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종류의 진리: 이승종과 이영철의 논쟁에 대한 고찰

『비트겐슈타인 새로 읽기』 2장과 13장에는 의미의 문제와 진리의 문제 사이의 관계를 둘러싼 흥미로운 일련의 논쟁이 등장한다. 논쟁의 주인공들은 비트겐슈타인, 데이빗슨, 이승종, 이영철이다. 즉, 이승종은 의미의 문제와 진리의 문제 중 무엇이 더 선행하는지를 주제로 비트겐슈타인과 데이빗슨을 서로 대립시킨다. 이승종에 따르면, 비트겐슈타인은 의미의 문제를 진리의 문제보다 우선시하고, 데이빗슨은 진리의 문제를 의미의 문제보다 우선시한다. 그러나 이영철은 이승종이 제시한 의미의 문제와 진리의 문제 사이의 차이를 거부한다. 이영철에 따르면, 비트겐슈타인은 데이빗슨처럼 더 이상 정당화가 불가능한 진리가 언어게임을 가능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본고는 우선 비트겐슈타인과 데이빗슨의 차이에 대한 이승종의 입장을 소개할 것이다(Ⅰ). 다음으로, 이승종의 입장에 대한 이영철의 비판을 요약할 것이다(Ⅱ) 마지막으로, 더 이상 정당화가 불가능한 진리를 상정하고자 하는 시도조차 결국 근본적 ‘확실성의 진리(truth of certainty)’와 개별적 ‘주장의 진리(truth of assertions)’를 구별해야 한다는 점에서 의미의 문제와 진리의 문제 사이에는 간과될 수 없는 철학적 간극이 놓여 있다고 논증할 것이다(Ⅲ).

Ⅰ. 이승종의 입장: 의미의 문제는 진리의 문제에 선행한다.

이승종은 비트겐슈타인이 이미 『논리-철학 논고』로 대표되는 전기철학에서부터 의미의 문제와 진리의 문제를 이원론적으로 사유하였다고 지적한다. 그는 ‘사태(Sachverhalt)’와 ‘사실(Tatsache)’이라는 개념 사이의 차이가 바로 의미의 문제와 진리의 문제 사이의 차이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관점을 반영한다고 강조한다. 즉, 사태란 세계의 가능한 모습이고, 사실이란 세계의 실제 모습이다. 한 명제가 대상이 결합할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인 사태를 묘사할 경우 그 명제는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여겨지고, 한 명제가 대상이 결합한 실제 모습인 사실을 묘사할 경우 그 명제는 그 명제는 참인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서 의미의 문제는 진리의 문제에 선행한다. 세계의 가능한 모습을 묘사하는 의미 있는 명제들 중에서만 세계의 실제 모습을 묘사하는 참인 명제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의 전기철학에서 의미의 문제와 진리의 문제가 맺고 있는 관계를 다음과 같은 표로 간략히 나타낼 수 있다.1

