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경험의 설명적 역할
캠벨은 ‘버클리의 퍼즐’에 대한 ‘직설적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한다. 우선, 캠벨이 다루고자 하는 ‘버클리의 퍼즐(Berkeley’s puzzle)’이란 무엇인가? 바로 (a) 일상적 대상에 대한 경험의 설명적 역할을 인정하면서도, (b) 마음 독립적 대상의 존재 역시 인정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문제이다. 그렇다면, 캠벨이 지지하는 ‘직설적 해결책(straightforward solution)’이란 무엇인가? ‘경험의 설명적 역할’과 ‘마음 독립적 대상의 존재’가 양립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버클리의 퍼즐을 풀어내고자 하는 전략이다. 즉, 우리가 감각 경험을 통해 주변 환경에 대한 지식을 얻는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주관 바깥에 대상이 존재한다는 입장을 부정해야 하는 것 같고, 우리의 주관 바깥에 대상이 존재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감각 경험을 통해 주변 환경에 대한 지식을 얻는다는 입장을 부정해야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직설적 해결책은 얼핏 딜레마처럼 보이는 상황이 경험의 설명적 역할과 마음 독립적 대상의 존재를 모두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시도는 크게 두 가지 물음에 대답해야 하는 과제를 지닌다. 첫째로, 경험이 마음 독립적 대상에 대한 파악에서 ‘설명적 역할’을 한다는 것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둘째로, 경험이 그 ‘설명적 역할’을 어떻게 수행할 수 있는가?
2. 객관적 사유의 사용을 정당화하기
버클리의 퍼즐에 대해 캠벨이 제시하는 ‘직설적 해결책’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캠벨에 따르면, ‘마음 독립적’ 대상이란 우리에게 인과적으로 의존하지 않는 대상이다. 자기 내부의 인과만으로 동일성 조건이 규정될 수 있는 대상은 ‘마음 독립적’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다. 즉, ‘대상이 이후에 존재하는 방식(the way the object is later)’이 ‘대상이 이전에 존재하는 방식(the way the object is earlier)’에 인과적으로 의존할 경우, 그리고 그 경우에만 대상은 마음 독립적이다. 여기서 마음 독립적 대상을 파악한다는 것이란 대상이 이전에 존재하는 방식과 이후에 존재하는 방식 사이의 인과적 연결을 파악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 감각 경험은 마음 독립적 대상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인과적 연결’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인과적 영향을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겨주는 물리적 대상인 ‘기제(mechanism)’가 발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버클리의 퍼즐에 직면하여 (버클리의 입장처럼) 마음 독립적 대상의 존재를 포기할 필요도 없고, (부수현상론의 입장처럼) 경험의 설명적 역할을 포기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감각 경험은 마음 독립적 대상에 대한 파악을 가능하게 한다. (a) 인과적 영향을 전달하는 기제가 감각 경험을 통해 발견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대상을 구성하는 ‘인과적 연결’을 파악하였다고 할 수 없다. (b) 우리가 대상을 구성하는 ‘인과적 연결’을 파악하지 못하는 이상, 우리는 ‘마음 독립적’ 대상을 파악하였다고 할 수 없다. (c) 감각 경험이란 마음 독립적 대상을 파악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것이다.
3. 대물적 상상하기
캠벨의 입장은 감각 경험을 순전히 마음속에서 발생하는 ‘내적 감각질(inner qualia)’로 이해하고자 하는 내재주의의 입장에 비판적이다. 그는 감각 경험이 언제나 환경과 관계를 맺고 있다고 강조한다. 심지어 우리는 다른 사람의 감각 경험을 상상할 때조차 환경을 배제할 수 없다. 가령, 무대 연출가가 연극 세트장을 꾸미는 과정을 떠올려 보라. 그는 관객이 연극 세트장을 어떻게 경험하게 될 것인지 상상해야 한다. 이때 그가 해야 하는 일이란 관객의 마음속에 발생할 감각질을 떠올리는 일 따위가 아니다. 오히려 정말로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란 ‘연극 세트장’이라는 환경이 관객이 앉아 있는 자리에서 어떻게 보일지를 상상하는 일이다. 또한, ‘박쥐가 된다는 것은 무엇과 같을까?’라는 네이글의 질문을 떠올려 보라. 물론, 인간인 우리는 ‘박쥐가 된다는 것은 무엇과 같을까?’라는 질문에 쉽게 대답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이유는 우리가 박쥐의 감각질을 결코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다. 단지, (a) 박쥐가 놓여 있는 환경이 우리에게 낯설고, (b) 박쥐가 놓여 있는 환경을 알 수 있는 상황에서조차 박쥐가 그 환경에서 무엇에 주목하고 있는지가 불분명하기 때문일 뿐이다. 다른 행위자의 감각 경험을 상상하는 일이란 (인간이든 박쥐든 관계없이) 감각질에 대한 ‘대언적 상상하기(imagining de dicto)’가 아니라 환경에 대한 ‘대물적 상상하기(imagining de re)’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4. 경험으로부터 배우기
