향 받으며, 지적으로 우수하여 이상적인 상황에서 전체 인민이 내릴만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자이다. 이런 자가 도대체 가능하다는 말인가? 이런 신의 눈을 가진 근대적 인간 모델은 철학적으로 방어하기 쉽지 않고, 최소한 우리의 정치 경험과는 거리가 멀다.

3. 참여 민주주의 모델

이 모델은 <정치적 평등>과 <참여>에 초점을 맞춘다. 이 모델의 핵심은 '직접 협의(direct consultation)'에 대한 강조이다. 이들은 경쟁적 민주주의 모델과 달리 공적 의지 형성에 큰 가치를 부여하고, 협의의 대상을 넓혀 '선거의 승패 및 권력 이임' 이상의 더 많은 이슈에 관해 협의하도록 요구한다. 이 모델은 '결국 정책 선택의 결과를 감수해야 하는 것은 인민이다'라는 논리를 근거로 대중의 실제 참여를 중시한다. 또한 대중의 참여로 인해 시민들이 '더 큰 (정치적) 효능감을 갖게 되고', 공적 이슈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갖게 되고, '공공 정신의 감각을 획득'하게 된다는 즉, 시민의 참여가 교육적 기능을 수행한다는 이유로 지지받기도 한다.

저자가 제기하는 비판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 참여 민주주의 모델은 대규모 국민 국가에서 시행할 수 있는 것인가?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참여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 참여 민주주의 옹호자는 그것을 제시해야 한다.

둘째, 자발적 참여가 대중의 거울이 되지는 못한다. 참여 왜곡의 문제를 피할 수 없다.

셋째, 참여 민주주의 모델 옹호자가 제기하는 참여로 인한 교육적 기능이 정말로 참여에 의한 것인지 숙의에 의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만일 참여가 토의를 포함하지 못하거나, 비밀투표처럼 무언이나 익명으로만 진행되는 '주민투표나 대중프라이머리'의 형식을 취하는 경우, 교육적 기능을 수행할지 의문이다. 동시에 대규모 차원에서 시행되는 참여가 여전히 교육적 기능을 취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따라서 교육적 기능을 목표로 할 것이라면, "직접 숙의를 목표로 하거나 숙의적 요소를 가질 제도적 설계를 목표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내가 보기에 이 모델의 이론적 결함은 대중(혹은 공적 의지)에 대한 과대평가이다.

참여 민주주의 모델은 교육적 기능을 통해 공적 의지의 <다수의 횡포> 가능성을 줄이고 합리적 선택의 기회를 증진하려 한다. 하지만 저자의 말대로 이것이 실제로 가능한지 의문이다. 이것이 규범적으로 추구해야 할 모델일 수는 있겠지만, 엘리트 숙의 모델과 마찬가지로 최소한 우리의 정치 경험과는 거리가 멀다.

또한 '결국 정책 선택의 결과를 감수해야 하는 것은 인민이다'라는 논리는 너무 보잘것없다. '결과를 감수한다'에서 '선택권자여야 함'은 도출되지 않는다.

4. 숙의 민주주의 모델

이 모델은 <평등>과 <숙의>에 초점을 맞춘다. 이 모델의 핵심은 '인민 자신에 의한 숙의'에 대한 강조이다. 이 모델은 다양한 전략을 통해 실현 가능한데, 저자는 그중 한 가지인 소우주 숙의(microcosmic deliberation) 전략에 따라 모델을 설명한다. 소우주 숙의는 엘리트 숙의와 달리 무작위 추출법을 통해 일반시민의 대표 집단을 선발하고, 선발된 소우주가 "좋은 조건 하에서 사람들이 생각할 바"를 대표하여 달성한다는 점에서 <평등>과 <숙의>를 결합한다. 이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참여 왜곡은 "사람들을 초대하기 전에 광범위한 설문지를 배포하고 수합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고, 질적 숙의는 그를 위한 다섯 요소를 잘 만족시킬 전략적 설계를 통해 이룰 수 있다.

저자가 소개하고 반박하는 숙의 민주주의 모델의 비판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소우주는 재선을 위해 출마하지 않기에 책임을 회피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를 거꾸로 생각해 "재선을 위해 출마하지 않기 때문에 소우주는 제기되는 논변의 장점에 대해 진지하게 초점을 맞출 수 있고", "그들은 자신들이 추출되었던 전체 인구가 결과를 감수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자신들도 결과를 감수해야 한다"며 반박한다. 이러한 보완 요소는 '그라피 라로노몬' 따위의 고대 아테네 민회 제도에서도 찾을 수 있다.

둘째, 아테네의 평의회 같은 역사적인 숙의 민주주의 모델은 소규모의 면대면 구조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저자는 온라인상의 소우주를 통해 면대면 구조를 유지하면서도 모델을 대규모로 확장할 수 있다고 반박한다.

내가 보기에 이 모델은 숙의 과정 참가자들을 막연하게 신뢰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저자는 이 모델 지지자라 문제를 축소하고 있다.

질적 숙의를 위한 요소 중 하나인 '성실성'과 관련하여, 참가자들이 논변의 장점을 성실하게 고려하지 않는 경우를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저자는 롤즈를 인용하며 '참가자들이 올바른 결론에 도달하고자 하는 '바람'을 가질 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여기지만, 이런 가정을 지지해줄 근거가 무엇인가? 나는 숙의 모델 지지자들이 은근히 무균질의 인간을 전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동등한 고려'와 관련하여, 참가자들이 논변을 제기한 사람이 누구인가와 상관없이 논변의 장단점을 평가하지 않는 경우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저자는 이런 왜곡의 가능성을 "올바른 설계를 통해 피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그 올바른 설계란 도대체 무엇인가? 저자는 '참여 민주주의 옹호자는 참여 공간을 만들기 위한 구체적 노력을 제시해야 한다'고 비판하면서, 같은 잣대를 자신이 옹호하는 모델에는 대지 못하고 있다.

이에 더해, 저자가 제시하는 소우주 숙의 전략이 엘리트 숙의와 얼마나 다른지 잘 모르겠다. 소우주 숙의 전략이 무작위로 시민을 추출한 후, 그들을 사실상 판단에 관한 엘리트로 양성하여 정치적 판단을 내리도록 만드는 것 아닌가? 이 양성 과정에서 일반 시민과 대표하는 소우주 사이에서 생성되는 갭 때문에 (생겨야만 숙의가 가능하고, 숙의에 따른 올바른 판단이 가능하다) 소우주가 대표성을 상실하는 것은 아닌가?


보론: 왜 열여섯 가지가 아닌 네 가지 민주주의 모델만 다루는가?

굳이 정리할 필요를 못느껴서 그대로 스캔.





출처: 피시킨 2020, pp. 125-155; pp. 32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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