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시간을 제가 잘 이해하고 있나요?(2)

1-2 존재물음의 형식적 구조

1)존재물음의 형식적 구조:1 물음의 대상이 되는 것: 존재
2 궁극적으로 밝혀져야 되는 것: 존재의 의미
3 물음이 걸리는 것: 현존재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이 존재물음이라면 우리는 이에 어떻게 물어야 하는가? 이를 살펴보기 위해 물음의 형식적 구조를 분석해보자.
물음의 형식적 구조는 물음의 대상이 되는 것, 궁극적으로 밝혀져야 하는 것 마지막으로 물음이 걸리는 것으로 나누어 분석할 수 있다.
예컨대 나는 수영을 하는 법을 알고 싶어 그것에 대해 물으려 한다. 이때 물음의 대상이 되는 것은 수영이며 궁극적으로 밝혀져야 하는 것은 수영을 하는 방법, 마지막으로 물음이 걸리는 것은 수영을 할 줄 아는(이해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존재에 의미를 물어야할까? 앞에 논의를 끌어와 연결해 보면 우리는 존재라는 술어를 이미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사용은 존재이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존재이해를 바탕으로 존재의미를 파악해야한다. 이러한 평균적인 존재이해를 하이데거는 “하나의 현사실”이라고 명명한다.

의문점: 그렇다면 존재물음은 이 사용의 맥락을 개념적으로 확정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 이해가 그저 평균적인 이해인 것은 우리가 이러한 맥락에서 사용하고 있음을 개념적으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잘못된 이해인 것인가?

  1. 존재이해 해석
    존재물음이 존재이해에 방향이 잡혀있기는 하지만 그에 앞서 존재이해를 해석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진 이해는 존재의 평균적 이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앞선 전승에 따라 이를 해석하면 존재물음은 불가능하다.(“나 이전에 해석은 틀렸으니 내가 해석하겠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의문점(이라기 보단 하소연): 계속 뭔가 “틀렸어!” 선언만 하는 것 같다.서론이라서 그러한 것인가? 읽기가 너무 힘들다.

3)물음이 걸리는 존재자

그렇다면 존재를 묻기 위해서는 어디에 물음을 걸어야 하는가? 다시 말해 어떤 존재자에게 존재에 대해 물어야 하는가? 물론 존재와 존재자는 구별되는 것이지만 존재는 존재자의 존재이기에 존재에 대해 묻기 위해서는 존재자에게 물어야 한다. 존재라는 술어를 가질 수 있는 주어 중에 어떤 주어가 적합한가? 우리는 “존재한다”는 술어를 아주 다양한 의미로 사용한다. 따라서 그 존재술어에 대응하는 어떤 존재자가 이 물음에 우위를 점하는가?

의문점(이 아닌 깨달음): 읽다가 생각난 몇 없는 내 배경지식이 떠올랐다. “존재한다”의 술어가 단순한 언어사용이 아님을 깨달았다. 서양에서 존재술어는 be동사로 사용되며 이것은 상당히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 말이다. 어째서 하이데거가 “존재한다”를 무엇과 이러저러하게 관계 맺음으로도 이해하는지 깨달았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타자를 치고 책을 읽는 것도 하나의 관계맺음이라면 이것 또한 존재술어 사용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앞선 내용을 바탕으로 추론해보면 (나는 물음이 걸리는 대상이 현존재라는 것도 알고 있지만 왜 물음이 걸리는지는 다소 피상적으로 알고 있다. 애초에 존재와 시간을 읽으려고 결심한 게 유튜브 영상 때문이니...)

(1) 우리는 존재이해를 가지고 있다.

(2) 존재이해는 "존재라는 술어를 맥락에 따라 (넓은 의미에서)사용함" 으로 정의할 수 있다.

(3) 존재물음은 존재이해를 바탕으로만 행해질 수 있다.

(4) 따라서 물음에 걸리는 존재자는 존재이해를 가지는 존재자, 즉 존재술어를 쓸 수 있는 존재자인 현존재이다.
이는 언어능력과 여러 행위능력이 현존재에 필요조건인 것으로 보인다.

4)물음의 3가지 계기에 요구되는 탐구
(1) 존재에 대한 관점의 방식에 대한 설명
(2) 의미의 이해 및 개념적 파악에 대한 설명
(3) 범례적인 존재자의 올바른 선택을 위한 가능성의 준비
(4) 확정된 존재자의 대한 올바른 접근 방식

의문점:(1)에 대한 의문: 존재에 대한 관점이라는 것은 존재이해 해석을 말하는 가?
(2)에 대한 의문: 올바른 해석을 통해 존재 의미를 이해하고 개념적으로 파악한다
는 것인가?

5)존재물음은 순환논증인가?
그런데 “존재자를 그 존재에 있어 규정”한다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해 “존재물음을 제기하는 것이 순환논증이 아닌가?”라는 의문을 던질 수 있다.그러나 이는 순환논증이 아니다. 만약 존재자를 그 존재에 있어서 규정하지 못한다면 지금까지 모든 존재론적 인식은 불가능 했을 것인데 이러한 존재론적인 있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실제로 모든 존재론은 “존재”를 전제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존재”는 우리가 독단적으로 상정한 개념이 아니다(따라서 순환이 아니다). 우리의 존재자는 이미 평균적인 존재이해를 가지고 있기에 그 존재는 우리의 본질을 구성하는 틀로서 제시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 이해로부터 어떤 명제를 추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불명료한 이해를 명료하게 제시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이 존재물음과 한 존재자(현존재)의 존재방식의 물음이 본질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하이데거가 명확히 말하지 않았지만 우리가 존재이해를 가지고 있기에 존재물음과 깊게 연관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이것이 현존재가 존재물음에 갖는 우위이다.

의문점: 근데 “존재자를 그 존재에 있어 규정”한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앞선 논의를 연결해서 이해해보면 존재라는 술어를 통해 주어인 존재자를 규정한다는 것은 굉장히 상식적인 견해이다. 예컨대 “하늘은 푸르다” 그런데 이것은 뭔가 “존재”라는 술어가 “존재자”라는 주어에 앞서 주어져 있다는 것처럼 들린다. 이것의 우선성은 정당화 될 수 있는가? 우리는 존재하고 있어야 존재자가 될 수 있는가? 나는 일단 ‘존재자가 있고 나서 그 존재가 있다’라는 상식을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상식과 다르게 이 부분이 읽힌다. 아마도 이점이 내가 존재와 시간을 읽는 이유인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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