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철학의 현재에 대한 (내가 생각하는) 간략한 지도들

흥미로워서 번역했습니다. 논의의 맥락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듯합니다. @lazy

(0) 서문

이 책의 중심 주제는, 구조에 대한 리얼리즘(realism about structure)이다. 세상은 특징적인 구조와 (그에 대한) 특권적인 기술을 가진다. (이러한) 재현이 완전히 성공적이려면, 참인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재현물이 반드시 옳은 개념(concepts)을 사용해야 한다. 그럼으로서, 개념적 구조가 실제의 구조와 정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세상이라는 책을 쓰는" 객관적이고 정확한 방법이다.
술어 구조(predicate structure)에 대한 리얼리즘은 꽤 널리 수용된다. (특히 데이빗 루이스의 영향을 받은) 다수는 몇 술어(e.g. Green)는 다른 술어(e.g. Grue)보다 객관적인 유사성을 더 잘 표기하며, 본질을 딱 들어맞게 깎아낸 것(carving nature at the joints)이라 본다. 하지만 이 리얼리즘은 술부를 넘어, 다른 문법적 범주로 확장되어야 한다. 논리적 표현들을 포함해서 말이다. (중략)

나는 구조를 근본성(fundamentality)와 연관시킨다. 딱 들어맞게 깎인 관념(notion)은 근본적인 관념이다. 사실은 딱 들어맞게 깎인 용어로 표현될 때 근본적이다. 형이상학의 핵심적 임무는 언제나 현상의 이면에 있는 궁극적인/근본적인 실제를 포착하는 것이다. 나는 이 임무를 실제의 구조를 탐구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어떤 표현이 딱 들어맞게 깎였는지에 관한 질문은, 실제가 얼마나 많은 구조를 포함하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실제가 인과적(causal)/존재론적(ontological)/양상적(modal) 구조를 포함하는지는, 인과적 술어/양화사/양상 연산가 딱 들어맞게 깎였는지에 대한 문제다. 이들 질문은 메타-형이상학의 중심에 놓인다. 예컨대, 존재론에 대한 질문이 "단지 말의 문제"라 주장하는 사람들은, 실제가 존재론적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보는 것으로 (자비롭게, be best)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축소주의적 메타-형이상학적 입장은 그 자체로, 형이상학적 입장이기 때문이다.

(1) 구조

필연성, 본질, 개념 혹은 존재론에 관한 담론은 실제의 구조를 밝히는데 도움을 줄지 모른다. 하지만 궁극적 목표는 구조 그 자체다. 세상이 어떠한지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층위에서 밝혀내는 것이다.

(1.1) 구조 ; 첫 인상

구조를 파악하는 것은 패턴을 파악하는 것이다. 이는 세상을 기술하기에 정확한 범주를 찾아내는 것이다. 플라톤에서 말을 가져오자면, "실제를 딱 들어맞게 깎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근본적으로 세상이 어떠한지를 밝히는 일이다. 우리가 원래 어떻게 말하는지/생각하는지에 대비해서 말이다.

(중략)

[다음 사례는 이해를 돕기 위해, 역자가 의역했으며 임의로 추가한 내용이 존재합니다.]

아니면 유체로 가득한 우주를 상상해보자. 면이 이 우주를 반으로 나누는데, 정중앙을 기준으로 한쪽은 모두 빨강색이며 다른쪽은 모두 파란색이다. 이제 이 우주를 마주친 사람들을 생각해보자. 이 사람들은 빨강/파랑으로 나눠진 면에 대한 특별한 인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은 빨강/파랑으로 우주가 정중앙에서 반반 나누어졌다 생각하는 대신, 대각선 방향으로 면이 나누어진다 생각했다. 이들은 빨강/파랑이라는 술어를 사용하는 대신, 그들이 면을 나눈 방식에 맞게 각 면의 모든 영역에 동등하게 적용될 술어를 가졌다. 이들 술어는 빨강/파랑이라는 구분선을 무시한다. (즉, 일부는 빨강 다수에 파랑 일부를 가지며, 일부는 파랑 다수에 빨강 일부를 가진다.) 이들은 빨강이 대수인 면을 "bred"로, 파랑이 다수인 면을 "rue"라 불렀다.
이 사람들이 실수를 했다는 건 명백해 보인다. 하지만 이들의 실수는 빨강/파랑 면이 어디있는지 착각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애당초 이들은 빨강-파랑에 대해서 무언가를 주장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개념을 적용하는 것에서도 실수하지 않았다. Bred라 불린 면은 실제로 bred이며, Rue라 불린 면은 실제로 rue다. 문제는 그들이 잘못된 개념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들은 세상을 부정확하게 깎아냈다. 면을 빨강/파랑으로 나누었다고 생각하지 않음으로서, 그들은 무언가를 놓쳤다. 비록 그들의 믿음이 사실일지라도, 그들의 믿음이 세상의 구조와 정합하지 않는다.

