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의 '진짜' 예술관에 신경 쓸 필요가 있나?

Daily Nous에 링크를 타고 찾아간, Tom Whyman의 "Should We Care What Hegel Really Thought of Art?" (링크)라는 논설문을 읽고서 서강올빼미 분들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지 궁금해 일부 발췌역을 해보았습니다. 좀더 궁금하신 분들게서는 링크를 따라 전문을 확인해보시길 권합니다.

배경 정보:


이 위대한 관념론 철학자의 미학 강의록이 더 필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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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멋진 일이다. 꼭 헤겔 예술 철학에 대한 해석을 두고 논적을 꺾기 위해 새로운 강의록의 발견을 꾸며내는 헤겔 연구자가 주인공인 움베르토 에코식 소설 아이디어가 떠오른게 고마워서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피벡의 경우엔 이번 발견을 모차르트의 새로운 악보를 발견한 것에 빗댄 바 있다. 그치만 또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헤겔이 정말로 더 많이 필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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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은 훑어볼 수 있는 철학자가 아니다. 너무 밀도가 높기 때문이다. 한 번은 정신현상학의 한 장만 다루는데도 3회의 강의가 필요한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충분히 내용을 다루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말이다. 헤겔의 정치철학 입문 수업은 한 학기는 가볍게 넘는다. 내가 한 청강했던 석사 수업에서는 700쪽짜리 『논리의 학』에서 20쪽 나가는데 10주가 걸린 적도 있다.

내 우려는 4000쪽에 달하는 더 많은 헤겔 저작이 그 사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기는 고사하고, '헤겔 전문가'라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릴 것이라는 점이다. 정말 꽂힌 괴짜가 아니고서야 이 새로운 문헌에 뛰어들어 허우적대지 않을 것이다. 특히나 나 같은 사람, 즉 전 생애를 헤겔에 바치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헤겔을 가르치며 밥벌이를 해나가는 사람이라면, 이 새로운 헤겔을 읽지 않고서는 학문 활동을 해나가는 것이 훨씬 어려워질 것이라는 점이다. 그게 철학사 분야에서 동료평가가 돌아가는 방식이다: 만약 뭐 하나를 빠뜨린다던가, 뭔가 미묘하게 다른 말이 쓰여있는 문헌 어디 한 구석에 있던 대목을 마침 심사위원이 기억해냈다던가 한다면, 님 출판은 물 건너간거에요. 당신이 종합적으로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같은 것은 아무 상관없다: 이 유감스러운 누락 덕분에 당신은 아마추어 수준이라는 것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졌고, 결코 (예를 들자면) 헤겔 학계 인싸들 사이에는 못 들어가게 된 것이다.

사실 이게 좋은 걸 수도 있다. 학문적 기준이 '헤겔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인 이상,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논문 출판이 거절 당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 그치만 왜 꼭 그게 중요한가? 헤겔은 물론 중요하다. 헤겔에 대해서 생각하고 글을 쓰는 것을 멈추기에 헤겔은 너무도 중요하다. 하지만 철학자들은 단순히 그 자신들이 중요하다고 중요한게 아니다. 그 양반들이 중요한 까닭은 그이들이 세계에 관해 뭔가 새롭고 독특한 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헤겔 문헌 발견을 알린 그 누구도 이번 발견 덕분에 우리가 예술에 대해 이전에 몰랐던 새로운 것은 것을 깨닫게 될 것이라는 것 대문에 기뻐하는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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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같은 양반에 대해 고민하고 글을 쓰는데 진정한 이유가 있다면, 그 이유는 우리가 헤겔을 이용하는 것, 즉 그와 함께 고민하고, 그를 동시대인인 것처럼 여기며, 지금 우리의 문제를 함께 헤쳐나가는데 있을 것이다. ... 근데 이 말은 곧 우리가 헤겔의 말을 비전문적으로,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를 창의적으로 써먹기 위해선 말이다. 그가 한 말 하나하나를 정확히 짚어내는 것만큼이나 그의 말을 헛듣는 것도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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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내가 새로운 헤겔 문헌을 발견했더라면, 내가 다른 사람들한테 이걸 알렸을지는 잘 모르겠다 (솔직히 말하자면 분명 알리긴 했을 것이다. 사람들이 '오 대단합니다!' 칭찬해주면 기분 좋을테니까. 그렇지만 내가 알려야만 한다고 생각하진 않았을 것이다.) 만약 내 소견이 옳아서 헤겔이 여전히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면, 헤겔은 덜 있는게 나았을지도 모른다고 본다.


