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이 수학철학에서 말하려는 핵심이 무엇인가?: 비트겐슈타인-튜링 논쟁과 비트겐슈타인-괴델 논쟁을 중심으로

(1)

철학자들도 모순을 충분히 유의미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 실례로, "도가도비상도" 같은 도가철학의 수많은 구절들을 들 수 있겠네요. 비트겐슈타인 본인이 감각질에 대해 "something도 아니고 nothing도 아니다."라고 말했던 것도 형식논리적으로는 모순이죠.

제 주장은 (a) "'철학자'가 모순을 유의미하게 사용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b) "'모순을 유의미하게 사용하지 않는 철학자'가 있다."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대표적인 경우가 의미론을 성립시키려는 대다수의 기획들에서 확인되고요. 제가 보기에, 이 기획에 참여하고 있는 철학자들 중 상당수는 "일상언어는 의미가 있다."와 "일상언어는 의미가 없다."라는 상반되는 두 입장 사이에서 아직도 갈팡질팡하고 있습니다. 크립키 이후로 다시 언어철학에 대두된 '비존재의 역설' 같은 것을 떠올려 보세요. "주어가 비존재를 지칭하는데도 어떻게 의미가 성립하는가?"라는 문제가 아직도 언어철학에서 계속 논의되고 있습니다. 비존재 지칭 문장이 (i) 일상 언어적으로 보면 의미가 있어 보이는데, (ii) 지칭 이론으로 보면 의미가 없어 보인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이런 논의가 제가 비판하는 것들입니다.

(2)

비트겐슈타인이 삼위일체를 언급하긴 하였지만, 직접 이 문제에 대해 해설은 하지 않았으니 그가 정확히 무엇을 생각했는지는 논란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적어도 제 관점에서는 삼위일체는 무슨 '신비'라는 말로 얼렁뚱땅 넘길 만한 이론이 아닙니다. 만약 그런 이론이라면 당연히 삼위일체도 일종의 형이상학으로 비판받아야겠죠. 하지만 초대 교회가 삼위일체를 주장한 건, "하나님은 숨어 계시지 않다."라는 말을 하고 싶어서였습니다. 예수가 가르친 하나님과 성령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 뒤편에 우리가 알 수 없는 '숨은 하나님'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 4세기 경에 이르러 '삼위일체론'으로 정리된 거죠. 이런 신학적 의미는 아무런 초논리적 신비 따위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삼위일체의 신학적 의미가 망각된 상황에서야 (혹은 신학적 의미를 좋지 않은 공식 속에 어거지로 담으려는 상황에서야) "하나는 셋이지만, 하나는 셋이 아니다." 따위의 이상한 형이상학적 정식화가 등장하는 거죠.

(3)

전제를 하나 빼서 유의미하게 형이상학을 성립시킬 수 있다면 저는 그 입장을 딱히 비판할 마음이 없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형이상학이 딜레마와 모순 상황에서 어떤 전제도 뺄 수 없어한다는 사실을 유념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이 '종교'를 거부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나듯이, 저는 형이상학도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만 알면 얼마든지 성립할 수 있다고 봅니다. 더 좋은 예로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 프레이저의 종교학을 들 수 있겠네요. 비트겐슈타인은 프로이트와 프레이저를 비판하면서도, 그들의 작업에서 잘못된 생각들만 걷어내면 유용한 통찰들을 발견할 수 있다는 데 대해 동의하였습니다. 형이상학도 바로 이런 지위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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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의미의 유무가 동시에 주장되니까 모순이기는 한데 이것도 사용이 있는 거 아닌가요? 문제의 구도와 내용이 전 잘 이해되는데요. 왜 이런 경우만 "갈팡질팡"이라고 표현하셨나요? 아마 그 이유는, 도가도비상도 라든지 neither something nor nothing 같은 건 저자에 의해 자신있게 교훈을 주는 말로 제시되는 반면, 저런 건 풀어야 할 숙제 같은 걸로 제시되니까 그렇겠지요.

제가 질문에서 애매성을 완전히 제거하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제 질문의 요점은 (철학자 전체에 일반화하는 게 아니고) 왜 문제로 제시되는 모순에 대해서는 사용이 없냐고 말하냐는 것입니다. 문제라는 것이 사실 다른 게 아니라, 지칭 이론이라는 긍정적으로 제시되는 이론에서 파생되어 따라 나오는 문제인 거잖아요. 함축적인 교훈을 주거나 하는 게 아니라면 모순 표현은 사용이 없는 건가요?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철학과 유관한 사용 중에서 말입니다. 형용 모순 같은 건 사용이 있지만 철학과 무관하죠.)

저런 걸 연구하는 철학자들이, 자신의 형이상학 연구가 함의하는 바에 따라 우리가 일상적으로 비존재문을 발화하는 것은 실제로는 or 깊이 있게 보면 무의미하다고 주장한다고 해도, 그게 사용이 없고 무의미한가요? 우리가 일상문장을 관습적으로&자연적으로 사용을 하는데 별 문제는 없지만(이건 온갖 회의주의자들마저도 다 인정하는 바입니다) 그게 이성적으로(=형이상학적으로) 검토해 봤을 때 무의미하다는 건 교훈 아닌가요? 심지어 영역을 잘 나눠서 딱히 모순도 아닌 거 같아 보이는데요. 게다가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그런 주장보다는 일상 문장이 어떻게 이론적으로 이해/분석될지를 고민합니다. 좀 극단적이지만 단순한 예로 예컨대 being이랑 existence를 나눠서 비존재들은 be하지만 exist하지는 않는다 뭐 이딴 식으로 해도 모순은 바로 사라집니다. 이게 너무 부자연스럽고 억지라거나, 존재론적 개입이 과하다고 비판할 순 있겠지만 그건 또 별개의 비판이잖아요. 이런 경우들도 다 사용이 없나요?

은 왜 일어나나요? 형이상학자들은 왜 그러는 건가요? 이걸 제가 여쭤본 겁니다.

전 아직 구체적으로는 주장이 전혀 이해가 안 됩니다. 표현들의 배치만 떠다니는 기분입니다

(1)

당연히, 철학자들이 저 모순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스스로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철학자들 스스로가 저 모순을 '문제'라고 생각하고, 자신들이 모순을 '해결'하거나 '해소'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는데도, 뚜렷한 방법이 없이 "꼼짝 못하고" 있는 거죠. 단적으로, 크립키주의자들에게 가서 "당신들은 왜 비존재 역설에 직면하였는데도 이론을 포기 못하나요?"라고 물어보면, 대개 "나도 크립키식 직접 지시 이론에 여러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이게 해결될 거라고 믿는다."라는 대답이 돌아오는 걸 알 수 있을 겁니다. 무엇을 해야하는지 모른 채 "꼼짝 못하고"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서, 지시 이론을 주장할 때는 문제에서 눈을 돌려버리는 거죠. 이렇게 철학자들 스스로가 "모순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모른다."라고 인정하기 때문에, "사용이 없다."라고 한 것입니다.

(2)

이런 식의 회의주의는 독단주의와 동전의 양면이죠. 회의주의는 '실재'나 '토대'를 가정하고서만 제기될 수 있는 거니까요. 즉, (a) "일상 언어의 의미를 정초하는 조건이 있다."와 (b) "그러나 나는 일상 언어의 의미를 정초하는 조건을 알 수 없다."라는 두 가지 주장이 결합할 때에야 비로소 회의주의가 생겨난다는 겁니다. 문제는, 저 두 가지 주장이 사실 (a') "나는 일상 언어의 의미를 정초하는 조건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안다."와 (b') "나는 일상 언어의 의미를 정초하는 조건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라는 모순되는 주장들을 함축하고 있다는 거고요. 바로 그 점에서 회의주의로는 무의미를 벗어날 수 없다고 하는 겁니다. 회의주의는 모순되는 두 전제에서 하나를 포기한 귀결이 아니라, 모순되는 두 전제를 여전히 다른 방식으로 주장하고 있는 입장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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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회의주의자가

이런 전제를 받아들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회의주의자는 (a)는 받아들여도, (a')와 같은 그런 무리한 전제를 받아들일 필요가 없습니다. 소크라테스 이래로 철학자들은 그것이 무엇이든 조건을 찾아나섰을 뿐입니다. 일상언어, 일상적 사물 등등을 바로 그 조건을 통해서 아는 것이라고 주장한 적도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그냥 미숙한 "선이해" 따위를 가졌을 뿐인 거죠.

