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헤겔은 현상과 사물 자체가 이분법적으로 구분된다는 '전제'를 비판합니다. 애초에 현상과 사물 자체가 결코 일치하지 않는다는 전제를 상정한 상태에서는 그 둘을 다시 일치시키고자 하는 어떠한 시도도 성공하지 못합니다. 즉, 칸트주의는 사물 자체에 대한 인식이 불가능하다고 전제한 채 다시 사물 자체에 대한 인식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모순에 빠져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체계적이고 치밀한 이론을 성립시키는 방식으로 '해결(solve)'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무비판적으로 상정된 전제를 거부하는 방식으로 '해소(dissolve)'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잘못된 전제로부터 철학을 성립시키고자 하는 칸트의 시도를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조롱합니다.
"무엇보다 우선 명심해야 할 일은, 인식은 절대적인 것을 획득하기 위한 도구라거나 또는 진리를 모사하는 매체라는 등의 부질없는 생각을 떨쳐버려야만 한다는 것이다. 인식과 절대적 진리가 서로 분리될 수 있다고 보는 생각이야말로 문제 해결을 불가능하게 하는 불씨가 된다. 그런 전제 아래 학문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단정하며 학문하는 노고를 떨쳐내버리려고 하면서도 역시 진지하고 열의에 찬 노력을 기울이는 듯한 모양새만을 갖추어나갈 속셈으로 학문하기에 어울리지도 않는 사람이 그런 전제에서 이러저러한 궁리를 짜내곤 하는데, 정말 그런 작태는 드러내지 않았으면 한다. 또한 이제는 그런 전제에서 생겨나는 의문에 답하는 일도 그만두어야만 하겠다."(G. W. F. 헤겔, 『정신현상학』, 116쪽 인용자 강조)
즉, 칸트는 현상과 사물 자체의 관계에 대해 일관성 있는 해명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한편으로, 칸트는 '이성의 한계'를 강조하기 위해 우리의 인식이 결코 사물 자체와 결합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칸트는 '회의주의'에 빠지지 않기 위해 우리의 인식이 결국 사물 자체와 결합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두 입장을 화해시키려는 시도는 모순을 발생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헤겔은, 소위 '엔치클로페디'라고 일컬어지는, 『철학적 학문의 백과사전 강요』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모든 이원론적 체계에서, 그리고 특별히 칸트의 체계에서, 근본적 결함은 독립적이어서 결합 불가능(unvereinbar)하다고 이전에 선언된 것을 결합하는(vereinen) 비일관성에서 드러난다. 결합된 것이 단순히 참이라고 선언되었는데도, 이제 대신 두 계기가, 곧 이들의 독립적으로 분열된 존재가 이들의 진리여야 했던 결합 속에서는 부정된 두 계기가, 이들이 오직 분열 속에서 존재하는 한에서는 진리와 현실성을 획득한다. 이와 같은 종류의 철학함은 이런 식으로 오락가락하는 가운데 각각의 개별적 결정이 불만족스러운 것으로 선언된다는 단순한 인식을 결여한다. 그래서 결함은 두 사유를 화해시키기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존재한다.(G. W. F. Hegel, Encyclopedia of Philosophical Sciences in Basic Outline, Part 1: Science of Logic, §60, 원저자 강조)
(6) 따라서 헤겔은 애초에 현상 너머에 '사물 자체'를 상정하려는 시도를 거부합니다. 오히려 그는 인식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경험이야 말로 세계에 대한 '진리'를 매 순간 드러내주고 있다고 강조합니다. 즉, '현상/사물 자체'의 이분법을 거부한 상황에서는 더 이상 우리의 인식이 사물 자체와 일치하는지를 기준으로 진리를 판단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 바깥에는 아무런 다른 세계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참/거짓'에 대한 판단은 순전히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를 바탕으로 성립해야 할 뿐입니다.