저는 헤겔은 고사하고 철학사에 대해서도 아는게 얕기 때문에 뭐라고 얘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만, 이 글을 읽으시는 다른 많은 분들께서는 이런 사뭇 도발적인 견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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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논의가 이루어질만한 재밌는 주제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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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이 재미있네요. 저도 "전 생애를 헤겔에 바치고 싶지는 않지만" 헤겔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 중 하나인데, 헤겔을 전공하신 분들 앞에서는 뭔가를 소신있게 말하기가 참 힘들더라고요. 철학적 관심사가 크게 다른 것 같아서요. (a) 헤겔 자체를 정확히 소개하고 해석하려는 정통파 연구자들과 (b) 헤겔을 이런저런 방식으로 사용해 보려는 저같은 헤겔향 첨가(?) 연구자들이 모두 일치를 볼 수 있는 공통된 지반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그래도 의외로 헤겔 연구자들이 다른 연구자들에 비해서는 좀 더 개방적인 것 같아요. 특히, 요즘은 독일에서 정통으로 헤겔을 공부하신 분들도 영어권 연구들을 많이 참고하셔서 그런지, 분석철학자들이 헤겔을 사용하는 방식에 대해서 거부감을 보이는 분들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더라고요. 헤겔학회에서도 관련 논문들이 꽤나 나오고요. 다만, 분석철학 진영은 헤겔을 정확히 모르고, 헤겔 연구자들은 분석철학의 주제들을 정확히 몰라서, 대화가 원활하지는 않다는 게 아쉬울 뿐이죠.)

개인적으로, 저는 잊혀진 문헌이 발굴되는 건 참 좋은 일이라고 봐요. 새로운 문헌들이 헤겔을 더 정확하게 해석하는 데 도움이 되어서라기보다는, 헤겔을 더 다양하게 적용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요. 가령, 저의 중요한 철학적 멘토 중 한 명은 리처드 로티거든요. 저는 기본적으로 로티와 거의 같은 철학적 입장을 지니고 있다 보니, 다양한 주제들을 처음 공부할 때 '로티라면 이 주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를 고민해보는 편이에요. 실제로, 제가 고민하던 주제에 대해 로티가 쓴 글을 읽으면 많은 도움을 받게 되기도 하고요. 다행히, 로티는 형이상학, 인식론, 언어철학 같은 이론철학적 주제에서부터 문학비평, 민주주의, 잔인성, 그리스도교, 시장경제 등 실천철학적 주제에 이르기까지 온갖 글을 쓴 사람이다 보니, 그만큼 온갖 사안에 참고하기에 좋더라고요.

헤겔의 문헌들도 이런 식으로 사용될 수 있지 않을까 해요. 헤겔의 기본 철학적 입장들에 동의하는 사람이라면, 그 입장들을 좀 더 구체적인 주제들로 확장하는 작업을 하려고 할 때 온갖 세부적인 문헌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보통 헤겔의 대표작을 『정신현상학』, 『논리의 학』, 『법철학』 이렇게 세 권으로 꼽잖아요. 물론, 이 세 권의 책들도 여러 가지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헤겔 철학의 전체로 보면 전부 '총론'에 해당하는 내용이거든요. '총론'으로부터 어떻게 '각론'이 따라나오는지, 그래서 헤겔의 철학의 기본 아이디어들이 어떻게 예술, 종교, 윤리, 정치, 역사 등에 일관성 있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자잘한 문헌이 많으면 많을 수록 좋다고 봐요. 전문 헤겔 연구자들에게뿐만 아니라 헤겔향 첨가 연구자들에게도 새로운 문헌들의 발견은 유익한 일일 수 있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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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댓글 감사드립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잊혀진 문헌이 발굴되는 건 참 좋은 일이라고 봐요. 새로운 문헌들이 헤겔을 더 정확하게 해석하는 데 도움이 되어서라기보다는, 헤겔을 더 다양하게 적용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요. [...] '총론'으로부터 어떻게 '각론'이 따라나오는지, 그래서 헤겔의 철학의 기본 아이디어들이 어떻게 예술, 종교, 윤리, 정치, 역사 등에 일관성 있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자잘한 문헌이 많으면 많을 수록 좋다고 봐요. 전문 헤겔 연구자들에게뿐만 아니라 헤겔향 첨가 연구자들에게도 새로운 문헌들의 발견은 유익한 일일 수 있는 거죠.

이 말씀을 듣고 나니 '총론 => 각론' 모형이 어떻게 적용될지, 과연 이번 사례에 적용될 수 있을지 궁금해지네요. 왜냐면 문외한의 입장에서 가끔 철학사 학계를 곁눈질해보면,

그래,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총론이 이 각론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살펴볼까?

라는 시도도 분명히 엿보이지만, 또 많이 눈에 띄는건

이번에 발견된 각론을 토대로 총론에 대한 기존의 정설을 뒤엎어보자!

라는 유형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학계의 특성상, 이런 식의 전복적인 시도가 더 눈길을 끄는 것도 인지상정일 것 같습니다. 왜냐면 저 같은 사람만 해도 만약 누가 '이번 강의록을 살펴보니 헤겔이 사실은 칸트식 물자체를 받아들였더라!'라고 주장한다면 한번쯤은 귀가 솔깃할 것 같으니까요. 본문에서 "이 새로운 헤겔을 읽지 않고서는 학문 활동을 해나가는 것이 훨씬 어려워질 것"이라고 하는 것도 아마 이러한 경향성을 염두에 둔게 아닌가 싶습니다.

만약 이번 헤겔 강의록 원고 발견도 비슷한 패턴으로 이뤄진다면, 저자의 우려는

당신이 지금껏 알고 있던 "헤겔의 기본 철학적 입장"이라는게 정말 헤겔 자신의 입장이라고 단정할 수 있겠나? 만약 그렇다면 그 '기본 철학적 입장'에 기초한 구체적인 주제들로의 확장은 정말 '헤겔적'인가?

라고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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