회의주의자는 그저, 우리는 일상언어를 정초하는 조건을 모른 채로 그냥 쓰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흄의 인과 회의주의는 인과가 존재함을 아는데 동시에 존재하지 않음을 안다는 게 아니고, 인과가 형이상학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데 우리는 그냥 비합리적으로 관습적으로 인과율을 사용한다는 겁니다.

전 이런 식의 무리한 정식화가 모든 문제와 무의미를 "모순"으로 정리하려는 사고방식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합니다.

'찾아나섰다'는 것부터가 애초에 '찾을 것'을 상정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잃어버린 게 없으면 찾을 것도 없죠. 즉, 애초에 '조건'이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 '조건'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 게 정상입니다.

글쎄요, 적어도 '회의주의'에 대해서는 제가 제시한 비판에 꽤 유구한 역사가 있습니다. 플라톤 시절부터 회의주의는 "모든 것이 거짓이라면, 모든 것이 거짓이라는 너의 주장도 거짓이어야 하지 않느냐?"라든가 "모든 것을 회의한다면, 모든 것을 회의하기 위해 너가 사용하는 기준은 왜 회의하지 않느냐?"라는 비판에 굉장히 많이 직면했으니까요. 이런 비판들은 회의주의가 모종의 진리를 전제한 채 제기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죠.

'모순'은 저에게 일종의 수단입니다. 저는 모순이 가장 효과적인 내재적 비판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꼼짝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는 다른 방법으로 있다면 그 방법을 써도 좋습니다. 다만, 제가 강조하는 건, 모순에 직면하여 "꼼짝 못하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 언어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사람의 언어는 사용이 없는 것이고, 요점이 없는 것이고,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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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일반에 관한 회의주의 등 도대체 합리적 과정을 통해 도달한다고 여겨지기 어려운, 무차별적으로 보편화되는 회의주의도 있겠지만, 분명 꽤나 많은 철학적 문제들이 특정 영역에 대한 회의주의적 도전으로 촉발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때 회의주의란 것은 대체로 특정 영역의 지식을 온전히 인정하면서, 그 특정 영역으로부터 다른 영역의 지식을 추론해낼 수 없다 등의 구조를 갖습니다. 흄의 회의주의도 인상과 관념의 다발로부터 인과를 도출해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꼭 그런 구조가 아니더라도, "합리적 과정"을 통해 도입되는 회의주의는 그 결론이 아무리 파멸적이어서 자기파괴적이더라도 상관없습니다.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는 나름의 합리적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다 결국 코기토에서 멈춥니다. 코기토에 정착하기 이전에, 이 방법적 회의를 따라가면 결론은 그냥 카오스입니다. 이게 결론으로서는 설득력이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작부터 무차별적으로 일반화되는 그런 방법이 아니기 때문에, 왜 모든 걸 의심한다면서 의심의 전제는 의심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 데카르트는 자신의 방법적 회의와 광인의 헛소리를 구분합니다. 회의의 과정에서 인정된 진리는 단계별로 깨어집니다. 끝끝내 본인의 의심의 전제마저 박살난다고 해도, 그건 그 탐구의 결과인 것이고, 경로상의 문제가 곧바로 제기될 수는 없습니다.

조건이 있다는 생각, 즉 (a)를 회의주의자가 받아들이더라도, 이는 (b)나 (b')와 모순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들과 모순되는 (a')를 회의주의자가 받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a)로부터 (a')가 도출되는지도 의심스럽습니다. 조건이 있어도 그 조건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하는 것이 많은 철학자들의 스탠스입니다. 이는 (a)&(b')이고, 이는 모순이 아닙니다. 명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자기 이론의 효용성을 자랑하기 이전부터, 즉 (b')를 탐구를 통해 마침내 살포시 부정하기 이전부터 (a')를 받아들이는 사람을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철학사적 평가 논쟁에 대해서는 제가 가타부타할 수가 없습니다만, 괴델의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반응에 대해서는 조심스레나마 첨언을 하고자 합니다.

괴델이 비트겐슈타인에 대해 불만을 표했던 이유는 괴델 자신의 수학철학적 견해와는 독립적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It is indeed clear from the passages you cite that Wittgenstein did NOT understand it (or pretended not to understand it). He interpreted it as a kind of logical paradox, while in fact it is just the opposite, namely a mathematical theorem within an absolutely uncontroversial part of mathematics (finitary number theory or combinatorics). (참조)

SEP "비트겐슈타인의 수학철학" 항목의 "Wittgenstein on Gödel and Undecidable Mathematical Propositions" 절 또한 유용한 참조 자료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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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이 괴델의 불완전성정리를 이해하지 못한 채로 고찰을 남겼다는 것은, 사실 수학철학계에서 거의 정설입니다. 제가 언급한 F&P는 그 정설을 어느 정도 뒤집고자 시도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저는 비트겐슈타인이 괴델의 불완전성정리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믿습니다. 다만 많은 수학철학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또 튜링과의 논쟁에서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비트겐슈타인이 완전히 논지를 이탈해 핵심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채로 엉뚱한 말만 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웃긴 얘기지만 비트겐슈타인이 한편으로는 억까도 좀 심하게 당하는 것 같습니다.)

분명 ~P가 증명가능하다면, P를 "P는 증명불가능하다"로 번역할 수 없다는 식의 주장은 인용하신 괴델의 언급처럼 logical paradox를 제기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심지어 이렇게 정리되기 이전의 원문을 보면, 더더욱 무슨 역설을 제시하는 것 같이 들립니다. 근데 사실 이 고찰이 그런 것이라기보다는, 괴델의 증명의 함의가 뭔지에 대해 논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어 보입니다. 많은 학자들은 비트겐슈타인이 괴델의 정리를 전혀 이해 못한 채로 거부했다고 여깁니다. 혹은 그 정리의 내용이 논리적 역설인 것으로 이해했다고 여깁니다. 근데 비트겐슈타인은 적어도 참인 증명불가능한 명제가 존재함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과연 그런 증명불가능한 명제가 바로 그 체계 내의 명제로서 참인가를 의문시하는 것입니다. F&P는 어떠한 형식언어도 자연언어를 통해서는 원리적으로 접근 불가능한 그런 참의 기준을 자체적으로 제시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형식언어를 자연언어로부터 완전히 분리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형식체계를 만드는 일은 그 자체의 자유도가 얼마든지 있지만, 그 자유도는 그것이 단지 형식체계로 여겨지는 데 그칠 때에만 보장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형식언어를 이해하려면, 기준이 주어져야 합니다. 수학의 경우에 유효한 참의 기준은, 참인 명제=그 형식체계의 정리 입니다. 즉 그 형식체계의 정리들에 대해서 우리는 (그 체계에서) 참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그것이 "무슨 뜻에서 참이라는 것인지"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수학의 토대 놓기 작업이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형식언어는, 기호체계의 자유도와 별개로, 자율적으로 의미까지 가질 수는 없습니다. 형식언어에는 의미가 부여되어야 합니다.)

F&P에 따르면
"수학적 진리"라는 개념이 따로 있어서, 어떤 "수학적 참"인 명제는 한 체계가 일관적이라면 그 체계 내에서 결정불가능하다.
이런 식으로 괴델의 정리를 이해하면 그건 수학이 아니라 형이상학이라는 게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입니다. 그들에 따르면 어떠한 형이상학적 함축 없이 괴델이 증명한 것을 이해하면
만약 P가 PM 내에서 증명가능하면 PM은 비일관적이고, 만약 ~P가 PM 내에서 증명가능하면 PM은 ω-비일관적이다.
입니다.

F&P처럼 비트겐슈타인의 고찰을 이해하면, 진리가 무엇인지에 관해 다소 부담스러울 수도 있는 주장을 떠안게 되는 것 같습니다. 배경이 없다면 매력이 없어 보이는 주장이라서 그렇겠지요. 그러나, 제2불완전성 정리의 경우 'Con(T)'라는 표현을 체계 T의 일관성으로 이해할 수 있냐와 같은 논란 제기가 정말로 가능하다면, 분명 비트겐슈타인이 깊게 생각해 볼 만한 통찰을 던졌다고 보는 것이 단순히 추종자들의 빠심에서 나오는 결론은 아닐 듯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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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과 괴델 사이에 오고 갔던 반응들은 사실 '논쟁'이라고 부르기에는 애매한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도 괴델에게 별로 관심이 없고, 괴델도 비트겐슈타인에게 별로 관심이 없어서요.