『철학적 탐구』로 대표되는 비트겐슈타인의 후기철학에서도 의미의 문제와 진리의 문제는 엄격하게 구별된다. 비트겐슈타인은 여전히 의미의 문제가 진리의 문제에 선행한다고 강조한다. 다만, 그는 언어가 어떻게 의미와 진리를 얻게 되는지를 해명하는 방식에서 이전과는 차이를 보일 뿐이다. 즉, 후기철학에서는 언어가 사태를 묘사함으로써 의미를 얻는다는 생각을 대신하여 언어가 각각의 맥락에 따라 사용됨으로써 의미를 얻는다는 생각이 등장한다. 마찬가지로, 후기철학에서는 언어가 사실을 묘사함으로써 ‘참’이라는 진리치를 얻는다는 생각을 대신하여 언어가 정당화의 맥락에 따라 사용됨으로써 ‘참’이라는 진리치를 얻는다는 생각이 등장한다. 사실을 묘사하는 명제는 사태를 묘사하는 명제 중 한 가지 종류였던 것처럼, 정당화의 맥락에 따라 사용되는 명제는 각각의 맥락에 따라 사용되는 명제 중 한 가지 종류이다.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이 의미의 문제와 진리의 문제를 구조화하는 방식은 전기철학과 후기철학 모두에서 동일하다. 우리는 전기철학과 후기철학에서 의미의 기준과 진리의 기준 사이의 관계를 다음과 같은 그림으로 나타낼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의미의 문제가 진리의 문제에 선행한다는 사실로부터 우리의 언어가 멈출 수밖에 없는 근본적 지점을 강조한다. 그는 진리, 지식, 정당화 등이 성립하기 위해 우선 의미가 성립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즉,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무엇이 지식이고 무엇이 억견인지, 무엇이 정당화되고 무엇이 정당화되지 않는지는 특정한 규칙에 근거하여 평가되어야 한다. 그러나 무엇이 의미 있는 규칙이고 무엇이 의미 없는 규칙인지는 더 이상 평가될 수가 없다. 우리는 단지 특정한 규칙을 의미 있는 것으로 받아들인 상태에서 그 규칙에 따라 언어게임을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 언어게임에서 제시되는 모든 질문과 대답은 마지막에 이르러 “나는 다만 이렇게 하고 있을 뿐이다.”(Wittgenstein, 2016: §217)라는 고백에 부딪힌다. 따라서 우리가 어떠한 규칙을 의미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는지는 우리가 어떠한 삶의 형식을 자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와 분리되지 않는다. 우리의 언어는 우리의 자연사(natural history)를 바탕으로 성립하고 있는 것이다. 이승종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정당화가 소진된 차원에서 게임하는 사람의 자연사적 확실성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가 사람이라는 단일한 삶의 형식을 공유한다는 사실은 지식이나 정당화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모든 언어게임의 한계를 규정하는 최후 근거이다. 이 최후 근거가 확보되지 않을 때 더 이상 의미 있는 의사소통은 불가능하다. (이승종, 2022: 61)

여기서 이승종은 비트겐슈타인과 데이빗슨 사이의 차이를 발견한다. 데이빗슨은 비트겐슈타인과 달리 진리론을 바탕으로 의미론을 구성하고자 한다. 그는 두 문장이 동일한 상황에서 이라는 사실로부터 두 문장이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이 도출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문장의 의미란 문장의 진리조건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생각이 데이비슨의 기획을 이루고 있는 대전제 중 하나이다.2 그러나 의미의 문제가 진리의 문제에 선행한다고 보는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에서는 데이빗슨의 기획이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가령, 한 문장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그 문장의 진리치가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다. 우리는 “파이(π)의 전개과정에서 9가 아홉 번 연이어 등장하는 경우가 있다.”라는 문장의 진리치를 알 수 없으면서도 그 문장의 의미는 이해할 수 있다. 오히려 한 문장의 의미가 아직 이해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그 문장의 진리치가 결정될 수 있다는 주장이 정확히 어떠한 상황을 고려하고 있는 것인지는 매우 불분명하다. 진리치 없이 의미를 지니는 문장은 존재하더라도, 의미 없이 진리치를 지니는 문장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Ⅱ. 이영철의 비판: 의미의 문제와 진리의 문제는 구별되지 않는다.

이영철은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이승종의 해석에 반대하여 의미의 문제와 진리의 문제 사이의 상호보완성을 주장한다. 그는 우선 이승종이 ‘의미의 문제’라고 명명한 언어게임의 층위를 비트겐슈타인이 ‘진리의 문제’로 다루기도 한다고 지적한다. 즉, 우리의 언어가 멈출 수밖에 없는 근본적 지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또한 비트겐슈타인이 근본적 지점을 상정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승종과 이영철 모두가 동의한다. 다만, 이러한 지점이 ‘의미’라는 범주로 이야기될 수 있는지 ‘진리’라는 범주로 이야기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두 사람의 의견이 엇갈린다. 이승종은 의미의 문제가 진리의 문제와 엄격하게 구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영철은 의미의 문제가 진리의 문제로도 여겨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영철이 자신의 해석을 정당화하기 위해 제시하는 핵심적 구절은 『확실성에 관하여』 §403과 §205~206이다.