캠벨은 우리가 감각 경험으로부터 배우는 것이 바로 환경에 대한 지식이라고 강조한다. 가령, ‘메리의 방’에 대한 잭슨의 사고 실험을 떠올려 보라. 평생을 흑백 방에서 자란 메리가 방 밖으로 나와서 색깔을 처음 보았을 때 새롭게 배우는 것이란 무엇인가? 잭슨과 루이스는 메리가 ‘감각질’이라는 자신의 심리적 상태를 배울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메리가 감각질을 배운다는 주장은 ‘메리의 방’ 사고 실험에 대해 사실상 아무것도 설명하고 있는 것이 없다. 즉, 감각질은 애초에 우리가 직접 볼 수 있는 ‘관찰적(observational)’ 대상이 아니다. 감각질은 기껏해야 우리가 봄의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상정하는 ‘이론적(theoretical)’ 대상이다. 따라서 (a) 메리가 감각질을 본다는 주장은 (감각질이 직접 볼 수 있는 관찰적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성립하지 않는다. 또한 (b) 메리가 감각질을 통해 대상을 본다는 주장은 (감각질이 봄 뒤편에 가정된 이론적 대상이기 때문에) 감각 경험에서 무엇이 실제로 보이는지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메리가 흑백 방을 나올 경우 ‘색깔’이라는 대상의 외적 속성을 새롭게 보게 될 것이라고 지적해야 한다. 메리가 대상의 외적 속성이 아니라 자신의 심리적 상태를 배운다고 말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감각질을 도입하여 우리가 경험으로부터 배우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려는 시도는 문제의 논점을 흐릴 뿐이다.
5. 경험의 현상적 성격에 대한 표상주의
표상주의는 캠벨과는 다른 방식으로 버클리의 퍼즐을 해결하고자 할지도 모른다. 가령, 맥로린은 표상주의의 입장에서 경험의 설명적 역할을 정당화하고자 한다. 그는 외적 대상에 대한 비개념적 내용이 우리의 개념적 사유와 판단을 형성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a) 표상주의의 입장은 감각 경험이 다른 지각 상태와 구별되는 고유한 인지적 특징을 지닌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가령, 색에 대한 감각 경험을 하는 사람과 색에 대한 신빙성 있는 반응 성향을 지닌 사람은 모두 색이 있는 대상으로부터 주어지는 비개념적 내용에 따라 자신의 판단을 형성한다. 비개념적 내용만으로는 두 사람이 지닌 능력 사이의 차이가 설명될 수 없다. 또한 (b) ‘비개념적’ 내용이 반드시 ‘마음 독립적’ 대상을 보장하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우리가 비개념적 내용을 지닌다는 사실과 외부에 마음 독립적 대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별개의 문제이다. 비개념적 내용을 도입하려는 시도는 경험을 통해 마음 독립적 대상을 파악할 수 있다는 입장을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더 나아가, (c) 비개념적 내용이 어떻게 개념적 내용을 정당화하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감각 경험이 ‘비개념적 내용’으로 구성된다고 주장하고 마음 독립적 대상에 대한 지식이 ‘개념적 내용’으로 구성된다고 주장하더라도 실질적으로 해결되는 문제는 아무것도 없다. 애초에 감각 경험이 어떻게 마음 독립적 대상에 대한 지식을 정당화할 수 있는지가 의문시된 이상, 비개념적 내용이 어떻게 개념적 내용을 정당화할 수 있는지도 다시 의문시될 수밖에 없다.
6. 비판적 평가
나는 ‘마음 독립적 대상의 존재’와 ‘경험의 설명적 역할’을 모두 옹호할 수 있다는 캠벨의 입장에 전반적으로는 동의한다. 특별히, 캠벨이 ‘감각질’이라는 개념을 비판하는 방식은 매우 훌륭해 보인다. 즉, 감각질은 우리의 경험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 경험에 감각질이 개입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마치 우리 눈에 너무나 투명해서 존재하는지조차 알기 어려운 안경이 씌워져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여기서 ‘감각질’이라는 안경은 (a) 우리에게 보이지 않기 때문에 ‘관찰적 대상’으로 여겨질 수도 없고, (b)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도 못 미치기 때문에 ‘이론적 대상’으로 상정될 필요도 없다. 따라서 경험을 감각질에 근거하여 설명하려는 시도는 무의미하다. 우리가 경험의 과정에서 마음 독립적 대상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감각질에 대한 지식을 얻는다고 생각해야 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나로서는 캠벨이 자신의 이러한 입장을 과연 지각철학의 개별 문제들에 철저하게 적용하고 있는지 의문스럽다. 가령,
(1) 마음 독립적 대상에 대한 지식을 인과적 연결에 대한 지식으로 환원하고자 하는 캠벨의 입장은 적절하지 않다. 우리는 마음 독립적 대상의 존재를 주장하기 위해 인과적 연결에 대한 분석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 경험과 마음 독립적 대상 사이에 감각질이 개입한다는 주장을 비판하는 것만으로도 버클리의 퍼즐은 충분히 해소될 수 있다. 감각질이 사라진 상황에서는 더 이상 경험과 외적 대상 사이의 직접적 접촉을 방해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인과적 연결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마음 독립적 대상에 대한 지식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는 일종의 선결문제 해결의 오류에 빠지는 것으로 보인다. 즉, 캠벨은 마음 독립적 대상을 설명하기 위해 ‘인과적 연결’을 도입한다. 그러나 그는 인과적 연결을 설명하기 위해 ‘기제’라는 일종의 마음 독립적 대상을 다시 도입한다. 따라서 그의 분석은 마음 독립적 대상의 존재를 이미 가정한 상태에서 수행되고 있다. ‘마음 독립적 대상’이라는 피설명항과 ‘기제’라는 설명항이 동일한 이상, 마음 독립적 대상을 개념적으로 분석하려는 작업은 사실상 아무것도 설명하고 있는 내용이 없다.