다만, 저는 "비트겐슈타인이 불완전성 정리를 이해하지 못했다."라는 평가에 대해서는 그다지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애초에 비트겐슈타인의 목적은 불완전성 정리를 거부하거나 비판하는 게 아니었으니까요.

실제로, 불완전성 정리에 대한 논의가 등장하는 『수학의 기초에 관한 고찰』 제1부 보론 1에서는 '괴델'이라는 이름이 언급조차 되어 있지 않습니다. '불완전성 정리'도 암시적으로만 다루어지고 있죠.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적어도 저는 애초에 이 부분의 목적이 불완전성 정리 자체에 대한 가타부타의 평가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생각해요. 오히려 '증명 가능성'과 '증명 불가능성'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의미로 이해되어야 하는지가 쟁점이죠.

그래서 비트겐슈타인과 괴델의 논쟁은 사실 헛돌고 있어요. 즉,

(a) 비트겐슈타인은 '증명 가능성'과 '증명 불가능성'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다루려고 하는데,
(b) 괴델은 비트겐슈타인이 자신의 정리에 대해 모종의 수리논리학적 평가를 내릴 것이라고 예상하면서 해당 부분을 읽었고,
(c) 그러다 보니 비트겐슈타인이 괴델의 정리 자체가 아니라 언어의 의미에 대한 철학적 논의를 다룬다는 것을 놓쳐서,
(d) '증명 가능성'의 의미에 대해 계속 거론하는 비트겐슈타인의 구절들을 보면서 "비트겐슈타인은 그것[괴델의 정리]을 이해하지 못했다."라고 단언한 거죠.

이게 제가 비트겐슈타인-괴델 논쟁의 흐름을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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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주의'라는 명칭을 지나치게 넓은 의미로 사용하시는 것 같습니다. "p에서 q를 추론해낼 수 없다."라고 지적하는 입장들을 모두 '회의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비약입니다. voicerigt님이 '회의주의'라고 하실 때 염두에 두시는 입장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다시 설명해 주실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흄의 회의주의가 지금 저희의 대화에서 썩 좋은 사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일반적인 철학사적 해석에 따라, 흄이 자신의 인과에 대한 회의주의를 통해 뉴턴 역학을 비롯한 모든 종류의 과학적 지식 자체를 부정하였다고 가정해봅시다. 저는 이런 식의 회의주의야말로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모르는 전형적인 경우라고 봅니다. 흄은 과학적 지식이 정당화되기 위해 과학자들이 주장하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형이상학적 조건' 따위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즉, 흄은

(a) "과학적 지식은 일상적으로는 정당화된다."

라고 말하는 동시에,

(b) "과학적 지식은 형이상학적으로는 정당화되지 않는다."

라고 말하는 셈입니다. 문제는 과학적 지식을 정당화하는, '일상적이지는 않지만 형이상학적인 조건' 따위가 무엇인지를 흄 본인도 정확히 모른다는 겁니다. 가령,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은 중력장이 강한 곳에서 빛이 휘어진다는 사실이 관측되기만 하면 정당화됩니다. "빛이 중력장에 따라 휘어진다는 사실이 관측된다."가 바로 상대성 이론이 정당화되기 위한 '조건'입니다. 그런데 흄이 이 조건을 받아들이면서도 다른 '형이상학적 조건'을 다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면, 더 나아가, 그 '형이상학적 조건' 없이는 상대성 이론이 정당화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흄은 자신이 정확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를 모르는 셈입니다. 말 그대로, "아인슈타인이 맞긴 맞는데, 어쨌튼 틀렸어!"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선호하는 '모순'의 형태로 정리하자면,

(a') "빛이 중력장에 따라 휘어진다는 사실이 관측된다면, 일반 상대성 이론은 증명된다."

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b') "빛이 중력장에 따라 휘어진다는 사실이 관측되더라도, 일반 상대성 이론은 증명되지 않는다."

라고 주장하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는 voiceright님이 정확히 어떤 문제제기를 위해 회의주의를 계속 거론하시는 것인지 잘 이해하기 힘듭니다. 위에서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나 '프레이저의 종교학'을 예로 들면서 말씀드렸지만, 저는 분명 형이상학도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자각하는 상황에서는 유의미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회의주의가 유의미한 맥락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제가 부정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가령, 저는 카뮈식의 부조리 문학에서 등장하는 회의주의를 '무의미하다.'라고 평가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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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전 YOUN님의 얘기를 계속해서 들을 때마다, 진지하게 논쟁에 제3자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제가 느끼기의 YOUN님의 철학이 무엇인지에 관한 생각이, 철학을 너무 터무니없고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만든다고 저에게는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냥 철학을 잘 모르고 별로 관심도 없는 사람이 철학 같은 건 쓸모 없다고 하는 말이랑 무슨 큰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옳든지, 아니면 역으로 제가 철학을 터무니없이 진지한 것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흄에 관해서도 똑같은 논조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흄이 말씀하신 (a)와 (b)를 모두 받아들인다고 합시다. 그리고 흄이 (a)와 (b)를 모두 받아들인다고 해도, 여전히 일상적이지는 않지만 형이상학적인 조건 따위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도 맞아 보입니다. 근데 왜 갑자기, 대체 어느 순간부터 (a')와 (b')처럼 층위 없는 언명으로 (a)와 (b)가 치환되나요? "아인슈타인이 맞긴 맞는데, 어쨌든 틀렸어!"라는 말은, "과학적으론른 맞는데, 형이상학적으론 틀렸어" 아닌가요? 이게 어째서 모순인가요? 자꾸 모순을 억지로 만들어내기 위해서 표현을 의도적으로 탈락시키는 건 아니구요? 예컨대 흄 시대의 범형적 과학자는 뉴턴이었으니, 뉴턴역학을 생각해 보면, 흄은 분명 뉴턴의 업적을 칭송하고, 뉴턴역학을 전반적으로 수용하는 듯 보입니다. 다만 뉴턴의 자연철학의 형이상학적 함축(예컨대, 인과력으로서의 뉴턴적 힘 개념 등)에 대해서는 거부하죠. 흄은 YOUN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모든 종류의 과학적 지식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그냥 반지성주의에 가까운 거죠. 어쩌면 흄은, 과학적 명제들이 과학자들이 소박하게 생각하는 그대로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뭐 이런 정도의 주장은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저도 흄을 전문적으로는 모르니까 여기서 그만두겠습니다만, 아무튼 흄을 반지성주의자로 이해하면 그냥 흄이 미운 거라고밖에는 생각이 안 됩니다. 도대체 어느 회의주의자가 과학적 지식 자체를 부정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과학적 지식이 과학 내부에서 옳고 그름이 가려져야 한다는 생각은 회의주의자에게도 낯설지 않은 사고방식 같습니다. 흄이 정말로 (a'), (b')를 받아들인다면, 대체 대학에서 왜 흄을 공부하고 가르칠 기회를 제공해야 하나요? 흄이 일상적이지는 않지만 형이상학적인 조건 따위가 무엇인지 모른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그 형이상학적 조건이 충족되지가 않는다는 것이 바로 흄의 회의주의의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맞서는 형이상학자들은 그 형이상학적 조건을 찾으려고 하겠지요. 그럼 또

라고 답하시겠죠. 그래서 흄은 인과에 대한 회의적 논변을 제시하잖아요. 여타 회의주의자들도 특정 대상 영역에 대한 회의적 논변을 제시하잖아요. 애초에 조건이 있다는 생각을 안 하면 된다는 건, 그냥 철학을 안 하겠다는 말로밖에 안 들립니다. 철학을 안 하면 철학적 문제는 쓸모가 없죠. 이건 철학자들도 다 동의할 텐데요(물론 예외는 있겠습니다). 근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의 영역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특히 논변을 통해 철학적 문제가 제시될 때에는, 상식의 사고방식을 따라가다 보니 이것만으로는 문제가 있다는 게 밝혀져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무언가를 찾아나서는 겁니다.

