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주의와 헤겔주의: 개략적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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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칸트주의와 헤겔주의 사이의 대결은 현대철학의 중요한 논쟁 구도 중 하나입니다. 두 입장은 형이상학과 인식론 같은 이론철학의 문제로부터 윤리학 같은 실천철학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분야에서 상이한 의견을 제시합니다. 무엇이 두 입장을 가르는 핵심적 기준인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명이 가능할 수 있습니다. 다만, 저는 이 글에서 '사물 자체(thing-in-itself)'의 문제를 중심으로 두 입장을 요약하고자 합니다.

(2) 칸트주의는 유한한 인간의 인식 조건 너머에 '사물 자체'가 존재한다고 상정합니다. 주관적으로 경험되는 세계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세계가 서로 구별된다는 주장이 칸트주의를 성립시키는 가장 근본적 논제입니다. 즉, 우리는 세계를 결코 완벽하게 조망할 수 없습니다. 유한한 인간은 자신의 인식 조건 속에서 주어진 세계만을 파악할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인식 너머에는 세계가 사물 자체로 존재하고 있을 가능성이 남게 됩니다.

(3) 칸트주의를 지지하는 오늘날의 철학자들은 사물 자체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을 최신의 전문 용어를 사용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합니다. 가령, 우리가 지닌 믿음은 '객관세계(objective world)'를 바탕으로 평가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의 수많은 제약 속에서 이루어지는 우리의 탐구는 '실재(Reality)'에 대한 순수한 인식에 도달하지는 못합니다. 다만, 우리는 '이상적 인식 조건(ideal epistemic condition)' 혹은 '이상적 발화 상황(ideal speech situation)'을 지향한 상태에서 끊임없는 반성과 토의를 통해 실재가 무엇인지를 점차 조금씩 더 알아갈 수는 있습니다. 또한 아무런 선입견에 물들지 않은 합리적 존재가 '원초적 입장(original position)'에서 어떠한 판단을 내릴지에 대한 사고 실험을 통해 우리가 지닌 믿음이 얼마나 정당한지를 평가해 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입장을 따르는 철학자로는 후설, 전기 하이데거, 전기 비트겐슈타인, 셀라스, 롤스, 하버마스, 아펠, 퍼트남 등이 있습니다.

(4) 헤겔주의는 인간이 현실의 제약 속에서 세계를 인식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굳이 사물 자체를 상정할 필요가 없다고 지적합니다. 주관적으로 경험되는 세계와 객관적으로 경험되는 세계를 나누어버리려는 시도가 잘못된 회의로 귀결된다는 비판이 헤겔주의가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즉, 헤겔주의 역시 우리가 유한한 인식을 바탕으로 대상을 경험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의 인식은 언제나 새로운 인식을 통해 수정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한한 인식이 사물 자체와 대비되는 '현상(appearance)'이나 '환각(illusion)'의 지위를 지닌다고 여겨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인식이 언제든지 수정될 수 있다는 가능성으로부터 우리의 인식이 실제로 거짓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내고자 하는 시도는 논리적 비약입니다. 이러한 입장은 우리의 인식이 부정되어야 할 아무런 정당한 이유가 없는 상황에서조차 미리 도입한 형이상학적 가정을 바탕으로 인식에 대한 회의를 도출할 뿐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이전의 인식을 수정하기 위해서조차 새로운 인식을 통해 세계를 '알아내야' 합니다. 우리가 그 자체로 존재하는 세계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주장은 인식이 매 순간 새로운 인식의 과정에서 세계를 알아내는 방식으로 자신을 뛰어넘는다는 사실을 간과합니다.

(5) 헤겔주의를 지지하는 오늘날의 철학자들은 사물 자체가 완전히 공허한 형이상학적 가정이라고 강조합니다. 즉, 우리의 인식을 보장해 줄 '실재계(the real)' 혹은 '대타자(the big Other)'로서 사물 자체란 사실 순전한 '공백(void)'일 뿐입니다. 우리의 인식이 사물 자체로부터 직접적으로 주어졌다는 생각은 일종의 '신화(myth)'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라고 폭로됩니다. 애초에 우리는 사물 자체와 우리의 인식이 일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대해 '초월론적 불안(transcendental anxiety)'에 빠질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인식 너머에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사물 자체를 상정한 채 우리의 인식이 어떻게 사물 자체에 도달할 수 있는지를 해명하고자 하는 시도는 해결할 수 없는 철학적 '딜레마(dilemma)' 혹은 '아포리아(aporia)'를 발생시키기만 합니다. 이러한 입장에 서 있는 철학자로는 가다머, 라캉, 호네트, 버틀러, 지젝, 쿤, 로티, 테일러, 맥도웰, 브랜덤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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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중 한 챕터를 읽어볼 기회가 있어서 그 부분이랑 같이 맥도웰이 직접 쓴 Precis를 읽다가 "transcendental anxiety"라는 표현이 참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ㅋㅋ
압축적인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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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이제야 읽게 됐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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