사람에 대해서, 무어의 뜻으로, 그가 어떤 것을 안다, 그가 말하는 것은 그러니까 무조건 진리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나에겐 잘못으로 보인다―그것은 그의 언어놀이들의 흔들리지 않는 기초인 한에서만 진리이다.(Wittgenstein, 2020: §403)

참인 것이 근거가 있는 것이라면, 그 근거는 참이 아니며, 거짓도 아니다.(Wittgenstein, 2020:, §205)

만일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그러나 그것은 참인가?”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그에게 “그렇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가 근거들을 요구한다면, 우리는 “나는 당신에게 아무 근거도 댈 수 없지만, 당신이 좀 더 배운다면 당신도 역시 같은 의견이 될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만일 그가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이는 그가 예컨대 역사를 배울 수 없다는 것을 듯하다.(Wittgenstein, 2020: §206)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은 주장의 참과 거짓을 가능하게 하는 ‘기초’ 혹은 ‘근거’를 다시 ‘진리’라는 용어로 명명한다. 적어도, ‘진리’라는 용어가 언어게임에서 제시되는 개별적 주장의 층위와 언어게임을 성립시키는 근본적 확실성의 층위에 모두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은 명백해 보인다. 따라서 이영철은 의미의 문제와 진리의 문제를 엄격하게 구별하는 입장이 지나치다고 비판한다. 그는 이승종이 ‘의미’라는 용어로 표현한 문제를 자신은 ‘진리’라는 용어로 동일하게 표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가령, 언어게임의 마지막에 우리가 도달하게 되는 지점은 더 이상 정당화가 불가능한 진리이다. 우리는 언어게임이 특정한 세계상(picture of the world)을 진리로 받아들인 상태에서 수행된다고 얼마든지 말할 수 있다. 대화에서 우리의 언어가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는 세계에 대한 우리의 기초적 믿음이 진리라고 초견적으로 가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과 데이빗슨의 관계 역시 서로 대립된다고 여겨질 필요가 없다. 오히려 이영철은 ‘확실성(certainty)’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관점이 ‘원초적 진리(primitive truth)’에 대한 데이빗슨의 관점으로 올바르게 계승되었다고 주장한다. 즉, 데이빗슨은 비트겐슈타인처럼 언어가 일종의 확실성의 층위를 바탕으로 성립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사람과 사람이 더 이상 정당화가 불가능한 진리에서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타인의 언어에 대한 해석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우리가 받아들이는 원초적 진리에 근거하여 우리가 제시하는 개별적 주장이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원초적 진리가 언어의 의미를 가능하게 한다는 데이비슨의 입장은 삶의 형식과 자연사가 언어의 의미를 가능하게 한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입장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두 입장은 ‘의미’와 ‘진리’라는 서로 다른 용어를 사용하여 실제로는 동일한 현상을 말하고 있었을 뿐이다.

Ⅲ. 두 종류의 진리

이영철이 의미의 문제와 진리의 문제에 대해 제시한 입장은 분명 여러 가지 측면에서 설득력이 있다. 그의 입장은 크게 두 가지 의의를 지니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로, 이영철은 확실성의 층위가 때로 ‘진리’라는 용어로 다루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잘 지적하였다. 심지어 비트겐슈타인조차 (일반적이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참과 거짓을 가능하게 만드는 근거나 기초를 ‘진리’라고 부르기를 완전히 거부하지는 않았다. 둘째로, 이영철은 근본적 확실성의 진리가 개별적 주장의 진리를 성립시킨다는 사실을 적절하게 강조하였다. 데이빗슨의 ‘원초적 진리’ 개념은 (비트겐슈타인이 ‘삶의 형식’과 ‘자연사’ 개념처럼) 우리의 언어에 의미를 부여하는 근본적 확실성의 진리를 드러내주었다. 특별히, 이러한 두 가지 의의는 비트겐슈타인과 데이빗슨을 넘어서는 더 넓은 맥락에서도 유효할 것으로 보인다. 가령, 우리는 (a) ‘진리’라는 용어를 확실성의 층위에 적용시키면서도 (b) 개별적 주장의 진리를 근본적 확실성의 진리에 근거하여 해명하고자 하는 철학자로 키에르케고어와 하이데거를 추가적으로 제시할 수 있다.