흄은 본인이 제시한 회의주의 때문에 과학을 하지 못한다고 주장한 적 없습니다. 그래도 "형이상학적으로는" 과학이 우리가/과학자들이 생각하는 액면 그대로가 아니다 정도를 주장하겠지요. 이걸 어떻게 YOUN님처럼 깔끔하게 모순으로 정리할 수 있는지 전 참 신기합니다. 만약 YOUN님이 옳다면 어떻게 이렇게 깔끔하게 모순으로 정리되는 걸 다들 모른 채로 철학을 하고 있는지도 더더욱 신기합니다. 이건 본인이 모순의 방법을 선호하냐 아니냐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을 좋아하는 저 같은 사람 말고, 그냥 이론철학 하는 아무나한테 가서 이걸 설명하면, 내용을 100% 이해해도 전혀 설득이 안 될 것 같습니다. 내용은 엄청 간단하잖아요. 철학자들이 모순된 전제를 받아들이고 있다. 이걸 이해를 못해서 설득에 실패하진 않겠죠. 그냥 이걸 이해를 해 봐야, 아무것도 달라지는 게 없고 오히려 그쪽에서 YOUN님이 철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하겠죠. 이것에 비하면 차라리, "너가 비트겐슈타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니까 가서 책 좀 더 읽고 공부 좀 더 하고 와라!" 하는 게 차라리, 차라리 조금 더 나은 것 같습니다. 물론 이쪽도 역겹지만, 그래도 내용을 좀 더 이해하고 나면 설득이 될거라는 "여지"라도 말이 되게 남겨 놓으니까요.
위에서도 저는 똑같은 불만족을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이건 무려 제가 2년 8개월 전에 했던 말입니다.

(II)

라고 하셨는데, X에 대한 회의주의(skepticism about X)라는 표현은 영미철학에서 엄청 자주 쓰이는 표현 아닌가요? 물론 제 '회의주의'라는 표현에 대한 사용이 뭔가 "커다란" 회의주의와 "국소적" 회의주의를 별로 구분하지 않고 이뤄지긴 했습니다. 근데 제가

이렇게 말했을 때, 일차적으로 제가 이 얘기를 꺼낸 건 Baker&Hacker의 1985년 "Scepticism, Rules and Language"의 6페이지 본문에 정확히 동일한 내용이 있어서입니다. 그냥 통으로 가져오겠습니다.

Initial qualms may be strengthened by reflection on the oddity of the so-called scepticism. What is classically known as scepticism typically involves challenging an apparent evidential nexus. The sceptic agrees that we do know the truth of statements about subjective experience, but, since they do not entail statements about objects, he denies that we really know anything about the material world. In a more obliging frame of mind, he accepts the possibility of knowledge about the behaviour of others (or about memories and current evidence, or singular statements) but denies that it supports cognitive claims about other minds (the past, inductive generalizations). But Kripke's sceptic, unlike the classical sceptic, saws off the branch on which he is sitting. For he is not claiming that certain given knowledge fails to support other commonly accepted cognitive claims. ...(중략)... But this is not scepticism at all, it is conceptual nihilism, and unlike classical scepticism, it is manifestly self-refuting. Why his argument is wrong may be worth investigating (as with any paradox), but that it is wrong is indubitable. It is not a sceptical problem but an absurdity. (pp. 5~6, 강조 제가 한 게 아니고 원문입니다.)

크립키의 회의적 역설에 대한 B&H의 평가는 저의 지금 맥락에서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과 대조하는 데 쓰인 classical scepticism의 sceptical problem에 대해서, 누구든지 그렇게 자기파괴적이라는 이유로 쉽게 dismiss 해버리진 않으리라는 생각이 아주 당연하다 정도는 보여드리고자 하는 겁니다. 뭐 사소한 거지만, 전 "p에서 q를 추론해낼 수 없다"는 구조이면 전부 회의주의라고 한 적 없고, 회의주의가 그런 구조를 지닌다라고 말했습니다. 혹시 예시가 하나밖에 없어서 근거가 부족하다고 느끼신다면, 반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철학자를 한 명만 가져와 보세요.

저는 다소 과감하긴 해도, 철학의 정의가 회의주의에 대한 응답이라고 말해도 크게 틀리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III)

근데 베이커 해커의 이 책 읽으셨잖아요. 심지어 제가 리뷰를 시도했던 그 논문의 참고문헌이기도 합니다. 가볍게 읽고 만 정도도 아니겠죠. 물론 지엽적인 부분이니까(그래도 크립키의 "회의적 역설"이 회의주의조차 아니라고 지적하는 건 제게는 꽤 중요해 보입니다), 기억이 안 나실 수도 있겠지요. 이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근데 저는 진지하게 텍스트 독해와 관련해서도 문제제기를 해야겠습니다. 인신공격이 될 까봐 그동안은 자제하고 이렇게까지는 말을 안 했는데, 전 정말로 YOUN님의 철학 텍스트 독해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A)
2년 9개월 전 저희의 논쟁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 YOUN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멘탈헬스 이슈로) 글삭튀를 해서 지금 가면 제 글이 사라져있지만, YOUN님은 저 인용을 제 글에서 했습니다. 근데 사실 제가 쓴 저 문장은, 그냥 James Conant의 본 논문을 그대로 번역한 것에 불과합니다. YOUN님의 저 글은

는 내용의 글입니다. 바로 그 Conant의 논문 "Stanley Cavell's Wittgenstein"의 64페이지, 그러니까 마지막 페이지에 정확히 "Rather the grammar of our various language games is exhibited to the skeptic, in order to present him with an Übersicht of the various possibilities of meaning his words that are available to him." 이라는 문장이 있습니다.

저는 당시에 Conant의 논문에 대한, 또 Cavell에 대한 YOUN님의 요약이 핵심을 벗어났다고 느꼈기 때문에 답글을 썼었고, 저런 응답이 왔습니다. YOUN님은 Cavell의 회의주의 트리트먼트에 대해

이렇게 요약하셨는데, 카벨은 이런 소리를 한 적이 없습니다. 코넌트가 다루고 있는 카벨의 회의주의는 The Claim of Reason의 2부에 나오는 세계의 존재에 대한 회의주의입니다. 카벨은 회의주의가 자신이 지니고 있는 의심의 근거조차도 의심해야 하는 상황에 빠진다 따위의 언급은 일절 한 적이 없습니다. 정말 그걸로 끝난다면, CR 2부는 대체 뭐한다고 분량이 110페이지가 넘을까요? 카벨을 읽지 않아도, 적어도 카벨을 요약하는 코넌트의 논문만 꼼꼼하게 읽었어도, 코넌트 본인조차 (카벨의) 회의주의에 대해서 저런 말을 안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제가 그 점을 지적하니까 "그것과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얘기한다면, 그러면서도 정작 본문은 "카벨의 비트겐슈타인 해석의 논지에 동의한다"고 말한다면, 그냥 글을 전혀 안 읽은 채로 논문 속 표현들에 자기 사고 틀을 투영한 것으로밖에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예컨대

와 같은 언급은, CR 1부 1장에서 카벨이 criteria, grammar, agreement, attunement, authority 등에 관해 논의하는 것에 정확하게 반대되는 지적입니다. 무식하게 말해서 카벨은, 이미 우리가 언어에서 일치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동등하게 권위가 있다고 얘기합니다. YOUN님은 우리가 언어에서 이미 일치한다는 사실은 그토록 강조하면서, 일상언어에 호소하는 권위에 관한 카벨의 논의에는 생각이 전혀 미치지 않으십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우리가 언어에서 이미 일치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동기가 그저 철학적으로 의미의 조건을 탐구하지 마라는 주장을 펴는 데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때로 이 일치를 선택적으로 무시하신다는 생각도 드는데, 특히 너는 너의 언어가 있고 나는 나의 언어가 있다 식의 발언을 할 때 그렇습니다.)