(1.2.) 구조에 대한 철학적 회의주의

(중략)

철학자들은 계속 질문한다. 빨강-파랑 세상을 대각선의 면으로 분할할 것이 무엇이 문제인가? 모든 bred는 실제로 bred다. 그들은 모두 대각선 면의 왼쪽에 있다는 특징(feature)을 공유한다. 혹자는 모든 bred가 닮지 않았다고 반박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몇은 빨강이고 몇은 파랑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철학자들은 이 세상을 정중앙으로 나누는 것도 딱히 나은 방법은 아니라 답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누군가는 모든 빨강이 닮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몇은 bred고, 몇은 rue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철학자들이 "특징"에 대해 생각하는 바를 따르면, 우리는 어떠한 두 개체(objects)도 무한히 많은 특징을 공유하며, 무한히 많은 특징에서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중략)

당연히, 모두는 "전자(electron)에 속하는 것"과 "전자나 소에 속하는 것" 사이에 어떠한 차이가 있다는 점에는 동의할 것이다. 단적으로, 일상 영어는 전자를 가리키기 위한 단일한 단어를 가진다. 이들과 암스트롱(D. Armstrong)과 루이스(David Lewis)의 차이는, 후자는 이 구분이 객관적(objective)이라 여긴다는 점이다. 구조 역시 객관적이라 여겨진다. 이 객관성이 어떠한 객관성인지는 어려운 문제다. 하지만 직곽적인 아이디어는 깔끔하다. 딱 들어맞게 깎인 속성(property)/단어/개념은 인간 언어/개념적 계획/생물학/기타 등등에서의 개념의 위치와 무관하다. 그러므로 "근본적인"은 개념보다는, 형이상학적 유형의 근본성을 의미한다.

(1.3.) 형이상학에서의 구조 ; 프리뷰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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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답해드리려고 했는데, Mandala님이 이미 1장의 주요 내용들을 번역하셨네요;; 사실, 저 부분은 사이더도 곁가지로 제시하고 넘어가는 부분이고, 저도 곁가지로 인용한 것이라, 딱히 자세한 설명이 덧붙여져 있지는 않습니다. 단지 "(a) 형이상학은 실재의 '구조'에 대한 탐구이다. (b) '구조'를 탐구한다는 것은 무엇이 '자연을 결대로 깎는(carving nature at the joints)' 개념인지를 탐구한다는 것이다. (c) 이 책에서는 자세하게 다루지 않을 것이지만, 나는 수학, 논리학, 자연과학의 몇몇 개념들이 자연의 구조를 잘 깎아내고 있다고 생각한다."와 같은 맥락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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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로만 봤을 땐 확실히 사이더는 구조가 형이상학적으로 실재한다는 주장을 가지고 있는 것 같네요.

그리고 사이더는 그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그러하다’만큼의 형이상학적 특권을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의 구조에 부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경우에 세계를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이 특정한 인식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경우에만(예를 들어 인과를 인과로서 이해할 수 있는 경우에만)으로 한정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진화적으로 전혀 다른 방향성을 가진 인식 주체(예를 들어 문어) 같은 대상은 실제 구조에 대한 사이더가 언급한 적절한 깎아내기가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형이상학을 제대로 공부한 적이 없어서 적절한 생각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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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바로 이 점에서 반 프라센이나 밀리칸의 입장에 관심을 가져요. 이 사람들은, 강조점은 좀 다르지만, '이론'이나 '개념'을 진화론적 생존경쟁의 결과물로 설명해서요. 실재의 구조라든가 인식의 필연적 조건 따위를 이들의 '진화론적' 혹은 '자연주의적' 입장에서는 상정할 필요가 없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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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 입장을 좀 더 명료하게 말씀드려야 할 것 같네요. 실제(reality)와 형이상학에 대한 사이더와 제 견해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a) 둘 다 형이상학이 세상의 구조의 문제라 본다.
(b) 이 구조는 (인지자에 따라 달라지는) 주관적인 것이 아닌 객관적인 것이다.

차이는

(c) 사이더는 이 구조를 실제의 영역에 놓고, 저는 개념의 영역에 놓는겁니다.

사실 이 구분은 미세한 편입니다.

