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로워서 번역했습니다. 논의의 맥락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듯합니다. @lazy
(0) 서문
이 책의 중심 주제는, 구조에 대한 리얼리즘(realism about structure)이다. 세상은 특징적인 구조와 (그에 대한) 특권적인 기술을 가진다. (이러한) 재현이 완전히 성공적이려면, 참인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재현물이 반드시 옳은 개념(concepts)을 사용해야 한다. 그럼으로서, 개념적 구조가 실제의 구조와 정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세상이라는 책을 쓰는" 객관적이고 정확한 방법이다.
술어 구조(predicate structure)에 대한 리얼리즘은 꽤 널리 수용된다. (특히 데이빗 루이스의 영향을 받은) 다수는 몇 술어(e.g. Green)는 다른 술어(e.g. Grue)보다 객관적인 유사성을 더 잘 표기하며, 본질을 딱 들어맞게 깎아낸 것(carving nature at the joints)이라 본다. 하지만 이 리얼리즘은 술부를 넘어, 다른 문법적 범주로 확장되어야 한다. 논리적 표현들을 포함해서 말이다. (중략)
나는 구조를 근본성(fundamentality)와 연관시킨다. 딱 들어맞게 깎인 관념(notion)은 근본적인 관념이다. 사실은 딱 들어맞게 깎인 용어로 표현될 때 근본적이다. 형이상학의 핵심적 임무는 언제나 현상의 이면에 있는 궁극적인/근본적인 실제를 포착하는 것이다. 나는 이 임무를 실제의 구조를 탐구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어떤 표현이 딱 들어맞게 깎였는지에 관한 질문은, 실제가 얼마나 많은 구조를 포함하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실제가 인과적(causal)/존재론적(ontological)/양상적(modal) 구조를 포함하는지는, 인과적 술어/양화사/양상 연산가 딱 들어맞게 깎였는지에 대한 문제다. 이들 질문은 메타-형이상학의 중심에 놓인다. 예컨대, 존재론에 대한 질문이 "단지 말의 문제"라 주장하는 사람들은, 실제가 존재론적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보는 것으로 (자비롭게, be best)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축소주의적 메타-형이상학적 입장은 그 자체로, 형이상학적 입장이기 때문이다.
(1) 구조
필연성, 본질, 개념 혹은 존재론에 관한 담론은 실제의 구조를 밝히는데 도움을 줄지 모른다. 하지만 궁극적 목표는 구조 그 자체다. 세상이 어떠한지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층위에서 밝혀내는 것이다.
(1.1) 구조 ; 첫 인상
구조를 파악하는 것은 패턴을 파악하는 것이다. 이는 세상을 기술하기에 정확한 범주를 찾아내는 것이다. 플라톤에서 말을 가져오자면, "실제를 딱 들어맞게 깎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근본적으로 세상이 어떠한지를 밝히는 일이다. 우리가 원래 어떻게 말하는지/생각하는지에 대비해서 말이다.
(중략)
[다음 사례는 이해를 돕기 위해, 역자가 의역했으며 임의로 추가한 내용이 존재합니다.]
아니면 유체로 가득한 우주를 상상해보자. 면이 이 우주를 반으로 나누는데, 정중앙을 기준으로 한쪽은 모두 빨강색이며 다른쪽은 모두 파란색이다. 이제 이 우주를 마주친 사람들을 생각해보자. 이 사람들은 빨강/파랑으로 나눠진 면에 대한 특별한 인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은 빨강/파랑으로 우주가 정중앙에서 반반 나누어졌다 생각하는 대신, 대각선 방향으로 면이 나누어진다 생각했다. 이들은 빨강/파랑이라는 술어를 사용하는 대신, 그들이 면을 나눈 방식에 맞게 각 면의 모든 영역에 동등하게 적용될 술어를 가졌다. 이들 술어는 빨강/파랑이라는 구분선을 무시한다. (즉, 일부는 빨강 다수에 파랑 일부를 가지며, 일부는 파랑 다수에 빨강 일부를 가진다.) 이들은 빨강이 대수인 면을 "bred"로, 파랑이 다수인 면을 "rue"라 불렀다.
이 사람들이 실수를 했다는 건 명백해 보인다. 하지만 이들의 실수는 빨강/파랑 면이 어디있는지 착각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애당초 이들은 빨강-파랑에 대해서 무언가를 주장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개념을 적용하는 것에서도 실수하지 않았다. Bred라 불린 면은 실제로 bred이며, Rue라 불린 면은 실제로 rue다. 문제는 그들이 잘못된 개념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들은 세상을 부정확하게 깎아냈다. 면을 빨강/파랑으로 나누었다고 생각하지 않음으로서, 그들은 무언가를 놓쳤다. 비록 그들의 믿음이 사실일지라도, 그들의 믿음이 세상의 구조와 정합하지 않는다.
(1.2.) 구조에 대한 철학적 회의주의
(중략)
철학자들은 계속 질문한다. 빨강-파랑 세상을 대각선의 면으로 분할할 것이 무엇이 문제인가? 모든 bred는 실제로 bred다. 그들은 모두 대각선 면의 왼쪽에 있다는 특징(feature)을 공유한다. 혹자는 모든 bred가 닮지 않았다고 반박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몇은 빨강이고 몇은 파랑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철학자들은 이 세상을 정중앙으로 나누는 것도 딱히 나은 방법은 아니라 답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누군가는 모든 빨강이 닮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몇은 bred고, 몇은 rue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철학자들이 "특징"에 대해 생각하는 바를 따르면, 우리는 어떠한 두 개체(objects)도 무한히 많은 특징을 공유하며, 무한히 많은 특징에서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중략)
당연히, 모두는 "전자(electron)에 속하는 것"과 "전자나 소에 속하는 것" 사이에 어떠한 차이가 있다는 점에는 동의할 것이다. 단적으로, 일상 영어는 전자를 가리키기 위한 단일한 단어를 가진다. 이들과 암스트롱(D. Armstrong)과 루이스(David Lewis)의 차이는, 후자는 이 구분이 객관적(objective)이라 여긴다는 점이다. 구조 역시 객관적이라 여겨진다. 이 객관성이 어떠한 객관성인지는 어려운 문제다. 하지만 직곽적인 아이디어는 깔끔하다. 딱 들어맞게 깎인 속성(property)/단어/개념은 인간 언어/개념적 계획/생물학/기타 등등에서의 개념의 위치와 무관하다. 그러므로 "근본적인"은 개념보다는, 형이상학적 유형의 근본성을 의미한다.
(1.3.) 형이상학에서의 구조 ; 프리뷰
(중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