(B) 논문 "사용 이론과 회의주의를 넘어서"의 주석 35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 대한 카벨의 해석을 딜레마 형식으로 재구성하는 방식은 코넌트에게서 빌려온 것이다"
이건 정말 말이 안 되는 게, 코넌트를 거칠 필요 없이 카벨 본인이 너무나 명시적으로 회의주의자가 딜레마에 빠진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카벨을 안 읽어 본 겁니다. 심지어 이는 목차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The Claim of Reason 2부 Chapter VIII의 세부 목차는 다음과 같습니다.
-The Philosopher's Ground for Doubt Requires Projection
-The Philosopher's Projection Poses a Dilemma
-The Philosopher's Basis; and a More Pervasive Conflict with His new Critics
-The Philosopher's Context Is Non-claim
-The Philosopher's Conclusion Is Not a Discovery
-Two Interpretations of Traditional Epistemology; Phenomenology
-The Knowledge of Existence
이 소제목들은, 그냥 책을 펼치면 목차 부분 viii 페이지에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책을 뒤져야만 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제 보니 이 책은 아예 참고문헌에도 없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넌트의 논문 속에서 CR을 인용한 문단에서 이미 딜레마 얘기가 원문으로 나오기 때문에, 딱히 면죄부가 주어지진 않는 듯합니다.)

심지어 카벨의 딜레마가 논문이 제시하는 것처럼

카벨은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언어 일반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고자 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즉, 이러한 해석에 따르면, 언어의 의미가 성립하기 위한 ‘조건’을 찾기 위해 언어게임보다 아래로 내려가고자 하는 시도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서 근본적으로 거부된다. 애초에 ‘조건’이라는 말은 언어게임이 이루어지는 구체적인 맥락 속에서만 의미를 지닐 수 있을 뿐이다. (a) ‘조건’이라는 말을 의미 있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언어게임보다 아래로 내려갈 수 없고, (b) 언어게임보다 아래로 내려가기 위해서는 ‘조건’이라는 말을 의미 있게 사용할 수 없다. 35) 따라서 언어게임의 모든 구체적 맥락을 설명하면서도 어떠한 구체적 맥락도 전제하지 않는 ‘조건’이란 허구이다.

인 것도 아닙니다. 카벨의 따르면 세계의 존재에 관한 회의주의는 일상적 앎 주장의 맥락에서 시작하며, 그래야 합니다. 그래야만 "상식적인 누구나"에게 일반화되는 함의를 지니고, 우리가 상식이라고 여기는 바로 그것을 회의주의가 논박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카벨의 딜레마는 (i) 언어게임 내에서 의심을 표현하거나 (ii) 언어게임 밖에서 의심을 표현하거나의 선택지 사이에서 이루어집니다. 한편으로 (i)을 선택하면, 회의주의자처럼 일반적인 결론을 도출할 수 없고, 특정 맥락 하에서 구체적인 의심밖에 가능하지 않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ii)를 선택하면, 일상언어 속에서는 그 모형을 찾을 수 없습니다. (i)은 회의주의자가 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거부되고, (ii)는 회의주의자가 탐구의 시작을 일상적 앎 주장의 맥락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또 그래야 하기 때문에, (ii)의 경우 회의주의자는 본인의 전체 탐구 과정에 부합하는 의미-모형을 자신의 표현에 부여할 것이 없게 됩니다. 이때 회의주의자에게 선택지로 주어지는 의미-모형이 일상언어의 언어게임이고, 그렇기 때문에

회의주의자에게 우리가 하는 것은, [……] 회의주의자에게 우리 언어의 다양한 언어 게임들을 보여줌으로써, 그에게 유효한 의미의 다양한 가능성들의 조망/통찰Übersicht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Rather the grammar of our various language games is exhibited to the skeptic, in order to present him with an Übersicht of the various possibilities of meaning his words that are available to him.

코넌트가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사실 제가 위에서 튜링이나 괴델에 관한 견해를 설명할 때 유사한 구성을 취했죠. 그때는 이런 글까지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저는 일관된 해석을 보이고 있습니다.

어쩌면 YOUN님이 논문에서 카벨의 인식론적 회의주의를 다루려 한 것이 아니라, 딜레마 형식을 "응용"해서 언어의 (의미의) 조건을 찾는 시도를 "딜레마의 형식만 빌려" 비판한 것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명 카벨은 언어의 의미의 조건이 언어게임 아래에 있지 않다는 데 동의할 테니까요. 근데 YOUN님이 논문에서 제시한 (a), (b)는 모순도, 딜레마도 아닙니다. 그냥 둘을 전체로서 고려할 때, (a), (b)를 함께 제시하는 건 그저

(c) '조건'이라는 표현에 의미가 있다<=>'조건'이라는 표현이 언어게임 내부에 있다

랑 동일합니다. 만약 누가 이런 주장을 한다면, 뭐 이런 주장을 하는 것 자체는 그렇다 쳐도 그걸 철학적 탐구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으로 활용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걸 증명해보라고 할 겁니다. 그리고 이미 올빼미에서 그런 반응을 많이 들었습니다. 어째서 비트겐슈타인은 일상언어만 의미 있다고 인정하는가? 그러면 전문용어를 다 무의미하다고 해야 하나? 언어게임이 뭐길래? 조건에 대한 파악 없이도 언어가 돌아간다는 것과, 그럼에도 "실제" 조건에 대한 파악이 형이상학을 통해 가능하다는 주장은 최소한 겉보기에는 양립가능합니다. 이건 여러 번 반복해서 말한 것과 동형입니다. 철학자들이 YOUN님의 논문에서처럼 "언어는 의미가 있으면서도 의미가 없다"는 단순명료한 모순을 (암묵적으로든 뭐든) 받아들인다는 건 전 도저히 납득이 안 됩니다.

근데 카벨이 인식론적 회의주의를 이야기할 때, 굳이 그런 주장에 개입할 필요까지 없습니다. 왜냐하면, 회의주의적 문제가 발생하기 위해서, 회의주의자가 본인이 바라는 그 함의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일상 언어 내부에서 시작을 해야 함을 카벨이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분명 일상 언어"만" 유의미하다고 인정하는 것과는 비슷해 보여도 엄연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물론 비트겐슈타인이나 카벨이 일상 언어만 유의미하고 전문 용어는 무의미하다 뭐 이런 주장을 할 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 목차에서만 봐도, 철학자의 의심의 근거는 투사를 필요로 하며, 바로 이 철학자의 "투사"가 딜레마를 설정한다고 말합니다. CR 2부 6장은 세계의 존재에 관한 회의주의의 논변 흐름을 따라가며, 회의주의자가 자신이 바라는 함의를 달성하기 위해 어째서 일상언어 내부에서 시작해야 하는지 등 이 회의주의가 어떤 논리로 제시되는지를 탐구합니다. 그리고 CR 2부 7장은 그 절반이 Projecting a Word에 관한 내용입니다(CR 7장이 바로 The New Wittgenstein에서 인용하신 "Excurses on~"입니다. 아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게 왜 NW의 첫 장을 장식하는지 그 중요성도 제 설명 하에서는 이해가 되실 겁니다.). 이게 다 빌드업이 필요하며 또 충분히 있다는 말입니다. 딜레마는 아무렇게나 구축되는 것이 아니고, 회의주의자의 논의 과정을 그대로 따라가며 검토한 후에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카벨은 이 지점에서는 이게 딜레마라고 해서 곧바로 회의주의가 논박되지는 않을 것(That will hardly constitue a refutation of skepticism, much less of the tarditional epistemological procedure as a whole)이라고까지 말합니다. 다만 "But the dilemma we have come upon must itself give us pause"이라고 말할 뿐이죠. (CR, p.203). 더 깊은 자세한 논의는 생략하겠습니다. 아무튼 카벨에게 있어, 회의주의자는 모순에 빠지는 게 아닙니다. 2년 9개월 전에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카벨에 대한 해석으로서는 저는 똑같은 내용을 주장하고자 합니다. 모순 어쩌고가 아니라, 바로 이게 핵심입니다. 회의주의는 언어와 언어 표현에 대한 욕망이 서로 충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디테일하게 탐구를 한 이후에는 전혀 수사적 표현, 슬로건이 아니라 오히려 사태를 적확하게 설명하는 말로 이해될 것입니다.