여기서 말했다시피, 사이더가 이 구조를 연구하는데 개념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건 아닙니다. 다만 "딱 들어맞게 깎인" 개념을 쓰겠다는 거죠. (여러가질 고려해보면 직관과 수학/논리학의 형식적 도구를 활용해 이러겠네요.) 따라서 (사이더가 대비시키는) 여기서 "원래 말해지는 개념"은 우리의 일상 언어가 가진 여러 유사어들이 뒤엉킨 개념을 말합니다.
제가 예전에 번역한 "지식에 대한 분석"에서 맥락주의가 이러한 뒤엉킨 개념에서 시작하는 이론의 예 같습니다. 이들은 우리의 일상 언어인 "알다"가 다양한 의미를 지닌며 그게 어떤건지 명료화하려고하죠. 하지만 동시에 이들은 "지식"을 어떻게 필요충분조건으로 정의할 수 있는지 (즉 사이더에 따르면 "딱 들어맞는 개념"으로 깎는 것)와는 구분되는 접근이죠.

저도 개념에 놓는다 표현했지만, 연구 방법이나 방향성 자체는 사이더와 별 차이가 없습니다. 저도 굳이 말하자면 일상 언어를 명료하게 하는 문제보다는, 딱 들어맞는 개념들의 구조를 찾고자 하는 것이니깐요.

차이가 있다면,

이정도 겠죠. 사이더는 실제의 구조를 반영하는 단일 모델을, 저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보지만) 다른 모델이 있을 수도 있다 보는거죠.

(2)

제 인간종이라는 한정에서도 알 수 있으시겠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저희가 가진 형이상학 모델과 완전히 다른 모델이 가능하려면

다른 종이여야 되지 않나 생각합니다. 문어든 외계인이든 그렇죠.
문제는 과연 이 다른 종의 형이상학을 인간이 이해할 수 있을까요?

윤님은 이렇게 말하시지만, 사실 저는 좀 회의적입니다. 다른 종이 가진 인지적 모델의 가능성은 인정합니다. (따라서 그런게 있다면 사이더가 말한 특권은 오류인 셈이죠) 하지만 이 모델을 인간이 이해하는게 가능할지 의문스럽네요.

아마 이 모델을 연구-제시하려면 지금과는 많이 다른 방식의 방법론과 철학이 제시되어야할듯합니다.

(3)

피터 고드프리 스미스가 열심히 문어를 연구한다지만 이 연구의 명백한 한계는 문어가 저희만큼의 추상적인 사고를 하는지 절대 알 수 없다는 점입니다.

인간의 추상적 사고는 대부분 언어를 통해 이해되는데, 인간이 문어의 언어를 (그런게 있다면) 이해하는 날이 올까요? 쉽지 않아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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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다른 종이 가진 인지적 모델"을 상상하는 것은 자칫 데이비슨이 강력하게 비판하였던 통약불가능성 문제에 빠질 수 있어서, 저도 굳이 이런 모델에 대한 상상을 논증의 근거로 삼고 싶지는 않아요. 물론, 비트겐슈타인은 자주 '사자의 언어'나 '다른 부족의 언어'를 상상하면서 매우 흥미로운 사고실험을 전개하지만, 그조차도 자신의 사고실험에 대해 명확히 제한을 두죠.

"I may occasionally produce new interpretations, not in order to suggest they are right, but in order to show that the old interpretation and the new are equally arbitrary. I will only invent a new interpretation to put side by side with an old one and say, "Here, choose, take your pick." I will only make gas to expel old gas."(L. Wittgenstein, Wittgenstein's Lectures on the Foundations of Mathematics, Cambridge, 1939, C. Diamond (ed.), Ithaca, New York: Cornell University Press, 1976, p. 14.)

나는 종종 새로운 해석을 만들 수도 있다. 그 해석이 옳다는 것을 제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낡은 해석과 새 해석이 동일하게 자의적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나는 단지 낡은 해석과 함께 나란히 세워두기 위해, 그리고 "여기서 선택해 봐라. 골라봐라."라고 말하기 위해, 새로운 해석을 발명할 것이다. 나는 단지 낡은 허풍을 제거하기 위해 새로운 허풍을 만들 것이다.

'진화론'에 대한 옹호도, 다른 종은 다른 모델에 따라 사고할 지도 모른다고 주장하기 위해서 옹호한다기보다는, 단지 우리의 이론이나 개념이 반드시 실재와 대응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옹호해요. 생존경쟁의 결과로 형성된 것이 이론이고 개념이라면, 그 이론과 개념은 '유용성'을 지니기만 하면 될 뿐이니까요. 다른 종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우리가 특정한 이론과 개념을 쓰는 이유는 '유용하기 때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게 진화론적 설명의 교훈이라고 생각해요.