(1) 키에르케고어는 ‘객관적 진리’와 ‘나에게 있어 진리인 진리’라는 개념을 엄격하게 구별한 철학자로 유명하다. 그는 ‘객관적 진리’를 “지식”이라고도 부르고, ‘나에게 있어 진리인 진리’를 “내가 그것을 위해 살고 죽기를 원하는 관념”이라고도 부른다(Kierkegaard, 1996: 32~37 참고). 즉, 객관적 진리는 정보의 참/거짓과 관련된 문제이고, 나에게 있어 진리인 진리는 삶의 의미/무의미와 관련된 문제이다. 나에게 있어 진리인 진리를 통해 삶 자체가 의미를 얻을 때에야 비로소 각각의 정보의 참도 제대로 성립할 수 있다. 따라서 키에르케고어가 말한 ‘객관적 진리’는 개별적 주장의 진리에 대응하고, ‘나에게 있어 진리인 진리’는 개별적 주장의 진리를 성립시키는 근본적 확실성의 진리에 대응한다. 물론, 개인의 실존을 의미의 지평으로 제시한 키에르케고어의 입장이 사람의 삶의 형식과 자연사를 의미의 지평으로 제시한 비트겐슈타인의 입장과 완전히 일치할 수는 없다. 다만, 개별적 주장의 진리보다 근본적 확실성의 진리가 선행한다고 보았다는 점에서만큼은 두 입장 사이에 구조적 유사성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 하이데거는 ‘마주 향함(ein Entgegen)’에서 성립하는 진리와 ‘열려 있음(ein Offene)’에서 성립하는 진리를 구별한다. 여기서 ‘마주향함’이란 진술과 사태 사이의 합치를 의미하고, ‘열려 있음’이란 그 합치를 가능하게 하는 존재의 개시성을 의미한다(Heidegger, 2005 100~103 참고). 즉, 하이데거에 따르면, 사태와 진술이 합치하는지 합치하지 않는지는 항상 특정한 맥락을 전제하고서 이야기되어야 한다. 가령, 그는 단순한 금속에 지나지 않는 5마르크짜리 주화가 어떻게 “이 주화는 둥글다.”라는 진술과 합치할 수 있는지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애초에 주화는 물질이고, 둥글고, 화폐인 반면, 진술은 물질이 아니고, 모양이 없고, 지불수단이 아니다. 둘 사이에는 엄밀하게 말해 ‘합치’라고 불릴 수 있을 만한 요소가 아무것도 없다. 실제로, 우리가 5마르크짜리 주화와 “이 주화는 둥글다.”라는 진술이 서로 합치하여 ‘참’이라는 관계가 성립한다고 생각하는 상황에서는 직접적으로 말해지지 않은 여러 가지 맥락이 가정된다. 진술이 참인 것으로 여겨지기 위해서는 사태와 진술 사이의 ‘마주 향함’을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맥락이 열려야 한다. 이러한 ‘열려 있음’ 혹은 ‘개시성’이 바로 그리스인들이 ‘알레테이아(aletheia, 진리)’라는 단어에 부여한 본래의 의미이다. 합치로서의 진리개시성으로서의 진리에 의존하는 것이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 데이빗슨, 키에르케고어, 하이데거 등이 두 종류의 진리를 상정한다는 사실로부터 의미의 문제와 진리의 문제가 분리될 수 없다는 결론이 도출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그들이 이야기한 두 종류의 진리가 실제로는 서로 완전히 다른 층위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3 즉, 개별적 주장의 진리와 근본적 확실성의 진리는 모두 ‘진리’라는 이름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것과 달리 결코 동일하지 않다. 오히려 두 종류의 진리에 대한 논의는 언제나 개별적 주장의 진리와 근본적 확실성의 진리 사이의 넘을 수 없는 차이를 지적하기 위해 제시되고 있다. 지식에 선행하는 확실성(비트겐슈타인), 해석에 선행하는 일치(데이빗슨), 정보에 선행하는 삶(키에르케고어), 합치에 선행하는 개시성(하이데거)이 바로 두 종류의 진리에 대한 논의에서 강조되고 있는 핵심이다. 두 종류의 진리가 구별되지 않는다는 주장은 두 종류의 진리에 대한 논의를 오도할 뿐이다.