(7) 소위 '변증법'이란 인식의 영역에서 '참/거짓'에 대한 판단이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주는 논리입니다. 헤겔주의는 변증법을 바탕으로 우리의 인식이 끊임없는 수정의 과정에서 발전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즉, 우리는 정상적 상황에서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거짓일지 모른다고 불안해 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앉아 있는 탁자는 노란색이다." 같은 판단은 기본적으로 '참'이라고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다만, 세계에 대한 경험은 때때로 이전의 인식을 부정하는 판단을 형성하기도 합니다. 가령, "내가 앉아 있는 탁자는 노란색이다." 같은 판단은 나의 방 조명이 노란색이었던 것으로 밝혀질 때에야 비로소 의심의 대상이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세계에 대한 경험이 이전의 인식을 수정하여 우리에게 새로운 차원의 '참'을 드러내 줍니다.
(8) 세계에 대한 경험의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참/거짓'의 수정에는 사물 자체가 개입할 여지가 조금도 없습니다. 즉, 칸트주의가 강조하는 것처럼, 우리는 유한한 인식의 한계 속에서 세계를 경험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의 인식은 결코 '완벽한 진리' 따위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칸트주의가 주장하는 것과 달리, 우리는 유한한 인식의 한계를 해명하기 위해 사물 자체를 도입하고자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인식은 세계에 대한 경험을 통해 매 순간 수정된다는 의미에서 유한할 뿐입니다. 따라서 이전의 인식을 부정하는 대상은 현상 너머에 존재하는 '사물 자체'가 아니라, 세계에 대한 경험의 과정에서 주어지는 '새로운 인식'입니다. 헤겔은 이전의 인식이 언제나 새로운 인식을 통해서 극복된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즉 의식은 그 자신의 잣대를 가지고 자기를 잴 수 있으므로 진위를 탐구하는 데서도 의식이 스스로 자기 자신과 비교만 하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위에서 논의된 지와 진리의 구별이란 바로 의식 자신이 행하는 구별일 뿐이기 때문이다."(G. W. F. 헤겔, 『정신현상학』, 124쪽)
여기서 '지(Wissen)'와 '진리(Wahrheit)'의 구별이란 매 순간 갱신됩니다. 즉, 우리가 지니고 있는 '지'는 새로운 '진리'가 현상하는 순간 수정됩니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진리'를 바탕으로 우리가 지니고 있는 '지'를 새롭게 구성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새롭게 구성된 '지' 역시 또 다른 새로운 '진리'가 현상하는 순간 다시 수정됩니다. 우리는 또 다시 새로운 '진리'를 바탕으로 우리가 지니고 있는 '지'를 새롭게 구성해야 합니다. 이러한 의식의 자기 부정은 끊임없이 계속됩니다. 의식은 매 순간 '진리'를 경험하는 과정에서 '지'를 수정하는 것입니다.
(9) 헤겔의 철학은 고정된 진리를 상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진리가 저 어딘가에 우리가 발견해내야 할 '대상'이나 '체계'로 존재하고 있다는 주장을 강력하게 비판합니다. 즉, 특정한 이론적 형식 속에 진리를 가두고자 하는 시도는 언제나 실패하고 맙니다. 우리가 포착하고 있는 '지'는 경험이 드러내고 있는 '진리'를 통해 매 순간 수정됩니다. 따라서 진리는 이론적 형식을 끊임없이 깨부수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현상합니다.
(10) 우리는 마치 살아 움직이는 대상과 만나는 것처럼 진리와 만납니다. 잡으려 해도 손아귀를 계속 벗어나는 역동성이 바로 진리를 표상하는 이미지입니다. 따라서 헤겔의 철학에서 진리는 '운동'이라고 표현됩니다(헤겔, 『정신현상학』, 85쪽). 또한 생명력을 지닌 '주체'라고 강조됩니다(헤겔, 『정신현상학』, 103쪽). 진리를 마치 눈앞에 놓여 있는 기성품처럼 소유하고자 하는 태도는 진리가 지닌 역동성을 제대로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받습니다.
"[확정적 사유는] '참'과 '거짓'은 결코 움직일 수 없는 각기 독자적 성질을 지닌 것이라고 하면서 서로를 이쪽과 저쪽으로 나누어 고정시켜놓고 다루어나간다. 그런 입장에 대해서는 진리란 기성품(旣成品)으로 만들어져서 그대로 지갑에 넣기만 하면 되는 동전과 같은 것은 아니라고 대꾸해야만 하겠다."(헤겔, 『정신현상학』, 76-7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