(1)

그래서 사실 사이더나 저나 윤님의 견해가 미묘한 차이만 있다는게 제 해석입니다. (물론 윤님은 이 차이가 중요하다고 보실 수도 있지만요.)

사이더 ; 구조는 단일하며 실제의 영역에 있다.
나 ; 구조는 여러 개일 수 있으나 적어도 인간 종에겐 하나인 듯하다. 그래서 일단 난 개념의 영역이라 하겠다.
윤 ; 구조는 여러 개일 수 있다. (사실 그 이후부터 윤님의 명확한 입장을 제가 알긴 어렵습니다만 그렇다고 아주 강한 다원주의를 주장하시진 않을 것 같습니다.)

사실 사이더 입장에서는 다른 모델은 그저 가능성일 뿐이니, 없다고 보는게 더 맞지 않냐 주장하면 답할 말이 좀 궁색하게 느껴지거든요.

(2)

이 부분도 사실 사이더도 한정된 영역에서는 동의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합니다. 사이더가 자기 책에서 물리학/수학/논리학이 실재에 대응하는 개념이라고 했지만, 그렇다고 도덕적 개념들을 내다버리다고 했을 것 같지는 않거든요. 도덕적 영역에서는 오히려 그 실용성이 진리조건일 수도 있죠.
(이건 사실 사이더의 스승-스승인 Crispin wright이 주장한 진리 다원주의에 더 부합하는 설명일 거 같긴합니다.)

(3)

사실 이건 복잡하고 단순화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습니다. 유용성이란 것이 어느 "기점"을 기준으로 하는지 정하기 난해하죠.
단순화해서 설명하자면, 맹장은 인간 몸에 아무런 기능을 하지 않습니다. 유용성이 없죠. 근데 인간 몸에 남아있습니다. 아마 과거 어느 순간에는 유용성이 있어서 형성되었겠지만 바뀐 환경에서는 그 유용성을 잃어버렸고, 발생학적 한계 때문에 사라지지 않고 잔존물로 남아있을 거겠죠.

이 이야기는 우리의 개념과 이론 모두에 적용해볼 수 있습니다. 동북아철학의 리/기 역시 과거에는 유용했지만 오늘날에는 그저 잔존물처럼 남아있는 것을 수도 있죠.
동시에 미래에는 다시 유용해질 수 있죠.

무엇의 유용성을 평가하는 건 쉽지 않은 일처럼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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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실재가 버클리가 생각하듯 무규정적인 것이 아니라면. 즉, 그것이 어떤 구조를 갖고 있다고 한다면, 또다른 인지적 모델을 통한 반박이 가능성 측면에서 희박하다는 데에 동의합니다. 뿐만 아니라 소위 지식에 있어서 축적이 가능한 인간은 이런 실재를 저절하게 깎아낼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고 밖엔 볼 수 없겠죠.(구조적 실재론이 말하듯이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 이 문제는 인지적 성공을 무엇으로 두느냐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비버는 물에 가까운 곳에 작은 나무 다수가 있고 먼 곳에 큰 나무 하나가 있더라도 위협을 무릎쓰고 큰 나무를 캐고 옵니다.

인간이 비버의 행동을 봤을 때 우리는 두가지 반응이 가능합니다. 인식은 동일하게 했고 그렇기에 비 합리적이지만 갖고 있던 본능이(욕구가) 그리하도록 했다. 혹는 합리성의 기준 자체가 달라 비버로서 적절한 인식을 했다.

전자라면 이 비버는 인지적으로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후자라면 성공했지요. 그런데 비버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생존’해 있고 나름 성공적으로 생태계에 자리잡았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이런 경우 인지적으로도 성공했다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하게 느껴집니다(이는 직관의 차이겠지요) 그렇다면 전 비버의 인식체계가 우리와 달랐기에 성공했다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그러나 전자라면 인지적으로는 실패했지만 여타 요인으로 인해 성공한 종이 되었다. 라고 주장하겠죠 이런 경우 인지적 성공은 우리가 가진 합리성에 합치하는 ‘행동’을 했느냐 안했는냐로 그 생물종의 인지적 성공을 판단하게 됩니다.이런 경우 인간은 거의 유일하게 대부분의 인지적 성공이 가능한 종입니다.

즉, 우리가 진화론적 성공을 인지적 성공과 묶어낼 것인지 그렇지 않을지에 새로운 인지모델이 사이더에게 비판이 될 수 있을지가 결정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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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신 견해가 정확히 누굴 타깃으로 하는지 잘 모르겠네요.

사이더에 대한 비판이라면, 사이더는 적절한 비판이 아니라 여길 것같습니다. 사이더가 주장하는 바는 어디까지나 (모든 인지적 체계/개념이 아니라) 세상의 근본적인 구조에 관한 것, 즉 형이상학이니깐요.