(2) ‘박쥐가 된다는 것은 무엇과 같을까?’라는 네이글의 질문에 대한 캠벨의 대답은 부적절하다. 캠벨은 박쥐의 경험을 상상하기 어렵다고 너무 쉽게 인정해버린다. 더 나아가, 그 이유가 인간은 (a) 박쥐의 환경에 놓이기 어렵고, (b) 박쥐가 무엇에 주목하는지 알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내재주의의 입장은 인간이 박쥐의 환경에서 박쥐가 주목하는 대상에 주목하더라도 시각 경험을 통해 대상을 발견하는 우리 자신과 초음파를 통해 대상을 발견하는 박쥐 사이에는 여전히 넘어설 수 없는 간격이 있다고 주장한다. 박쥐의 감각질과 인간의 감각질이 서로 완전히 다르다는 주장이야 말로 내재주의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이러한 입장을 철저하게 논박하기 위해서는 박쥐의 감각질을 상상하기 어렵다는 가정 자체를 애초에 거부해야 한다. 오히려 상상하기 어려운 ‘감각질’이라는 대상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반문해야 한다. 실제로, 우리는 박쥐가 초음파를 통해 대상을 발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또한 우리는 박쥐가 초음파를 통해 발견한 대상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를 충분히 예측해내기도 한다. 심지어 우리는 박쥐가 초음파를 사용하듯이 우리도 초음파 감지기를 사용하여 대상을 발견해내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미 ‘박쥐가 된다는 것은 무엇과 같을까?’에 대해 상당히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우리가 박쥐의 경험에 대해 더 알아야 할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는 결코 자명하지 않다. 우리가 모르는 ‘감각질’이라는 대상이 있다는 일방적 주장만으로는 우리와 박쥐 사이에 정확히 어떠한 점에서 넘어설 수 없는 간격이 있는지가 설명되지 않는다. ‘박쥐가 된다는 것은 무엇과 같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고자 하는 사람이야 말로 ‘감각질’이 무엇인지를 설명할 부담을 짊어져야 하는 것이다.
두 가지 문제는 아마도 ‘경험(experience)’을 ‘믿음(belief)’이나 ‘지식(knowledge)’과 엄격하게 분리시키고자 하는 캠벨의 입장에서 발생한 것인지도 모른다. 즉, (a) 캠벨은 ‘대상이 이후에 존재하는 방식’과 ‘대상이 이전에 존재하는 방식’ 사이의 반사실적 조건문에 대한 지식만으로는 마음 독립적 대상에 대한 경험이 설명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제’라는 개념을 도입한 것인지도 모른다. 또한 (b) 캠벨은 ‘박쥐의 경험’에 대한 지식과 ‘박쥐의 행동’에 대한 지식을 구분하기 때문에 인간은 박쥐의 경험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주장한 것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캠벨은 제4장에서 콰인의 입장에 반대하여 경험이 다른 믿음이나 지식과는 달리 우리의 판단에 ‘결정적(decisive)’이고 ‘권위적(authoritative)’인 지위를 갖는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경험을 믿음이나 지식과 반드시 구분해야 하는 이유가 정말 존재하는가? 가령, 우리는 정말 눈앞의 경험만으로 그동안 유지해 온 믿음과 지식을 수정하는가? 믿음과 지식은 정말 경험에 비해 대상을 ‘생생하게’ 담고 있지는 못하는가? 대상이 눈앞에 놓여 있는 상태에서는 경험이 아무런 믿음과 지식 없이도 자동적으로 발생하는가? 적어도, 경험의 ‘설명적 역할’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시도가 반드시 경험의 ‘인식적 특권’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시도로 귀결되어야 할 필요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
Campbell, J., “A Straightforward Solution to Berkeley’s Puzzle”, J. Campbell & C. Quassim, Berkeley’s Puzzle: What Does Experience Teach U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4, 25-49.