따라서 의미의 문제와 진리의 문제 사이에 놓여 있는 철학적 간극은 간과될 수 없다. 의미의 문제는 진리의 문제에 선행하는 층위로서 다루어져야 한다. ‘진리’라는 하나의 이름이 서로 다른 두 층위를 자칫 혼동하도록 만드는 결과를 초래해서는 안 된다. 적어도, 비트겐슈타인, 데이빗슨, 키에르케고어, 하이데거는 두 종류의 진리를 통해 개별적 주장의 진리와 근본적 확실성의 진리가 다르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두 종류의 진리를 주장한 인물들은 실제로는 의미의 문제와 진리의 문제를 뒤섞지 않은 것이다. 여기서 이승종의 입장은 이영철의 비판에 비해 더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 즉, (a) 의미의 문제와 진리의 문제를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진리로 이야기할 수 있다고 주장한 점에서 이영철은 옳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b) 두 종류의 진리가 구별되지 않는다고 주장한 점에서 이영철은 분명히 틀렸다. 오히려 (c) 의미의 문제와 진리의 문제 사이의 엄격한 구별을 강조한 점에서 이승종이 옳았다. (d) 우리가 의미의 문제와 진리의 문제를 모두 ‘진리’라는 용어를 통해 해명하는 상황에서조차 두 종류의 진리는 엄격하게 구별되어야 한다.

참고

이승종, 『비트겐슈타인이 살아 있다면: 논리철학적 탐구』, 문학과지성사, 2002.
이승종, 『비트겐슈타인 새로 읽기: 자연주의적 해석』, 아카넷, 2022.
Heidegger, M., 『이정표』, 제2권, 이선일 옮김, 한길사, 2005.
Tugendhat, E., “Heidegger’s Idea of Truth,” Hermeneutics and Truth, B. R. Wachterhauser (ed.), Evanston, Illinois: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1994, 83-97.
Wittgenstein. L., 『철학적 탐구』, 이승종 옮김, 아카넷, 2016.
Wittgenstein. L., 『확실성에 관하여』, 이영철 옮김, 책세상, 2020.
Kierkegaard. S., Papers and Journals: A Selection, A. Hannay (trans.), London and New York: Penguin Books, 1996.


  1. 위의 표가 비트겐슈타인의 전기철학에서 고려되는 명제의 범주를 모두 포괄하는 것은 아니다. 『논리-철학 논고』는 ‘의미 있는(sinnvol)’과 ‘무의미한(unsinn)’이라는 범주 이외에도 ‘의미를 결여한(sinnlos)’이라는 범주에 대해서 역시 고찰한다. 의미를 결여한 명제에는 항상 참인 동어반복적 명제와 항상 거짓인 모순적 명제가 귀속된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 논고』를 작성할 당시 동어반복적 명제와 모순적 명제의 의미에 대해 상충하는 견해를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형식적 명제론’의 관점에서는 동어반복적 명제와 모순적 명제가 의미를 지닌다고 주장하면서도, ‘의미론적 명제론’의 관점에서는 동어반복적 명제와 모순적 명제가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고도 주장한다(이승종, 2002: 제2장 참고).

  2. 데이빗슨은 서로 다른 두 문장이 진리조건에서 일치할 경우 그 두 문장은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의 언어 속 각각의 문장과 타자의 언어 속 각각의 문장을 타르스키의 T-문장 형식에 따라 서로 비교하여 의미론을 성립시키고자 하는 시도로 귀결된다. 여기서 T-문장이란 “x는 참이다 iff p”와 같은 형식의 문장이다. 우리는 개체 변항 ‘x’에 타자의 언어를 대입하고 문장 변항 ‘p’에 우리의 언어를 대입하는 방식으로 타자의 언어 속 각각의 문장에 대응하는 우리의 언어 속 각각의 문장이 무엇인지에 대한 체계적인 의미론을 구성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3. 이러한 사실을 강조하는 인물로는 투겐트하트가 있다. 그는 하이데거의 사유에서 주장의 진리에 해당하는 ‘알레우테인(aletheuein)’과 세계의 개시성에 해당하는 ‘아포파이네스타이(apophainestai)’가 엄격하게 구별된다고 지적한다(E. Tugendhat, “Heidegger’s Idea of Truth,” Hermeneutics and Truth, B. R. Wachterhauser (ed.), Evanston, Illinois: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1994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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