비버의 인지적 성공은 형이상학이라기보단 지각(perception)과 심리철학-행위철학의 영역에 가까워 보입니다. (특히 행동할 이유 [reason for action]을 어떻게 종-초월적으로 프레이밍해 볼 수 있는가.)

(2)

말씀해주신 영역에서 다른 종의 인지가 기존 이론을 개선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데 동의합니다. 실제로 그런 방향으로 움직이는 학자들이 꽤 있고요.

(SEP의 다음 아티클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합니다. Animal Cognition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저도 개인적으로 사회성은 그런 방식으로 연구해보면 흥미롭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2-1)

여담이지만, 동물의 사회성은 인간과 얼마나 유전적으로 밀접한지와는 상관이 없는 편입니다.

인간과 가장 가까운 침팬지/보노보/고릴라는 모두 꽤 고도의 사회성을 유지합니다. 하지만 오랑우탄은 일평생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지냅니다. (사회성이 없는 것이죠.)

한편 인간과 유전적으로 거리가 꽤 먼 개미는 인간보다 (어느 지점에 있어서는) 훨씬 고도의 사회성을 가집니다.

그렇다면 이 사회성에는 단순히 생물학적-신경학적 기반의 차이에 의존하는게 아니라, 각 종이 가진 "인지적 성공"에 달려있는 것 아닐까요? 그렇다면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을 추출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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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궁색하다'고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요? 우리가 무엇을 주장할 수 있고, 무엇을 주장할 수 없는지를 정확히 알도록 하는 게 철학이잖아요. Mandala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a) "구체적인 '모델'이 무엇이냐?"

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사이더나, Mandala님이나, 저나 크게 차이가 없지만, (게다가, 사실 저는 여러 가지 철학적 사안에 대해서 실재론을 더 옹호하는 편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b) "그러한 '모델'의 철학적 지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섣부르게 논리적 비약을 하지 않는 게 미덕이라고 생각해요. 무턱대고 '실재'를 인간과 독립적인 영역으로 상정한 채, 우리가 구조에 대해 가지고 있는 '모델'을 그 영역에 투영시키려 해서는 안 되는 거죠. (칸트가 이거 하나 잘한 것만으로 철학사에 영원히 남을 거인이 되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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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실 이 지점부터는 개인의 취향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축소주의적이냐 아니면 좀 더 과감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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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학자이면서도 형이상학이 우리의 개념체계(conceptual scheme)에 대한 것이라고 보면서, '명제는 있다', '수는 있다' 등 실재론을 주장하는 분석철학자로 에이미 토마슨(Amie Thomasson)이 있더군요!

토마슨은 현상학 연구를 한 적도 있는 걸로 보아, 철학사를 존중하면서도 형이상학을 하는 것 같아 멋있더라고요!

(그런 의미에서 [Ontology Made Easy]라는 책을 모두에게 강추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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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이 포스팅을 다시 읽고 생각이 든 점입니다만, 본 포스팅이 전통적인 소위 "M&E" 및 관련 분야에 대해 통찰력 있는 조망을 제공하는 것과는 별도로 "분석철학" 전체에 대한 '간략한 지도'를 제시하는 것은 정말 더이상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젠 너무나 다양한 분야들에 관해서 다양한 접근을 해나가고 있으니까요.

일례로 (물론 위 글에서도 '응용윤리'가 언급이 되기는 했습니다만), 사회철학적/윤리학적 주제는 이제 전통적인 M&E보다도 더 큰 존재감을 발휘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런 현상에 대해서는 '내재적' 설명 뿐 아니라 범사회적인 '외재적' 설명도 가능할 법 합니다.)

사실 철학적인 추론이라고 하긴 그렇습니다만, NYU 철학과에서 2022년에 '인식적 부정의' 개념으로 명망 높은 Miranda Fricker를 (NYU에서 으레 그러하듯) 석좌교수로 영입해온 것은 위 흐름을 잘 보여주는 예시가 아닐까 싶네요.

