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철학의 동향에 대해 전체적인 그림을 그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동안 몰랐거나 이름만 대강 알던 인물들 사이의 관계가 보여서 유익하네요. 다만,
라고 하신 것은 현재의 분석적 형이상학을 너무 칸트의 초월철학처럼 해석하신 게 아닌가 합니다. 제가 보기에, 형이상학자들은 말 그대로 '실재'가 어떻게 구조화되어 있는지에 대해 주장하고 있어서요. 즉, 자신들의 탐구가 단순히 우리의 사유가 전제해야 하는 필연적 개념에 대한 탐구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세상을 이루고 있는 가장 근원적인 존재"에 관한 탐구라고 생각하는 거죠. 가령, 테드 사이더는 Writing the Book of the World에서 (이름부터가 도발적이죠? '세계' 전체를 대상으로 책을 쓰겠다니요. 데리다가 『그라마톨로지』에서 '책의 종언'이라는 용어로 비판했던 철학적 작업을 그야말로 대놓고 하겠다는 제목이니 말이에요.) 형이상학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Metaphysics, at bottom, is about the fundamental structure of reality. Not about what’s necessarily true. Not about what properties are essential. Not about conceptual analysis. Not about what there is. Structure. (T. Sider, Writing the Book of the World, Oxford: Clarendon Press, 2011, p. 1)
형이상학은, 기본적으로, 세계의 근본 구조에 대한 학문이다. 형이상학은 무엇이 필연적으로 참인지에 대한 학문이 아니다. 무슨 속성들이 본질적인지에 대한 학문이 아니다. 개념적 분석에 대한 학문이 아니다. 무엇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학문이 아니다. 구조에 대한 학문이다.
아마 Mandala님이 일종의 '자비의 원칙'에 따라 형이상학자들을 좀 더 변호해주고(?) 싶은 마음에 오늘날 형이상학을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이 세상을 사유하는데 사용하는 여러 개념들에 관한 연구"라고 설명하신 게 아닌가 합니다. "21세기에도 설마 '칸트 이전적' 형이상학을 하는 철학자들은 없을 거야?!"라고 생각한 것 같아 보입니다. 그렇지만, 제가 느끼기에, 분석 형이상학자들의 기획은 (좋은 의미에서는) 훨씬 '솔직'하고, (나쁜 의미에서는) 굉장히 '단순'합니다. 대부분의 분석형이상학자들은 칸트의 초월철학을 전혀 고려의 대상으로 삼고 있지조차 않은 것 같아요. 20세기 초반에 등장한 대륙과 영미의 '반형이상학' 운동도 무시해버리는 것 같고요. 단지 루이스와 크립키 이후의 작업들에만 관심이 있죠. 루이스와 크립키가 그 이전 작업들을 이론적으로 극복했다고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 물론, 분석적 형이상학에 대한 이런 평가에도 제 선입견이 강하게 들어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저는 형이상학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라, 사이더 같은 사람들이 일종의 '낡은' 작업에 천착하고 있다고 너무 쉽게 단정해 버리는 경향이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