사용이 있는 모순은 괜찮고 사용이 없는 모순이 문제라고 말한다고 해서 모순이 핵심이 아니라는 지적을 회피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사용이 있는 모순은 괜찮은데 사용이 없는 모순이 문제인 거면, 모순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겁니다. 사용이 없는 비모순도 사용이 없는 모순만큼 사용이 없다는 점에서 똑같이 무의미이니까요. 어차피 사용이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에 달린 것입니다. 바로 그걸 보여야 하는데, 그걸 모순으로 정식화하기만 한다고 보일 수는 없다는 요지로 위에서부터 전 계속 말해왔습니다. 그래서 왜 철학적 문제를 제기하는 철학자들의 모순만 사용이 없냐고 반문한 것입니다.

(IV)

근데 YOUN님은 제가 이런 말을 하니까 해석이나 분류법, 명칭의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근래에 저희가 의견을 나눌 때에도, YOUN님이 철학적 내용을 보다 중요시하는 반면에 저는 주석적 문제에 집착하는 훈고학자로 프레임이 씌워진 적이 몇 번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철학도들이 주석적 문제는 추종자들이나 하는 일이고, 본인은 철학적인 문제를 더 중요시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명의 철학자, 하나의 사상에 매몰되지 않아야 한다는 점에서 그 말은 정말로 옳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텍스트를 아무렇게나 읽고 아무렇게나 써먹어도 상관없다는 거라면, 전 결단코 반대합니다. 철학 대 주석이 대립하는 건 사실 자주 있는 일이 아닙니다. 특히 분석철학계에서는 이런 문제가 겉으로 드러나게는 잘 발생하지 않죠. 열심히 읽었을 때 이해를 못할 만한 글이 잘 없기 때문입니다. 근데 열심히 읽어도 이해를 하기가 어려운 글들이 세상에는 많고, 이런 글들을 한 번 제대로 이해를 해 보고자 주석적 작업이라는 것이 요청되겠지요. 근데 열심히 읽어도 이해하기 어려운 글들을 그냥 자기 나름대로 읽고 문제에다 잘 써먹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논리는, 전 수긍이 안 됩니다. 결국 이러면 본인이 평소에 가졌던 생각, 다른 어딘가에서 봤던 생각 등이 그 텍스트의 표현들에 그저 투영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뭐 그렇게 해서 문제를 해결하면 그만이라고 칩시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주석적 작업이 철학적 문제를 해결하는 작업과 분리될 수는 없습니다. 정말로 오롯이 역사학만을 하고 있는게 아니라면, 주석적 작업도 철학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직접적인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특히 해당 텍스트가 그 문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한 흔적이 있다면, 그것을 주석적으로 온전하게 재구성해보는 작업 자체가 이미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의 일환인 것입니다.

제가 이 커뮤니티에서 비트겐슈타인과 관련된 이야기밖에 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제가 훈고학자로, "책을 한 권만 읽은 사람"으로 여겨지는 것도 납득은 합니다. 그 얘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고, 제가 왜 positive한 주장을 그간 회피했으며 더 이상 하지도 않으려 하냐면, 제가 아무리 말해봐야 소용이 없다고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 역시도 YOUN님의 논의를 왜곡하거나 오해한 부분이 많을 것입니다. 근데 그건 서로 인정할 만합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인터넷 커뮤니티고, 여기에 뭘 그렇게 집중해서 정신력을 소모해야겠습니까. 근데, 바로 그래서 저는 제 주장을 직접 하는 것 말고 카벨 같은 나름 권위가 있는 텍스트 자체에 호소한 것이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을, 카벨을 읽고 제대로 이해하면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을 테니까요. 제가 위의 언급한 것들을 그때 논쟁 당시에 지적하지 않은 것은, 카벨을 안 읽어봤을 테고 그렇기에 그런 거 가지고 지적하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그냥 그런 잘못 지적 말고 순전히 내용상으로 반박을 하고 싶었습니다. 근데 지금은 다릅니다. 카벨을 소재 중 하나로 활용해 논문을 쓰고 심지어 그 논문의 저자가 "카벨의" "정적주의"를 철학적으로 올바르다고 지지하는데, 주변에서 아무도 이런 이슈를 지적을 안/못하고 비트겐슈타인 전공자로서 인정받고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평가를 받는 이 상황이 저는 납득이 안 됩니다.

애초에 그 많은 학자들의 논의가 한 쪽 정도의 분량으로 모조리 논박되는 이유는, 그들의 사상을 끼워맞출 틀이 있기 때문입니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전혀 안 들었나요? 그 이상함의 감각을 말해주는 이가 아무도 없었나요? 만약 없었고 실제로 이게 이상하지도 않다면, 제가 그동안 철학을 완전히 헛공부한 것이거나, 지금 완전히 심각한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겠죠 뭐. 그런데 말입니다. 만약 YOUN님의 모순 폭로 전략이 예컨대 셀라스의 소여의 신화 비판과 동일하다면, 셀라스는 왜 본인의 그 좋은 방법론을 철학의 문제 일반에다 확장하지 못했을까요? 모순, 귀류법 등을 활용해 철학적 작업을 한 사람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귀류법을 통해 모순을 지적함으로써 특정 문제가 잘못 제기된 문제임을 밝힌 사람도 꽤나 많습니다. 그 사람들은 대체 왜 그 간단한 걸 못 보고 놓쳤을까요? 이상하지 않나요? YOUN님의 논리는 누가 봐도 전혀 topic-sensitive하지 않게 무차별적으로 적용될 겁니다. 암묵적 모순을 텍스트의 함축 등을 탐사해 가며 밝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철학적 문제를 해결하려고 형이상학을 시도만 해도 무조건 그 입장을 모순으로 정식화할 수 있습니다. 근데 심지어 그렇게 정식화된 모순이 엄청 간단명료해요. 그럼 모든 철학적 문제를 다 해결해 버릴 텐데, 뭐하러 그런 기회를 놓치나요. (셀라스의 논변은 topic-sensitive합니다. 그리고 카벨의 논변조차 topic-sensitive합니다. 당장 회의주의만 해도 CR 2부의 세계의 존재에 대한 회의주의, CR 4부의 타인의 마음에 대한 회의주의, CHU의 규칙 따르기 회의적 역설 세 가지 모두 논변의 과정, 구조뿐만 아니라 결론, 의의도 다 다릅니다.) 전 YOUN님이 비트겐슈타인도, 카벨도, 그리고 철학이 무엇인지도, 전부 다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위의 근거가, 이 주장이 단순한 매도와 비방이 아님을 보여주기를 기대합니다. 철학이 무엇인지에 관한 YOUN님의 컨셉션이 교정되지 않는다면, 아마 이 글도 YOUN님에게 이해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1개의 좋아요

(1) 제 3자가 불쑥 끼어들기 참 뭐한(...) 상황이고 제가 잘 모르는 토픽에 관한 논쟁이기도 하지만 "일종의 교통정리"가 필요한듯 하여 짤막하게 글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2) 이제 논쟁이 크게 두 가지 다른 (그렇지만 연관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듯합니다. 하나는

이라고 쓰셨듯, (특정한 누군가의 철학이 아닌) 철학 일반의 목적과 유용성에 관한 견해입니다. 사실 이에 대한 견해는, (어떤 국소적 영역[분과]이든 전반적 영역이든) 어느정도 규범성/가치론적 논의이기 때문에 합의되기 어려운 지점이 있어 보입니다.

(2) 다른 하나는 (1)을 토대로 나오는 (나온다 추정되는) 비트겐슈타인(혹은 다른
학자)에 대한 해석이 있습니다. 이는 (1)과는 무관하게 무엇이 더 설득력있는지 논의할 수 있어 보입니다. 이제부턴 "일종의 연구"가 요청되지 않나 생각되는 것이지요.
보다 명확한 근거가 될 원문헌에 관한 언급, 비트겐슈타인 사상 전체와 여러 요소들의 정합성, (필요하다면) 비트겐슈타인이 반대하고자 했던 당대의 철학들 등등.

제 3 자의 참견이지만, 뜨거운 논쟁이 계속 뜨겁고 건전하기 위해서 이런 짤막한 정리가 필요한듯하여 이리 글을 남깁니다. 모쪼록 두분 다 심력을 써서 좋은 글을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개의 좋아요

말씀 남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불편하실까봐 혹시 질문을 드려도 될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남겨 보겠습니다.