그런데 이런 '주류'의 흐름은 어찌되었건, 제 생각에 다수의 (특히나 정년보장이 된!) 철학자들은 자기가 해오던걸 그냥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유망한 분야의 새로운 결과물이 자기가 하던 거에 도움이 되는지 다들 기웃거려보긴 하겠습니다만, 결국 세부 분야가 다르면 그건 그쪽 전문가들 얘기를 경청할 일이지 자기가 함부로 끼어들 수 있는 주제가 아니니까요. 이러다보니 결국 "분석철학"이 기존에 받던 여러 편견들이 사라지고 있는 와중에도, 예외적으로 '분업화'라는 특성만큼은 더 공고해진다는 느낌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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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말씀이 맞는 듯 합니다. 생각해보면, 결국 제가 여기 적은 것이란 2020년대 지금 학계 커리큘럼에서 완전히 정착한 (상대적인) 옛 거장들의 연구 분야지, 지금 이머징하고 있는 필드는 아닌 셈이죠. 어떤 의미에서, 저는 이제 완전히 커리큘럼의 일부로 들어간 (상대적으로 최신의) 분야를 나름대로 설명하고자 한 셈입니다.

(2)

이 부분에 있어서도, 특히 동의합니다. 요근래 들어서, 사회 존재론/응용 언어 철학/(메타 윤리학이 아닌) 규범 - 응용 윤리학적 주제들에 대한 관심이 (학계 전반에 걸쳐) 크게 번지고 있는 듯합니다. 아마 이것이 (그동안에는) 그저 "응용"이라는 관심 있는 자들만의 관심사로 남았다면, 이제는 학계 전반의 커리큘럼에 포함될 듯합니다.

그리고 최근 다른 분과 대화를 하면서 든 생각이지만, 저는 이러한 분석철학의 발전이 '내재적'이기 보단 외재적이라 생각합니다. (여기서 내재적이란 분석 철학 내부의 코어한 이론적 관심사를 토대로, 이 관심사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는 과정이라면, 외재적이란 그동안 철학 내부에서 다루어지지 않은 주제들이 당대 사회의 관심이 됨으로서, 분석 철학 내부에서 논의되기 시작되는 과정이라는 의미입니다.)

다만 이러한 흐름이 단발성일지, 지속적일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당장 몇해 전만해도, 메레올로지가 꽤 유행했던 것으로 아는데 학계 내에서는 큰 흐름을 만들지 못한 것 같습니다. 유행이 되었다 정착이 못 되는 학계의 담론/유행들은 항상 있어왔죠. 90년대 후반에 있었던 포스트 휴먼 논의라던가....뭐. 그런 것들 말입니다.
아마 이 현상이 학계에서 안정적으로 안착이 될려면, 단순히 '외재적 관심사'에 대해서 철학자들이 (상식적인) 한 두마디의 말을 하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널리 활용될 수 있는 개념/이론을 안정적으로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생각됩니다. 아직은 이러한 것이 미심쩍기에,

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3)

이 부분에 있어서는, NYU가 학계의 유행에 뒤늦게 반응한 것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뉴욕대 교수진들인 제가 본문에서 언급한 형이상학 - 인식론 분야의 옛 거장들이 워낙 많이 포진해 있어서, 세대 교체가 상대적으로 늦은 것 아닌가,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당장 뉴욕대에 비해 2위인 릿거스대 교수진들은 이런 '응용적 흐름'에 익숙하고 호의적인 신진학자들이 많은 편입니다. 언어-심리-예술 철학을 모두 하는 엘리자베스 캠프(Elisabeth Camp)라던가, 선택 이론과 (맥락적?) 인식론을 연구하는 Juan Comesana 등이 제 눈에는 띄이네요. 상대적으로 옛 거장들이지만, 응용적 흐름에 호의적인 에른스트 르포르나 스테판 스티치도 눈에 보이고요.
(여담이지만 르포르는 이번에 옥스퍼드 컴패니언 중에서 응용 언어 철학 [applied philosophy of language]의 편집을 맡았습니다. 올해 하반기에 출간이라는데, 기대 중입니다.)

(4)

이 부분에 있어서는, 아마 종국에는 철학과가 두 개의 정도의 큰 흐름으로 갈라지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본문에서 언급한 흐름인 (자연주의적) 인지과학/심리철학 프로그램과 (형식적 도구를 활용하는) 논리학/언어철학/형이상학은 여전히 철학과에 남을 듯합니다. 둘은 기반이 다르고, 요구하는 지식이 다르긴 하지만, 어쨌든 꽤 공통의 논문들을 레퍼런스 소스로 사용하며 나아가고 있는 듯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여기에 이 이론들을 "응용"하는 지금의 흐름이 추가 되겠죠.

(물론 인지과학/심리철학 프로그램은 점점 더 자연주의화 되고 있긴 합니다. 제가 보는 학자들은 이제 심리학과 fMRI를 활용하는 인지신경과학을 통해 보다 "생물학적인" 설명을 하고 있더라고요. 아이러니 하게도, 이렇게 쓰지만 여전히 이들의 책은 여전히 심리철학 교재를 읽는 기분이 듭니다. 반대로 보다 고전적인 철학에 가까운 설명을 제시하는 생물학의 철학은 오히려, 도킨스류의 책을 읽는 기분이 들더군요.)

