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아직 가입한지 얼마 안되어서 그런지 요약문 작성이 안돼네요. 그래서 이곳에라도 올리겠습니다. 번역서는 이기상 교수님의 번역서를 읽고 있고 박찬국 교수님의 존재와 시간 강독도 사긴 샀습니다만.. 보니까 하이데거가 한 말을 그냥 풀어쓴거 같아서 이럴바에는 그냥 1차자료에 충실하자는 생각이 들어 번역서만 읽고 있습니다. 어떤 피드백이든 감사히 받겠습니다.
1-1 존재에 대한 물음을 분명하게 다시 제기해야 할 필요성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존재에 대한 물음은 망각되었다. 왜냐하면 존재물음에 대한 3가지 선입견이 생겼기 때문이다.
(1) 존재는 가장 보편적인 개념이다.
(2) 존재는 정의할 수 없는(공허한) 개념이다.
(3) 존재는 자명한 개념이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존재망각을 일으킨 선입견이 오해임을 밝히며 다시금 존재물음을 반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역설한다.
- ‘존재는 가장 보편적인 개념이다’
하이데거는 존재의 보편성이 유의 보편성과 구별된다고 주장한다. 유의 보편성은 존재자들을 어떤 범주에 넣어 한정시키며 갖는 보편성인 반면에 존재의 보편성은 언제나 한정시키는 것을 혹은 그 한계를 뛰어넘고 초월하기 때문에
유적 보편성도 뛰어넘는다. 이러한 존재의 초월적 보편성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유비의 단일성으로 인식하였다. 다시 말해 존재는 유비적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여전히 이 존재의 범주적 연관을 무시하였다. 헤겔 또한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이러한 점을 볼 때 아직 “존재”라는 개념은 오히려 가장 어두운 개념이다.
의문점: 유비의 단일성이 정확히 어떤 개념인지 모르겠다. 내가 보는 번역서의 주석을 보면 이 개념을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건강하다"는 다양한 주어에 쓰이며 비슷하지만 다르게 사용된다. 예컨대 논리가 건강하다, 몸이 건강하다, 등등, 이는 존재는 술어인데 그 맥락에 따라 다양하게 사용될 수 있음을 말하는 것 같다. 따라서 다양한 의미도 가진다. 그렇다면 유의 보편성은 이러한 다양성을 무시하기 때문에 비판받는 것인가? 그렇다면 헤겔의 존재개념(무규정적인 직접적인 것)을 비판한 것이 이해가 되긴 한다.물론 여전히 저 직접적인 것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 직접적인 것인지는 모르겠다.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라는 뜻인가?그렇다면 결국 아리스토텔레스도 이러한 다양성을 무시한 것인가? 이 둘의 철학을 하나도 모르기 때문에 이 비판이 옳은지는 모르겠다.
- ‘존재는 정의할 수 없는(공허한) 개념이다’
존재자를 정의하기 위해서는 ‘~이다‘라는 정의항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다‘는 이미 존재를 함축한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범주(최근류와 종차)를 통해 존재자를 정의하는 것처럼 존재를 정의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존재는 다른 개념과 달리 자신보다 상위의 범주를 갖고 있지 않고 작은 범주들은 이미 그 안에 모두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존재는 전통적인 정의 방법으로는 정의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결론으로 말미암아 귀결되는 것은 존재와 존재자의 개념을 파악함에 있어서 이 둘이 구별된다는 것뿐이다. 이것이 어떤 내용도 지니지 못하는 공허한 개념이라는 귀결은 비약이다.
의문점: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이 개념(존재)을 정의하는 가? 그것도 전통논리학의 방법과 같은 오류에 빠지지는 않은가? 이 의문은 책을 더 읽으면서 해결해야하는 문제일 것 같다. 더 읽어보자.
- ‘존재는 자명한 개념이다’
우리는 존재에 대한 평균적 이해를 가지고 있다. 이는 우리가 존재자들과 맺는 관계나 인식, 발언 등을 통해 찾을 수 있다. 예컨대 “하늘은 푸르다”, “나는 기쁘다” 등등. 그러나 하이데거에 따르면 이는 완전한 이해가 아니다. 오히려 이런 이해는 우리의 몰이해를, 이해의 행동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선험적 구조를 모른다는 것을 드러낼 뿐이다. 또한 존재라는 개념을 자명한 것으로 놓고 주제로 삼지 않는 것도 문제다. 칸트의 정신에 따라 ‘자명한 것’이라고 판단 되는 것을 주제로 삼고 분석하는 것이 우리 철학자의 임무이다 . 따라서 존재는 그저 자명하기에 주제가 될 필요 없는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불투명한 가장 연구가 필요한 개념인 것이다.
의문점: 평균적 이해라는 것이 왜 잘못된 것인가? 하이데거는 존재가 술어이고 맥락에 따라 다양하게 사용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맥락을 무시한 이해가 이 평균적 이해인가? 그런데 “하늘이 푸르다”, “나는 기쁘다”라는 사용은 맥락을 무시한 게 아니지 않은가? 하늘이 푸르다는 하늘에 먹구름이 없고 미세먼지가 없으며 해가 떠있고 등등 여러 맥락을 따져봐야만 사용 가능하다.
내가 뭔가 잘못 이해하고 있나? 잘 모르겠다. 역시 철학은 어렵다.
총정리: 하이데거는 3가지 오류를 3개의 선입견으로부터 도출해낸다. 존재의 보편성을 유적 보편성으로 본 오류가 첫째, 존재자와 존재를 구별하지 않은 오류가 둘째. 존재를 자명한 것으로 놓고 이것이 주제가 되지 못한다고 잘못 파악한 오류가 셋째이다. 이 오류들이 존재 망각의 이유이다. 따라서 존재물음은 다시 물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