저는 이 논쟁에서 철학 일반이 무엇인지에 관해서 서로 경합하는 용인 가능한 수준의 견해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당연히, 철학이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Mandala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근데 전 단순히 유용성, 그니까 철학이 쓸모가 있냐 없냐를 논하는 것도 아니고, 그 다양한 의견을 하나로 모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도 아닙니다. 단지, 철학을 저렇게 생각하는 것만큼은 도저히 철학 내에서는 용인이 될 수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Mandala님은

이것이 흄에 대한, 철학에 대한 옳게 된 정식화라고 생각하시나요? 이는 굳이 흄에 관한 전문적 연구가 필요한 그런 질문이 아닌 것 같습니다. 애초에 이 정식화도 흄의 텍스트에 대한 전문적 연구를 통해서 이끌어낸 게 아니죠. 그냥 흄에 대한 "이미지"에 관한 논의여도 크게 상관없습니다.

저는 이게 흄을, 철학을 진지하게 이해해보려는 사람에게서는 도저히 나올 수가 없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a) (b)에서부터 (a') (b')가 도출 되나요?

진짜 관대하게 도출된다고 인정해도, 그게 '일상적'(제가 보기엔 '과학적', '관습적' 등이 더 적절합니다), '형이상학적'이라는 표현만 탈락되어서 모순처럼 보이는 것뿐이지 실제로는 모순이 아니지 않나요?

진짜 관대하게 정말로 모순이라고 인정을 해도, 이걸 우리가 철학적 문제에 도달했다는 것으로 이해해야지, 모순이 발생했으니까=철학적 문제가 발생했으니까 여기엔 반드시 오류가 있으며 그 오류는 바로 그 모순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로 이해하는 게 말이 되나요?

철학자는 강박증 같은 것 때문에 무언가를 요구하는 게 아니고, 회의적 논변을 통해서 철학적 탐구가 요청됨을 "합리적으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근데 위와 같은 이해는 철학자의 과정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합리적 과정을 완전히 배제해 버립니다. 철학자의 논변 과정을 공격하는 것은 굉장히 topic-sensitive하고 텍스트의 내적 논리에 천착하는 연구 또한 필요로 합니다. 근데 저렇게 이해하면 이런 연구 작업은 전혀 필요가 없습니다. 철학자가 무슨 주제를 가지고 작업을 시도하는지만 알아도 곧바로 모순으로 정식화할 수 있습니다. 철학자는 강박증.과대망상증 환자고, 과대망상의 "증상"인 모순을 폭로당함으로써 치료받아야 합니다.

저의 "철학적" 직관으로는 이런 사고방식이 철학 내에서 용인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3자에게 여쭤볼 필요가 있다고 느끼는 겁니다. 제가 느끼기에 더 이상 논쟁의 핵심은 비트겐슈타인 해석에 있지가 않아 보입니다.

(0) 하하하. 불편하지는 않는데 곤란한 것은 사실이네요. 제가 느끼기로는 저에게 일종의 "심판관" 자리를 주시는 듯한데, 제가 그럴 자격이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몇 자 쓰도록 하겠습니다. 두 분에게는 어떠한 개인적 감정도 없으며, 이 글에 나타는 두 분 입장에 대한 요약/평가 혹은 재해석은 온전히 제 관점이라는 점을 미리 서술합니다. 제가 텔레파시가 가능한 궁예는 아니라서요.

(1)

우선 말씀은 이렇게 하시지만, 제가 볼 때는 오히려 제가 "핵심"을 지적한듯합니다. 제가 말했듯, 문제는 여전히 "철학 일반에 대한 견해 차이"로 보입니다. 다만 voiceright님이 지적하신 것은

라는 점이지요. 즉, 이 문제는 "철학 일반에 대한 견해 차이"는 맞지만, voiceright님이 보시기에 윤님의 입장(으로 추정되는 것)은 "철학 내에서" 용인될 수 없는 견해이다, 라는 것이 적절한 요약인 듯 합니다.

(1-1) 이렇게 되면 저는 자연스럽게 몇 가지 의문이 듭니다.
(a) 이 논쟁에서 윤님은 철학 일반에 대해 (직접적으로) 아무런 견해도 표명하진 않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논쟁이 어느순간부터 허수아비 공격으로 흘러간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b) 보이스라이트님이 해석하신 윤님의 입장이 실제 윤님의 입장이라고 가정합시다. (그래서 허수아비 공격이 아니라고 합시다.) 그럼에도 여전히 궁금한 것은 "철학 내에서 용인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보이스라이트님 말을 제가 거칠게 요약하자면) 윤님이 철학자들은 과대망상을 하고 있으며, 아무리 합리적이여도 그게 과대망상이므로 치료 받아야 한다, 라는 견해를 가진다고 합시다.

이 자체는 굉장히 과격하고 과감한 주장인 것은 맞습니다. 철학하는 사람들 기분은 나빠지겠죠. 자신들이 하는 것은 학문이 아닌 망상이며,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주장하는 셈이니깐요. 그렇다고 이게 "철학 내에서 용인될 수 없는 것"인지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철학의 한 부분, 혹은 철학 일반조차 폐기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왜 용인할 수 없으신 것이죠?

(1-2) 철학계 내에서도 철학의 기존 역할을 굉장히 축소할 것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여럿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리처드 로티도 이러한 포지션이었던 것으로 기억하죠. (제 기억으로는 이로 인해 프린스턴대 철학과 교수 자리를 내려놓고, 버지니아대 "인문학부" 교수로 넘어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상대적으로 굉장히 강한 자연주의를 옹호하시는 분들도, 철학의 프로젝트 일반이 결국 과학으로 환원되어야 한다고 보시죠. (정확하진 않지만, 처칠랜드가 이러한 입장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2) 그리고 흄에 관한 논의가 "철학" 일반으로 팽창하는 것은 일종의 "비약"처럼 느껴집니다. 저는 흄에 관해서 모르고, 상대성 이론에 대해서도 모릅니다. (물론 흄 시대에는 상대성이론이 없었기에 저 모든 것들이 가정이라는 점은 압니다.)

제가 볼 때, 윤님의 견해는 다음과 같아 보입니다.
(i) 과학은 자신이 예견한 현상에 대해, 실제로 그 현상이 반복적으로 나타났다면 정당화된다.
(굉장히 나이브하지만, 어떠어떠할 때 번개가 내린다고 해보자. 그리고 실제로 어떠어떠한 때 번개가 내렸고 특별한 예외가 없었다. 그러하면 "어떠어떠한 때 번개가 내린다."라는 과학 이론은 옳다.)

(ii) 과학은 이 이상의 어떠한 형이상학적 가정물을 "굳이" 추가해서 정당화할 필요가 없다.
("어떠어떠할 때 번개가 내린다."라는 과학 이론에서 원자라던가, 경험적으로 관찰 불가능한 어떠한 요소를 굳이 투입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요약해볼 때, 이는 "철학 일반"에 관한 논의라기보단, 윤님 자신의 과학에 대한 이해, 즉 과학철학적 입장을 내비친 것으로 저는 이해됩니다.

(2-1) 철학의 여러 분과들에 대해서, 윤님의 견해가 굉장히 미니멀하고, 경험주의적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자체로 이게 문제가 된다 여기진 않습니다.
왜냐하면 때론 학자들은 어떠한 '도입물 자체'를 문제 삼기도 하니깐요.