포르노/인터넷에서의 대화/비하/문학 작품/딥페이크/거짓 정보/주장/비형식 논리 등과 같은 광범위한 응용 언어철학 - 사회 인식론의 흐름, 이러한 사회적 현상들에 대한 형이상학적/존재론적 접근인 사회 존재론, 사회적 현상에 대한 형식적 접근인 선택 이론 등등이 안정적으로 학계에 안착할 듯합니다. (다만 10년 후에도 언급될지는, 지금 신진 학자들이 얼마나 훌륭한 이론을 만드는지에 따라 달라지겠죠.)

(그리고 아마 도덕적 책임이나 행위자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응용 윤리/규범 윤리가 큰 지각 변동을 격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탈식민주의/인종 차별 등과 연관된 국제 정의라는 주제, 기후 정의와 환경 윤리 같은 주제들은 기존 서양 윤리학의 틀에서는 쉽사리 해명하기 어려운 형태의 윤리를 요구하는 듯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러한 일명 PC의 흐름에 저항감도 느끼고 그러는 것이겠죠.])

반대로 생물학의 철학은 이제 완전히 철학과에서 분리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실상 이들은 이제 도킨스류의 진화생물학 담론을 '생물학의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더 이상 공통의 관심사도 드물어지고, 레퍼런스 소스들도 진화 심리학/생물학의 철학/진화 생물학 등의 영역과 더 친연성을 가지는 듯 보입니다. (그리고 어느순간부터 철학보다는 진화 생물학과 등의 협동과로 불리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실제로 하버드에서는 진화 심리학과 인류 발달인가? 그런 협동과가 있고, 막스 플랑크 연구소에서도 비슷한 형태로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케임브리지인지 옥스퍼드인지 생물학과 철학 총서의 주제를 보면, 이제 그냥 생물학의 철학 - 진화 심리학/진화 생물학이 뉴 '대륙 철학'이 된 듯 합니다. 면역은 물론, 도덕, 종교, 사랑, 번식 등 모든 주제에 관해서 이제 한 마디씩은 하는 듯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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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의 철학이 점차 분과 학문으로서의 ‘철학’보다 ‘생물학’에 더 깊이 섞여 들어가는 것은 특정 개념의 도입과 그 개념의 조작이 중요한 방법론으로 작용하는 생물학(특히 분류계통학이나 진화생물학)의 특징이 하나의 원인인 것 같기도 합니다. 물리학, 화학 등 또한 개념의 도입과 조작은 중요한 방법이지만 생물학에서 그것은 보다 잦은 빈도로, 그리고 상대적으로 더욱 주요하게 이루어지지 않나 합니다.

토마슨의 Ontology Made Easy는 이전에 메타존재론 수업에서 본 적이 있네요! 흥미로운 내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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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여러 과학철학 조류들이 철학과에서 떨어져나와 경험적 분과학문에 가까워지는 현상은 오히려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경험적 현상들에 대한 클레임을 하면서 오로지 머릿 속에서 이루어지는 선험적인 논의만으로 유의미한 설명을 할 수 있다는 접근방식에서 철학자들의 오만함까지 느껴지거든요. 가령 과거 과학철학자들이 경험과학적 evidence 없이도 논리적이고 형식적인 분석만으로 가령 시/공간에 대해 규정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처럼요. 자연과학 혹은 인문/사회과학적인 분과학문들의 경험적 성과들을 적극적으로 차용하는 것은 환영할만한 일이라고 봅니다. 물론 이러한 경향이 진행될수록 철학무용론과 자연주의/환원주의에 대한 경향도 짙어지겠지요?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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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잘 감이 잡히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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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보는 또다른 원인은 생물학이 가지는 일종의 '팽창주의적?' 야망입니다. 과거 (혹은 몇몇은 현재에도) 철학이 결국 세상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 여긴 적이 있습니다. 도킨스나 여러 진화 생물학자들의 시도 이후, (진화) 생물학 역시 과거 철학과 같은 '팽창주의적' 야망을 의식적이든/무의식적이든 가지는 듯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잘못되었다 여기든 맞다고 여기든 앞으로의 철학자들/사상가들은 여기에 대응할 수 밖에 없다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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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에 있어서는 동의합니다. 비록 철학자들이 안락의자 방법을 사용한다 할지라도, 설명하고자 하는 현상에 대한 (최대한의) 자료를 모아야 한다 저는 생각합니다. 오늘날 자연과학/사회과학의 발전으로, 이전보다 사례에 대한 정보가 디테일하고 풍부해진만큼, (철학이 스스로 보편의 학문이라 자임한다면) 단순히 과거 알려진 사례 - 거기서 나온 이론만을 참고하는 것을 넘어서야 한다 생각합니다.

(예컨대, 인지라던가 심리를 다루려면, 이제 인간은 물론 동물과 같은 비-인간 생물 인지와 AI 같은 인공적 인지의 사례를 모두 다루고, 이걸 디테일하게 분류/분석할 개념틀을 만들어야 하겠죠. 단순히 '동물은 마음이 없다!', 'AI는 마음이 없다!.'라는 주장은, 결국 마음의 정의에 대한 [검증 불가능한] 철학 집단[의 한 부류가 가진] 직관에 의존하는 셈이니깐요.
스테판 스티치가 하듯, 이 직관을 '실험'을 통해 경험과학적으로 검증할 필요까지는 없지만, 적어도 X가 마음이라 생각하는 것이 상식적이라면, (그게 자신의 정의와 다르더라도) 차이를 설명하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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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적인' 문제로 이러한 일은 없지 않을까 생각하긴 합니다.

이와 반대로, 사실상 철학이 자신만의 분야도 없고, 자신만의 방법론도 없다면 사실상 (모든 개별 학문의) 기초론으로서만 남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가끔합니다.

기실, 철학이 결국 개념에 대한 작업이라면, 철학자가 하는 일이란 (개별 학문이든 학문[들]이든) 여러 다양한 사례들을 모으고, 사례들을 설명할 여러 개념들을 구분하고 만들고 정교화하는 것일텐데, 결국 이게 학문 기초론과 무슨 차이가 있나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예컨대, 요근래 형이상학에서 자주 쓰이는 수반, 환원, 포함, building 등의 관계성에 대해 논의하는 것이란, 결국 이 세상을 설명하기 위한 툴을 고안/탐구하는 과정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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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의 이론 구성에서 개념은 법칙보다 훨씬 큰 역할을 한다. 생명과학에서 새로운 이론에 기여하는 주된 방법은 새로운 사실(관찰)의 발견과 새로운 개념의 개발이다. 사전에서 ‘개념(concept)'이라는 용어의 의미를 찾아 본다면 매우 넓은 정의를 발견하게 된다. 어떤 정신적 이미지도 개념일 수 있다. 그 정의에 따르면 내가 그것에 대해 생각하기만 하면 숫자 3도 개념이다. 그에 대해서 정신적 이미지를 형성할 수 있는 모든 대상은 개념이다. 그러나 인문학도가 개념에 대해 말할 때는 훨씬 좁은 정의를 적용하는데, 이 좁은 의미의 ’개념‘에 대해서도 마땅히 좋은 정의를 찾을 수 없다. 생물학자들은 자기 분야의 중요한 개념이 무엇인지에 대해 전혀 의심을 갖지 않는다. 예컨대 진화생물학에서는 선택, 배우자 선택, 세력권, 경쟁, 이타주의, 생물 개체군 등이 그런 것이다.
물론 개념은 생물학에만 한정되지는 않으며, 물리과학에서도 나타난다. 제럴드 홀턴이 주제도식이라고 부른 것이 아마도 생물학자들의 개념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새운 사실의 발견이 무엇보다 중요한 물리과학이나, 생리학과 같은 기능생물학 분야에서는 개념의 숫자가 대단히 제한적인 듯하다. 실제로 그 분야의 선도자들은 그들 분야의 진보는 새로운 사실의 발견에 달려 있다고 말하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생명과학에서는 개념이 큰 역할을 한다. 모든 개념이 진화생물학의 자연선택처럼 혁명적인 충격을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보다 복잡한 생명과학 분야들(생태학, 행동생물학, 진화생물학)의 최근 발전은 새로운 개념의 제안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이상하게도 전통적 과학철학에서는 이론 구성에서 개념이 갖는 중요한 역할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론 구성에 대해 생각해보면 볼수록 물리과학은 법칙에 기반을 두는 반면, 생물학은 개념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이 뚜렷해진다. 누군가는 개념이 법칙으로 정식화될 수 있다고, 또는 법칙은 개념으로 진술될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이 대비를 완화시키려 할지 모른다. 그러나 ’법칙‘과 ’개념‘이라는 용어를 엄밀하게 정의해본다면 그러한 변형이 쉽지 않음이 드러난다. 이는 분명 물리학에 집중된 과학철학이 소홀히 해왔던 문제 영역이다.

이렇게 긴 문장을 댓글로 달아도 될지 모르겠네요... 일단 이 주장은 염두에 둔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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