이 부분은 라이칸의 책을 제가 요약한 파트입니다. 명제에 관한 라이칸의 태도는, (제가 볼 때) 어떠한 일상 경험을 넘어선 '형이상학적 가정물'에 대한 윤님의 태도와 동일한 지점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3) 즉흥적으로 써서 두서가 없으니, 간략한 요약을 남기도록 하겠습니다.
(i) 제가 볼 때, 윤님은 철학의 여러 분야에 대해서 굉장히 미니멀하고, 경험주의적인 태도를 가지신 듯합니다. 이러한 태도가 철학 내에서 용인받을 수 없는 스텐스라고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ii) 이제 보이스라이트님이 요약하셨든, 윤님은 "철학은 망상이며 이는 치유되어야 한다."라는 견해를 가진다고 합시다. 설사 이러한 견해를 가졌더라도, 이러한 윤님의 태도가 철학 내에서 용인받을 수 없는 스텐스라고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지금/역사적으로 존재했던 것들에 대해서 '사이비'라는 호칭을 붙여왔습니다. 관상학도 그렇고, 풍수지리도 그렇고, 무속도 그렇습니다. 한의학도 누군가는 사이비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철학이 "사이비"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불리지 않을 "특권적 위치"에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누군가가 근거도 없이 그렇데 말한다면, 그건 굳이 상대할 필요가 없습니다. 누군가가 근거를 가지고 말한다고 해도 대답해도 되고 안 해도 되죠. 그렇다고 누군가가 그렇게 말하지 못하게 만들 이유는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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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란하셨을 텐데 답변 주셔서 감사합니다. Mandala님의 답변에 관한 제 의견을 좀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일단 이 논쟁이 어느 순간부터 허수아비 공격으로 흘러갔다는 지적은, 조금 인정하겠습니다. 근데 제가 자꾸 허수아비를 세워놓고 패는 이유는, YOUN님의 주장이 잘못된 원인이, 그 이면에 있는 철학 일반에 관한 컨셉션 자체에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너무 갔나요? 뭐 그럴 수도 있습니다. 전 그냥 인신공격으로 커뮤니티에서 쫓겨나기 바로 직전 선까지 비판을 시도했을 뿐입니다. 제 비판이 YOUN님께 도움이 되면 좋고, 안 되면 아쉬운 거고 그렇네요.

흄에 관한 논의가 "철학" 일반으로 일반화되는 것은 비약이 맞습니다. 또 많은 학자들이 형이상학적 도입물에 관해 축소주의적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근데 YOUN님은, 다른 철학자들을 비판할 때, 아마 본인이 그 어떠한 철학적 논제를 도입하지 않고서 단지 그 철학자들의 결함을 비판할 뿐이라고 생각하실 것 같습니다.

이런 문장만 보더라도요. 그래서 YOUN님의 주장은, 축소주의적, 경험주의적 긍정적 논제로 이해되면 또 안 될 것 같습니다.
저희의 흄에 관한 논의가 이런 맥락에서 철학 일반으로 일반화되는 이유는, YOUN님의 지적이 "흄의 결함" 자체에 대한 구체적 비판이 아니라, "형이상학의 결함"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저절로 일반화될 수 있는 그런 성격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철학 일반이 폐기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용인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주장할 수도 있죠.
근데 제가 용인할 수 없는 것은,
"철학적 문제"에 도달하기만 해도 그것이 철학자가 오류에 빠졌다는 증거가 된다는 사고방식
입니다. 제가 이런 사고방식을 YOUN님에게 귀속하는 건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일까요? 처음에는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갈수록 아닌 것 같습니다.


추가로 남깁니다.
귀류법이랑 무의미함을 보이기는 다릅니다. 모순을 지적하는 것은 대체로 귀류법입니다. 귀류법은 어떤 명제가 참이라고 가정했을 때 모순에 빠지므로 그 명제가 "거짓임"을 증명하는 방법입니다. 귀류법은 무의미함을 지적하는 것과 상관이 없습니다.
모순 문장은 무의미합니다. 근데 무의미하다고 전부 모순인 것은 아닙니다.
모순을 가지고 꼼짝 못하는 것은 모순 문장이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근데 꼼짝 못한다고 해서 다 모순인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모순에 관한 비트겐슈타인의 수학철학적 고찰들을 아무리 가져와 봐야 YOUN님의 주장은 정당화되지 않습니다. 예컨대 탐구 125절은 이 논의가 명백하게 수학철학적 고찰의 맥락임을 명시적으로 드러냅니다. "해소하기"는 "보여주기"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보여주기"는 "해소하기" 과정의 핵심 부분입니다. 아직도 2년 9개월 전과 똑같은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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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러한 답과 물음에 대한 대답은, 제가 아닌 윤님이 하시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듭니다.

(2) 저는 그저 논의의 맥락이 선명해지는 지금 이 시점에, 제 역할을 다 했다 생각합니다.

결국 이제부터 이 부분이 논의의 핵심이 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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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외자의 입장에서 여러 생각이 드는데요. 최근 한국 논문 출판과 관련된 여러 쟁점이 논의되었기에 조심스럽습니다만, 본 문제제기는 좀더 다듬어 논문 지면상에서 전개될 수 있다면 더 생산적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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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답변 감사합니다. 저의 댓글 이후 비트겐슈타인 해석에 관한 상당한 토론이 있었던 걸로 보이네요. 저는 전공자가 아니라 해석에 대해선 특별히 할 말이 없습니다. 다만 '철학과 개별 학문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일반적 문제에 관심이 있습니다. 저의 전공과 관련해 한마디 보태겠습니다.

제가 보기에 비트겐슈타인(또는 YOUN님)의 우려는 개별 학문의 독립성 보장과 관련되는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일상의 실천에서 형이상학으로의 논리적 비약을 막고자 하는 것' 말입니다. 이런 경우 크게 두 가지 가능성이 있을 것 같은데요. 하나는 특정한 형이상학 이론을 거부하거나 수용하지 않고 단지 사실을 기술하는 소박한 차원이겠고('개별 학문의 존립 근거는 해당 학문 내에 있다'), 하나는 개별 학문의 존립이 철학과 전혀 무관하다는 좀 더 강한 주장이 있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견해가 전자라면 말씀하신 것처럼 상식적인 얘기이므로 크게 논란이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만 위 글에서는 두 가지 입장이 다 보이는데 논조는 후자에 더 무게를 두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현재 논의에서 빠져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과학 이면에 있다고 하는 형이상학적 대상이라 할 때 정확히 누구의 형이상학을 가리키는가입니다. 가령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일의적 존재론을 가정하는 것은 개별 학문의 존립 근거를 없애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개별 학문들은 단지 플라톤의 일자에 도달하기 위한 '계기'에 불과하고 따라서 그 자체로는 정당성이 없게 된다는 겁니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비트겐슈타인의 문구('존재하는 것을 그대로 둔다')와 비슷하게 자신의 형이상학을 존재하는 것을 존재한다는 관점에서 탐구하는 학문이라 규정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그의 형이상학은 개별 학문에 나름의 독립성을 부여하면서도 동시에 개별 학문의 형이상학에 대한 의존을 보여줍니다.

모순율을 예로 든다면, 어떤 속성이 어떤 사물에 속하면서 동시에 속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은 모든 사물에 적용됩니다. 단지 공학자는 다리를 설계할 때 모순율을 의식하지 않고 의식할 필요도 없다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모순율을 몰라도 다리를 지을 수 있습니다. 다만 철학자는 모든 사물에 공통적으로 속하는 속성이나 법칙에 관심이 있으므로 개별 학문들이 모순율을 전제로 삼는다고 지적할 수는 있다는 겁니다. 이때 모순율은 과학자나 일상인에게 숨겨진 어떤 대단히 심오한 진리가 아니라, 단지 우리가 일상에서 전제로 하지만 형식화하지 않은 공리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이 다음처럼 말했다면

건설자의 제한된 관점에서는 맞지만 철학의 일반적 관점에서는 틀리게 되는 것입니다. 다리는 특정한 재료로 만들어지고 그 재료는 모순율에 따라 단단하면서 동시에 단단하지 않거나 존재하면서 동시에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없습니다. 즉 모순율이 사물의 실재에 대응한다는 겁니다(재료에 속하는 어떤 속성과 그것의 모순항을 수치로 표현한 것이 '모순된 계산체계'일 것입니다). 재료의 상대적 고정성이 성공적인 다리 건설의 전제라는 점은 분명할 것입니다.

요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을 취할 경우 비트겐슈타인 식으로 개별 학문의 독립성과 개별 학문의 철학에 대한 의존을 이분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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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형이상학'이라는 용어를 어떤 의미로 사용할 것이냐에 따라 달라질 것 같아요. 저는 이 용어를 대체로 부정적인 뉘앙스로 사용하지만, 말씀하신 아리스토텔레스의 예처럼 충분히 긍정적인 뉘앙스를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관련해서 제가 예전에 썼던 몇 가지 글들을 보탭니다. (처음 두 개는 지난 학기 기말 페이퍼였기도 해요.)

(1) 개별 학문과 형이상학의 관계에 대한 생각

(2) 제가 생각하는 긍정적 형이상학의 예시

(3) 모순율은 사물의 실재에 대응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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